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아니 그걸 먼저 말했어야죠
SF라··· 그것도 하위장르인 사이버 펑크···가 맞나? 도사가 주인공인데?
몇 시간 전에 현주가 쓴 각본이라면, 어떤 작품이라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건 제목부터 난관이다.
[홍길동전 2077]
SF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에서, 투자유치가 되려나?
얼마전 [D-CRAFT]의 폭망으로 이쪽으로는 투자유치가 안 될 것 같은데. 심지어 [D-CRAFT]는 크리쳐물에 가까운데 ‘한국형 블록버스터 SF’로 홍보를 한 후 폭망했다. 그렇기에 SF 장르 자체가 투자자들에게는 더욱 꺼려질 텐데.
꼭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SF 중에 성공한 작품이 있었나? 미래에는 SF 장르 중 유의미한 성공한 작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시기에는 많이 힘들 거다. 몇 년 전에 [성냥팔이]라는 SF 작품도 심하게 망했거든.
영화관에 걸리는 SF작품 태반이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작품인 상황이다. 할리우드건 한국에서 만든 영화건 영화 티켓의 가격은 동일하다.
이미 할리우드 수준에 눈높이가 맞춰진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의 비주얼을 뽑을 기술력이 없는 상황에서 SF 장르는 항상 지는 도박일 뿐이었다.
심지어 SF는 20년이 넘는 내 연기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장르였다.
장르에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큼 보기 힘든 장르라는 거였다.
이수한이 건네준 각본의 첫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얼어있자 현주가 다가왔다.
“곧 너 생일이잖아.”
“어? 어··· 그랬나?”
“생일 때 짠! 해주고 싶었는데···”
“어우, 입 근질거려 죽는 줄 알았다.”
이수한이 코를 쓱 훔치며 말했다.
“놀라운데 진짜. 여러 의미로.”
놀랍긴하다.
남자친구의 생일 선물로, 각본을 선물해 주는 여자친구라··· 좋은데, 너무 좋긴한데.
도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SF 장르. 아니, SF이긴 한 건가?
“일단 읽어볼게.”
각본을 빠르게 넘겼다.
뭐, 당연히 재미있다.
[벡터맨]을 제쳐놓고 작업했으니까 재미있어야지.
주로 현주가 작업한 듯한 대사.
‘이지우가 도사가 된다면 이럴 것이다.’ 를 옮겨적은 듯한 주인공.
대본을 읽기만 해도 어떻게 연기가 나올지 상상이 되는 나와 꼭 맞는 캐릭터성.
이수한이 주로 작업을 한듯한 서사. 홍길동전을 2077년도 판으로 리메이크 한 듯한 느낌이다. 하나의 주제의식 아래 탄탄하게 서사를 쌓아올린 다음 마지막 장면에서 감정을 터트리는 구조.
이수한의 연출력을 더한다면 좋은 그림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배우, 각본, 감독. 다 준비되어있다.
하지만···
“이거 가능해?”
각본을 덮었다.
“가능하냐니?”
“머릿속으로 그림은 그려지는데, 이게 영상화가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반쯤 열린 문을 열며, 한 사람··· 사람이 맞긴 하는가? 하여튼 뭔가가 들어왔다.
“됩니다.”
“아 씨발, 깜짝이야.”
조금의 과장도 없이, 바로 좀비물 엑스트라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들어왔다.
“아휴, 최 대표님. 집에 좀 들어가시라니까···”
“충성! 사장님, 괜찮습니다. 저는 이 회사에 뼈를 묻을 겁니다.”
“아니··· 그 정도는 하지 마시고···”
최 대표··· 최 대표··· 제로나인 스튜디오의 대표라면 최영준 아닌가?
그런데 몰골이 내가 아는 최영준 감독의 모습이 아니었다.
미래에 잡지에서 나온 모습은 훤칠하고, 깔끔한 모습이었다. 감독이라기보다는 사업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었는데···
저 사람 눈빛이 이상하다. 이수한 한테 충성이라니.
“인사해, 여기는 제로나인 최영준 대표이사. 여기는 아시죠? 이지우.”
“죄송합니다. 좀 놀래서··· 안녕하세요. 이지우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지우 씨. 얼굴은 처음 뵙네요. 이 사장님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얼마나 혹독하게 굴렸으면··· 대표이사라는 사람이 며칠을 집에 못 간 사람처럼 수염이 수북했고, 옅은 베이지색 체크 남방에는 라면국물 자국이 선명했다.
사실 말이 대표이사지, 아직은 스타트업 기업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된다는 말이 혹시, [홍길동전 2077] 말씀하시는 게 맞나요? 이게 된다고요?”
“네. 안 그래도 이 사장님이 요청하신 자료 때문에 온거 거든요. 이것 때문에 팀원들 며칠 동안 집에 못 갔으니까요.”
최영준 대표는 눈이 뻑뻑한지 눈을 끔뻑거리면서 들고온 노트북을 켜서 조작하기 시작했다.
최영준 대표가 보여준 이미지는 3D로 만든 일종의 프리비즈(Previs)와 레퍼런스로 사용될 배경 모델링이었다.
돈이 좋기는 하네. 아직 제작 확정도 안 된 영화의 사전 시각화 작업을 이런 식으로 하다니.
“일단 저희가 만든 툴로 작업을 하게 되면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은 이런 식으로··· 나오게 될 거고요···”
최영준은 스페이스 바를 탁탁 눌러가며 이미지를 보여주며 설명을 했다.
전체 줄거리는 아니고, 주요장면의 움직임이나 편집 등을 예측할 수 있게끔 하여 놓은 일종의 3D콘티였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더 놀라운 것은 레퍼런스로 보여주는 배경의 3D모델링이었다.
“자주 나오는 ‘활빈당’의 모습입니다.”
“이게 풀 3D라고요?”
처음에는 사진인 줄 알았다.
실제의 질감과 유사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교하게 모델링 된 배경은 딱 봐도 실제와 구별이 잘 안 될 정도였고, 최영준이 조작하는 광원효과에 따라 밝은 모습에서만 살짝 티가 날 뿐이었다.
“네. 우리 회사 자체 개발 프로그램으로 뼈대 위에 소재와 질감만 설정해주면 자체적으로 무작위 패턴으로 렌더링 되는···”
공돌이 특유의 설명이 한참 이어졌다.
어··· 음··· 완벽하게 이해했음.
“어쨌든, 이대로 나온다는 거네요···”
“네. 만약 [홍길동전 2077] 시나리오대로 촬영을 하게되면, 영화 전체 VFX를 저희 스튜디오에서 다 하지는 못하고, 일부 장면은 다른 VFX회사에 외주 줄 겁니다. 제로나인에서는 주인공의 도술과 배경만 담당하면 이 정도 퀄리티로 충분히 가능합니다.”
의기 양양한 이수한의 모습.
왜 형이 의기양양한 건데··· 몰골을 보니까 일은 최영준 대표가 다 한 것 같구만.
에라 모르겠다.
이수한의 똘끼와, 현주의 각본, 그리고 내 연기력이면 뭐가 되도 되겠지.
그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애초에 여기에 온 목적은 [홍길동전 2077]이 아니었으니까.
“좋아, 이거 한다 치자. 그럼 [벡터맨]은 누가 찍어? 시즌2 계약한 거 안 까먹었지? TNN이랑 레드켓, 그리고 반다이에서 후속작 나오기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형 이거 안 하면, 장인호 사장이 [벡터맨] 다른 곳으로 넘길지도 몰라.”
“알지. 그거 꼭 내가 찍을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 어차피 스튜디오 나우에서 제작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럼 누가 찍는데? [벡터맨]이 흥행한 게 CG랑 연출 때문인데.”
“감독이야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
어?
CG활용에 능수능란하고, 연출적 지식이 있는 사람?
공교롭게도, 아직 영화를 한 편도 찍어보지 못한 미래의 천만 감독이 옆에 있네?
“최 대표님. 원래 영화 연출 전공이라고 하셨죠?”
“네? 저요?”
***
스튜디오 나우는 오랜만에 출근한 사장 때문에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그 사장이 놓고 간 각본.
[홍길동전 2077]
느슨해진 제작사에 긴장감을 주는 각본이었다.
이수한 감독은, 이 각본과 제로나인 스튜디오 대표이사인 최영준만 남겨놓고 떠나버렸다.
정확하게는 도망쳐 버렸다.
“그러니까··· 이걸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고요?”
“음··· SF면··· CG가··· 세트가··· 예산이 많이 필요하겠군요.”
제작 1팀 팀장 윤경수와, 제작지원본부장 김주하는 시나리오를 훑어보고 침음을 흘렸다.
본의 아니게 불청객이 돼버린 최영준 대표이사.
“어··· 이거 이야기된 거 아닌가요? 이수한 사장님이 여기 와서 인수인계만 받으면 된다고 하던데···”
“휴···저는 이 각본 오늘 처음 봅니다.”
“아···”
“그런데 인수인계는 또··· 무슨 말이신지···[벡터맨] 때문에 정신없어 죽겠는데.”
윤경수 팀장의 말에 난감하게 수염 아래턱을 긁는 최영준 대표이사.
여기서 이 이야기까지 하면, 왠지 자신만 죄인이 되는 기분일 것 같다.
“진짜 이수한 사장님이 아무 말 안 하고 간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윤경수 제작 1팀장.
최영준 대표이사는 난감한 듯 말을 이었다.
“음··· 당황스럽네요. 일단 [벡터맨] TV판 2기를 제가 연출 하게 됐습니다. 제가 제작 2팀을 맡아서 [벡터맨] TV판 2기를 제작하고, 제작 1팀은 [홍길동전 2077]을 작업을 하기로 하긴 했는데···”
윤경수 제작 1팀장과 김주하 본부장은 서로 눈을 마주치곤 인상을 쓰며 머리를 싸매었다.
방금 제작 1팀장 입 모양이 분명 ‘이수한 씨바새끼’라고 한 것 같았는데.
최영준은 자신이 잘못 본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수한에 대해서 유난히 적대적인 이 분위기. 최영준은 스튜디오 나우의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이수한은 잘 나가는 감독이자, 이 제작사 사장 아니었나? 최영준은 같은 영화인으로 이수한에게 존경심이 있던 차였다. 맨손으로 시작해서 독립영화에서 대박 한 번, 제작사를 설립해서 초대박까지 친 젊은 감독.
그뿐만 아니다. 젊은 후배들을 대거 스튜디오 나우로 영입하여 훈련시키는가 하며, 망하기 직전 제로나인 스튜디오를 인수해 주지 않았나.
젊은 만큼 파격적이고, 인성까지 훌륭하다 생각했다.
그 감사함과 존경심을 표현하고자, [벡터맨] 라일라 공주의 변신 장면에 팀원들을 갈궈서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냈던 거였다.
거기에 미래를 예측하는 놀라운 혜안.
모두가 미쳤다고 말했던 [벡터맨] TV판. 아동특촬물에 예산의 두배를 꼴아박고, 모자라는 예산을 자신의 사비를 털어 넣는 것 을 보고, 최영준은 눈물을 흘렸다.
망해가는 제로나인 스튜디오를 살리기 위해 일감을 몰아주고 있구나. 망해가는 우리 제로나인을 살리기 위해서 이수한 사장이 무리하고 있구나 싶었다.
이수한 사장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팀원 모두 [벡터맨] TV판에 영혼을 갈아 넣었다. 우스운 아동용 특촬물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수한 사장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자발적인 크런치 모드에 돌입했다.
제로나인의 팀원들 모두 최영준의 생각에 공감했고, 자발적인 야근에 동참했다.
그 결과.
[벡터맨]의 초대박.
특촬물의 원조의 나라 일본에서의 초대박. 이후 홍콩, 태국, 중국 등에 잇단 수출.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벡터맨]TV판을 본 중국 영화계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일감들.
최영준은 전율을 느꼈다.
'이수한 감독님은 어디까지 보고 있었던 겁니까!'
그런 놀라운 혜안을 가진 이수한 사장이 가져온 [홍길동전 2077]이다. 당연히 감사한 마음으로 전사적인 역량을 동원해서 찍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헌데 제작 팀장이라는 사람은 영 탐탁지 못하다는 듯 말했다.
“이수한이 그러던가요?”
날카롭게 되묻는 윤경수 제작 1팀장.
“뭐 그런 셈이죠. 파이낸싱(제작투자)이 끝난 [백터맨]을 먼저 제작 2팀을 이용해서 찍으면 된다고 하던데요. 제로나인에서 [벡터맨] CG 작업하는 동안 [홍길동전 2077]찍고, 벡터맨 후반부 작업 끝나는 시기 맞춰서 [홍길동전 2077] 후반부 작업 들어가면 스케줄 나올 것 같다고 지우 씨가 너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길래 저는 스튜디오 나우와 이야기가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네? 마지막 다시 한번 말해줄래요?”
“아니, 배우가 회사 스케줄을 다 알고 있길래 스튜디오 나우 쪽에서 다 컴펌 된 건 줄 알고 찾아왔다고요.”
갑자기 주름진 미간이 펴진 두 사람.
최영준은 분위기가 더욱 적응이 안 되었다.
이수한과 이지우가 막역한 사이라는 것은 이미 영화판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까 제로나인 스튜디오 사무실에서, 이수한 대신 이지우가 계획을 설명하길래 두 사람이 따로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많이 하나 보다, 하는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이지우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앞의 두 사람이 반색하며 말을 이었다.
“에이, 최 대표님, 이게 지우가 만든 계획이었으면 그걸 먼저 말씀을 해주셨어야지요. 어쨌든 지우가 한다고 했다는 거죠?”
“어쩐지··· 계획이 디테일 하더라. 지우 씨가 하기로 한 거 면 진행해봐야죠. 제작지원본부는 큰 문제 없을 겁니다. 1팀장님? 제작 2팀장 들어오라고 할까요? [벡터맨]2기 까지 회의하려면 2팀장님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몇 초 전까지 눈으로 욕하던 두 사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두 개의 프로젝트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최영준은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