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오이오이 믿고있었다구!
현주의 첫 각본 데뷔. 내가 주연인 영화.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가질 수가 없다.
하지만, [찬란하게 빛나는]은 여태 해왔던 작업과는 다르다.
영화계 원로라고 불릴만한 감독. 그리고 그와 함께 수 편을 작업한 베테랑 스태프들.
내가 끼어들 틈이 없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조기퇴근을 걸고 예비군 대장과 한판 승부를 벌리는 예비군들 느낌이랄까.
분명 미래에서 온 내가 봤을 때 정말 구식이고, 시스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잘 돌아간다. 한 분야에 달인이 되면 대충 해도 일반인과 비교하면 훨씬 더 좋은 결과물을 내듯이 각 감독이 제 몫을 해낸다.
모든 게 어설펐던 [폭력의 사슬]과도 달랐고, 촬영간 바싹바싹 말라가며 작업하던 이태환 감독이랑도 다르다.
설렁설렁 대충대충.
그런데도 결과물만 보면,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장면별 핵심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콘티. 깔끔하게 정리된 사전제작 표와 예산기획.
그리고 시나리오의 분위기를 충실하게 재현한 미술 분야 레퍼런스까지.
프리프로덕션을 진행하는 것을 보고, 괜히 베테랑 스태프를 쓰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지우야, 화실에서 잠시 미팅해도 돼?”
“무슨 미팅?”
주말에는 줄곧 내 화실에서 작업하는 현주. 갑자기 현주가 내 작업실을 미팅장소로 사용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미술 감독님이 [찬란하게 빛나는] 주인공 화실 레퍼런스 뽑았다고, 진 감독님한테 보여 드리기 전에 나한테 한번 보여주고 싶다고 하시네. 사실 내가 다른 화가들 화실을 언제 한번 가봤겠어. 여기 생각하고 글 쓴 거지.”
“아, 그런 거면 언제든지 오케이지. 오시라 그래.”
영화 미술. 영화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절대 소홀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양찬호 감독은 그런 부분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고.
진권호 감독과 여러 작품을 하면서, 한국 배경에서 독보적인 사람이다. 사극부터 근현대까지 안 다뤄본 시대가 없는 걸로 안다. 그리고 진권호 감독 외 다른 감독과 작업하면서 SF나 블록버스터 영화도 몇 편 참여한 것으로 안다.
한 시간쯤 지난 후.
주소를 듣고 화실로 찾아온 양찬호 미술감독.
“아!”
화실에 들어오자마자, 양찬호 미술감독은 가벼운 탄성을 낸다.
“안녕하세···요?”
“네네, 안녕하세요. 현주 씨, 지우 씨. 여기 와보길 잘한 것 같네요.”
“네?”
양찬호 미술감독은 내 화실을 좌우로 둘러보며 말했다.
“글로는 잘 이해가 안 갔던 주인공의 심리가 여기 오니까 확 와 닿네요.”
“뭐가요?”
“아··· 주인공이 쓸쓸하잖아요. 우울하고. 현재에서 살지 못하고 과거에 사는 남자 같다고 할까나요. 여기 이 화실처럼. 텅 비어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고개를 끄덕이는 현주.
현주가 이 화실이 내가 쓰는 곳이라 말을 안 했나 보네. 아마도 내가 그냥 현주 따라 여기에 왔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화실 주인 앞에서 저럴리가 없지.
“오? 저거 누가 그린 거죠? 와, 무슨 여자애 그림만 수십 장을 그려놨네. 음··· 오?”
“왜요?”
“좋아서요. 화실은 삭막한데, 그림은 되게 따뜻하네요. 구도나 뭐 테크닉은 그냥 저냥 인대, 그림에 흐르는 정서가 좋아요.”
“감독님, 그림에 조예가 깊으신가 보네요.”
“하하, 미술감독 아닙니까. 농담이고, 원래 진짜 미술 전공이였어요. 그런데 이거 진짜 누가 그린 거예요??”
“제가요.”
“네··· 아! 네?”
“여기 제 화실인데요.”
“아··· 그럼 혹시, [찬란하게 빛나는] 모티브가···”
현주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옆에서 웃고만 있었다.
***
오로라 프로젝트. 회사 내부적으로 오래갈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자, 스타를 만들어보자 하는 생각을 공유하고 발전시킨 내용이었다.
사실 이건 내가 유튜브를 염두에 두고 진행했던 프로젝트였다.
과거, 딸 아이가 좋아하던 유튜브 채널이 있었다. 공주 콘셉트로 장난감을 소개하고, 짤막한 역할극을 하는 채널이 있었다.
보통 아이들처럼 차 안에서, 식당에서 유튜브를 보던 아이. 딸은 그 채널에 있는 영상을 다 보고, 그것도 모자라 새로운 영상이 뜰 때마다 봤던 영상을 반복해서 봤었다.
방송을 전문적으로 하는 내 입장에서 봤을 때 좋은 퀄리티라고는 할 수 없던 영상들이었다. 앵글은 단조롭고 배경은 허접하고. 다루는 주제들도 앞 광고가 포함된 대부분 장난감 등의 놀 거리 위주.
다만 10분 단위로 바뀌는 주제, 캐릭터가 가지는 힘, 빠른 진행 등으로 아이의 시선을 빼앗았다.
매번 떼쓰는 아이를 달래가며 휴대폰 뺏고, 태블릿 뺏고. 휴대폰을 아이에게 떼어놓고 나면 이어지는, 이거 사줘, 저거 사줘.
뭔가를 사주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하면 아이의 정서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
좋은 주제, 좋은 퀄리티의 영상을 만들어 부모는 마음 놓고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고, 아이는 즐겁게 시청할 수 있는 그런 영상이 있으면 어떨까.
처음 [벡터맨]을 하기로 마음먹고, 오로라 공주의 저작 재산권만 똑 때서 가져왔을 때부터 했던 생각이다.
그리고 장인호 사장에게 오로라 프로젝트에 은근슬쩍 교육방송 이야기를 꺼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였다.
돈이야 스마트폰이 나오고 유튜브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일 때쯤이면 코인에 투자했던 내 개인 재산이 한국에서 한 손가락으로 꼽힐 수도 있다. 그런 내가 그깟 광고 수익 몇 푼 때문에 오로라 프로젝트를 시작했겠나.
그리고 유튜브 키즈가 나오면 그 광고 수익조차 반 토막 날 텐데.
딸 아이에게 관심도 없던 내가, 그깟 유튜브 좀 많이 본다고 혼내고 잔소리했던 게 계속 마음에 남았다.
딸아이를 기억하고 추억하며, 딸 아이에게 못 해줬던 일을 더 많은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
초기투자비용을 크게 잡아 촬영장과 소품을 만들고, 괜찮은 스태프를 고용하고, 라일라 공주의 저작재산권을 적극 활용한 재미있고 유익한 유튜브 채널.
어쩌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최소한 나는 광고료 몇 푼 때문에 저질 콘텐츠를 만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몇 달이 훌쩍 지났다.
[찬란하게 빛나는]의 프리프로덕션이 끝나고 본 촬영의 날짜가 잡혔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겨울. 11월에 첫 촬영이 계획되었다.
내년 칸 영화제에 제출을 염두에 두고 촬영 스케줄을 짰다고 했다. 칸의 경쟁부문에 작품을 제출하기 위해서는 월드 프리미어(전 세계 최초개봉)가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벡터맨]의 첫 방영 하는 날.
일부러 세화 세호 남매를 데리고 이수한의 만화방으로 왔다. 이수한의 만화방에 대형 스크린과 빔프로젝터가 마련되어 있기도 했고, 내가 애들 데리고 놀기에 이만한 곳이 없기도 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내가 애들을 데리고 오고, 현주는 먹을 것을 챙겨서 스크린 앞에 자리 잡았다.
몇 개의 광고가 지나가고, 시작한 오프닝.
유명 비주얼 록밴드에게 의뢰한 경쾌한 주제가.
그리고 주제가의 박자에 맞춰 편집된 벡터맨들의 액션 장면.
후렴구가 끝나고, 엔딩에 맞춰서 ‘쿵’ 하고 여이수가 오함마를 찍으며, 아니 마법봉을 내려치며 주제가가 끝난다. 그리고 오함마의 하트 위로 [벡터맨]의 로고가 뜬다.
오프닝부터 신경 쓴 티가 팍팍 난다. 빠르게 컷을 나눈 벡터맨 3인의 액션. 액션하면 이수한, 이수한 하면 액션 아니겠나. 코리아 액션스쿨과의 인연을 이용해서 경험 많은 액션감독 까지 섭외해서 촬영을 했다더니, 액션의 짜임새가 기존 특촬물의 궤를 벗어나 있다.
백터맨 3인의 금속 생명체(곰, 호랑이, 독수리) 특징을 액션으로 잘 살렸다.
거기에 더해 벡터맨이 입은 슈트도 기존 벡터맨의 슈트를 재해석하여 트렌드에 맞게 디자인했다. 최근 개봉한 [강철남]의 슈트에 금속 생명체의 개성을 혼합한 느낌이었다.
여이수는 뭐 말할 것도 없고. 비싼 변신 장면부터 시작해서, 오프닝의 절반이 여이수로 채워져 있는 느낌이었다.
“오! 쩌는데?”
현주의 감탄. 그리고 남매는 말없이 스크린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1화가 시작되고. 나는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구상하고 고민했던, 오로라 프로젝트가 이수한의 트롤링과 여이수의 오함마로 개박살 내는 걸 나는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망했어. 오로라 프로젝트는 망했어.
이건 모두 빌어먹을 이수한 때문이다.
여이수가 오함마 들었을 때 막았어야 했다.
경수형은 안 말리고 뭐한 거야··· 제작 1팀 팀장으로 이수한이 폭주하면 말렸어야지.
1화, 2화의 내용 자체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나도 대본을 읽어봤으니까. 히어로 영화처럼 1편에서 주인공의 배경을 설명하느라 재미가 반감 시키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시작과 동시에 지구에 사악한 외계인이 쳐들어온다. 서울에 묻혀 있는 카오스의 비밀을 노리기 위해 침략하는데.
서울에 침략한 사탄 제국의 군대. 먼저 도착한 라일라 공주는 위기에 처한 3명의 소년을 구하고 각각 벡터맨으로 각성시키고 싸운다.
분명 피가 튀거나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는데, 액션이 너무 화려하다.
이럴 거면 [악의 기록2]를 찍지 싶을 정도의 화려하고 진지한 액션.
특히 라일라 공주가 각성하지 않은 3명의 용사를 구하러 가는 장면. 영화 [늙은 소년]의 장도리 씬을 오마주 한 듯, 17:1의 오함마 액션을 보인다.
아니, 우주에서 온 공주가 왜 오함마 가지고 저런 액션을 하는 건데. 미친 이수한.
2화가 끝나고. 화실에 박혀서 오는 전화를 무시하고 그림만 그렸다.
그림을 그리면서 감정을 좀 가라앉히고, 다른 방향으로 오로라 프로젝트를 살릴 방법이 없는지 구상하고···
휴대폰을 들어 그동안 온 연락을 확인했다.
애플에서 사과폰을 만든지는 좀 됐지만, 전생에도 안드로이드 휴대폰만 썼기에 삼성에서 스마트폰을 만들자 마자 샀다.
부재중 통화가 10통화 넘게 쌓여있었다.
현주, TNN 예능국 국장([벡터맨]은 예능국에서 관리한다.), 이수한, 최지연 사장, 장인호 사장 등.
여러 곳에서 온 전화가 쌓여있다.
먼저 현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못 받은 게 좀 미안하기도 하고.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현주야, 무슨 일 있어?”
- 아니, 너 전화 너무 안 된다고, 장 사장님이 확인해보라고 해서.
“아··· 나 그림 그리고 있었어.”
- 잘됐네. 나도 그럴 거 같아서 지금 화실 앞. 조금만 기다려봐 곧 도착해
그리던 그림을 정리하고 곧 현주가 화실로 도착했다.
“왜 이리 전화를 안 받아?”
“그냥··· 그림 그리느라.”
회사에서 진행하는 오로라 프로젝트. 내 개인적으로는 오로라 공주를 이용한 아동용 컨텐츠 개발이 잘 안 될 거 같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대충 변명했다.
“지금 [벡터맨], 아니 오로라 공주 때문에 난리 난 거 모르지?”
“하··· 그정도로 욕 먹고 있어? 그래도 그렇게 욕먹을 정도는 아닐텐데.”
“얘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현주가 화실 구석에 있는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기사를 띄웠다.
[이수한 감독, 의외의 선택. 아동 특촬물 [벡터맨] 2030 세대에 대흥행]
ㄴ 조카가 틀어놓은 거 같이 봤다가, 끝까지 다 봤다. 액션 쩔더라.
ㄴ 라일라 공주 진짜 매력적임.
ㄴ 어렸을 때 생각나고 좋았음. 그때 엄마한테 벡터맨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다가 혼났는데, 이제는 내 이름으로 된 카드가 있지.
[할리우드 게섯거라. 국산 특촬물 CG의 발전!]
···현재 TNN 측으로 인터넷 다시보기 문의가 폭주하고 있으며, TNN측은 조속히 [벡터맨]의 인터넷 다시보기를 마련할 것이라 전했다.
ㄴ 기자님, 할리우드는 좀···
ㄴ 아님, 라일라 공주 변신 장면은 솔직히 할리우드 저리가라였음.
ㄴ 아드님 부디 벡터맨을 좋아해 주세요···
어? 뭐지 이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반응과 다르다.
이거 주 시청자가 아동들 아니었나?
많이 봐줘야 초등학생까지가 주 시청자라고 생각했는데. 올라오는 기사들은 대부분 2030세대의 반응이 올라오고 있었다.
시청률은 종편, 거기에다가 아동을 겨냥한 방송이라 3% 정도 였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올라온 기사는 무슨 시청률 20% 이상 돌파한 것 마냥 올라오고 있었다.
“현주야 이거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떴지?”
얼떨떨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다른 반응.
“이거 봐.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벡터맨]이 엄청나게 화제가 됐나 보더라고.”
그러면서 보여주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을 주로 취급하는 커뮤니티였다.
[오이오이, 이수한쿤. 내가 해낼 줄 알았다구!]
ㄴ 이수한이 누군데?
ㄴ [악의 기록]이랑 [폭력의 사슬] 모름?
ㄴ 영화는 잘 모른다능(후다닥)
ㄴ 어휴 됐다. 이게시판에 뭘 바라냐
ㄴ 오로라 공주 다이스키!!!!
[강철의 세일러복 입은 공주가 망치를 휘두른다고? 이건 못참지]
ㄴ 저 세일러복 슈트 제작에만 수천만 원 썼을 듯.
[오로라 히메, 저 배우 누구임? 처음 보는데? 발차기 개쩌네]
ㄴ 나 저 여자 알고 있음. 가라데 전국대회 무제한 체급 1위 한 여자임. 구봉산 강냉이로 유명함.
ㄴ 구봉산 강냉이? 구봉산 강냉이가 저 여자임? 구봉산에 반달곰 강냉이 추수한 사람이, 저 여자라고?
ㄴ ㅇㅇ천연기념물 건드려서 벌금 오지게 물었을걸?
[와, 오로라 공주한테 한 대만 맞아봤으면 좋겠다]
ㄴ 맞으면 죽는다능···
[1화, 4분 32초, 오로라 히메 발차기 할 때 팬티 보임. 분홍색]
ㄴ 오이오이 믿고 있었다구!
이 커뮤니티 최고의 화제는 단연 [벡터맨]이었다. [벡터맨]을 주제로 많은 자료가 생성되고 다른 커뮤니티로 전파되고 있었다.
‘지이이이잉’
그림을 그리느라 진동으로 해놓은 휴대폰이 울리고.
‘레드켓 사장 최지연 선생님’
상황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재빨리 통화버튼을 눌렀다.
- 지우야, 이거 무슨 일이야? 일본쪽에서 오로라 요술봉 발주가, 한국 유통량의 2배가 들어왔어.
뭔가···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흉측한 오함마라고 무시했던 요술봉.
요술봉이 아니라, 돈 복사 도깨비방망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