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교도
“사특한 존재를 믿고 섬기는 부랑자 같은 놈들 아닙니까?”
교회가 신봉하는 유일신을 부정하고 요상한 존재를 따르며 떠돌아다니는 놈들.
벨로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기억 속에 있는 존재들을 떠올렸다.
아드리아의 재림에서 기사 태생은 기본적으로 전쟁터를 전전한다. 전장에 나가 공을 쌓고 땅을 가진 영주가 된다.
이윽고 온갖 암투와 혈투를 거쳐 정적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왕좌에 오르면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이다.
대영주들과 싸우기도 바쁜 판국에 사교들과는 마주친 적이 없었다. 너무나 하찮은 적이니까.
벨로크의 말에 로벤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가로저었다. 그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랑자라··· 맞는 말이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하지만 악마들이 출현하자. 나는 더 이상 놈들을 좌시할 수 없게 되었네.”
“악마···”
뜨끔한 벨로크는 자신이 했던 짓거리를 떠올렸다. 이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불지옥 난이도를 선택해서 대륙에 악마라는 종족들을 추가한 것을.
이게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군. 벨로크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사교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놈들이 믿고 따르는 존재들이 직접 이 땅에 강림한 것이네. 녀석들은 이제 평범한 부랑자가 아니야. 요상한 사술을 사용하는 괴인들이지.”
“꽤나 위험한 세력이군요.”
“그래, 그리고 그 사특한 존재들이 감히 내 땅에 발을 들이밀었지. 로벤의 지배자로서 나는 놈들의 더러운 짓거리를 눈감아 줄 수가 없어.”
“토벌입니까?”
“아니, 일단은 정찰이라네. 얼마 전 교회의 밀고를 받았네. 이 도시의 지하에 사교도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군. 하지만 나는 악마들만큼이나 교회 놈들을 믿지 않네. 그들은 법황의 교활한 개들이니까. 그래서 내 충실한 검에게 이번 임무를 맡기고 싶네. 과연 지하도에 사교도들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갈 곳 잃은 부랑자들의 모임인지 알기 위해서.”
교회는 언제나 왕권과 영주들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려왔으며, 귀족들과 왕은 이들을 경계했다.
두 세력의 대립은 전통처럼 꽤나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로벤 영주는 교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만의 세력으로 움직이고 싶은 것이다.
도움을 받으면 다시 돌려줘야 하니까. 이해가 갔다.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의아함이 있었다.
“다른 두 기사들은?”
말콤과 거스트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건 꽤나 막중한 임무. 보통 이런 일은 막 들어온 신참보다는 숙련자들에게 맡기는 것이니까.
로벤 영주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책상을 쿵 쳤다. 서류가 파르륵 날렸다.
“이 멍청한 놈들이 몇 주 전 대련을 하면서 팔이 부러졌다는군. 재활을 위해 일단은 안정을 취하게 했네.”
“혈기가 이성을 앞질렀군요.”
그렇군. 그런 변명을 지어냈나?
당사자들의 팔을 부러트린 벨로크가 태연하게 말했다.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기사라는 놈들이 제 몸 관리도 못 해서야··· 어쩌면 내쳐야 할 수도.”
로벤 영주가 마지막 말을 작게 중얼거리면서 벨로크를 슬쩍 보았다.
그 의미심장한 눈빛이 이번 일의 성과에 따라서 벨로크의 지위를 더 높이겠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벨로크가 머리를 굴렸다. 계획이 틀어졌다.
원래는 놀고먹다가 전란의 불씨가 보이면 탈출을 감행할 생각이었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미래가 바뀌고 있다. 악마라는 변수 덕분에 말이다.
‘쉽지 않겠군.’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의 그는 일단 영주의 기사. 내어주는 명을 따라야 한다.
“맡겨두시죠.”
“자네만 믿겠네.”
영주가 그런 벨로크는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이 젊은 기사를 뽑은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고 느끼면서.
영주의 기대를 뒤로한 채 벨로크가 집무실을 나섰다. 해는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다. 준비를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
벨로크는 곧바로 종자 아델을 불렀다. 그녀는 훈련이 끝나고 막 씻고 나온 듯 머리칼에 물기가 가득한 상태였다.
“부르셨습니까. 영주가 뭐라고 하던가요?”
“일이다. 아델. 이곳 지하에 괴인들이 있다는군.”
벨로크는 영주에게 들었던 내용을 말해주었다. 유심히 듣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해야겠군요. 병사들을 소집할까요?”
“아니, 우리 둘이서 간다. 길잡이로 용병 하나쯤은 고용해야되겠지만,”
“교회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정찰이라고는 하나 둘이서 괜찮을까요?”
아델의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것보단 훨씬 낫지.”
그들은 이미 영지의 군권을 잡고 있는 토착세력. 말콤과 거스트와 척을 진 상태다. 자연히 그들의 입김이 닿아있는 영지 병사들이 둘의 말을 들을까?
아니, 오히려 감시를 하며 뒤에서 비수를 찌를지도 모른다. 차라리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들이 훨씬 더 믿음직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둘은 주섬주섬 무장을 챙겼다. 정찰이 목적이니만큼. 소리가 덜 나는 가죽 갑옷을 입고 검에는 숮으로 칠을 했다. 횃불과 여분의 식량도 챙겼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상. 준비는 아무리 과해도 부족했다.
둘은 곧이어 영주 성을 나섰다. 하지만 복도를 걸어가는 도중. 보기 싫은 얼굴을 마주하고 말았다.
요 몇 주간 보이지도 않던 놈들이 이런 때 나타난다고? 벨로크는 놈들이 의도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말콤과 거스트가 한쪽 손에 붕대를 감은 채 이죽거렸다.
“어디를 가시는 것이오. 벨로크 경?”
“요 앞으로 산책 겸 사냥을 나갈 생각이오.”
“내가 알기로는 하수도에 볼일이 있다고 들었네만?”
역시나 알고 있군. 성내에는 이미 두 기사의 눈길이 곳곳에 닿아있었다. 벨로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하세계 산책이오.”
“하하. 냄새나는 장소로 피크닉이라도 가시나?”
“손 병신들 뒤치닥꺼리를 하는 중이지.”
“풋.”
“뭐라? 네놈이!”
벨로크의 적나라한 말에 아델이 비웃었고 말콤이 달려드려는 걸 거스트가 막았다. 그가 벨로크를 노려보며 말했다.
“말콤 경. 참으시게. 그리고 벨로크 경. 계속 그렇게 꼿꼿하게 나오는 건 자네에게 안 좋을 텐데?”
“먼저 시작한 건 그쪽이오. 나와 내 종자를 모욕했지.”
벨로크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거스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의 입장에서 벨로크는 굴러들어온 건방진 돌 이었을 뿐이다.
양심이란 것이 거스트에게 존재했으면 그가 지금까지 왜 이렇게 살았겠는가?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만 고려할 뿐이었다.
“하. 어디 마지막에 누가 웃는지 보자고. 부디 뒤통수 조심하시게나.”
“조언 고맙소.”
벨로크와 아델은 두 사람을 지나쳐갔다. 말콤이 이를 갈며 말했다.
“여전히 건방진 놈들이군요. 하수도에 들어가는 즉시 사람을 보내는 것이?”
거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젊은 기사보다 조금 더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알았다.
“놈들은 지금 영주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중일세.”
“그렇다면 더욱더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말콤이 안달 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공을 세우면 영주의 후광이 더욱더 자신들을 벗어날 것이기에.
거스트가 제발 진정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안 죽인다는 뜻이 아니야. 기회를 노리자는 뜻이지. 사교도를 무찌르고 순직한 기사라. 좋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
거스트는 나직하게 말을 하면서도 이 무식한 동료에게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같은 공범이라는 사이만 아니었다면 이미 내쳤으리라.
그런 거스트의 열변이 통했던 걸까. 그제서야 말콤이 고개를 끄덕이며 흠흠거렸다.
“그렇군요. 샌슨과 병사들에게 준비해두라 일러야겠군요.”
“뒷골목 녀석들에게도 말을 해놓겠네. 그 버본을 죽인 놈이니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성 밖, 하물며 컴컴한 지하수로 밑에서는 영주의 눈도 잘 닿지 않으리라. 두 기사가 멀어져가는 벨로크의 뒷모습을 보며 흉악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영내에 위치한 선술집으로 향했다. 하수도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들을 모집하기 위해서였다.
도둑질이라던지 거친 용병일을 하는 놈들의 일과야 뻔했다. 펍에서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거나 밤새 창녀와 논 다음 여관방에 드리누워있을 것이다.
무역도시답게 영지는 대낮부터 시끌벅적했다.
귀가 뾰족한 요정족과 땅딸막한 난쟁이들도 흔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이종족들이 익숙한 듯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바쁜 걸음을 움직였다.
“쌉니다. 오늘 아침 밭에서 따온 녀석입니다.”
“저 멀리 동방에서 가져온 귀한 비단이란 놈입니다. 마치 요정의 살결처럼 부드럽죠. 암요.”
상인들이 소리높이며 호객행위를 했다. 진짜 중세시대 같군. 벨로크는 신기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친절하지 않은가?”
“네?”
“대놓고 습격해올 거라는 걸 저렇게 말해주니 말이야. 나였다면 웃는 얼굴로 방심시킨 후. 숨통을 노렸을 텐데.”
이게 바로 명예로운 살인예고 뭐 그런건가? 무식한 기사 새끼들답군.
벨로크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제서야 주인이 말하는 바를 알아차린 아델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동료 살해죄는 중죄가 아닙니까. 진짜로 올까요?”
벨로크는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이지. 그들에게 그런 머리가 있었다면 우리를 건드리지도 않았을 거야. 무식하면 용감하거든.”
아까 전 두 기사의 눈빛은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았다. 아마 백이면 백 올 것이다. 그리고 언제쯤 올 것인지도 대략 짐작이 간다. 아마 그들이 임무를 완수했을 때겠지.
공적은 가로채고 방해물도 제거하고, 일석이조가 아닌가.
습격을 해올 것이란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감이 넘치는 벨로크의 모습에 아델이 손을 꽈악 잡았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했다.
뻔히 상대의 함정이란 것을 알면서도 정면돌파를 택하다니. 하지만 아델은 어째선지 이 선택이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만이 아닌 용기’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자신의 주인에게는 있었다. 종자인 자신은 그저 보필할 뿐.
“대비를 해야겠군요.”
“하수도에 들어가면 우리 둘을 제외하고는 아군은 없다고 생각해라. 생각해보니 용병 놈들도 믿을 게 못 되겠군. 놈들이 어디서부터 손을 써놓았을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벨로크가 어깨를 툭 쳐주고는 어느새 도착한 술집의 문을 걷어찼다.
콰앙
고약한 알콜냄새와 음식 찌꺼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빈 병들이 아무렇게나 널린 테이블에는 만취했거나 얼굴이 시시각각 뻘개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공통점은 하나. 다들 어딘가에 흉터가 몇 개씩은 있고 인상이 더럽게 생겼다는 것.
흔하디흔한 용병들의 모습이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용병들이 하나 둘 입을 열었다.
“뭐냐? 요란하게도 등장하시는군.”
“네놈들은 누군데···”
벨로크는 그들의 말을 무시한 채 품속에 있는 양피지를 하나 꺼내 들었다.
로벤 영주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였다.
“지하수도의 지리를 잘 아는 놈을 한 명 모집한다. 나는 벨로크 하이네. 로벤 영주님의 칙령을 받고 움직이는 기사다.”
“뭐? 영주의 일이라고?”
“난 저 문양을 알아. 진짜다.”
황금 곡괭이 문양을 알아본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도시를 다스리는 지배자의 의뢰. 곧 이어 돈 냄새를 맡은 용병들이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벨로크가 바닥을 한 번 쿵 찍었다. 나무 바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다.
주방에서 컵을 닦고 있던 주인이 울상을 짓고 용병들의 시선이 다시 집중되었다.
벨로크가 품에서 금붙이를 하나 꺼냈다. 반짝이는 그 광채에 용병들이 입을 헤 벌렸다.
“보수는 금화 한 개. 길 안내만 맡아주면 된다. 지원할 사람 없나?”
안내치고는 어마어마한 보수.
용병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손을 들고 어필을 시작했다. 말만 들어서는 미궁에서도 길을 찾을 정도로 대단한 길잡이들이 즐비했다.
용병들이란 으레 그랬다. 약간의 실력과 입담 그리고 허세로 먹고사는 놈들이 태반 이었다.
그 열광적인 성원에 아델이 약간 기가질렸다. 그리고는 대체 누구를 뽑아야 하나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벨로크는 도처에 있는 용병들 중에서 한 녀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거대한 덩치에 온 몸을 덮은 털복숭이의 사내.
벨로크는 그를 안다. 그는 아직 자신을 모르겠지만,
‘설마하니 저자가 여기에 있을 줄이야. 이거 일이 쉬워지겠군.’
벨로크가 씨익 웃으며 털복숭이를 손가락으로 콕 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