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118화 (119/121)

118. 삼촌

지일권 의원은 굳은 표정으로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유서라고 써져있는 서두.

흥미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냄비가 끓는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리기가 몇 분.

가만히 그가 글을 다 읽을때까지 기다렸다.

지일권 의원이 서류를 끝까지 읽고, 자신의 옆에 뒀다.

심각하게 얼굴이 굳어지는 지일권.

"이게 다 사실이니?"

"네."

정치인은 정치인이다. 첫만남에 봤던 그 호탕함과는 대비되는 신중함.

아마 머릿속으로 계속 계산하고 있지 않을까.

괜찮은 소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일권 의원 입장에서는 이걸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괜한 벌집을 건들이는 것 일수도 있다.

언론이 마음먹고 정치인 죽이기를 한다? 정치인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언론 카르텔은 지들끼리 싸우는 듯 보여도 외부에 적을 향해서는 놀랍도록 단결하는게 속성이니까.

그만큼 언론은 정치인에게 어려운 상대다.

왜 그동안 언론개혁이 안되었겠는가.

국민을 대변하는 선출직 공무원인 국회의원.

아이러니 하게도 그 국민들의 여론을 조성하는게 언론이기 때문이다.

지일권 의원은 걱정이 앞서지 않았을까?

그런 지일권을 먼저 안심시켜 주기로 했다.

"조만간 터트릴 예정입니다. 어떻게 떠트릴지는 아직 고민중입니다. 적당한 판이 깔렸을때 터트리면 보조를 맞춰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거랑 ‘기레기법’이랑 연결해서 터트린다라··· 와꾸가 나올 것 같긴한데. 이게 공론화가 되겠니."

"공론화 시켜야죠. 그 유서의 주인공. 아직 살아있습니다. 법정까지 정종철 끌어올 수 있으면 증언까지 해주기로 약속했고요."

소극적인 지일권 의원. 실망하지 않는다.

뭘 걱정하는지 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기자가 선배 기자를 죽였다. 죽은 기자의 부인이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어느 언론사에서도 다뤄주지 않았다.

뭐 여기까지는 그럴 수있다. 살인사건이야 주변에서야 보기 힘들지 몰라도 전국적으로는 하루에 몇건씩이나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런데 한개의 메일이 공개되면서 그 배경이 알려지게된다.

살인을 한 기자의 언론사에서 전 언론사 대상으로 메일을 뿌린다.

'언론계 선후배 기자님들 기자의 명예를 위해서 관련된 사건을 다뤄주시지 말아주십시오.'

한 양심적인 기자의 고백으로 이 메일이 공개되었지만 놀랍도록 아무런 일이 없었다.

어느 언론사에서도 다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밥그릇 앞에서는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거국적 타협을 하는 애들이다.

사실 멀리갈 필요도 없이 지일권 의원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추진하면서,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모든 언론사의 공격을 몸소 받아냈으니까.

그당시 지일권 의원의 사돈에 팔촌까지 사정없이 탈탈 털렸었다.

한번 당해본 만큼, 이 사건을 공론화 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치밀하고 화려하게 일을 저질러야 공론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지일권 의원은 알 것이다.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올라타시기만 합니다.”

“그렇긴한데···”

무명 여배우가 대기업 3세를 고발하는 것과, 4선 당 중진이 공식 석상에서 언론사의 부정을 말하는 것. 당연히 무게감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이젓도 사이즈의 사건이라면 입법을 위한 여론 조성도 훨신 쉬울것이고, 지일권 의원이 직접 터트리는 것이 아니니 위험 부담도 없을 것이다.

소극적이고, 신중한 모습.

가만히 앉아 지일권 의원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지일권 의원을 찾아온 이유는 나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는 것도 있지만, 이 일에 지일권 의원만큼 꼭 맞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일전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으로 언론사들에 의해서 탈탈 털리고도 아직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이미 한번 언론의 조리돌림을 당했기에 더 깔것도 없을 테고, 더 까면 동정론에 불이 붙을 수도 있으니 언론사도 조심스러울 것이다.

심지어 지일권 의원은 ‘특수임무 유공자’ 아닌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그의 배경은 잘못 건들면 국민들의 애국심과 동정심에 불을 지를 트리거가 될 수 있다.

당론이 어떻든 간에, 총대를 매고 언론과 한판 붙을 만큼 배짱이 있기도 했고.

언론에 시달릴만큼 시달렸으니 이일을 할만한 동기도 충분 할 것이다. 복수하고 싶지 않을까?

그런 조건들을 고려했을때 지일권 의원 만한 사람이 없었다.

내가 건조하게 조건을 따지고 있을 때였다.

“지우야 혹시, 지난번 백룡영화제 [악의 기록] 남우주연상 틀어진 것 때문이니?”

깜짝놀랐다. 나도 확실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심증만 가지고 있었던 일이었는데, 마치 지일권 의원은 확실하다는 투로 이야기 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나 문체위(문화체육관광위원회) 상임위원장이야 임마. 안그래도 그 것 때문에 말이 좀 나왔어. 백룡영화제 수상에 고구려 일보가 압력을 가했다고 말이야. 청원이 좀 들어와서 자료를 모으는 중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문체위 소관 기관안에 ‘언론중재위원회’, ‘뉴스 통신진흥회’, ‘한국언론진흥재단’ 등이 있으니, 지금 추진중인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튀어나온 것이였겠지.

그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노리는건 기본적으로 대형 언론사들이다. 고구려 일보도 그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일권 의원이 언론사들의 비리나 부정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조사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겠지.

그리고 문체위 소관 기관중에 ‘영화진흥윈원회’, ‘콘탠츠진흥원’, ‘영상물등급위원회’ 등 영화와 관련된 기관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지일권이 문체위 위원장이라는 것 조차 방금 여기서 처음 들은 것이니까.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그냥 좀··· 악연이 있습니다. 백룡영화제 관련된 건 그 악연에서 나온 일부분일 뿐이고요.”

“남우주연상이 일부분일 뿐이라고?”

깜짝 놀라 눈이 커지는 지일권 의원.

전생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아도 이번생에 쌓아온 악연도 상당하다. [응답하라 119]를 찍으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던가.

[응답하라 119] 첫화가 방영 되기도 전에 최지연 사장이 ‘환경호르몬 완구’로 저격당했고, 촬영도중에 스태프 빼가기로 곤혹을 치루었다.

이지혜 사건도 있었고.

[응답하라 119] 종방연하던 날 이지혜가 죽었다면··· 사람 죽은 드라마라 좋지 않은 소문이 퍼졌을지 모른다. 소문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씁쓸했을 것이다.

그녀의 자살시도가 빨라진 것은, 내가 관련 되어 있으니까.

정종철과 나와 이어진 악연을 지일권 의원에게 간략하게 전했다.

“와··· 이거 어마어마한 씹새끼네?”

“네.”

이어지는 지일권의 말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신중하지도, 소극적이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단지 내가 왜 작정하고 정종철을 죽이려 하는가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지일권 의원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너무 좋은 패가 굴러들어온 셈이니까. 내 진심이 궁금하지 않았을까.

지일권 의원은 백숙 다리 하나를 큼직하게 때서 내 앞접시에 올려다 놓았다.

“고생 많았다. 참··· 말만 아들처럼 생각한다 해놓고 이런줄도 모르고. 정종철 이새끼 안되겠네. 아저씨가 알아서 할테니까 걱정마라.”

나는 지일권 의원을 국회의원으로 대했는데, 지일권은 아니였나보다.

지일권은 친구의 아들처럼 나를 대했다.

***

[DR.헬기] 마지막화 시청률 18.8%

[응답하라 119]의 종영과 동시에 [DR.헬기]는 치고 올라가 끝끝내 시청률 1위를 달성했다.

농담삼아 했던, 동시대 배우로 시청률 경쟁을 한번 해보자는 이야기.

최고 시청률은 [DR.헬기]가 높았지만, 재미있게도 [DR.헬기]는 [응답하라 119]에게 시청률 1위를 단 한번도 뺐지 못했다.

이정도면 무승부가 아닐까?

이정건은 스스로 자위해보지만, 영 개운치 않다.

[응답하라 119]가 공중파에서 방영되었다면, 지금 보다 훨신 더 좋은 반응을 얻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저승 카페] 때보다 더 세련된 연출과, 대본.

여전히 좋은 연기.

주연이 어울리는 동생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끼는 동생과 마지막에 했던 대화가 생각났다.

‘나 하나 잘한다고 띄울 수 있는 판이 아닌거 알잖아?’

그 말 그대로 혼자서 애써 본들 나아질 게 없는 [DR.헬기]의 촬영장이었다.

고집센 작가와 PD의 반목. 오락가락하는 방송국. 배우들간의 불협화음.

경쟁 드라마들의 부진이 아니었다면 저 시청률 1위 또한 힘들었을 것이다.

드라마의 종방 직후, 이정건은 새로운 영화를 준비했다.

[민주를 기다리며]를 찍었던 이태환 감독의 신작이었다.

[DR.헬기]와 거의 동시에 출연 확정을 지었던 작품이었다.

이정건은 원래 영화를 먼저 하고 싶었다. [악의 기록]에서 좋은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좋은 시나리오에 꼭 맞는 배역이 나와 주저없이 계약했다.

제작사 또한 이정건이 몸값을 낮추고 계약을 해줬기에 영화 일정 자체를 이정건에게 맞췄다.

미장센의 이태환 감독. 그의 첫 상업영화 였다.

그리고 이 각본을 추천해줬던 것도 이지우 였었다.

이태환, 이수한, 박현주.

이태환을 제외 하고 다 한번씩 작업을 했던 사람들.

그리고 이지우의 사람들.

그들끼리 서로의 글을 봐주는 과정에서 이지우 손에 이태환 감독의 각본이 들어갔고, 그 각본이 이정건의 손까지 오게된 거였다.

이태환 감독의 대학시절의 전공을 살린 작품 이었다.

변호사와 무고한 피고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피의자]. 이정건의 정의감 투철한 변호사역을 맡았다.

영화 종반부 ‘이의 있습니다!’ 하고 치고나가는 마지막 대사. 그 대사 하나만 보고 출연을 결정 지었다.

하릴없이 거실에서 매니저와 티비를 보던중. 속보로 [찬란하게 빛나는]의 칸 영화제 경쟁부문 지명소식과 남우주연상 후보지명 소식이 떴다.

아끼는 후배이자 동생의 후배지명에 이정건은 진심으로 기뻤다.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에게 진 것은 명예로운 패배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형 이거, 화환이라도 보내야 되는거 아냐?"

"아니,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무슨 화환이야."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그의 매니저.

"보통 칸 영화제 쯤 되면 화환 안보내나?"

"나중에 수상 하면 보내. 오바야. 하··· 내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네. 칸 영화제에서 한국인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고? 미치겠다. 진짜 될 것 같아서."

"그럼 제철 과일이라도 보내자."

"아니 뭘 자꾸 못보내서 난리야!"

이정건은 매니저의 짜증에도 아랑곳않고 말했다.

"내가 연기는 못해도, 선배고 형이잖아! 이런거라도 해야지. 보낼때, 이수한 감독도 같이 보내고."

***

[찬란하게 빛나는]의 칸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거기에 내가 남우주연상에 후보에 지명 되었다.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자 온 포털 사이트에 관련기사가 도배가 되다 시피했다.

과거 한국의 여배우가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기록이 있었지만, 남우주연상은 미래의 일이다.

그 이후 한참동안 실시간 검색 순위에 내 이름과 진권호 감독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등등이 줄세우기 되었다.

감독이 진권호 쯤 되니까 영진위(영화진흥위원회)에서 대우도 다르다.

비행기부터 호텔까지 대원 영화사와 영진위에서 다 처리해줬고, 나는 옷 정도만 준비하면 될 정도였다.

뭐, 그렇다고 내가 무슨 패션을 알겠나.

회사에서 주는대로 입어야지.

회사 소속 스타일리스트가 내 턱시도를 가지고 왔고, 그 옆에 놓여있는 작은 사이즈의 여성 정장이 눈에 띈다.

칸영화제는 보수적인 영화제이다. 그만큼 드레스코드도 빡빡하고. 남성은 보타이를 포함한 정장, 여성을 드레스에 구두를 꼭 착용해야한다. 예외가 되는 경우는 전통복장을 입는 경우밖에 없다.

그나마 스태프들은 그런 드레스코드에 다소 제약이 덜한편이다. 그래서 현주의 복장은 무난한 여성정장을 준비한 모양이다.

"한 실장님, 이거 혹시 현주 건가요?"

회사내에 특별한 직책이 없는 계약직 스타일리스트. 그렇기에 모든 직원들은 그녀를 한 실장이라 불렀다.

"네. 아무래도 현주 씨는 작가로 가시는거라, 차분한 정장 받아왔어요."

게다가 보통 각본상이라든지, 편집상이라든지 스태프들이 받는 상에 경우에는 따로 드레스를 입기보다 정장을 입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우리 현주 자랑하고 싶은데.

"음··· 그러지말고,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 ···네? 정말요?"

나와 스타일리스트의 작당모의로 현주의 새로운 의상을 준비해서 칸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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