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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8화 (8/222)

8

사교도

로브 자락에 반쯤 가려진 얼굴 윤곽 사이로 유난히 새빨간 입술이 눈에 띠었다. 그녀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벨로크는 안력을 돋궈서 입술 모양을 읽었다.

안녕? 제물들아.

말을 마친 여인이 씨익 웃었다.

쯧. 알고 있었나?

벨로크도 비뚜름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매달아 두었던 석궁을 꺼냈다.

“벨로크 님?”

“들켰다. 아델.”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도 없다. 길잡이는 도망쳤고, 그들은 지하수로의 지리도 잘 모르니까. 이렇게 된 이상 싸울 뿐이다.

“이런 씹.”

그녀도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석궁을 꺼내 들었다.

“제물들이 제 발로 찾아왔다. 형제들아! 모두 무기를 들어라!”

붉은로브녀가 양팔을 펼치며 외쳤다. 하이톤의 목소리가 공동을 카랑카랑 울리자. 기도를 올리고 있던 사교도들이 자리를 벅차고 일어났다.

“그분을 위해···”

“진실된 세상을 위해.”

썩은 동태 눈깔을 한 사교도들이 로브 자락에서 무기들을 꺼내 들었다.

철퇴나 도끼 가시곤봉 같은 흉악한 무기들이 횃불 빛에 반사되며 번들거렸다.

녀석들이 달려들기 직전 벨로크와 아델이 먼저 선수를 쳤다.

“쏴!”

쐐애액

두 사람이 발사한 쿼렐이 어둠을 갈랐다. 퍽퍽 한순간에 두 명의 사교도가 화살을 맞고 바닥을 굴렀다.

“크아악.”

“달려들어!”

붉은로브녀가 명령을 내리고는 양손을 모으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곧 그녀의 주위로 요상한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마법사다. 아델. 조심해라!”

이를 본 벨로크가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마법사.

물리법칙 따위는 무시하며 주문이라는 기이한 힘을 사용하는 존재들.

마법이 걸린 물품이나 같은 마법사가 아닌 이상 주문을 막는 것은 어렵다.

방법은 두 개다.

녀석이 주문을 외우기 전에 죽이거나 사출된 주문을 피하는 것뿐. 쉬운걸로 따지자면 주문을 외우기 전에 죽이는 것이 훨씬 편했다.

옛날부터 전사와 마법사의 싸움이란 으레 그랬으니까. 누가 먼저 칼을 꽂는가, 혹은 주문을 외우는 가의 싸움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는 사교도 무리들이 무기를 꼬나쥔 채 달려들고 있었다.

고요했던 공간이 한순간에 소란스러워지며 돌로 된 통로가 쿵쿵 울렸다.

녀석들을 처리하지 않는 이상. 마법사에게 다가갈 수 조차 없을 터.

이를 알아차린 아델이 석궁을 던지고는 검과 방패를 들었다.

“시선을 끌겠습니다.”

그녀는 10여 명이 넘는 사교도 무리들에게 냅다 달려들었다.

“계집. 얌전히 제물이 되어라!”

사교도가 눈을 빛내며 곤봉을 휘둘러왔다. 아델은 방패를 가슴께까지 올리고는 두 발 가득 힘을 줬다.

반발력에 의해 곤봉을 휘두른 사교도가 오히려 튕겨 나갔다. 기회를 잡은 그녀가 재빨리 검을 찔렀다.

“끄르륵.”

목이 꿰뚫린 사교도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녀석의 뒤에서 곧바로 다른 두 명이 달려들었다. 제각기 도리깨와 검이 날아들었다.

좁은 통로 안에서 피할 곳은 없는 상황.

하지만 전투에 능숙한 아델은 곧 해답을 찾아냈다.

오히려 놈들의 품 안으로 파고든 것이다. 충분한 가속도를 얻지 못한 도리깨가 치렁거리며 그녀의 갑옷을 긁었고, 검이 그녀의 손에 의해 막혔다.

“뭣이.”

당황하는 둘을 뒤로한 채 그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무방비하게 노출된 녀석들의 배에 검을 찔러넣었다. 방패를 둔기처럼 휘둘렀다.

“커어억.”

몸에 구멍이 뚫린 녀석이 내장을 비죽 흘렸고, 얼굴을 맞은 녀석의 이빨이 비산했다. 사교도들의 다수라는 이점은 좁은 통로에 가로막혀 오히려 방해물이 되었다.

한쪽에서 종자가 미친 듯이 날뛰자 벨로크는 그 틈에 다른 통로를 이용해서 공동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붉은로브녀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로브 속에서 탁한 빛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양동작전인가? 머리는 좋네.”

“알고 있었나?”

“’눈’이 있어서 말이지.”

그녀가 여유롭게 웃으며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는 한쪽 손을 뻗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바닥에서 일순 빛이 일었다.

푸화악

시꺼먼 검은 연기가 요란하게 방출되었다. 아까전부터 준비하던 주문이다.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순식간에 뻗어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벨로크는 일순 숨을 참았다. 그리고는 냅다 바닥을 굴렀다.

한순간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연기와 접촉한 돌바닥만이 치이익 거리며 녹아내렸다.

“빠르네?”

로브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감탄했다. 그렇지만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다시 손바닥을 움직였다.

쿠르르릉

그 움직임에 따라 방출되는 연기가 꼬리처럼 따라다녔다.

벨로크는 발을 구르며 재빨리 움직였지만 쏘아지는 연기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이윽고 연기가 그를 집어삼켰다.

목적을 달성한 여인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피어오르는 독무를 피해 입가를 가리며 슬쩍 뒷걸음질 쳤다.

[베르테르의 독안개]주문은 산성용액과 함께 마비효과를 지닌 연기를 뿜어내는 마법.

이를 정통으로 맞았으니 지금쯤 어디 한 군대가 녹아내렸던지, 아니면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했을 것이다.

몸놀림으로 보아 기사로 보였는데. 제법 훌륭한 제물이 생겼군. 남은 건 아직도 싸우고 있는 계집년 하나인가?

그녀가 주문을 취소하고 고개를 슬쩍 돌리려는 찰나.

쐐애액

연기를 가르며 날아온 화살 한 발이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다.

“커억··· 이게 무슨.”

여인이 눈을 크게 뜨며 몸 사이로 삐져나온 화살 깃을 바라봤다. 충격 때문인지 사출되던 주문은 취소된 지 오래였다.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린 그녀가 앞을 바라보자. 벨로크가 재빨리 녹아 들어가는 갑옷 파편을 떼어내고 있었다.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채로. 제법 영민한 그녀는 금세 상황을 이해했다.

쏘아지는 연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저 기사는 오히려 역공을 준비했다.

독 연기로부터 노출되는 얼굴을 가리고 갑옷을 내어준 채, 찰나의 순간 화살을 쏜 것이다.

무섭도록 재빠른 판단력과 행동력.

붉은 로브 사교도. 이블렛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이블렛은 자신이 섬기는 악마 바호메트로부터 주문의 힘을 받은 후. 두려울 게 없었다. 한낱 뒷골목 창녀였던 그녀가 한순간에 강대한 힘을 지닌 마법사가 되었으니까.

대부분의 적들은 그녀에게 접근하기 직전 마법에 녹아내렸다. 그런데 저 사내는 대체···

뚜벅뚜벅

벨로크가 연기를 헤치며 걸어왔다. 그는 마법이 가진 무서움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검으로는 튕겨낼 수 조차 없는 기상천외한 요술. 모르면 당할 뿐이었다.

‘저것과 비슷한 마법을 본 적이 있어서 다행이야.’

게임 속 플레이. 과거의 경험이 도움이 됐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으리라.

벨로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검을 들어 올렸다.

“이블렛 님!”

그 순간.

통로에서 싸우고 있던 사교도 셋이 이블렛의 위험을 감지하고는 달려왔다.

“이노옴! 감히 그분의 배필을 건드리느냐!”

피를 토하는 듯한 음성. 대단한 기세였지만 그뿐. 벨로크는 심드렁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무기만 들었다뿐이지. 엉성한 자세와 보폭은 어중이떠중이도 못 되었다.

마법사만 제외하면 별 것도 없는 놈들. 벨로크가 대충 검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검광이 번뜩이며 사교도들의 머리통이 차례로 하늘을 날았다.

푸시식 뒤늦게 머리를 잃어버린 시체들이 부들부들 경련하다 쓰러졌다.

순식간에 인간 세 명을 죽이는 것이 어디 보통 실력인가.

그 모습을 보던 이블렛은 공포심을 몰아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가슴이 들썩이며 피가래가 푸컥 나왔다.

“진짜 기사였군··· 그것도 대단한 실력을 지닌.”

“유언은 그걸로 끝인가?”

벨로크가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어차피 또 묻을 것이지만 이 몸에 새겨진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태연한 말에 이블렛이 핏기 어린 눈으로 벨로크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거의 다 되어가던 자신의 게획을 방해한 자에게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젊은 기사. 내 너를 저주 할 것이야. 곧 산양의 머리를 가진 사도가 내려와 너를···”

더 들어줄 것도 없군. 벨로크는 이블렛의 목을 쳤다.

퍽 댕구르르

후드가 벗겨지며 제법 이쁘장한 얼굴을 가진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얼마나 원통한지 죽어서도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벨로크는 손을 슬쩍 움직여 사교도의 눈을 감겨주었다. 경험치는 그렇게 많이 주지 않았다. 버본보다 적었다.

마법사라길래 기대했는데. 조금 실망한 벨로크가 몸을 살폈다.

젠장.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험한 돌바닥을 구른 몸은 쑤셨고 갑옷에 보호받았다고 해도 지독한 산 때문에 겉 피부가 따가웠다.

밥 벌어먹기 한 번 더럽게 힘들군. 그가 한숨을 내쉴 때.

“벨로크 님. 괜찮으십니까!”

통로에서 아델이 나타났다. 그녀도 몸 여기저기 생채기가 가득했다.

무장한 괴한 10여 명과 싸웠으니까. 하지만 치명상은 없었다.

아델은 전장을 거친 경험 많은 전사였으니까. 어중이떠중이에게 당할 리가 없는 것이다.

“맙소사. 갑옷이···”

다가온 그녀는 오히려 벨로크를 걱정했다. 갑옷이 녹아내려 맨살이 보이는 것이 좋은 꼴은 아니었다.

벨로크가 안심하라는 듯 몸을 털었다.

“그럭저럭. 너야말로 괜찮나?”

“이 정도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아델이 용맹하게 답하며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처음에야 그들의 기이한 의식 때문에 긴장했지만 싸워보니 별거 아니었다.

그냥 무기를 든 일반인들 수준. 마법사만 조심하면 끝이었다.

임무는 정찰이었는데. 단둘이서 오히려 섬멸을 해버렸다. 대단한 업적이었다.

‘그래도 보통 기사라면 마법사를 당해내지 못했을 거야. 역시 벨로크 님···’

어느정도 실력 있는 기사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지만, 마법사는 달랐다.

주문 몇 개만 가지고 있어도 성주의 고문으로써 대우받는 것이 그들이었다.

죽이는 것은 더 어렵고. 아델이 다시금 감탄하며 주인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이윽고 영주에게 제출할 증거품들을 찾기 위해 죽은 사교도들의 품을 뒤졌다.

시뻘겋게 물든 뱀처럼 휜 단검과 사람의 뼈로 만든 장신구, 가죽으로 만든 요상한 양피지 같은 것이 나왔다.

“하나같이 꺼림칙한 물건들뿐이군요.”

아델이 미간을 구기며 양피지를 살피려 하자 벨로크가 이를 만류했다.

“그만. 저주가 담긴 물건일지도 모른다.”

악마를 섬기는 사교도들이 사용하던 물건이다.

특히나 주문서 같은 것은 읽기만 해도 무슨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

이 세상에는 별의별 요상한 저주들이 다 있었으니까.

“으···”

아델이 기겁을 하며 양피지를 도로 말았다. 그리고는 가지고 온 보따리에 조심스럽게 물품들을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아무리 대담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역시 저주는 무섭나 보지? 하지만 그녀가 몸을 사리는 것도 잠시였다.

아델은 잠깐 고민하더니, 음음.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사교도 여인의 목을 주워들었다.

“역시 이건 주워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죄인의 목은 그 자체로 훌륭한 증거가 되니까요!"

꺼림칙해 하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아델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목을 끌어안은 채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신나서 말을 이었다.

"교회가 금지한 사교도의 토벌이라니. 위대한 업적이자. 정의를 바로 세운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로부터 포상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모가지를 증거품으로 내세워서 교회로부터 포상을 받을 셈인가?

그런 종자의 모습에 벨로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곳 중세랜드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남의 모가지를 못 가져가서 안달인가.

확실한 증거품이라서? 그렇다고 해도 무슨 인형 뽑듯이 고르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당사자의 목을 직접 벤 벨로크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한 번씩 정서적으로 이해가 안 됐다.

아니, 어쩌면 아델만의 취미가 아닐까? 자신의 종자이건만 벨로크는 한 번씩 아델이 두려웠다.

“다 챙겼으면 가자.”

“네.”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척척척

통로 저편에서 수십 개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작게 들리던 것이 곧이어 우르르 거리며 들렸다.

어둠 속에서 복면을 쓴 괴한 수십 명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공동을 중심으로 포위되었다.

“끄응. 2차전인가?”

벨로크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풀었다. 그는 누가 보냈냐 같은 상투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다.

어떤 미친새끼가 지금 이 시간에 수십 명의 무장병을 지하에 밀어 넣을까.

그것도 저렇게 수상하게 입혀놓고서.

손쉽게 예상이 갔다. 보나마나 거스트와 말콤 두 기사의 부하들이겠지.

‘이 새끼들 타이밍 한 번 잘 맞추네.’

이렇게나 빨리 온다고? 벨로크가 덤덤하게 적들을 주시했고, 아델이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꾹 주었다.

두 사람은 곧 자객들이 어떻게 그들을 쫒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자객들 사이로 낯익은 얼굴을 본 아델이 이를 갈며 외쳤다.

“네놈! 스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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