15
여정
여정의 목표는 간단했다. 생존을 위한 방황이었다.
벨로크는 여행 도중 괴물도 좀 죽이고 레벨업도 하며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숨겨진 보물들도 찾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점점 강해지고 마침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괴물들로부터 안전이 보장되었을 때. 집으로 가는 실마리를 찾아볼 셈이었다.
벨로크는 자신이 진짜 RPG 게임 속의 전사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오리지널만 깬 채, 확장팩이 추가된 새로운 버전을 즐기는 느낌. 하지만 모니터 속에서 하는 게임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역시나 좆같았다. 벨로크가 툭 내뱉었다.
“이런 망할 세··· 씁.”
혀를 씹었다. 달리고 있는 말 위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며칠 동안 움직이고 있었다.
남쪽에 있던 무역도시 로벤을 지나쳐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아드리아 왕국의 중심부에 다다를 기색이었다. 뒤따르던 아델이 한발 늦게 물었다.
“벨로크 님. 저희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벨로크는 잠깐 고민했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으며, 이곳 근처 산속에 사는 대장장이가 실은 굉장한 솜씨를 지닌 장인인데.
그에게 부탁해서 악마나 괴물들을 잡기 위한 무구들을 탈 셈이다. 라는 말을 보기 좋게 못 할 것 같았다.
또 혀를 씹기는 싫었다. 그래서 간단하게 말했다.
“갑옷 한 벌 맞춰주마.”
“갑옷 말입니까?”
“풀 플레이트 아머. 한 벌 맞춰야지.”
짧게 말했건만, 효과는 굉장했다. 아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도 전사였다. 어찌 무구에 대한 욕심이 없을까.
하지만 번쩍거리는 판금 갑옷은 늘 한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싸지 않을까요?”
“맡겨둬.”
아델의 우려에도 벨로크가 흔쾌히 말했다. 영주로부터 받은 돈도 있었고, 교회에서도 적지 않은 보상금을 받았다.
풀 플레이트를 맞추고도 많은 돈이 남을 정도로 그들은 부유했다.
“벨로크 님···”
아델이 고개를 푹 숙였다. 목소리가 떨리며 눈물이 찔끔 흘렀다.
새로운 무구도 좋았지만, 신경을 써주는 주인의 마음 씀씀이가 더 고마웠다. 감격한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돈 냄새를 맡은 것일까.
쐐애액
수풀 저편에서 화살들이 날아왔다. 점처럼 보이던 것이 순식간에 커졌다.
하지만 벨로크의 초인적인 육체는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그가 팔꿈치를 슬쩍 움직였다. 몸을 감싼 플레이트 아머는 그 자체로 육중한 방패였다.
팅팅팅 화살들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습격!”
뒤따르던 아델은 당황했지만, 곧바로 방패를 들어서 후속타로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았다.
히히히힝
멱을 따지는 못했지만, 도적단의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말들을 놀라게 해서 떠돌이 기사 일행을 멈춰 세운 것이다.
“개새끼야! 말을 맞추라니까!”
“시발. 이 거리에서 달리는 녀석을 어떻게 정확히 맞춰.”
웅성거리는 소음과 함께 수풀이 들썩였다.
잠시 후 서른은 넘을 것 같은 도적들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왔다.
누비 갑옷과 도끼, 몽둥이 등으로 무장하고 있던 도적들은 자신들의 압도적인 숫자를 믿었다.
덕분에 간 크게도 중무장한 기사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여자다. 여자야!”
“나! 내가 먼저 할 거야!”
자기들끼리 킬킬거리고 있던 도적들의 틈바구니에서 녀석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며,
무장상태가 좋은 대머리 사내가 나왔다.
이런 일을 많이 해본 듯. 놈이 피딱지가 굳은 망치로 바닥을 쿵 찍었다. 그리고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반갑소. 기사 나리들. 우리 이름은 들어보셨나? 우리는···”
도적단 두목의 말을 끊은 벨로크가 아델에게 말했다.
“이걸로 몇 번째였지.”
“다섯 번째 입니다. 이곳은 정말이지 치안이 개판이군요.”
“중앙으로 갈수록 더 심해질 거다. 남쪽은 오히려 상황이 좋은 편이었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두목은 당황했다.
‘이 새끼들 뭐냐? 왜 이렇게 태연해?”
아무리 숙련된 기사라고 할지라도 수십 명의 도적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말을 가속할 틈도 없이, 뒤쪽에서는 화살이 날아오고 앞에서는 날붙이들이 날아오니까.
그런데 이놈들은 왜 이런 반응이지? 묘하게 익숙해 보이는 듯한 태도는···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두목은 생각을 멈추고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수를 이끄는 집단의 리더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게를 잡을 줄 알아야 했다.
거친 사내들의 세계인 도적단을 이끈다면 더더욱.
정신을 차린 두목이 으르렁거렸다.
“이 새끼들이! 감히 내 말을 끊어? 10초 준다.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갑옷하고 무기 내려 놓···컥”
두목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벨로크의 손에 들린 석궁이 불을 뿜었기 때문이다.
쏜살같이 날아간 쿼렐이 입을 꿰뚫고 뒤통수를 부쉈다.
두목은 눈을 까뒤집으며 육중한 몸을 뉘었다. 벨로크가 쏘아낸 석궁을 안장에 걸치며 창을 뽑았다.
“갈 길이 바쁘다. 경험치들.”
“처리하겠습니다.”
아델 또한 창을 뽑아 들었다. 2미터는 넘어갈 듯한 강철 창이 햇빛에 번들거렸다. 탈주병 출신으로 이뤄진 도적단은 당황했다.
뭘 어떻게 할 것도 없이 두목이 뒤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숙련된 살인병들은 곧 무기를 다잡고 전의를 다졌다.
그것에는 줄어든 두목의 몫만큼이나 그들에게 돌아갈 배당이 많아졌다는 것도 한몫했다.
“두목! 시발! 죽여버려!”
벨로크와 아델이 전투마의 옆구리를 찼다. 말이 푸르릉 소리를 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거리가 가까웠기에 충분한 가속도를 얻지는 못했지만, 코앞에서 드리우는 말발굽은 도적들이 기겁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도적들은 오히려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뒤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쏴버려!”
쐐애액
뒤편에서 쇠뇌를 들고 있던 도적들이 화살을 쐈다. 말을 노린 것이다.
아무리 중장 갑옷을 입은 기사라고 해도 낙마시키고 둘러싸서 내려찍으면 끝이다.
멍청한 기사 같으니! 말을 포기 안 한 걸 후회하게 해줄 참이다.
도적들의 행동을 본 벨로크는 조금 놀랐다. 기사를 상대로 겁을 먹지 않은 것도 그렇고, 갑옷 대신 말을 노린 것도 그렇고. 행동들이 묘하게 익숙해 보였다.
탈주병 출신인가? 일반적인 기사라면 맥을 못 췄겠군.
하지만 벨로크는 일반적인 기사가 아니었다. 악마도 사냥한 전사였다.
벨로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양손에 쥔 창을 풍차 돌리듯 휘둘렀다.
풍압과 함께 두 사람에게 쏘아지던 화살들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도적들은 눈을 크게 떴다.
“뭐···”
아까처럼 갑옷으로 막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창으로 튕겨낸다고?
뭐야. 시발. 무슨 전설속의 기사나 뭐 그런건가?
도적들이 당황하든 말든 벨로크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 얼타고 있는 도적들의 등판에 창을 찔러넣은 것이다.
누더기가 된 천 갑옷이 손쉽게 뚫려 나가며 도적들이 만찬 속 고깃덩이가 되었다. 피가 후드득 떨어지며, 내장이 줄줄 흘러나왔다.
“이런 시발! 보통 놈이 아니야! 밧줄 가져와!”
용맹한 도적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윽고 뒤편에서 손목을 붕붕 돌리던 도적들이 벨로크에게 밧줄을 날렸다. 몸에 걸어서 당긴 후 낙마시키기 위함이다.
말에서 내려 도적들을 도륙하고 있던 아델이 큰 소리로 말했다.
“벨로크 님! 위험합니다.”
“그런가?”
벨로크는 대충 대답해 주고는 날아오는 밧줄을 턱 잡았다.
“걸렸구나!”
도적들은 코웃음을 쳤다. 곧이어 세 네 명이 모여들어서 벨로크가 잡은 밧줄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이제 녀석을 떨어트리기만 하면 끝이다. 그런데···
“왜 꼼짝도 안 하지?”
도적들은 한참을 끙끙거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거대한 바위를 옮기는 것만 같았다.
도적들의 재롱을 보던 벨로크가 밧줄을 뒤로 쑤욱 당겼다.
“어어어.”
도적들이 하늘 위의 연처럼 날아왔다. 손목에 슬쩍 힘을 준 벨로크가 밧줄을 내팽개쳤다.
도적들이 다시 동료들에게로 날아갔다. 쿠당탕
바닥을 구른 녀석들이 끙끙댔다. 거슬리는 것이 없자 벨로크가 다시 말을 박찼다.
히히히힝
“끄아아악.”
“히이이익.”
전투마가 거칠게 가속하며 누워있던 도적들을 짓밟았다. 살이 터지고 뼈가 짓이겨지는 감촉이 안장을 넘어 그대로 느껴졌다.
벨로크는 별다른 감상을 내뱉지 않았다. 이제는 능숙한 중세랜드 기사가 된 벨로크는 그것보다는 어떻게 적들을 부숴야 할지.
경험치를 올려야 할지에 주목했다.
"으아아. 개새끼야!"
분노가 이성을 지배해버린 몇몇 도적이 기다란 창을 들고 덤벼왔다. 벨로크도 손에 들린 창을 냅다 던져서 화답했다.
부우웅
“커어억.”
가공할 힘을 더한 투창이 도적들 넷의 몸뚱이를 한 번에 뚫고 나무에 틀어박혔다. 가지가 대롱대롱 흔들리고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직관적으로 보이는 어마어마한 괴력.
일순 전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으, 으아아아."
"괴물!"
비명소리를 기점으로 시간은 다시 움직였다.
몇몇 영리한 녀석들은 정신없이 도망쳤다. 몇은 몸이 굳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벨로크는 허리춤의 롱소드를 뽑아 굳어있던 한 놈의 머리통을 대번에 내려찍었다.
반대편 손으로는 메이스를 뽑아 들어서 다른 도적이 찌른 창을 튕겨냈다. 놈이 기우뚱하며 넘어지자. 메이스도 냅다 던졌다.
태양 빛에 반사되는 쇳덩이가 거대한 그림자를 그리며 도적에게 날아들었다.
짙은 음영이 도적의 얼굴을 뒤덮었다. 짧은 찰나. 이름 없는 도적은 후회했다.
이미 뒤져버린 두목의 의견을 따른 것을. 젊어 보이는 기사의 외관에 속아 방심한 것을. 마지막으로 식인을 일삼는 뱀 영주가 무서워 탈주병이 된 것을.
퍼억
주마등과 함께 도적의 대가리가 수박처럼 깨지며 뇌수가 비죽 흘렀다.
고요한 대로변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 흔들리는 눈동자와 지려버린 바지춤을 보면서 벨로크는 미친 듯이 날뛰었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나리들! 자비를··· 컥.”
아델이 마지막 하나 남은 도적의 가슴을 베었다.
그녀가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검은색 단발머리가 찰랑거리며 땀에 젖은 얼굴이 드러났다.
“후우. 보통내기들이 아니군요. 도적이라고 무시할 것들이 못 됩니다.”
“탈주병 출신 같다.”
벨로크가 죽은 도적들의 품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저번 도적들보다 경험치를 조금 더 주는 걸 보아하니.
역시나 이 경험치라는 것은 개인의 무력이나 이룬 것에 따라서 얻는 것이 다른 것 같았다.
아델도 주인을 따라 얼른 돈주머니들을 갈취했다.
“그렇군요. 확실히 몸놀림부터가 달랐습니다. 체계도 제법 잡혀있었고요. 앗. 이 녀석은 제법 가진 것이 많군요.”
아델은 도적의 손가락에 끼워져있는 금반지를 빼려고 낑낑거리다가 안 빠지자 손가락 채로 잘라서 챙겼다.
벨로크도 피 묻은 옷가지와 살점 등을 헤치며 구리 동전이며 은화, 노린내 나는 육포까지 다 챙겼다.
뭐든지 얻을 수 있을 때 얻어야 하는 법이었다.
벨로크가 손에 들린 전리품들을 아쉽다는 듯 바라봤다.
“어디 레어템 하나 안 나오나?”
“뭐라고 하셨습니까?”
“혼잣말이다. 다 챙겼나?”
노략질을 끝낸 벨로크가 허리를 뚜둑 거리며 말했다.
“네. 그런데 장비 손질은 안 해도 될까요?”
아델은 어느새 전투에 사용한 무구들을 헝겊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요 며칠 도적단들과 잦은 마찰 때문에 무구들의 상태가 엉망이었다.
갑옷이든 무기든 전투를 거듭하다 보면 피와 지방이 묻기 마련. 오래 놔두면 녹이 슬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천으로 닦아주고는 했지만, 그것도 일차적인 방법일 뿐.
제대로 된 손질을 하려면 기름칠을 하고 고운 모래에 굴려줘야 했다.
벨로크는 손에 들린 뭉툭한 롱소드를 쳐다보다가 슬쩍 고개를 저었다.
“굳이 할 필요 없다. 거의 다 왔으니까. 이참에 새로 맞추는 게 낫겠군.”
대장장이 루크. 웬만한 난쟁이보다 더 뛰어난 솜씨를 지닌 인간이 눈앞의 산에 은거하고 있었으니까.
괴팍한 노인네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하지.
“그렇군요!”
드디어 새로운 갑옷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아델이 기대감 어린 얼굴로 싱글거렸다.
두 사람은 다시 이동을 개시했다. 말에서 내려 고삐를 쥔 채, 풀숲을 헤치며 산을 탔다.
여름의 숲은 생기가 넘쳤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사이로 새나 벌레들이 찌르르 거리며 울었고, 다람쥐나 토끼 같은 산짐승들도 겁 없이 날뛰었다.
말들도 기분이 좋은지 화답하듯 푸르릉 울었다.
우뚝 솟아있는 나무들을 짚으며 한참을 올라왔을까. 산 중턱의 끝자락. 평평한 공터에 지어진 통나무 집이 하나 보였다.
굴뚝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패다 만 장작이 사람의 온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해줬다.
벨로크는 지금쯤 집 안에 있을 늙은 대장장이에 대해서 떠올렸다.
‘분명 귀족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을 싫어했었지.’
루크는 귀족의 공방에서 일할 정도로 뛰어난 대장장이였지만, 당시 귀족들의 허례허식에 지쳐있었다.
실전성은 잊은 채, 오직 보석과 금붙이를 이용한 예식용 검과 갑옷을 만드는 것에.
검이란 본디 살상 도구다.
뼛속까지 대장장이였던 그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 결과.
귀족 전속 대장장이라는 명함을 버리고 산에서 은둔하며 외롭게 쇠를 두드리는 것이었다.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은 채, 더 강력한 검, 더 튼튼한 갑옷을 만들기 위해!
‘그의 실력이라면 존중받을 자격은 충분하다.’
벨로크는 어느 한 분야에서 경지를 이룬 사람이라면, 심지어 그가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장인이 만든 검과 갑옷이라면 악마와 괴물들을 사냥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
벨로크는 공손하게 노크부터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행동하기 전에 충실한 종자 아델이 대문을 콰앙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