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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1화 (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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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적어도 겉으로는 예의 바르게 행동하던 거스트가 가면을 집어 던졌다. 말콤은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뭐가 됐든 해볼 생각이었다. 영주 부녀를 인질로 잡아 이곳을 탈출할 수도 있겠지.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베로니카를 사랑했던 과거 따위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생각을 마친 두 사람은 곧 영주 부녀에게 달려들었다.

“생각보다 더 불손한 자들이었군!”

“겨··· 경비병!”

“꺄아악.”

사제 안톤이 기도문을 외웠다. 로벤 영주가 딸을 감쌌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느렸다.

시퍼런 검날 두 개가 날아들었다.

바로 그때. 벨로크가 나섰다. 그의 다리가 한 차례 가속했다. 순식간에 홀 안을 가로지른 벨로크가 검을 뽑아 들어서 두 사람의 검을 쳐냈다.

쇳소리가 울리며 그 반발력에 의해 두 사람은 잠시 물러났다.

“크윽.”

손이 저릿저릿했다. 잠깐의 공방이었지만 거스트와 말콤은 알 수 있었다.

이 검은 머리 새끼. 더럽게 강하다. 하지만 이쪽도 물러설 수 없다. 목숨이 걸려있으니까. 두 사람은 독기를 가득 품었다.

“벨로크 님!”

아델이 검을 뽑으며 재빨리 다가왔지만, 벨로크가 만류했다.

“아델. 사제님과 영주님을 지켜라.”

“하지만···”

“혼자서도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자··· 잠깐 기다리게. 내 주문이 곧.”

“얌전히 따라오시지요.”

아델이 뜨문뜨문 주문을 외우던 안톤을 거칠게 낚아챘다. 벌벌 떠는 영주 부녀의 옆에 그를 데려다 놓고는 호위하듯 앞에 섰다.

베로니카가 속삭였다.

“기사님이 위험해! 상대는 둘이라구!”

“내 딸의 말이 맞다. 가서 주인을 거드는 것이 조금이라도···”

당장에 벨로크가 죽으면 부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영주까지 그렇게 말했지만, 아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여유롭게 팔짱을 꼈다.

“벨로크 님을 믿으시지요.”

종자의 강한 자신감에도 두 사람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상식적으로 1대2의 싸움이니까.

그것도 범인이 아닌, 살인 전문가들의 대결. 이런 승부는 한끝으로 갈릴 것이다.

가죽 부츠가 돌바닥에 마찰되며 차르륵 소리가 울렸다. 거스트와 말콤이 각자의 검을 추켜세우며 슬금슬금 움직였다.

검을 쥐고 있던 자세를 슥 바꾸기도 했으며 허공에다가 위협적으로 휘두르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내 식은땀을 흘렸다.

‘도저히 틈이 없다.’

앞을 가로막은 검은 머리 기사는 마치 태산과도 같았다.

두 사람이 고래고래 욕설을 지르며 도발하든 페이크 섞인 동작을 섞어 넣으며 달려들 준비를 하든.

벨로크는 검을 든 채 한치의 미동도 없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검술이란 결국 손의 연장선. 날붙이를 휘두르는 거였다.

두 기사의 보폭과 손의 위치, 시선이 향하는 곳만 봐도 검이 어떻게 뻗어올지. 어떻게 덤벼올지 뻔히 보였다.

공격해올 곳은 정해져 있다. 게다가 시간도 벨로크의 편이었다. 내정관이 소리를 높이며 병사들을 부르고 있었으니까.

“으아아!”

이 끝없는 대치 관계가 신물이 난 걸까.

결국. 참다못한 말콤이 먼저 자리를 박찼다.

“말콤! 이런 젠장.”

거스트도 어쩔 수 없이 나섰다. 동시에 달려드는 것이 그나마 승산이 높으니까.

짧은 찰나. 거스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래, 사교도와 자신의 부하들까지 처리했다면 녀석도 분명 지쳤을 것이다. 그 틈을 노린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이 덤벼오자. 대비하고 있던 벨로크가 검을 휘둘렀다.

말콤이 기세 좋게 막았다. 하지만 검안에 담긴 강력한 힘에 그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이대로라면 후속타에 목이 떨어질 상황.

그때 벨로크가 몸을 회전시키며 후방으로 검을 휘둘렀다. 난입한 거스트를 저지하기 위함이다.

거스트가 혀를차며 주춤 물러섰다. 잠시 후 세 사람 사이의 공방이 이루어졌다.

“뒤져라!”

말콤과 거스트가 양쪽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지만, 벨로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녀석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현란한 발재간과 검 놀림이 홀 안을 가득 채웠다.

“무슨···”

로벤 영주는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건 대체··· 저자는 뒤에 눈이라도 달렸단 말인가.

벨로크는 상대방의 공격을 막았다 싶으면 뒤돌아서 카운터 쳤다.

아니면 상대의 힘을 이용한 반발력으로 두 기사의 공격을 얽히게 만들었다.

1대2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수세에 몰린 것은 말콤과 거스트였다.

거스트는 벨로크와 검을 맞댈수록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놈은 지치지도 않았단 말인가?’

무거운 갑옷을 입고 하수도를 헤매고 검을 휘두르고 모두 다 체력을 크게 잡아먹는 일이다.

더군다나 놈은 사교도 일당과 자신의 부하들까지 처리했다. 오늘 하루. 인간만 수십 명을 썰어 죽인 것이다.

헌대. 어째서 저렇게 멀쩡한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거스트는 모르고 있었다. 벨로크에게는 시스템 창이 존재하는 것을.

그리고 방금 전 체력에 스텟 포인트를 투자함으로써 몸 상태가 최상이라는 것을.

승부는 곧 났다.

“으아아!”

참지 못한 말콤이 큰 동작으로 검을 휘두른 것이다.

부우웅

온 힘을 다한 양손 공격. 그 속에는 분명 강맹한 위력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큰 동작은 그만큼의 빈틈을 수반했다. 벨로크의 검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뭣!”

채앵

말콤의 검이 도저히 꺾일 수 없는 위치로 휘었다. 빗겨치기.

기회를 잡은 그가 대번에 말콤의 목을 쳤다.

“컥.”

주인을 잃어버린 몸뚱이가 바닥을 굴렀다.

벨로크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뒤돌아서 당황한 거스트에게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하나, 아래에서 하나, 옆에서 하나.

번개 같은 연속 베기. 거스트는 처음 한 번은 어떻게든 받아냈지만, 이후의 참격은 그대로 허용했다.

한순간에 눈앞이 번쩍하며 팔과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가 경악 어린 눈동자로 검을 떨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스트가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끈적한 물방울이 물감처럼 튀었다.

회색빛 돌바닥이 붉게 물들고 비릿한 냄새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수십 년 동안 로벤 영내에서 권력을 잡아 온 두 기사.

등 뒤의 칼날로 다져온 입지 만큼이나 그 최후도 허무했다.

훨씬 더 튼튼하고 강력한 검에 의해 꺾인 것이다.

벨로크는 무덤덤한 얼굴로 검에 묻은 피를 털려다가 멈칫했다.

"아직 살아있군."

발치에서 꿈틀거리는 거스트를 보면서 벨로크는 어쩐지 성취감을 느꼈다.

약간 오른 경험치, 음습한 음모의 분쇄, 자신이 가진 무력에 대한 자신감.

기분이 나쁜 것이 이상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건드리지 말라고.”

벨로크가 거스트를 슬쩍 보고는 걷어찼다.

생각해보니 이 녀석이 지금까지 한 짓이 굉장히 얄미웠던 것이다.

"끄으으. 그...만."

숨이 턱 막힌 거스트가 자비를 구걸했다.

벨로크는 고통스러워하는 거스트를 끝장내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다.

귀찮게 자비를 베푸느니, 한 줌 경험치로 만드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웨엑.”

눈앞에서 사람의 머리통이 날아가고,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모습에 베로니카가 로벤 영주의 옷깃을 잡고 토했다.

곧이어 한발 느리게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영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허억, 이게 대체···”

난장판이 된 홀 안의 상황에 병사들이 기겁하든 말든 로벤 영주는 딸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멍하니 상황을 관조했다.

아직도 벨로크의 전율할 정도의 무력이 뇌리에 남았기 때문이다.

‘저런 사내가 대체···’

상업 도시의 지배자이자 손익계산에 철저한 이 귀족은 곧 머릿속의 정리를 끝마쳤다.

그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딸을 바라봤다. 베로니카는 연신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벨로크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입가에는 더러운 토사물이 그득했지만, 눈동자 속에는 흠모의 빛이 가득했다.

전란의 시대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력한 무력을 가진 사내는 뭍 여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얼굴도 잘생긴 데다 예의범절 또한 남달랐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노련한 영주는 어린 딸내미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았다. 단단히 빠졌다.

그의 머리로 괜찮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병사들이 일단 온몸 가득 피를 묻힌 벨로크를 포박하고자 했다.

덕분에 다 죽어가는 거스트의 숨통을 끊으려던 벨로크가 멈춰 섰다.

“벨로크 경!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일단 무기를 내려놓으시고 저희를 따라서···”

“이익. 시끄럽다. 이 등신 같은 놈들이!”

그 광경을 본 로벤 영주가 역정을 내며 손에 잡히는 술잔을 던졌다.

“감히 더러운 반역도들에게 맞서 나와 내 딸의 목숨을 구한 벨로크 경에게 그 무슨 망발이냐!”

“억.”

‘시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입을 연 병사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억울해했지만, 이윽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더러우면 출세 해야 했다.

“용서하십시오. 경. 차마 몰라뵀습니다.”

“그러지.”

벨로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주님의 말 대로라면 그는 지배자의 은인이었다.

앞으로 더 없을 권력을 가질 것이다.

“당장 여길 정리해라! 벨로크 경. 그리고 종자 아델이여.”

“네. 영주님.”

병사들에게는 호통치던 영주가 둘에게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상냥하게 말했다.

“오늘 자네들의 은혜 절대 잊지 않겠네. 이곳은 좀 그러니 일단 내 집무실로 같이 가지 않겠나?”

로벤 영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피비린내 나는 홀 안에서 할 얘기는 절대 아니다.

영주는 자신의 딸과 이 젊은 기사를 혼인시킬 생각이었다.

집무실로 이동한 로벤 영주가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옆에 일부러 베로니카도 앉혔다. 물론 깨끗이 씻긴 것은 물론 화장까지 시킨 채로.

베이츠와의 전쟁에서 잃은 부하들과 더불어 믿고 있던 말콤과 거스트의 배신.

그리고 그 둘을 단번에 제압한 혜성 같은 기사.

로벤 영주는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하나뿐인 혈육을 내어주어서라도 황금 같은 땅을 위해서라도.

‘전란이 길어지고 있다. 지금 믿을 것은 돈과 무력뿐이다.’

로벤 영주는 벨로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신의 딸 베로니카에게 마음이 있지 않냐고.

그녀는 영주의 무남독녀.

이는 곧 베로니카와 결혼만 한다면 이 로벤 땅을 준다는 의미와 같았다.

자유 기사에서 정식기사. 그리고 땅을 가진 영주의 자리까지!

대단한 업적이자 초고속 승진이었다. 그 어디를 가도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

“아버님도 참···”

베로니카가 입가를 가리며 슬쩍 웃었다. 결코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말 한번 잘 꺼냈다는 표정.

아까까지 겁에 질려 벌벌 떨던 여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아비를 쏙 빼닮은 독한 귀족이었다.

"아가씨와의 결혼이라. 제가 부족하지 않을지..."

아델의 얼굴이 슬쩍 굳고, 벨로크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그런 말을! 내 목숨을 구하고 사악한 사교도들을 일망타진한 자네에게 그 누가 뭐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을 겸양이라고 받아들인 영주가 와하하 웃어넘겼다.

목숨의 위기를 넘겨서 그런 걸까. 영주는 독한 술을 연신 들이켜며 벨로크의 무용담을 칭찬했다. 이윽고 얼굴이 시뻘게진 그가 기분 좋게 외쳤다.

"참. 벨로크 경. 제안과는 별개로 내 경에게 줄 것이 있소이다. 아마 자네 마음에 꼭 들 걸세."

"선물... 말입니까?"

벨로크의 얼굴에 궁금증이 떠오르고 로벤 영주가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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