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화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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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혼란의 시대이자 전란의 시대였다.

영주들은 땅따먹기에 혈안이 된 채 늘 전쟁을 벌였으며, 깊은 숲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도사렸다.

치안이 악화되자 자연히 도적들이 창궐했다.

당장 며칠 거리 이웃 마을에 가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세상이었다.

그래.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좆같은 세상이었다. 하지만 난 치명적인 실수를 더해버리고 말았다.

“불지옥 난이도라... 재밌겠는데?”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세 가지 난이도 중 제일 어려운 걸 선택했을 때. 이 게임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했을 뿐이다.

[불지옥 난이도를 선택하셨습니다.]

[아드리아 대륙에 다섯 대악마와 그 추종자들이 뿌리를 내립니다.]

화면이 뒤바뀐다. 지상과는 달리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세계가 나타났다.

시뻘건 불길이 넘실거리며 머리에 뿔 달린 괴물들이 낄낄거렸다.

그런 권속들을 오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악마 군주들이 돌연 환희에 찬 괴성을 질렀다.

어두컴컴한 세상에 슬며시 빛이 스며든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지상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쿠웅

왕좌에 앉아있던 대악마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양팔을 펼치며 외쳤다.

“유희를 즐길 시간이다.“

거대한 울림이 퍼져나가자 권속들이 환호했다. 바야흐로 축제의 시작이었다.

인간들의 뼈를 부수고 내장을 꺼낼 것이다. 요정들의 머리통을 잘라서 공놀이를 즐길 것이다.

난쟁이들을 짓 밞아서 피떡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원대한 포부를 간직한 악마들이 드높은 지상을 향해서 진군을 시작했다.

격식과 품위를 차린 행진은 아니었다.

그저 악마답게 입가가 찢어져라 웃으며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갈 뿐이었다.

영상은 더럽게 현실감이 넘쳤다. 모니터 너머의 내가 침을 꿀꺽 삼킬 정도로.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뭐야. 그냥 악마라는 놈들만 추가되는 건가?”

나는 김이 팍 샜다. 쉬움과 보통을 클리어하고 이제 마지막 난이도인 불지옥만 남아서 선택해본 것인데. 그냥 새로운 종족들의 추가가 끝이라니.

[당신의 선택으로 인해 세상은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메시지 창과 함께 다시 화면이 반전되었다.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다양한 인종과 종족을 가진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캐릭터 선택창을 가득 채웠다.

하나같이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대단한 기운을 뽐내는 것이 다시없을 영웅들이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수많은 종족만큼이나 수많은 직업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인간족 기사를 선택했다.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냥 이제 3회차 도전이니까. 익숙한 것부터 다 깨볼 셈이다.

[기사 벨로크 환영합니다. 부디 대륙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해주시기를.]

이 게임은 특이하게도 각 종족의 캐릭터마다 정해진 이름과 고유의 스토리가 있다. 지겨움도 잠시였다. 그래, 이제 삼 회 차다.

아직 못해본 플레이도 많고 못 찾아본 비밀들도 많았다.

나는 곧 흥분으로 인해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벌써부터 내 머릿속에는 말을 타고 전장을 휘저으며, 적들의 모가지를 따는 강대한 기사가 그려졌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게임 속 세상에 빠지게 되리란 것을.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 말고 더 좋은 직업을 선택했을 텐데.

아니, 차라리 난이도를 낮추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이런 병신. 그렇게 따진다면 애초에 이 게임을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지.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감정이 휘몰아쳤다.

부정과 분노 공포와 흥정 마지막으로 체념.

그렇게 나는 게임 속 기사가 되었다.

와아아아!

채앵 챙

우레와도 같은 함성소리와 함께 쇳소리가 이리저리 울려 퍼졌다.

젠장. 귀가 나가버릴 것 같다. 이곳은 대체 어디인가.

나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시선을 휙 돌렸다.

복장의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무리들이 각자 무기를 꼬나쥔 채 눈앞의 성을 향해서 달려들고 있었다.

현대인의 눈에는 낯설기도 하면서 묘하게 익숙한 복장이다.

저건... 용병?

“하하하! 사다리를 올려라! 놈들은 독 안에 든 쥐다!”

한 사내가 검을 짓쳐 올리며 외치자 성벽 위로 사다리가 놓아진다.

그러자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이 아귀처럼 성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침략자의 습격에 그 위에 있는 자들도 필사적으로 막았다.

지글거리며 끓는 물과 기름을 있는 대로 들이부었다.

치이이익

“아아아악!”

살이 타는 냄새가 고약하게 울려 퍼졌다. 갑옷이 녹아내리고 피부에 들러붙었다. 온몸에 지독한 화상을 입은 용병들이 팔을 허우적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제2 제3의 사다리를 놓았다. 제 몸을 돌보지 않는 무식한 돌격. 눈앞의 끔찍한 광경에 나는 입을 헤 벌렸다.

맙소사. 나는 분명 게임을 하고 있었을 텐데... 이건 대체.

현실감이 없는 상황.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벨로크 님! 적의 성문이 열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체인메일과 가죽보호대를 충실하게 갖춰 입은 한 여인이 다가와서 말했다.

얼핏 신나 보이는 그 목소리가 묘하게 익숙하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벨로크? 대체 무슨...’

찌이잉

골이 울린다.

이어서 삐이이이 하는 이명과 함께 멍하던 머릿속에 각양각색의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어억.”

나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어가며 몰려드는 정보의 호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벨로크 하이네.

알 수 없는 내력을 지닌 몰락한 가문 출신의 떠돌이 기사.

전란의 시대인 지금 의탁할 자리를 찾기 위해서 종자 아델과 함께 이번 전쟁에 참여한 사내.

그리고 이건 모두다 게임 속의 설정이며 현실의 자신은 먹고살기 바쁜 현대인. 두 가지의 기억이 서서히 융합되기 시작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정도 동화가 끝난 벨로크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양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말랑했던 자신의 원래 손이 아닌 굳은살이 가득 박힌 바위 같은 손.

고행으로 다져진 단련된 육체.

벨로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굉장히 더러운 상황에 빠졌다는 것도 깨달았다.

게임 속 세상에 빠지다니. 그것도 이런 꿈과 희망도 없는 다크 판타지 세상에. 벨로크가 툭 내뱉었다.

“좆됐네.”

“네? 벨로크 님. 그게 무슨...이 개새끼가!”

채애앵

“끄아아악!”

아델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두 사람에게 겁 없이 달려들던 용병 한 녀석을 베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델의 검이 반짝이자 녀석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군더더기 없는 솜씨와 과감한 결단력.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아델은 훌륭한 종자였다. 그녀의 재능만 보고 벨로크가 거두었을 만큼.

“하나 둘!”

수십 명의 용병들이 합을 맞춰 공성추를 찍었다.

쿠우웅 쿠웅

경첩이 흔들거리며 튼튼하던 외성 문이 비명을 질렀다.

성벽 쪽에서 화살이 날아왔지만 그 기세가 약했다. 애시 당초 숫자 싸움이 너무 났다. 이에 힘을 얻은 용병들이 다시 한번 공성추를 움직였다.

“하나 둘!”

콰아앙

굉음과 함께 철통같던 성문이 마침내 박살 났다.

늑대의 머리를 본뜬 공성추가 쩌억 하며 적들의 심장에 아가리를 내밀었다.

“와아아아!”

이를 드러낸 용병들이 뚫린 성문으로 개미처럼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약탈이든 싸움이든 원래 제일 선봉에 서는 자가 얻는 것이 많은 법이었다. 그들의 탐욕에 불이 붙었다.

“벨로크 님! 성문이 열렸습니다. 공을 세우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종자 아델이 당장에라도 뛰어들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벨로크가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멈췄다.

“아델. 잠깐만.”

“네? 벨로크 님 대체 왜...”

주인의 머뭇거림에 아델이 또다시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벨로크는 전투와 싸움에 있어서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비록 모시는 자 없는 떠돌이 기사이기는 하나 그 용맹은 진짜였던 것이다.

원래 주인의 성격대로라면 제일 앞 다투어 성문으로 향했을 텐데. 어째서.

하지만 벨로크는 아델의 의문을 해소해 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파악해야 했으니까. 그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정신을 차리니 게임 속 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가진 기억을 말미암아 생각하자. 이 세상은 자신이 플레이했었던 게임 속 세계다. 그것도 지근거리에 있는 용병들의 땀내와 피 냄새까지 생생하게 맡아질 만큼 리얼한 세계.

벨로크는 어째선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죽는다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 될 것이란 걸.

‘진짜 죽음 일수도.’

한 순간 전장의 열기도 식혀버릴 만큼 차가운 냉기가 몸을 엄습했다.

벨로크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나약했던 현대인이 아닌 강철같은 기사의 경험과 지식이 그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나에게는 강철같은 몸뚱이와 미래의 지식이 있다.

비록 2회차 까지 밖에 클리어를 못 했지만 대강의 물줄기는 기억이 난다.

자신이 빠진 게임. 아드리아의 재림은 각 태생마다 시작지점과 이야기의 진행이 다르다. 기사 태생의 초반 스토리.

‘시작은 베이츠와 로벤 사이의 영지 전이다.'

현재 그들이 속해있는 곳이 로벤측. 수비측이 베이츠였다.

현재 전황도 로벤 측이 유리하다.

그리고 게임 속에서 봤던 내용대로라면 이 전쟁은 로벤 측이 승리한다.

로벤 영주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금을 풀어 재낀 결과였다.

압도적인 숫자의 용병들을 고용한 물량 공세.

그렇게 베이츠는 함락 당한다. 성문도 열렸으니 금방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그 전에 문제가 있었다.

“끄아아악!”

“아아악!”

성문 안으로 기세 좋게 뛰어 들어가던 용병 몇 놈이 토막 난 채 도로 밖으로 튕겨 나갔다. 녀석들이 잘린 신체를 부여잡으며,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무슨.”

그 광경을 본 아델이 눈을 크게 떴다.

벨로크는 지금쯤 무너진 외성 안에서 날뛰고 있을 적의 기사를 떠올렸다.

‘강철도끼 버본.’

분명 그런 위명이었지.

도끼 하나만으로 이번 전쟁에 참여한 로벤 측 기사 대부분을 참수시킨 전사.

따지고 보면 이 전장은 튜토리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버본은 그런 튜토리얼의 보스 몹이다.

용병들은 끝도 없이 성안으로 들어갔지만, 어김없이 신체 어디가 절단 나며 바닥을 굴렀다. 공포에 질린 몇몇이 뒷걸음질을 치며 중얼거렸다.

“시... 시발!”

“괴물이다! 궁수대! 궁수대는 어디 있지?”

“한참을 기다려야 해! 녀석들은 맨 끝에 있다고.”

어중이떠중이들로는 도저히 뚫을 수가 없는 상황. 그만큼 버본의 무력은 강력했다.

바로 이때.

플레이어가 나서서 버본을 쓰러뜨리고 길을 뚫어야 한다.

그러면 로벤 영주의 신임을 얻고 몸을 의탁할 수 있다.

만약 꾸물거려서 기회를 놓친다면 겁쟁이라 낙인찍힌다.

지금까지 전장에서 쌓아왔던 업적과 평판을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로벤에서 쫓겨나 또 다시 거리를 떠돌게 되는 것이다.

요즘 같은 전란의 시대에 밖을 나돌아다니는 건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한 일이었다. 벨로크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싸우는 수밖에 없다.

“외통수로군.”

말을 뱉은 벨로크가 종자 아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성문을 턱짓했다.

아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네! 벨로크 님! 길을 뚫겠습니다.”

성문까지 가는 길을 막은 용병들만 수십이다. 어떻게 뚫을 셈이지?

게임 상에서는 이렇게 디테일한 상황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벨로크가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보자. 곧 아델이 행동을 개시했다.

맙소사.

그 모습을 본 벨로크가 입을 슬쩍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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