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3화 (3/222)

3

야만의 시대

그녀는 용병들을 독려하며 나가서 싸우라고 걷어찼다. 그럼에도 용병들은 좋다구나 하고 거칠게 뛰어나갔다.

와아아아

로벤 측 용병들이 겁에 질린 적들의 등 뒤에 칼을 꽂았다.

배를 뚫린 적군 하나가 피를 토하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용병은 희번득 거리는 눈으로 죽은 녀석의 품을 뒤적거렸다.

동화와 은화 몇 개가 나왔다.

용병이 낄낄거리며 녀석의 무구도 벗기기 시작했다.

그 때 다른 용병 하나가 그런 녀석의 머리를 으깨버렸다. 그리고는 두 녀석의 시체를 뒤적거렸다.

목이 날아가고, 다리가 날아갔다. 피 묻은 동전들이 하늘을 날았다.

아귀 같은 용병들은 어느 누구라도 할 것 없이 그 속에서 동전을 집으려 몸을 날렸다.

아비규환.

온갖 더러운 탐욕이 이곳에 집약되어 있었다.

“진짜 전쟁.”

벨로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현대인인 자신이었다면 당장에 구토를 하며 도망칠 만큼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몸과 기억이 융합된 지금은 그저 담담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한 건 현대인으로서 살아왔던 감정이 살아있기 때문인가.

그 때.

“벨로크 님.”

어느새 다가온 아델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는 벨로크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오늘따라 평소답지 않으십니다. 어디 다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갈색 빛이 감도는 종자의 눈동자에는 주인에 대한 믿음과 감탄 마지막으로 걱정 세 가지 감정이 다채롭게 섞여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충실했다.

당장에 나가서 적들의 목을 베고 업적을 쌓는 것 대신 주인을 보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충실한 종자 아델. 이곳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내 편.

그 다정함에 벨로크는 긴장이 풀려서 피식 웃었다. 그래도 아주 최악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조금은 기사를 선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미인 부하도 생기고 말이다. 벨로크가 슬쩍 미소 지었다.

“괜찮다. 그저 조금... 피곤하군.”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그러면 보필하겠습니다.”

걱정스레 벨로크를 보던 아델이 환하게 웃으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벨로크는 미소 짓던 얼굴 그대로 굳었다.

아니, 피곤하다니까? 이러면 보통 쉬게 한다거나 그런 것 아닌가?

“길을 뚫겠습니다. 성주의 목을 천한 용병 놈들에게 줄 수는 없지요. 아 참. 그전에.”

아델은 그런 주인의 바람은 무시한 채 어딘가로 향했다.

찌거걱

뼈와 살이 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나타난 그녀의 손에는 다 찌그러진 주전자 머리가 하나 들려있었다.

아델이 버본의 머리통을 보따리에 싸면서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전리품을 까먹을 뻔 했군요. 가시죠!”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 후.

길고 길었던 전쟁이 끝났다.

기사란 무엇인가.

어릴 때부터 온갖 살인 무술을 단련해온 인간병기.

명예를 누구보다 끔찍이 여기며 약자와 레이디를 보호하는 기사도를 미덕으로 삼는 자들.

모시는 주군에게 충성하며 전장의 일선을 휘젓는 사관.

글쎄. 이러한 입발린 말들은 결국 다 기득권층인 자신들을 보기 좋게 포장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기사들은 그저 자신들의 무력을 권력자에게 팔아서 돈을 버는 장사치들일 뿐이다. 이런 직업에 명예 따위가 어디 있단 말인가.

벨로크가 속으로 비웃었다.

한순간에 살던 세상이 바뀌고 가치관도 달라진 세상이 도래했다.

하지만 그저 조소만 날릴 뿐이다. 일개 개인이 나서서 뭔가를 바꿀 수가 없었으니까.

아니꼽고 더러웠지만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가 이 중세랜드에 맞출 수밖에.

벨로크는 생각했다.

이 좆같은 게임에서 나갈 때 까지. 잘난 기사 행세를 해주겠다고.

베이츠는 결국 함락당했다.

성주는 무사히 몸을 빼냈지만, 그의 통치를 받던 마을은 무참히 짓밟혔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사내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여성들은 성난 용병들에 의해 강간당했다.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벨로크의 앞에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로벤의 영주가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박수를 쳤다. 무척이나 경쾌하게.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사정 따위 고려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리고 진짜 기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벨로크 또한 그렇게 행동해야 했다.

“훌륭하오. 벨로크 경. 경이 대단한 기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그 버본을 무찌를 줄은 몰랐소.”

“과찬이십니다. 영주님.”

벨로크는 오만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게 말을 받았다.

영주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강철도끼 버본은 이 근방에서도 알아주는 기사일세. 그런 자를 쓰러뜨린 자가 이렇게 젊은 기사일 줄 그 누가 알았겠나.”

전장에서 공을 세웠으면 논공행상을 하는 것은 당연.

용병들은 계약한 일자만큼의 황금을 받았으며 기사인 벨로크는 영주가 일대일로 불러서 치하하고 있었다.

한 영지를 다스리는 권력자가 굳이 이렇게 정성을 들이는 이유.

벨로크는 쉽게 짐작이 갔다. 이 게임을 할 때도 여러 번 봐온 광경이기도 하니까.

“용맹한 기사에게는 그에 걸맞은 포상이 필요한 법.”

로벤 영주가 고개를 까딱이자 곁에 시립 해있던 집사가 주머니 하나를 공손히 건넸다. 벨로크가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주머니를 받았다. 묵직했다.

“세어보셔도 좋소. 내 섭섭지 않게 넣었으니.”

하지만 벨로크는 고개를 저으며 주머니를 품에 갈무리했다.

“영주께서 어지간히 넣어주셨겠지요. 괜찮습니다.”

‘금화 서른 닢에 은화 열다 섯 닢 정도 넣어줬겠지. 부유해서 그런가? 어마어마한 액수다.’

벨로크가 동전을 안 세어 본 이유는 별것 없었다. 게임 속에서 본 광경으로서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를 모르는 영주는 눈앞의 기사가 더 마음에 들었다.

재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절제된 행동. 실로 명예로운 기사가 아닌가.

영주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벨로크 경. 내가 그대를 따로 부른 이유를 아시겠소?”

“잘 모르겠군요.”

벨로크는 일부러 시치미를 뗐다.

영주기 집사에게 눈짓하자 집사가 잔 하나와 포도주 한 병을 꺼내왔다.

쪼르륵 피처럼 붉은 술을 따른 집사가 영주에게 공손히 잔을 건넸다.

로벤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한탄하듯 말했다.

“바깥에는 악마와 괴물들이 날뛰고 있으며 탐욕에 눈이 먼 인간들은 눈이 돌아간 채 서로 죽이고 있네. 지금은 그야말로 혼란과 전란의 시대라고 할 수 있지.”

가만히 있던 베이츠 영지에게 먼저 시비를 걸고 습격한 로벤 영주의 입에서 듣기에는 아니꼬운 말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곳에서는 힘 있는 자가 곧 왕이었다.

벨로크가 묵묵히 듣고 있자. 로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게 무엇일 거 같은가? 그래, 바로 무력과 황금이라네. 다행히 나는 무역도시 로벤의 수장이지. 황금은 넘쳐날 정도로 가지고 있다네. 나는 힘이 필요해. 어중이떠중이 같은 용병들이 아닌, 실력 있는 기사가 말이야.”

“그 말씀은.”

“벨로크 경. 자네는 꽤나 오랫동안 떠돌아다녔다고 들었네. 이제 한곳에 정착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번 전쟁으로 인해 로벤 영주는 많은 것을 얻는 동시에 잃었다. 새로운 땅과 노예들, 황금을 얻었지만, 충성스러운 병사와 기사들을 잃은 것이다.

잃어버린 것은 채워넣어야 한다. 하물며 자신 휘하에 있던 기사들 대부분을 죽인 그 버본을 물리친 기사다. 더더욱 탐이 났다.

로벤이 양손을 스윽 잡으면서 말했다. 그 어투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영입 제안.

이를 받아들이면 벨로크와 아델은 더 이상 떠돌이가 아닌, 로벤 영내에 거주하며 영주로부터 녹봉을 받고 살 수 있다.

안정된 직장과 거주지를 동시에 얻는 것이다.

로벤은 무역도시로 이름 높은 황금 같은 땅.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

보통의 떠돌이 기사 같았으면 좋다구나 하며 바로 수락했을 것이다.

실제로 게임 속 캐릭터 벨로크는 몸을 의탁하려고 이번 전쟁에 참가했으니까.

하지만 현대인과 융합된 그는 망설였다.

이 게임의 엔딩을 본 자신은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어차피 몇 달 후에 로벤 영지 또한 함락당한다. 다른 영지들의 협공에 의해서.’

로벤 영주의 욕심이 과했던 게 탓이었다.

베이츠 영지를 함락시키기 위해 푼 황금의 저력에 위기감을 느낀 다른 영지들이 연합한 것이다. 그 안에는 살아남아 비수의 칼날을 갈아온 베이츠 성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베이츠와의 전쟁으로 인해 약화되어있던 로벤은 당연히 이를 막지 못한다.

수많은 기사와 병사 용병들이 습격했다. 도시는 불타오르고 영주는 목이 잘렸다.

플레이어였을 때 아무리 동분서주해도 막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해일.

로벤은 침몰하는 배다.

‘그렇다고 해도.’

이 제안을 함부로 거절할 수도 없다. 로벤 영주는 자비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가차 없이 선공을 취할 만큼 호전적이며 자존심이 강한 귀족이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떠돌이 기사에게 모욕받았다고 느낀 로벤 영주가 벨로크와 아델을 죽이기 위해 병사들을 보낸다.

그 속에는 경쟁자에게 실력 있는 기사를 뺏기는 걸 막기 위한 조치도 있었다.

벨로크는 고민했다.

그냥 처음부터 버본을 죽이지 않고 전장을 이탈할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다간 일이 더 꼬였을 것이다.

당장 노상에 돈 한 푼 없이 떨어지는 상황이 되니까. 이 세계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가만···

벨로크의 머릿속으로 괜찮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그래. 어차피 망할 곳이라면 받을 것만 받고 떠나면 되지 않나?’

적당히 일 좀 해주다가 도망친다.

기사의 명예와는 거리가 먼 박쥐 같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벨로크는 날 때부터 기사가 아니었다. 21세기 현대인이었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는 것이다.

“벨로크 경? 내 제안이 그렇게 고민할 만큼 별로인가?”

망설임이 길어지자. 방금 전까지 미소 짓고 있던 로벤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쳤다.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뜻. 표정이 쉴 틈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소름 끼쳤다.

“아닙니다. 영주님. 잠시 현실감이 없어서...”

“하하하.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자네라면 이 로벤의 검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네. 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대답은?”

벨로크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제부터 제 검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 말에 로벤이 찌푸렸던 인상을 피며 다시 와하하 웃었다. 그리고는 벨로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좋아, 좋아. 벨로크 경. 환영하네! 오늘 밤 자네 서임식 겸 축하 연회를 열겠네. 준비 단단히 해두게나.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마셔야 할 테니.”

“영광입니다.”

레벨업이라니.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버본과의 격렬한 전투가 끝나고 느닷없이 보이는 문자와 차오르던 고양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처음에 자신이 미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기사의 검술] Lv4 [꺼지지 않는 투지] Lv2

잔여 스킬포인트 : 1

자신의 내면속에 게임시스템 창 같은 것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이런 건 모니터 밖에서나 보는 건 줄 알았는데. 눈앞에서 직접 보니까 조금 낯설군.

정확히 말하자면 임의대로 수치화한 능력 그래프를 느낀다는 표현에 가까웠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뭐가 됐든 지금 자신에게는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벨로크는 보이는 항목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우선 검술.

처음 시작이 검술 레벨4. 세계관을 기준으로  볼때. 일반적인 기사들의 검술 레벨이 2였다. 반면에 이 육체는 검술로만 따지면 그들의 두 배.

달인급이었다.

이토록 젊은 나이에 범인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재능의 영역.

영웅이 될 자질을 가진 기사의 몸뚱이라더니 난 놈은 난 놈이다.

검술 스킬에 집중하자. 자동적으로 수 십 가지의 검형이 떠올랐다. 일전 버본을 무찌른 그 비술도.

‘빗겨치기’

검 면으로 상대의 무기를 쳐서 그 궤적을 바꾸는 기술. 말은 쉽지,

정신없는 전투 와중 명확한 타이밍과 힘으로 특정 지점을 쳐내야 했다.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기술.

하지만 벨로크는 단순히 스킬포인트를 투자하는 것 만으로 수많은 기사들의 전투법을 취할 수 있다. 포인트를 투자하면 쓸 수 있는 기술은 더 많아진다.

그렇지만 지금은 필요가 없다.

검만 잘 휘두르면 뭐 하겠는가. 몸이 굳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그가 하나 남은 스킬로 시선을 돌렸다.

[꺼지지 않는 투지]

적을 상대할 때 몸과 마음이 굳는 것을 막아주는 스킬.

꽤나 직관적이며 단순한 효과였지만 절대 무시 못 할 힘이었다.

한순간의 판단이나 찰나의 움직임이 생사를 좌우하는 전장. 공포심을 떨쳐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나약한 현대인을 진짜 기사로 만들기에는 이만한 스킬이 없는 것이다.

벨로크는 우선 투지 스킬을 찍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잡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비실비실 웃음이 흘렀다. 자기 자신을 게임캐릭터 삼아 육성법을 써 내려 가는 것만 같았으니까.

지독한 현실 같으면서도 공상 같은 게임 속 세상. 벨로크는 점점 더 이 알 수 없는 세상에 빠져들어 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