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복수
거스트와 말콤은 한 방에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신입 기사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것은 이 둘.
부하들의 입단속부터 시작해서 서로 맞춰야 할 얘기가 많았던 것이다.
“부하들이 늦는군요.”
“걱정 말게. 지하수로가 오직 넓은가? 아마 찾느라 시간이 좀 걸리는 거겠지.”
“혹여 길이 엇갈리지는 않을까요?”
“아니, 선술집에 잠입해있던 부하로부터 연락이 왔네. 훌륭히 뒤를 잡았다더군.”
두 사람은 애초에 이 계획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른. 자그마치 서른 명이다.
그 안에는 숙련된 병사와 종자들도 섞여 있었다.
인간 둘이서 사교도는 물론 무장병 서른을 잡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말콤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종자나 병사들은 몰라도 고용한 건달들은 죽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거스트도 곰곰이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흥. 도시를 좀먹는 놈들의 말 따위 누가 귀담아듣겠나? 하지만 확실히 하는 게 낫겠지. 알겠네. 자네 말대로 하지.”
빈 술병들이 하나 둘 씩 바닥을 뒹굴고, 두 사람의 얼굴이 빨개질수록 그들의 대화는 거침없어지기 시작했다.
“으드득. 그 건방진 새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거스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붕대가 감긴 손을 슥슥 만졌다. 거의 다 나아가고 있었다.
말콤도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베로니카 님에게 수작을 거는 걸 보셨습니까? 내 당장에 그놈의 머리통을 쪼개 버리고 싶었건만···”
“잘 참았네. 잘 참았어. 결국 우리가 이기지 않았나.”
“거스트 경. 덕분이지요. 하하하하.”
분위기는 끝장날 정도로 좋았다. 베이츠와의 전쟁 덕에 다른 기사들도 죽었으니 자연히 두 기사의 위상도 높아지게 된 것이다.
그래, 앞으로도 이렇게만 된다면 더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웃고 떠들던 그 순간.
“그··· 급보입니다!”
문이 콰앙 열리며 거스트 휘하의 병사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얼마나 급하게 온 것인지 거친 숨을 연신 몰아쉴 정도였다.
“이런 미친 새끼가! 예의는 밥 말아 먹었냐? 대체 무슨 소란이야!”
거나하게 취한 말콤이 병사에게 욕설을 했다.
“한스. 자네는 지금쯤 성문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 설마. 그것 때문인가?”
거스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비릿하게 웃었다. 드디어 소식을 가지고 왔구나!
거스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그 년놈들의 목은 어디 있나?”
“그··· 그게.”
병사는 망설였다. 대체 이 충격적인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감을 못 잡았기 때문이다.
그가 꾸물거리자 말콤이 술잔을 집어 던지며 다그쳤다.
“이 새끼가! 왜 이렇게 꾸물거려? 채찍으로 한 번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나?”
“말콤. 진정하게. 한스. 오늘따라 너답지 않군. 차분하게 말해봐라.”
한스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으며 크게 말했다.
“도··· 돌아왔습니다.”
“역시!”
“하하하. 끝났습니다. 거스트 경.”
“포상을 내려야겠군. 그래. 다들 어디 있지?”
거스트와 말콤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부하들이 돌아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드디어 방해물이 죽었다.
마음속에 남아있던 일말의 불안감마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벨로크 경이 돌아왔습니다. 지금 영주님에게로 향하고 있답니다.”
“뭐?”
두 기사는 취기가 싹 가시는 걸 느꼈다.
사교도의 동향을 알아보기 위해 정찰 임무를 나갔던 벨로크가 돌아왔다. 들려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도시의 지하에 사교도가 암약하고 있었음은 물론이요. 한술 더 떠서 말콤과 거스트가 벨로크를 죽이고 공을 가로채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는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인가?! 한밤중. 느닷없이 재판이 열렸다.
“말도 안 되는 모함입니다! 영주시여. 저 떠돌이의 말을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저희가 동료를 살해하기 위해서 자객들을 보냈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말입니다.”
범인으로 지목된 두 기사와 더불어 잠옷 바람으로 나온 영주와 그녀의 딸. 내정관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두 기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만 일단 잡아땠다. 벨로크가 살아 돌아왔든 피가 묻은 요상한 주머니를 가지고 있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부정뿐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그들이 로벤 영주와 몇십 년을 동고동락 했단것이다. 거진 그들 가문의 시조부터 함께해왔던 인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두 기사는 부족한 증거물과 영주와의 정을 믿었다.
“거스트 경과 말콤 경이 자네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라··· 일단 그건 뒤로 넘겨두지. 그보다 정말 다 죽였나? 사교도들은 절대 쉽지 않은 상대인데.”
영주는 일단 사교도의 일부터 먼저 물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현실 부정이었다.
믿고 있던 두 기사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벨로크의 앞에서 두 기사를 내쳐야겠다고 했던 말들도 어느 정도 과장이다. 이 젊은 기사의 의욕을 불태우기 위해서 한 것.
영주는 놈들을 함부로 내칠 수가 없었다. 두 기사 가문이 로벤 영주를 모셔온 것도 몇십 년이 지났다. 자연히 그들에게 얽혀있는 영내 세력들도 있는 것이다.
“그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나. 대체 어떻게 둘이서 그 많은 사교도들을 다 잡았다는 거지?!”
거스트가 잘 되었다는 듯이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두 기사와 친분이 있는 내정관도 벨로크를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베로니카만이 벨로크를 걱정스레 쳐다봤다.
별로 호의적이지 못한 반응에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두 기사가 발뺌하리란 것도 영주가 그들의 편을 들 거란 것도 예상 범위 내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부임한 지 몇 주 안 된 신입 기사의 말보다. 몇십 년 동안 봐온 부하들의 말을 믿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아델. 고맙다.’
벨로크는 이 순간 적들의 수급에 집착하는 부하 아델에게 감사를 표했다.
“증거라면 여기 차고 넘칩니다.”
벨로크는 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를 풀었다.
댕구르르
“꺄아아악.”
사교도들의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덜그럭 거리면서 의식에 사용되는 저주 물품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충격적인 광경에 베로니카가 입가를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영주와 내정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사교도가 있었다.
설마하니 토벌까지 했을 줄이야. 하지만 대화의 주제를 돌리고 싶었던 거스트가 끝까지 부정했다.
“그냥 지하를 돌아다니는 난민들의 목을 잘라온 것 아닌가? 좀 더 확실한···”
“말 안 해도 그럴 참이오. 들어오시죠.”
거스트의 말을 끊은 벨로크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홀의 문이 열리며 수염이 성성한 노사제가 들어왔다.
로벤 교회를 맡고있는 성직자. 안톤이었다.
“사제 안톤? 벨로크 경! 자네 지금 교회를 끌어들인 것인가?!”
로벤 영주가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교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어서 벨로크만 따로 보냈던 영주였다.
하지만 그 기사가 외부의 세력을 끌어당기자 열이 뻗칠 수밖에.
벨로크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가 주장한다 해도 의심부터 하고 볼텐데.’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이용해야 했다.
그로서는 자신의 발언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세력이 필요했다.
사교도가 있다는 밀고를 먼저 보내온 것도 교회.
벨로크가 그들의 수급을 보여주며 증인이 되어 달라 말하자. 그들은 크게 환영했다.
“영주시여. 거스트 경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부른 것입니다.”
벨로크가 의심 많은 거스트의 탓이라고 돌렸다. 궤변이었지만 영주가 그들의 호감을 깎아내리기엔 충분했다.
“그 말 대로요. 성주. 나는 이 신실한 기사의 업적이 폄하되는 것을 우려해 온 것일 뿐이오.”
로벤 교회를 맡고있는 성직자들의 우두머리. 안톤 사제가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는 벨로크가 가지고 온 증거품들을 슬쩍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맹세컨대. 이들은 사교도의 무리가 맞소. 우리가 쫓던 놈들이군. 바호메트의 창녀. 이블렛과 그 일당들.”
“그··· 그런!”
교단의 사제가 신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 이를 부정한다는 곧 신성모독을 뜻했다.
로벤 영주가 거스트와 말콤을 보면서 말했다. 아까 전보다 시선이 더 차가워져 있었다.
“만족했나?”
“그··· 그렇습니다.”
거스트가 입을 꾸욱 다물었다. 벨로크가 말했다.
“영주님. 저는 당신이 맡긴 과업을 훌륭히 이행했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다시 돌릴 때가 온 것 같군요.”
“음···”
로벤 영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말콤과 거스트에 대한 의심이 점점 싹트고 있었다.
“사교도 무리들을 토벌한 저는 곧 정체불명의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가까스로 놈들을 물리치고 얼굴을 보니 아는 얼굴이더군요.”
말을 마친 벨로크가 말콤과 거스트를 보며 씨익 웃었다. 거스트와 말콤의 얼굴에 핏기가 싸악 가셨다.
이런 좆같은 아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설마하니 사교도 무리에 이어서 단둘이서 자신들의 부하들. 수십 명을 잡아 죽였다고?
두 사람은 끝까지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어진 벨로크의 말에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증거는 물론 증인도 있습니다. 아델! 놈을 끌고 와라!”
벨로크가 소리높여 말하자. 홀의 문이 또 다시 열렸다. 아델이 만신창이가 된 샌슨을 질질 끌고왔다.
“너는!”
거스트의 종자 샌슨의 얼굴을 알아본 로벤 영주가 눈을 크게 떴다. 말콤과 거스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아델이 끌고 온 샌슨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끄으으···”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얼굴은 피멍투성이에 다리도 부러져 있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급소를 피해서 때린 것이다.
그녀가 샌슨의 배를 거세게 밟았다. 샌슨이 미친 듯이 떨었다.
연회장에서 자신감에 넘치던 종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간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그만큼 원초적인 폭력은 두려웠다.
“커어억. 그···만.”
아델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비겁한 기사의 종자야! 이 자리에서 네놈 일당의 죄를 낱낱이 밝혀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샌슨이 떨리는 눈으로 홀 안을 살폈다.
상석의 영주와 베로니카 내정관은 물론 신을 모시는 안톤 사제와 그의 주인인 거스트, 말콤의 모습이 보였다.
두 기사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둘이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저었다. 어떻게든 입을 다물라는 뜻. 그가 입을 여는 순간.
둘은 교수대로 향하게 될 테니까.
그 신호에 샌슨의 눈빛이 흔들렸다.
‘젠장. 지금 내 꼴이 안 보이는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일순 샌슨이 망설였다. 말을 하고 죽든, 안 하고 죽든, 죽는다면 그래도 주인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그 기색을 읽은 아델이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로벤 영주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영주 님. 잠시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음?”
영주의 의문을 뒤로한 채. 아델이 샌슨의 사타구니를 발끝으로 찍었다.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샌슨이 괴성을 질렀다.
“끄. 끄아아아!”
그 참혹한 광경에 베로니카가 입을 헤 벌렸고, 홀 안의 남자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울부짖는 샌슨의 모습을 바라보던 아델이 머리카락을 슬쩍 넘겼다. 그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네놈이 아직 덜 맞았나 보구나. 어디 한 번 거짓을 고해 보거라. 다음에는 그 눈깔을 파버릴 테니.”
감미로운 목소리에 그렇지 못한 내용.
머릿속이 하얘지는 듯한 고통에 샌슨은 모든 망설임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침을 튀기듯이 말했다.
“모두! 모두다! 거스트와 말콤이 시킨 짓입니다! 모두 다아!”
경칭도 집어치웠다. 샌슨이 큰 소리로 그동안 지어온 죄들을 낱낱이 밝혔다.
횡설수설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만큼은 모두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두 기사가 작당을 하고 새롭게 서임 받은 기사를 죽이려 했다!
그것도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그 비겁한 행태에 베로니카가 손가로 입을 막았고 영주가 얼굴을 있는 그대로 구겼다.
털썩
"아...안 돼."
말콤은 다 틀렸다는 듯 주저앉았지만, 거스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침을 튀겨가며 끝까지 무고를 주장했다.
“모함··· 모함입니다! 둘이 입을 맞춘 것이.”
“정녕 명예라고는 없는 자로군. 끝까지 잡아뗀다 이건가? 아델!”
중년 기사의 추한 발버둥에 벨로크가 차갑게 비웃었다. 그가 종자를 다시 불렀다.
아델이 다른 손에 들린 주머니 하나를 바닥에 던졌다.
데구르르
“꺄아악.”
또 다른 머리통들이 바닥을 굴렀다. 겨우 진정했던 베로니카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를 본 영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모두 아는 얼굴들이다. 성내의 경비를 맡는 병사들의 얼굴. 증인에다가 빼도 박도 못 할 증거까지 모든 것이 다 맞아떨어졌다.
“허허. 집안 꼬라지가 엉망이구려. 로벤 영주.”
안톤 사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비웃었다.
로벤 영주의 두툼한 턱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교회와 귀족들은 서로를 끝없이 견제하며 대립해왔다.
그런데 하필 이 순간.
제일 보이기 싫은 치부를 제일 보이기 싫은 상대에게 들켜버렸다!
푸른 피가 흐르는 귀족에게 자존심과 명예란 곳 전부!
로벤 영주의 이성이 뚝 끊겼다.
그의 눈동자가 쫙 째지며 형형한 눈빛을 빛내기 시작했다.
교회를 끌어들인 벨로크에 대한 원망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졌다.
지금 그의 분노가 향하는 곳은 당연히 이딴 짓거리를 일삼아 자신에게 모욕을 안겨준 두 기사였다.
“이 개새끼들이!”
로벤 영주가 의자의 팔걸이를 쿵 찍었다. 그가 벼락같이 외쳤다.
“네놈들은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하리라! 감히! 이따위 망신을 나에게 안겨줘?! 여봐라! 당장, 이 죄인 놈들을!”
“으아아아!.”
영주의 말을 끊은 거스트가 돌연 검을 뽑았다.
채앵
홀 안에서 서슬퍼런 검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억. 자네! 미친 건가!?”
내정관이 영주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거스트가 손을 감싸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그리고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영주 부녀를 노려봤다.
“미친 건 너희겠지! 내가 그동안 이 영지를 위해 해준 것이 얼마인데. 이딴 식으로 날 갖다버려?”
잠시 숨을 고르며 씩씩거린 거스트가 거칠게 말했다.
“말콤! 이 멍청한 새끼야! 뭐 하고 있는 거냐. 당장 검을 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