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115화 (116/121)

115. 한국에서 SF는 좀...

현주가 쓴 [찬란하게 빛나는]. 강우의 시점으로 본다면 전형적인 성장영화이다. 정신적 결함을 가진 방구석 천재의 성공기.

결함을 가진 천재가 멘토의 도움으로 성장하는 드라마.

그리고 그 멘토와의 관계가 스승이나, 가족이 아니라 연인이라는 점이 조금 특별한 점일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 아니야?”

내 화실에서 작업하던 현주.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내 말에 현주가 늘라면서 반문했다.

“음··· 나는 ‘현아’가 ‘강우’의 멘토 역할을 했다고는 전혀 생각 안 해. 그냥 두 사람은 연인이었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웠다고 생각해. ‘현아’는 자신이 글로서 표현 못 했던 성공을 ‘강우’로 부터 대리만족했다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한다···

‘강우’의 입장이 아니라 작가인 현주의 입장에서 봤을때는 그럴 수도 있겠네.

아니··· 듣고 보면 그러네.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지는 게 영화니까.

할 말이 없네. 현주는 예전과 비교하면 비할 바 없이 영화적 안목이 높아졌다. 그 정도 되니까, 진권호 감독님도 대본을 들고 직접 찾아왔겠지.

현주는 다시 돌아서 자신의 노트북을 뚫어지라 본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참··· 뒷모습도 예쁘냐.

이렇게 현주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현주가 다르게 보인다.

[찬란하게 빛나는]의 흥행성적과 무관하게 이미 이 영화는 성공한 게 아닐까. 나를 다시 돌아보게 했던 영화. 이미 나에게는 성공한 영화가 아닐까 한다. 세월을 거슬러 20대의 나를 다시 마주한 느낌이었으니까.

예전 연기 때문에 현주와의 관계가 심각하게 틀어졌는데, 이제 영화로 새로운 관계가 생긴듯한 느낌이 든다.

사랑하는 연인이자, 신뢰하는 작가.

아니, 그걸로는 부족해.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이해 하는 작가와 배우.

저 작가가 쓰는 작품이라면, 어떤 작품이라도 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그런 좋은 작가 말이다.

[찬란하게 빛나는]의 촬영은 약 3주 만에 끝났다. 상업영화에 비해 적은 예산으로 찍은 영화답게 촬영 일자 자체는 짧았다. 11월에 시작해서 12월이 시작되기 전에 끝났으니까.

이미 필름은 편집실로 들어간 상태였다. 약 5개월 후에 칸에서 최초상영 할 때까지는 스케줄에 여유가 생긴 셈이었다.

그간에 현주와 못했던 데이트도 좀 하고, 미뤄왔던 일도 좀 처리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도통 현주가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놀러 가자고 해도, 화실에 박혀서 글만 써대는 통에 모처럼 휴식기가 아쉽다고 할까.

그러던 중, 현주가 노트북을 ‘탁’하고 소리나에 닫더니 벌떡 일어났다.

“다 썼다!”

“도대체 뭔데 그래?”

“뭐긴 뭐야 신작이지.”

[찬란하게 빛나는]의 촬영이 시작되고, 촬영장에도 안 오고 신작에 매달려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통 보여주질 않으니, 뭘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벡터맨] TV 판이 끝난 이수한이랑 자주 만나던데, 이수한 한 테 나쁜 물 들면 안 되는데···

“진짜 안 보여줘?”

“응 안 보여줘.”

그러면서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날씨도 좋은데 놀러 안가?”

“나중에, 나중에! 나 수한이 오빠한 테 감평 받기로 했어. 새 시나리오. 연락할께!”

그러면서 화실 밖으로 빠져나가 버린다.

나랑 왜 안 놀아주느냐고···

***

일전 최지연 선생님에게 말했던 조건. 그건 완구 카테고리 중 일부를 타사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현재 레드캣이 취급하는 완구는 주로 벡터맨의 가면이나 무기, 변신 팔찌 등의 비교적 제작이 쉬운 제품들과 캐릭터 상품 위주였다. 예를 들면 라일라 공주의 마법 오함마 같은 것.

이러한 제품들은 일단 만들기가 크게 어렵지 않고, 어느 회사에서 만들든 품질의 차이가 작기 때문에 일본시장에서도 꽤 재미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벡터맨]이 타는 로봇의 프라모델이나, 피규어들은 사정이 다르다.

일단 레드캣 자체가 규모가 큰 편도 아니고, 피규어나 프라모델 같은 복잡한 금형이 필요한 완구는 레드캣 수준에서 소화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벡터맨] TV판 일본 방영이 끝난 직후, 반다이에서 연락이 왔다.

[벡터맨] 피규어와 로봇을 제작, 유통하기 위해서이다. 레드캣 에서도 일부 피규어와 로봇을 제작 유통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수준이 처참한 상태였다. 출시해놓고 욕만 먹고 있는 상황.

레드캣에게 시간을 주고 제작기술이 발전될 때까지 기다려 주면 좋겠지만, [벡터맨]의 인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보통 [벡터맨]과 같은 특촬물이나 애니메이션은 방영하기 전에 완구류의 유통까지 끝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게 보통이니, 그동안 레드캣의 사정을 많이 봐준 셈이다.

최지연이 피규어와 로봇 관련한 제작 유통을 포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반다이와 레드캣은 이 분야에서의 기술력 차원이 다르다. 경쟁이 성립이 안 된다. 사실 이건 한국의 어느 완구기업을 가져다 대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에서도 독보적인 금형 기술과 사출기술을 가진 회사니까.

그만큼 반다이의 수준이 높았다. [벡터맨]을 활용해 한국 완구회사를 끼고 피규어나 프라모델 만들어 일본 시장진출을 노린다 하더라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만큼 일본은 반다이가 시장진입장벽을 높여놓은 시장이기 때문이다.

최지연 사장도 못 올라갈 나무를 올라가려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레드캣에서 부족한 부분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 결과 레드캣이 피규어와 로봇 프라모델을 포기하는 대신 해외 판권을 가져가고 반다이에서 피규어와 [벡터맨] 로봇의 프라모델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일본에서 벌어들이는 로열티 금액은 레드캣이 벌어다 주는 로열티와는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벌어다 주는 중이고.

이게 벌써 몇 달 전 일이다.

반다이에서 만든 완구의 초도 물량이 일본에서 다 소화되고, 일부 물량이 한국에도 조금씩 풀릴때 쯤.

다시 한번 반다이 측에서 청운 엔터테인먼트를 찾았다.

나는 원래 오늘 현주와 놀러 가고 싶었지만···

크흡···

그래, 현주야 너는 이랬구나. 내가 여기저기 촬영 나가는 동안 나 없이 심심했겠구나.

벌 받는다고 생각해야지 뭐.

그러한 연유로 원래 참석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던 실무자 회의에 나도 참여하게 되었다.

엄연히 나도 [벡터맨]의 저작재산권의 소유자.

다국적 대기업 반다이가 왜 또 청운 엔터테인먼트를 찾아왔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회의실에서 진행된 실무자 회의.

간단한 인사말이 오가고 실무자 회의가 시작됐다.

그동안 메일을 이용해서 실무를 진행했을 텐데, 갑자기 반다이 측 실무자들이 한국에 들어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반다이에서 만든 [벡터맨]완구 판매량, 성장률. 그리고 지급 예정인 로얄티 금액 등에 대해서 짦게 설명했다.

여기까진, 메일로 보냈어도 충분히 확인이 가능한 사항들.

그리고 그 끝에 반다이 관계자의 깜짝 놀랄 발언이 이어졌다.

“[벡터맨] TV판의 일본판 리메이크를 하고 싶습니다.”

“네?”

채 실장이 놀라 반문했다.

일본의 디즈니라고도 불리는 반다이. 일본발 IP중 좀 유명하다 싶은 IP는 다 반다이가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드래곤볼], [건담], [디지몬], [원피스], [세일러문], [슈퍼전대], [가면라이더]···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지브라와 포켓몬 관련된 IP 빼고는 다 반다이와 연관 되어 있는 느낌.

시리즈의 시작부터 적극 투자해서 IP를 키워서 각종 완구류를 제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성공한 IP의 라이선스들도 다량 확보하여 제품을 찍어내는 일본 최대의 완구 회사.

아니 이제 완구 회사라고 하기도 힘들지. 엔터테인먼트 상품 제작 회사에 가깝다. 지금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러브라이브 애니메이션 제작도 반다이 계열인 걸로 알거든.

이미 [슈퍼전대]와 [가면라이더]라는 글로벌 히트시킨 특촬물을 가지고 있는 반다이.

게다가 이미 비슷한 경험도 가지고 있다. 일본의 [슈퍼전대]를 리메이크한 미국의 [파워레인저]. 미국에서 흥행을 바탕으로 다시 일본에서 흥행시켰다.

이번에는 반대로 [벡터맨]을 일본판으로 리메이크 해서 지금의 [벡터맨]의 흥행 열풍에 편승하려는 생각이다.

벡터맨 최종화 시청률이 10%였다고 한다. 저녁 6시에 놀이터에 아이들이 안 보일 정도. 케이블 티브이의 한계를 깨트려버린 수치였고, TNN의 형제 방송국이라 할 수 있는 루니버스에서 종영한 지 3개월이 넘은 지금 시점까지 재방송에 재방송을 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도 분명 성공적이었으나, 일본에서의 성공은 말 그대로 열풍, 혹은 광풍이라 불릴 만했다.

회사 내부적인 분석으로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의 성인들은 어렸을때부터 자연스럽게 특촬물을 보고 자란 세대이다.

특촬물이 그만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소재라는 것. 그런 소재에 유치하지 않은 전연령을 겨냥한 초고퀄리티 특촬물이 나왔으니 환장할 수밖에.

애, 어른 할 것 없이 [벡터맨]에게 빠지게 됐다는 것이다.

회의 간 잠자코 있던 내가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어··· 그런데, 일본에서 지금 [벡터맨] TV 판이랑 비슷한 퀄리티 유지할 수 있을까요?”

“걱정 마십시오.”

걱정을 안 하겠냐고···

일본쪽 제작사가 만드는 [벡터맨] TV판?

왜 일본에서 만화를 실사화한 영화들이 떠오르는 거지···

통역이 해준 내 말을 듣고 반다이 측은 자신만만하게 기획안을 꺼내어 내밀었다.

친절하게 한글로 번역까지 해놓은 기획안.

반다이가 말하는 [벡터맨] TV판의 일본판 리메이크. 정확하게는 일본판 리부트였다.

현재 [벡터맨]의 한국판이 종영한 지 반년도 안된 시기에 같은 스토리로 배우만 바꿔서 찍는 게 말이 안 되기도 하고.

기획안의 내용은 [벡터맨] IP를 활용한 일본 전대물 시리즈화에 가까웠다.

뒷장에는 유명한 일본 감독과 배우들이라며 리스트를 보여주기는 하는데, 대부분 모르는 사람 태반.

그렇다고 이 사람들 작품을 따로 찾아보고 싶은 생각도 안 든다.

미안하지만··· 니들이 만든 실사화든, 리메이크든 좋은 꼴 본적이 없거든.

나를 비롯한 청운 엔터테인먼트 측이 난감한 기색을 보이자 반다이 측에서도 나름의 이유를 말했다.

“지금 [벡터맨]의 인기를 이어갈 콘텐츠가 필요합니다. TV판의 후속이 제작되고 있다는 소식이 없기에 저희도 답답합니다.”

이해는 간다.

이런 쪽으로는 도가 튼 기업 아닌가. 콘텐츠를 제작하고 완구로 팔아먹는 시스템은 전 세계 어디보다 잘 되어 있는 회사다. 청운 엔터테인먼트가 IP를 활용하지 않는 것에 답답하겠지.

“사실 저희도 그 부분에서는 답답합니다. 이미 스튜디오 나우와 2편을 계약 하긴 했는데···”

“저희도 시즌 2가 스튜디오 나우와 계약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일본판 리메이크를 추진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벡터맨]의 지금의 인기는 이수한 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벡터맨]이 이수한의 똘끼와 개썅마이웨이가 만난 돈 지랄의 산물이라는 걸 이 사람들은 모른다.

나중에 제작비를 확인해보니, 제작비의 절반 이상이 이수한의 개인 돈을 부어서 만들었다. 물론, 해외 여러 곳에 수출하면서 수익을 냈지만.

거기에다, 이수한의 시나리오와 연출 능력이 온전히 담겨있는 작품이기도 했고. 제로나인 스튜디오의 VFX 기술도 무시 못한다.

즉, [벡터맨] TV 판은 이수한의 손에서 시작되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파괴력을 가지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TNN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벡터맨] TV판 2편을 스튜디오 나우에 오퍼냈지만, 아직 침묵 중인 스튜디오 나우.

결국 반다이 측은 스튜디오 나우에서 2편을 만들지 않으니, 자신들이 [벡터맨]을 가지고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어 보겠다는 건데···

“제가 가서 이수한 감독을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절때, 이수한 작업실에 간 현주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

미리 전화하고 찾은 제로나인 스튜디오.

현주에게 연락해보니, 이수한의 만화방이나 스튜디오 나우가 아니라 제로나인 스튜디오라고 해서 그쪽으로 갔다.

이미 내가 도착하니 현주와 이수한은 사무실 하나를 사용해 뭔가 작업하고 있었다.

“형은 왜 스튜디오 나우 안가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도망치는 중이야.”

“아니, 왜 도망쳐?”

“어우 말도 말라. 요새 [벡터맨]에 제작비 2배로 부은 것 때문에 김주하 실장이 너무 갈궈. 그리고 회사가면 자꾸 [벡터맨] TV판 시즌2나 [벡터맨] 극장판 찍으라고 너무 쪼아대서 요새 회사 안 나가.”

아··· 이수한 개인 돈을 들이부어서 만든 [벡터맨] TV판. 김주하 경영지원 본부장 입장에서는 황당했겠지. 이걸 이수한이 개인이 투자한 형식으로 바꾸고 정리하느라 머리 좀 아팠으리라.

“하기사, 회사 차원에서는 형이 회사 안 나가면 대이득이지.”

“그건 그렇지.”

인정하는 모습이 얄밉다. 놀릴 수가 없다.

“그런데, 지우야 니가 여긴 웬일?”

“그냥 너도 좀 보고, 수한이 형한 테 할 이야기도 좀 있고.”

내가 들어오자마자 슬금슬금 자료를 정리하는 현주.

진짜 뭐지.

“그런데 진짜 [벡터맨] TV판 시즌2 안 만드는 거야?”

“만들긴 해야지. 떡밥 회수도 해야 되고. 찍고 싶은 영상은 많은데··· 요새 좀 바뻐.”

“무슨 작업하는데?”

난감한듯 현주를 바라보는 이수한. 살짝 끄덕이는 현주.

그러자, 이수한은 현주가 정리하던 자료 중 두툼한 한 부의 서류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게 내밀었다.

가까이서 보니 각본이었다.

[홍길동전 2077]

각본 : 박현주, 이수한

연출 : 이수한

현주가 그동안 몰래 작업하던 각본.

사이버펑크 도사 활극의 각본이었다.

그리고 주인공 ‘홍선아’의 배역은 당연히 나였다.

현주가 쓴 작품은 어떤 작품이든 하고 싶기는 한데...

한국에서 SF는...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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