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야만의 시대
벨로크는 시선을 돌렸다. 스킬창 옆에 자그마한 스텟들도 몇 개 보였다.
힘과 체력.
단순한 육체 관련 스텟들.
흠. 잠깐 고민하던 벨로크는 포인트를 힘에 투자했다. 그러자 원래 강력했던 손아귀의 힘이 한층 더 강해진 것을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숫자 하나를 올렸을 뿐인데, 아까 전 버본과의 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만큼.
“오.”
벨로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시스템 창이 이 땅을 헤처나갈 큰힘이 되리라는 것을.
게임과는 다른 디테일, 좀 더 상세한 설명과 떠오르는 이미지.
이것 참 신기하군. 벨로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면속 세계를 탐험했다.
그 때.
“아직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저희가 정녕 로벤에 정착하는 겁니까?”
아델의 들뜬 목소리에 벨로크의 상념이 깨졌다.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뜨자. 깔끔하게 올려 묶은 검은 머리칼에 여리한 목선이 돋보였다.
처음 입는 드레스가 어색한지. 아델은 방에 비치 된 거울을 보면서 연신 옷매무새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벨로크가 파티용 의복을 점검하며 피식 웃었다. 모시는 주인의 지위 상승은 곧 종자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친다.
자유기사와 정식기사의 발언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지사. 아델이 좋아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그녀가 벨로크에게 거둬진 이후부터의 2년간 정말 갖은 고생을 했으니까.
지금 머릿속에는 꽃밭이 한가득일 것이다. 곧 있을 연회가 기대되는 것인지 그녀는 눈동자를 빛내며 연신 말을 이었다.
“이번 연회에 영주 부녀를 제외한 휘하 두 기사들도 온다고 하는데. 그래봤자 벨로크 님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자들일 겁니다. 겁쟁이처럼 도망만 치면서 성문도 못 뚫었으니 말이죠.”
그녀는 한편 다른 곳의 성문 돌파를 담당했던 기사들을 힐난했다.
벨로크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리한데?
녀석들은 정말 별것 아닌 놈들이 맞다.
그가 알기로는 오래전부터 영주를 모셔왔기에 성주가 애정으로 품는 녀석들.
실력보다는 연줄로 기사가 된 자들. 이름이··· 기억도 안 나는군. 워낙 조연들이어야지.
벨로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를 과대평가 하는구나. 아델.”
생각과 달리 나오는 말은 겸양. 현대인으로서 살아가던 때 자신의 습관.
“푸후.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벨로크 님이 아니었다면 베이츠를 함락시키는데 몇 주는 더 걸렸을 겁니다.”
그녀가 주인의 용병술과 용맹 그리고 기개를 칭송했다.
벨로크는 분명 자신의 기억 속에서 자신이 한 일이건만 어째선지 낯간지러워졌다.
그래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분명 텃세가 심할 테지요. 하지만 실력으로 증명해 보이면 될 겁니다.”
똑똑한 종자는 벌써 미래의 상황까지 읽고 있었다.
그녀가 주먹을 꽈악 쥐었다. 여리여리한 몸 위로 탄탄한 근육과 핏줄이 불끈 섰다.
그제서야 벨로크는 어째서 아델이 왜 저렇게 말을 많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름의 긴장 해소법이었다.
똑똑
“벨로크 경. 시간이 되었기에 모시러 왔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집사의 목소리에 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성의 중앙에 위치한 넓은 홀. 연회는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무역도시 로벤의 재력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붉은 융단이 깔린 바닥과 함께 식탁 위에는 호화로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구운 칠면조와 돼지고기 위에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는 향신료가 잔뜩 뿌려져 있었고, 오래도록 숙성된 포도주에서는 깊은 향이 그윽했다.
악단도 불렀는지 경쾌한 음악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홀 안에는 영지 안에서 콧방귀 좀 낀다 하는 사람들은 다 모여있었다.
내정을 책임지는 서기관과 영주의 조언자인 책사를 비롯해서 아델이 말했던 무력을 담당하는 두 기사와 그들의 종자들.
그 밖에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한가득 있었다.
수많은 가신들 중. 제일 상석에 위치해있던 로벤 영주는 당연 눈에 띠었다.
그가 하하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새로운 나의 검께서 오셨군. 잘 오셨소. 벨로크 경.”
그의 옆에는 앳된 끼가 조금 남아있는 여인이 한 명 서 있었다.
뚱뚱한 영주의 외관과는 전혀 다른 미인상의 얼굴. 하지만 벨로크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성주의 딸임을.
‘이름이 뭐였더라. 베로니카였나. 분명 로벤이 함락되고 노예로서 비참한 생활을···’
벨로크가 머릿속을 뒤적거리는 동안. 아델이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벨로크 님. 성주의 앞입니다."
‘아차.’
벨로크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영주님.”
“허허. 내 딸의 얼굴이 눈을 못 뗄 정도이기는 하지.”
젊은 기사가 딸의 미모에 정신이 팔렸다고 생각한 영주가 슬쩍 웃었다.
피붙이들이 칭찬받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법. 성주는 너그러이 그의 실수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반가워요. 고명하신 기사님. 베로니카에요.”
베로키나의 소개에 벨로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부녀와 잠깐의 인사치례가 끝났다. 영주가 잔을 높이 치켜올렸다.
“자. 시작하지! 오늘 하루는 모두들 먹고 즐겨들 주시게.”
영주는 축사를 하고는 잠깐 앉아있다가 곧 자리를 비웠다. 상석에는 곧 그의 딸만이 홀로 남았다.
“로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벨로크 경. 저는··· “
“벨로크 경. 버본을 무찌른 그 업적을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만.”
다양한 사람들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그들 대부분은 벨로크처럼 영지에 정착하지 얼마 안된 이를테면 신흥세력 들이었다.
속셈이 뻔히 보였다. 어떻게든 그들끼리 단결해서 오래 묵은 토착 세력들을 밀어내자 이거였다.
‘어디를 가도 밥그릇 싸움.’
벨로크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건 21세기나 이곳 중세시대나 별 다를 건 없었다. 벨로크는 그들에게 적당히 대꾸해주면서 먹고 마셨다.
어디서도 쉽게 보기 힘든 호화로운 음식 들이었지만, 각양각색의 조미료 맛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는 싸구려 햄버거 하나보다 맛이 없었다.
젠장. 이곳을 탈출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군.
벨로크가 한탄했다.
“국밥 먹고 싶다.”
“벨로크 님. 그건 또 무슨 음식입니까?”
주인의 옆에서 격식을 잃지 않게 그러나 미친 듯이 고기를 뜯어 먹던 아델이 물었다.
“한 그릇만 먹어도 배가 터질 것처럼 든든하며 몸 안 가득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신의 음식.”
“마법같은 음식이군요. 저도 꼭 먹어보고 싶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해주마.”
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며 놀고 있을 때. 일단의 무리들이 다가왔다. 그러자 벨로크의 곁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이를 보고 씨익 미소지은 붉은 머리 남자가 자신감 넘치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일부러 어깨를 부딪쳐왔다. 그 속도가 제법 빨랐다.
“어이쿠. 실례.”
하지만 대비하고 있던 벨로크는 슬쩍 뒷걸음질 친 것만으로 이를 피했다.
“실례랄 것도 없지.”
벨로크가 태연하게 답했다. 목표를 잃은 남자가 비틀거렸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욱하며 입을 열려는 순간.
콧수염을 기른 남자 한 명이 또 다가왔다.
그가 붉은 머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말콤 경. 많이 취한 모양이군. 괜찮소?”
“괘··· 괜찮습니다. 거스트 경.”
“내가 대신 사과하리다. 새로운 기사의 등장에 이 친구가 많이 흥분했던 것 같소.”
“괜찮소. 딱히 피해 본 것도 없고.”
아직까지는 벨로크가 속으로 생각하며 난입한 두 명의 남자를 주시했다. 붉은 머리의 애송이 하나와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 하나.
말콤과 거스트.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고는 하나. 제법 단련된 몸뚱이들을 가진 것. 그리고 뒤에 종자들을 끌고 있다는 것.
‘이 새끼들이군.’
아델이 말했던 무능한 두 기사. 게임 속에서도 지나가는 먼지와 같은 자들이자 로벤의 토착세력. 벨로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연회장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이벤트가 있었지.’
아주 작은 헤프닝 같은 사건이라 잊고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거슬렸을 것이다.
둘이서도 공략 못 하던 성을 자유기사인 그가 단신으로 공략했으며, 악명 높은 적의 기사도 분쇄했다. 성주의 총애가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이 두려웠으리라.
어디서나 있는 알력다툼에 벨로크가 끼인 것이다.
거스트가 말했다.
“버본을 무찌른 위명 익히 들었소. 경.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텐데.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찾아왔소이다. 거스트라고 하오.”
거스트가 악수를 청해왔다. 하지만 벨로크는 그를 무시하며 뒤를 슬쩍 바라봤다.
어느순간 말콤과 거스트의 종자들이 아델을 둘러싸고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청력을 집중하자. 천박한 말들이 들려왔다.
“여인의 몸으로 종자 생활이라니. 어렵지 않습니까?”
“혹시 몸으로 그 자리를 따낸 것은 아닌가.”
“하하하. 농이 지나치군요. 샌슨. 아무리 근본 없는 떠돌이의 종자라고 해도···”
아델은 눈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종자들의 말을 무시했다.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대처였지만 주인에게 폐를 끼치기 싫은 종자는 일단 참고 인내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노로 인해 양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건 막지 못했다.
‘이 새끼들이···’
그 상황을 지켜본 벨로크의 이마에 힘줄이 비죽 솟았다.
하찮은 도발이었지만 아끼던 부하가 욕보이자. 그를 분노케 하기에는 충분했다.
종자 새끼들끼리 대범하게 저럴 리는 없고. 보나 마나 눈앞의 콧수염이 시킨 짓이겠지.
얕지만 더러운 수. 이를 해낸 거스트가 느물거리며 말했다.
“경. 내 손이 허전하구려. 어서 보듬어주시지 않겠소?”
눈앞에서 거스트가 큼직한 손을 장난스레 흔들었다. 벨로크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았다.
꽈아악 거스트의 손아귀에 핏줄이 한가득 돋았다. 그가 씨익 미소지었다.
‘걸렸구나.’
거스트는 비겁하고 몸을 사리기는 했지만, 완력으로는 로벤에서 제일가는 남자였다.
그는 이대로 저 애송이의 손을 분질러 줄 생각이었다.
‘보나마나 버본 놈도 용병들이랑 협공해서 죽였겠지.’
전장에서의 활약상이란 으레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병사 하나를 죽여도 수십을 죽였다고 부풀리는 것이다.
거스트는 벨로크가 버본을 죽인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구겨진 체면도 펼 겸 이 젊은 기사에게 시비를 걸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연회에서 막 서임 받은 기사가 울부짖는 모습은 보기 좋은 구경거리가 되리라. 게다가 재활을 위해 당분간 검을 못 잡으면 성주의 총애도 사그라들터.
비열하게 웃은 거스트가 힘을 꾹 주었다. 하지만 상대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응?’
이상하다. 지금쯤이면 비명이 나와야 할 텐데.
의아한 생각을 한 채 벨로크를 쳐다보자. 녀석 역시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무지막지한 힘이 거스트의 손을 강타했다.
뿌드득
“끄윽.”
스텟 포인트를 투자해서 한층 더 강력해진 벨로크의 악력이 힘을 발휘했다.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거스트가 얼굴을 부들거리며 신음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마지막 자존심을 끌어모아 간신히 웃는 낯을 유지했다.
눈앞의 쇼에 벨로크가 코웃음을 쳤다. 포커페이스 하나는 인정해줘야겠군.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벨로크가 손아귀에 힘을 더욱 강하게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