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야만의 시대
“이런 비루먹은 용병 새끼들이 당장 비키지 못하겠나!”
그녀는 외관과 어울리지 않게 앞을 가로막는 용병들을 걷어차거나 호통쳤다. 심하면 검을 휘두르기도 했다. 다분히 전투적인 방식이었다.
“이런, 씨. 어떤 새끼가! 허억.”
엉덩이를 걷어차인 한 용병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곧바로 기겁하며 길을 비켰다.
190이 넘어가는 기사와 종자의 명을 거스를 간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델의 활약에 힘입은 두 사람은 수월하게 성문에 진입했다.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아군들의 시체가 보였다.
시신들 사이로 부상병들도 엎어져 신음했다.
잘린 손가락과 팔뚝, 뇌수가 바닥에 흥건했다.
지독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으으으. 괴물.”
“우리 측 기사는 언제 도착하는 거지?”
외성 안에 진입했던 로벤 측 용병들은 뒤돌아서 밖으로 나가거나 성벽에 등을 꼬옥 붙인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만큼 눈앞의 상대는 괴물이었으니까.
“역시 버본 님!”
“하하! 가진 거라고는 황금밖에 없는 더러운 로벤 놈들!”
그 모습을 본 베이츠 측 용병들이 기세를 올렸다. 성문이 뚫렸을 때는 모두 다 끝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버본 이라는 기사의 난입에 적군들은 한 발자국도 못 들어오고 있었다. 환호하는 베이츠 측 용병들의 중심에 서 있던 거대한 체구의 사내.
“이 겁쟁이 놈들! 한 놈도 들여보내지 않겠다!”
버본이 도끼자루를 바닥에 쾅 찍으며 외쳤다.
쓰고 있는 둥근 투구 때문인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몸을 감싼 두터운 회색 풀 플레이트.
그리고 손에 들린 큼직한 도끼에는 희생자의 살점이 가득했다.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자였다.
“흥. 주전자같이 생긴 놈이 입만 살았구나!”
하지만 아델은 그런 버본을 보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고는 기세 좋게 검과 방패를 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겁먹은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호승심과 투쟁심은 기사의 종자로서 필히 갖춰야 할 소양이었으니까.
하이톤의 목소리에 버본의 시선이 돌아갔다.
“음?”
단발머리를 한 계집과 큰 키를 가진 사내가 보였다. 용병과는 다른 충실한 무장상태로 보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상대측에 자유 기사가 한 명 있다고 하더니 이제야 나타난 건가.
버본이 빈정거렸다.
“뭐냐? 이제 보니 계집년 아닌가. 크하하하. 로벤 측은 창녀도 병사로 고용하는 건가?”
“와하하하.”
버본을 위시한 적군이 그들을 비웃었다.
면전에서 모욕당한 아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새끼가...”
아델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충실한 부하인 그녀는 달려 나가기에 앞서 주인에게 먼저 허락을 구했다.
“벨로크 님! 종자 아델이 저 건방진 주전자의 목을 따오겠습니다. 명령을!”
결의에 찬 그녀의 눈동자를 보면서 벨로크가 턱을 쓰다듬었다.
‘분기점이다.’
게임 속에서라면 선택지가 떴을 것이다.
그녀를 보낼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나설 것인지.
안 보내면 호감도가 떨어진다.
주인이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함정이다. 보내면 죽는다.
아델은 분명 종자치고는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버본의 상대가 안 된다. 서른 명 베기의 버본, 철판도 맨손으로 찢는다는 괴물.
천박한 입담과는 달리 그는 대단한 기사였다.
이번 전쟁에 참여한 로벤 측 기사 대부분을 단신으로 죽였으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
좆같은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부하 하나는 굉장히 큰 자산이다.
벨로크는 아델의 동그란 눈을 바라보았다.
“벨로크 님?”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흉터가 가득한 얼굴과 그간의 노력을 증명하듯 억센 손.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아델의 동그란 머리를 툭툭 쳤다.
“내가 간다. 아델. 너의 상대가 아니다.”
“벨로크 님! 하지만...”
상처 입은 자존심에 아델이 눈을 고양이처럼 치켜떴다.
벨로크는 일부러 무시했다.
“뒤를 부탁한다.”
부하의 대가리가 깨져서 죽는 것을 또 보고 싶지는 않다.
그건 모니터 너머의 광경으로 충분했다.
기억과 육체에 대한 동화는 100% 완료된 상태다. 벨로크는 자신이 있었다.
버본은 분명 강자였지만 이 몸뚱아리 또한 영웅이 될 자질을 가진 기사였다.
버본이 고개를 까딱 거렸다.
“기다리느라 목이 빠질 뻔했군.”
“늦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용기는 칭찬해주마. 떠돌이 놈아.”
떠돌이.
영지도 모시는 주인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자유기사를 모욕하는 단어.
버본의 도발을 피식 웃어넘긴 벨로크가 넓은 학 문양의 방패와 롱소드를 들어 올렸다.
“네놈을 죽이고 종자라는 저년은 팔다리를 잘라서 부하들에게 던져줘야겠군.”
투구 안 버본의 눈이 비열하게 휘었다.
정말이지 입이 더러운 새끼로군. 벨로크가 재빨리 달려들었다.
타다다닷
그가 입고 있는 사슬갑옷이 치렁거리며 소리를 냈다.
“후우웁.”
대비하고 있던 버본은 양손 도끼를 머리 위까지 치켜올렸다.
그리고 거세게 내려찍었다.
부우웅
그저 단순한 휘두르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사람 셋을 한 번에 토막 낼 정도로 강맹한 힘이 담겨있었다.
벨로크는 쥐고 있던 방패를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그러고 손목만 살짝 움직여 도끼의 궤적을 흩트렸다.
기기기긱
일순 불꽃이 튀며 무식한 힘이 손아귀로 느껴졌다.
집중해야 한다.
잘못하면 방패째로 두 동강 난다. 그만큼 놈의 힘은 위협적이었다.
“흡.”
벨로크가 심호흡과 함께 방패를 튕겨 올리듯 휘둘렀다.
녀석의 도끼가 기우뚱거리며 휘었다.
“뭣?”
자세가 무너진 버본이 당황스런 음성과 함께 휘청거렸다.
지금껏 이 일격을 제대로 버틴 자는 몇 없었다. 로벤 측 기사 놈들도 대부분 첫 일격에 머리가 으깨졌으니까.
하지만 이런 떠돌이가?
기회가 왔다.
이를 본 벨로크가 본능적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상대는 중무장한 기사. 노릴 곳은 한정되어 있다. 갑옷과 갑옷 사이를 잇는 이음새. 이를테면 겨드랑이 부분.
푸우욱
“크아악.”
버본이 비명을 지르며 도끼를 휘둘렀다. 벨로크는 혀를 차며 뒷걸음질 쳤다. 얕았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저 팔을 못 쓰게 할 수 있었는데.
“이 새끼가... 토막 내서 돼지 먹이로 던져주마!”
분노한 버본이 쿵쿵 거리며 달려들었다.
육중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빨랐다.
놈의 도끼가 사방에서 몰아쳤다.
벨로크도 반격해나갔다. 그의 눈과 팔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챙챙챙 두터운 쇳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두 무구가 마찰하며 불똥이 이리저리 튀었다.
몇 번은 방패로 막고 롱소드로 흘렸다. 또 몇 개는 피해냈다.
처음 겪는 실전.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그는 얼추 막아낼 수 있었다.
그만큼 벨로크의 육체는 완성된 기사의 것이었다.
“버본의 공격을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막아낸다고?!”
“대체 저 녀석은 누구냐. 아직 젊어 보이는 얼굴인데.”
양측 진영의 용병들이 웅성거렸다.
종자 아델은 잠깐이라도 놓칠까 주인과 주전자 머리의 싸움을 눈에 넣고 있었다.
괴물 같은 싸움이다. 진정으로 수준 높은 기사들의 전투.
자신이 저 사이에 꼈다면 대번에 죽었을 것이다.
아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쥐새끼 같은 놈이!”
벨로크가 휘두른 검을 갑옷째로 막아낸 버본이 냅다 발길질을 했다.
벨로크가 다급히 방패로 이를 막아냈다.
투웅 마름모꼴 방패가 바닥을 굴렀다.
그 충격에 벨로크가 떨리는 팔을 부여잡으며 혀를 찼다.
중장 갑옷은 이래서 사기다.
저 두터운 철판은 공격도 방어도 모든 것이 완벽하다.
앞에다 갖다 대면 방패 휘두르면 망치가 되니까. 더럽게 비싼 가격만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애송이! 제법 괜찮은 솜씨였다.”
벨로크가 고개를 올렸다.
태양 빛에 반사된 도끼가 핏빛으로 반들거리고 있었다. 곧이어 음영을 만들어낸 도끼가 쏜살같이 떨어졌다.
“끝이다.”
조금 있으면 들려올 파육음에 버본의 눈가가 기분 좋게 휘었다.
“벨로크 님!”
종자 아델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렸다. 하지만 벨로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방패 대신 롱소드를 양손으로 잡았다.
머릿속에 지금 상황에서 사용해야 하는 검식이 떠올랐다.
버본이 코웃음을 쳤다.
놈이 자세를 다잡는 것 보다 자신의 도끼가 더 빠르다. 단번에 대가리를 깨주리라.
그 순간. 벨로크의 검이 흐릿하며 기묘하게 움직였다.
“뭣?”
일순 버본은 그 움직임을 놓쳤다.
채애앵
들려온 것은 피륙을 분쇄하는 소리가 아닌,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옹이 구멍 처럼 보이는 투구의 구멍 사이로 버본이 눈을 치켜떴다.
놈의 롱소드가 댕강 부러졌지만 버본은 자신의 도끼가 애꿎은 바닥을 내려찍는 것을 보았다. 흙먼지가 파악하고 치솟았다.
그 사이로 벨로크가 야수 같은 미소를 지으며 허리춤의 메이스를 꺼내는 것도 보았다.
버본이 다급히 나불거렸다.
“자... 잠깐! 실로 대단한 솜...”
콰앙
둔중한 충격에 버본이 혀를 씹었다.
주전자 투구가 팍 찌그러졌다. 벨로크는 쉬지 않고 내려쳤다.
쾅쾅쾅
“끄아아아.”
뇌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얼굴이 조여드는 느낌에 버본이 냅다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윽고 강철도끼 버본은 투구째로 머리가 으깨져서 죽었다.
폐품이 된 투구 밖으로 눈알이 툭 튀어나왔다.
요란스러운 전장에 일순 침묵이 맴돌았다.
고명한 기사의 최후는 하찮은 용병들의 안식과 다를 것도 없었다.
시궁창 같은 전장에 명예로운 죽음이란 없다. 다져진 살덩이만 있을 뿐이다.
이를 해낸 벨로크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손에 들린 메이스를 저 멀리 던졌다.
챙그랑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녀석의 도끼가 주는 위압감이 아직도 선명했다.
거센 풍압이 얼굴을 스칠 때의 느낌 또한.
모니터 뒤에서 편하게 관조하던 자신은 겪어본 적이 없던 감정.
죽음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것 같았던 기이한 감각.
벨로크는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이 지독한 현실감을 대체 뭐라 설명해야 할까.
그 순간. 기묘한 힘이 벨로크의 내면에 샘솟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눈을 감으며 정신을 집중하자 요상한 문구와 함께 게임 스탯 같은 것이 몇 개 보였다.
“하!”
이를 본 벨로크가 헛웃음을 지었다.
떨리는 손과 폐부에 와 닿는 공기, 지독한 피비린내는 그에게 이곳이 현실임을 일깨워주었지만, 내면의 시스템 창 같은 것은 이곳이 또 게임 속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현실감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었다.
지독히도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군.’
벨로크가 습관적으로 얼굴을 쓸었다. 끈적한 붉은 염료가 얼굴 가득 묻었다. 쇠 냄새가 진동했다.
“적장이 죽었다아아아! 어서 움직여라! 이 빌어먹을 밥벌레들아!”
그런 벨로크의 정신을 깨운 것은 종자 아델의 거친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