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야만의 시대
“겨···경! 이런 시···끄아악.”
참지 못한 거스트가 비명을 내지르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어떻게든 손을 빼기 위함이다.
벨로크는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자신과 부하를 욕보인 대가를 톡톡히 받을 생각이었다.
그는 거스트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신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도 나도 반갑소! 경! 하하하.”
멀리서 본다면 영락없이 사이좋은 기사들의 친목 다짐으로 보였다.
이를 본 토착세력과 신진세력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저럴 새끼들이 아닌데. 이상하다. 왜 저러지?
뿌득. 마침내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악!”
손이 작살난 거스트가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소리는 때마침 악단의 유쾌한 연주에 묻혀버렸다. 그제서야 벨로크가 거스트의 손을 놓아주었다.
“흐으, 흐아아아.”
거스트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자신의 손을 살폈다.
대롱
마치 슬라임처럼 흐물거렸다. 그는 고통과 공포가 섞인 얼굴로 벨로크를 올려다보았다.
이 내가 힘으로 밀린다고? 버본을 물리친 게 요행이 아니었단 말인가?
“경?”
옆에서 말콤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벨로크는 씨익 웃으면서 그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잠시 후.
뿌득
“아아악!”
말콤또한 한쪽 손이 아작나버렸다. 눈물 콧물을 질질 짜는 두 기사에게 다가간 벨로크가 조용히 속삭였다.
“다시는 나와 내 종자를 건드리지 마시오. 남은 한쪽 손마저 보존하고 싶다면 말이오.”
서슬 퍼런 그 목소리에 두 기사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둘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소이다. 우리가, 우리가 잘못했소.”
“그렇다면 저 얼간이들부터 빨리 치워야 할 거요.”
벨로크가 종자들을 고갯짓했다. 녀석들은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에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새 아델에게 시비를 거는 것도 멈춘 그들은 똥 마려운 개처럼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거스트와 말콤이 종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놈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거스트 님. 어째서···”
“이익. 시끄럽다! 가자!”
둘은 아픈 손을 부여잡으며 종자들을 끌고 연회장의 구석으로 향했다. 당장에 의원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둘은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이를 참았다.
성주의 명으로 소집된 자리다. 함부로 이탈하면 성주의 심리를 거스르게 될 터. 둘은 고통을 잊기 위해서 연신 독한 술을 입에 댔다.
벨로크는 그 꼴을 보면서 웃었다. 능력도 없는 것들이 꼴값 떠는 것만큼 보기 싫은 것은 없었으니까. 옆에서 아델이 다가왔다. 그녀의 입가에도 슬쩍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무슨 수를 쓰신 게지요?”
“별 같잖은 놈들이 으스대기에 손을 부러트려주었지. 아마 당분간 검을 쥐기 힘들 것이다. 괜찮으냐?”
“물론입니다. 이 정도 쯤이야. 얼마든지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글쎄. 아까 전의 행동으로 보면 당장에 검을 뽑을 기세던데. 벨로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이내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하지만 아델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렇지만··· 혹여 놈들이 앙심을 품지는 않을까요?”
“저 치들이?.”
“성주에게 고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아무리 공을 세워서 자리를 얻었다 한들. 저들은 오랫동안 성주를 보필한 자들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을 수도 있지 않을지···”
부하의 우려에 벨로크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듯한 말이긴 한데. 그건 기사라는 족속들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허황된 명예와 자존심만 넘쳐나는 것들.
벨로크가 차갑게 말했다.
“제 치부를 자기 스스로 어떻게 드러낸단 말이냐.”
기사 둘이서 신입 한 명을 교육시켜주러 갔다가 되려 털렸다. 그것도 성주가 그를 위해서 베푼 연회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성주를 보필한 자들이라고 해도 신임을 잃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설령 자존심을 버려가며 말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몇 달 후면 로벤을 떠날 생각이니까.
‘비바람을 피하기 위한 잠깐의 둥지일 뿐.’
벨로크의 호언장담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그렇다면 그런거다. 단 한 번도 그 선택이 틀린적이 없으니까.
둘은 걱정을 잊고 다시금 먹고 즐겼다. 아까 자리를 비켰던 신진세력들이 다시 다가왔다. 그러면서 방금 전의 상황을 물었다.
“경. 거스트 저놈이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명예와는 거리가 먼 자들입니다. 오만하며 비겁하기 까지 하죠. 조심하셔야 됩니다.”
놈들이 다가오자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던 놈들이 입만 살았군. 박쥐 같은 놈들.
하지만 대놓고 뭐라 할 필요는 없다. 쓸데없이 적을 늘릴 필요는 없으니까.
사회생활은 이곳이나 저곳이나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벨로크가 차갑게 웃으며 대충 대꾸했다.
그 순간.
주위에 있던 신진세력이 또다시 웅성거렸다. 급변한 분위기에 벨로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는 정말이지 귀찮았다. 또 어떤 새끼야. 하지만 이번에는 무시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반가워요. 경.”
여리여리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벨로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술잔 하나를 들고 다가온 베로니카가 보였다. 신진세력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베로니카 님을 뵙습니다.”
“오늘도 정말이지 아름다우십니다.”
베로니카는 지배자의 딸답게 능숙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물렸다. 그리고는 벨로크에게 가까이 붙었다.
나이답지 않은 진득한 향수 냄새와 함께 얄상한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성숙해 보이고 싶은 건가?
“경. 내 궁금증을 해소시켜주지 않겠나요?”
“무엇을?”
“강철도끼 버본을 죽인 그 업적을 말이에요.”
성주의 어린 딸은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이 나이대의 소녀들이 좋아하는 로맨스.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같은 기사 이야기.
그것을 얼굴도 준수한 흑발 청년에게 직접 듣고 싶은 모양이다.
벨로크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권력자들의 연회가 그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자리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인맥 다툼의 장이자 상관에게 아부도 해야 했다. 그리고 적대하는 자들과의 만남도 해야 했다.
기사란 직업은 생각보다 피곤했다. 그저 잘 싸우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치적인 상황까지도 고려를 해야 했다.
‘지치는군,’
요 며칠.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당연했다. 눈앞의 소녀는 이 도시를 지배하는 권력자의 딸이니까.
“아가씨께서 듣기에는 조금 잔인한 얘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호호호. 경. 나를 너무 어리게만 보지 말아주세요.”
“바라시는 대로.”
벨로크가 과장스럽게 손짓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온갖 문물을 접해 본 21세기 현대인의 입담이다.
성주의 어린 딸은 곧 꺄르륵 웃으면서 손뼉을 쳤다. 화기애애한 둘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기사와 공주 같았다.
부임하자마자 성주의 딸에게 저런 관심을 받다니. 시기와 질투 선망 등의 감정이 연회장에 가득 찼다. 그중에서 가관은 거스트 일행이었다.
손봐주려던 놈에게 되려 당하고 권력자의 관심까지 가져가 버렸으니까. 특히나 말콤의 표정은 연인을 빼앗긴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베로니카를 몰래 흠모했기에.
뿌드득
말콤이 이를 악물었다.
‘네까짓 놈이··· 감히 아가씨를 넘봐?’
그가 덜렁거리는 팔을 부여잡은 채 둘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거스트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지금 끼어들어봤자 좋을 것 없네.”
“하지만···경!”
말콤이 고개를 팍 돌려서 거스트를 바라봤다. 젊은이의 치기 어린 질투가 얼굴에 가득했다.
쯧. 이런 새끼도 기사라고. 하지만 말 잘 듣는 부하는 언제나 필요하다. 거스트가 속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때를 기다리세나. 놈은 분명 대단한 기사지만 싸움이라는 것이 꼭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방법은 많았다.
독살이라든지 영외 임무를 나갔을 때 함정에 빠트린다던지. 암살자를 고용한다던지 말이다. 둘은 그것을 실행에 옮길 만큼의 결단력과 세력이 있었다.
거스트가 비열하게 웃었다. 그 의도를 알아차린 말콤이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거스트가 슬쩍 웃다가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벨로크에게 당한 손이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어찌나 강하게 비튼건지 손 안의 뼈가 산산조각났다. 몇 주간은 요양에 전념해야 할 정도의 부상.
‘젠장할. 이 빚은 비싸게 먹힐 거다. 검은 머리. 두고 보자고.’
둘이 스산하게 눈을 빛내며 벨로크를 주시했다.
“아델. 검이 뭐라고 생각하지?”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며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틀에 박힌 말 집어치우고.”
주인이 심드렁하게 답하자 아델이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는 검을 휘두르면서 말했다.
“제 몸을 지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녀는 강함에 집착하며 나약한 자들을 경멸했다. 전부 다 과거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힘없는 소녀가 전란의 시대에서 살아가는 것은 매우 가혹했으니까.
부웅
연무장에서 둘의 고요한 대화 소리와 함께 날붙이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벨로크는 몸을 움직여서 아델의 자세를 교정해주며 말했다.
“검술. 거창한 비기나 오의 같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 근본은 살인기술이다. 어떻게 하면 상대의 검을 받아내고 상대를 찌를 수 있느냐. 나는 상처 입지 않고 상대를 상처입힐 수 있는가? 원리는 단순하지.”
“요컨대 안 맞고 잘 휘둘러야 한다는 거군요.”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벤에 정착한 지 몇 주가 지났다.
무역도시답게 이곳은 컸으며 또한 지저분했다. 보기 힘든 이종족들도 곧잘 보였다.
마치 거대한 물류창고를 보는 것 같다고 벨로크는 생각했다.
전쟁의 여파로 인해 병사들과 기사들이 줄어서 그런가. 벨로크와 아델은 영지의 치안을 살핀다는 명목으로 순찰을 나가기도 했다. 경비병들은 물론 신참기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군권을 틀어쥐고 있는 거스트와 말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탓이다. 벨로크가 기어오르는 경비병 몇의 팔다리를 부러트려 준 것만 빼면은 이곳 생활은 평화로웠다.
벨로크는 그 나름대로의 정서적인 안정과 가진 능력 등을 다듬으며 중세랜드 세계에 적응해나갔다. 꼭 전투기술만이 아닌 사교술이나 춤, 체스 같은 교양적인 부분에서도 말이다.
아델은 처음에 바뀐 주인의 성격에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많이 바뀐 것도 아니었다.
그저 더 신중해졌고, 더 다정해졌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하등 나쁠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 평화로운 생활이 말이다. 그녀가 남몰래 미소지었다.
“검 끝이 흔들리는군.”
“아. 죄송합니다!”
이런 멍청이. 훈련 중에 딴 생각이라니. 네가 이러고도 벨로크 님의 종자인가.
아델이 머리를 흔들면서 다시금 집중했다. 눈동자가 가라앉고 떨리던 검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명심해라. 아델. 휘두르기나 찌르기만이 능사가 아니다. 손잡이로 상대의 검날을 비틀거나 폼멜로 가격할 수도 있지. 전투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다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벨로크가 옆에서 시범을 보였다.
아델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그 모든 것을 보고 배웠다. 순식간에 고요했던 연무장 안에 열기가 가득 찼다. 그 순간.
끼이익
문이 열리며 노령의 집사가 들어왔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그가 용건을 말했다.
“벨로크 경. 영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영주께서?”
벨로크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이건 미래에 없던 일이다.
전회차도 전전회차에서도 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영지에서 놀고먹으며 재정비를 했었다.
집사가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아마 긴히 맡기실 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음. 알겠네.”
“다녀오십시오.”
벨로크는 꾸벅 고개를 숙이는 아델을 툭툭 쳐준 다음 집사를 따라서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로벤 영주가 집무실에 앉아서 서류 더미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아. 왔나? 앉게나. 경.”
벨로크가 묵례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로벤 영주는 벨로크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도장을 찍어대며 말했다.
“영주라는 직함은 참 바쁘다네. 하나같이 내 눈이 닿지 않으면은 어디선가 무언가 새어나가기 일수거든.”
로벤 영주가 피곤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손목은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한참 동안 집무실에는 쿵쿵거리며 도장 찍는 소리만 들려왔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이제 곧 퀘스트가 뜰 것만 같은 분위기로군.
속으로 생각하던 벨로크가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로벤 영주가 마침내 서류 더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벨로크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자네. 혹시 사교도라고 알고 있나?”
올려버린 난이도 덕에 미래가 바뀌었다.
아무래도 히든 퀘스트가 떠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