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110화 (111/121)

110. 부럽다

약 10초 정도 분량의 영상.

라일라 공주가 일상복에서 슈트를 갖춰 입는 그 변신 장면 영상은 확실히 시대를 앞선 느낌이 강하다.

머나먼 우주에서 온 용사들답게, 발전된 과학기술과 에너지원을 사용한다는 설정. 그 설정에 맞춰 금속 생명체를 가공한 슈트는 살아있는 강철과 같이 여이수의 온몸에 장착된다.

그 슈트가 어쩐지 세일러복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법 소녀와 특촬물의 메카닉의 느낌을 섞어놓은 듯한 슈트였다. 뭐 어떤가. [마법기사 레이어스]의 여고생들도 이 세계에서 교복 같은 갑옷 입는데.

우주에서 온 공주가 입은 강철슈트가 세일러복 좀 닮을 수도 있지.

곧이어 여이수가 손을 뻗자 아무리 봐도 오함마처럼 생긴 마법봉이 번쩍이며 나타난다.

오함마 중앙 부분에는 큼직한 하트, 한쪽에는 부스터가 달려 파괴력과 살상력을 극대화해놓은 모양이다.

강철의 하트와, 망치 가속 부스터. 이 얼마나 끔찍한 조합인가.

그 흉물스러운 망치가 여이수 손에 들리자 볼만해진다.

작고 동안인 여이수의 귀여운 외모에 강철의 슈트. 그리고 오함마가 기묘한 어울림을 보여준다.

배경 소리가 아직 완성이 안 돼서 임시로 섞은 허접한 음향임에도 그 영상을 본 JHA 관계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일본 방송국 관계자의 요청으로 10초짜리 영상을 5번 더 반복 재생했다. 잠시간의 침묵. 이 후, 일본 방송국 관계자가 말문을 열었다.

“인상깊네요. 좋은 영상 잘 봤습니다. 이 작품을 연출 하는 것이 이수한 감독 이라고 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수한 감독의 차기작은 특촬물입니다. 참고로 각본도 이수한이 직접 쓴 작품입니다.”

일본 방송국 관계자들은 자기네들 끼리 일본말로 수근대기 시작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말 중, 유일하게 알 수있는 ‘이수한’. 그리고 ‘악의 기록’을 거론하며 이야기한다.

나도 그 시간을 빌려 TNN 관계자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방금 이수한 감독님 작업실 갔다 왔는데, 이 영상 뽑아놓고 작업하고 있더라고요. 오늘 계약하는데 혹시 유리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아, 네. 그런데 이거 우리가 독단으로 진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요. 문제 생기지 않을까요?”

TNN 드라마국 CP의 걱정스러운 물음.

[벡터맨] TV판이 드라마국의 편성이 아니라, 예능국의 편성이라 잘 모르는 눈치였다.

“TV판 영상물에 대해서 저작재산권이 스튜디오 나우에 있어서 괜찮을 겁니다. 이수한 감독에게는 미리 말하고 왔거든요. ”

“아··· 네.”

투자자금은 레드켓(최지연의 완구회사)과 TNN이 분담. 레드켓은 완구에 대한 제작과 유통권을, 그리고 TNN은 방영권을 가져간다.

당연히 매출에 대해서는 투자금액 비율대로 레드켓과 TNN이 쉐어 하는거고.

TNN에서 득이 되면 득이 되지, 손해 갈 일은 전혀 없다는 이야기이다.

거기에 만약 [벡터맨] TV판이 일본에 선판매 후 제작된다면, 여러모로 모두에게 돌아가는 이득이 많다.

[벡터맨]은 이제 초반부 촬영 중인데, 이수한의 트롤링(?)으로 앞으로 예산이 더 필요하다.

이 사전계약이 진행되면 투자자금 조기회수로 자금조달을 조금 더 유연하게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일본방송사인 JHA사는 아직 방영되지 않은 작품이라 검증이 되지 않았다는 리스크가 있지만, 판권을 싸게 얻어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TNN은 앞으로 있을 해외 계약에 [벡터맨] TV 판을 무기로 다른 국가들과 교섭할 때 좋은 카드 하나를 얻는 것이고. 혹시라도 운이 좋아 [벡터맨] TV판이 일본에서 성공한다면, 수익도 무시 못할 것이다.

모두에게 득이 되는 계약.

그러던 중, 일본 방송사 측 관계자들이 의견이 모인 듯 말을 꺼냈다.

“이름이 [벡터맨]이라고 했습니까? 분명 특촬물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보여주신 영상은 마법 소녀의 모습이 강합니다.”

“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이수한 감독은 지금까지 영화만 찍었지만, TV 애니메이션이나 아동용 특촬물에 절대 무지 하지 않습니다. 이수한 감독 나름대로 남아와 여아로 분리된 시장에서 타겟팅을 넓히고자 하는 시도죠. 특촬물에 마법 소녀의 요소를 조금 혼합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벡터맨] TV판 기획서를 통역사에게 넘겼다.

“제가 급하게 오느라 아직 번역본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필요하시면 스튜디오 나우에서 번역된 기획서를 보내 드릴 겁니다. 판권 협상을 위한 연락도 앞으로 스튜디오 나우로 하시면 되고요.”

방송 기획서를 양손으로 소중히 받아드는 JHA관계자.

판을 깔아놨으니, 세부적인 협상은 김주하 본부장과 이수한의 몫이었다.

***

영화 촬영간 가장 고생을 하는 분야를 꼽으라면 어디일까.

배우들? 연출부? 조명? 촬영?

파트별로 다 힘들고 어려운 점이 있겠지만, 그 중 육체적으로 고생하는 팀은 아마도 미술팀일 것이다.

글로 된 세계를 가장 먼저 시각화하는 곳답게 영화 속에서 구현될 세계를 만들었다 부수기를 수어번 한다. 처음에는 문서와 스케치로. 이후에는 각종 세트부터 시작해서 소품까지. 모두 미술팀의 소관이다.

남들이 일할 때 일하고, 쉴 때도 일하고.

쉬는 날이 없는 미술팀.

쉼 없이 일하는 미술팀의 감독이라 그런 걸까. 양찬호 미술감독은 40대 중반의 나이지만 겉보기에는 50이 훨씬 넘어 보인다.

새까만 얼굴에 마른 듯한 몸. 유난히 발달한 팔뚝의 근육과 불룩 솟은 핏줄이 겉보기와 달리 젊구나 예상하게 할 뿐이었다.

영화제작을 위한 회의는 진작에 끝났지만, 양찬호 미술감독은 여전히 퇴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양찬호 미술감독의 사무실을 찾아온 진권호 감독.

둘은 오랜 영화 동료였다.

수 편의 영화를 같이 찍으며 서로의 성향을 너무나 잘 아는 두 사람이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형님.”

“그냥. 생각나서 들렸어. 준비 잘하고 있나 싶어서.”

양찬호 미술 감독은 놀리던 펜을 놓고, 진권호 감독을 맞이했다.

미술감독 마다 준비를 하는 과정은 제각각이다. 어떤 미술감독은 글로 정리하는 타입이 있고, 어떤 미술감독은 사진과 영상으로 준비하는 감독도 있다.

양찬호 미술감독은 그림을 그린다. 이는 양찬호 미술감독이 미술, 그것도 순수 미술을 하다가 영화판으로 흘러들어왔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자연스럽게 찬장에서 잔과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는 양찬호.

“형님, 안주할게 없는데, 라면이라도 부술까요?”

“아냐 됐어. 내가 들고 왔어.”

가방에서 주섬주섬 곶감을 꺼내는 진권호 감독.

“웬 곶감이에요?”

“받았어. 배우한테.”

“그 배우는, 무슨 한여름에 곶감을 선물한대요?”

“줄 만하니까 줬겠지.”

양찬호 미술감독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피식 웃는 진권호 감독 얼굴을 보니 뭔가가 있긴 한 거 같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 대본 좋던데요. 신인이라면서요.”

“완전신인은 아니고, 공동 각본가 몇 번 했더라고.”

“어떤 작품이요?”

“[폭력의 사슬], [민주를 기다리며].”

“아! 어쩐지 대본이 좋더라.”

고개를 끄덕이는 양찬호 미술감독. [폭력의 사슬]은 일반 관람객보다 영화계 관계자들에게 더욱 유명한 작품이다.

신인 감독의 독립영화가 저 정도로 흥행한 경우는 여태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립영화, 그것도 액션 장르. 100만 관객은 그만큼 대단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폭력에 사슬]에서도 이지우인가? 걔 나오지 않았나요?”

“그렇지.”

“어? [민주를 기다리며]도 이지우 나오잖아요. 여자친구가 작가하고, 남자친구가 주연배우 밀어주고 그런 거 아니에요? 이번 각본 계약도 이지우 출연 조건으로 각본 팔았다면서요.”

“그렇지···”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어린애들이 학연 지연도 아니고, 인연을 끌어다 쓰네.”

“찬호야···”

“네?”

“곶감 먹어라.”

“네.”

“넌 특별히 두 개 먹어라.”

“네, 형님.”

오랜세월 함께 작업한 시간이 많아서일까.

두 사람은 이후로 오랫동안 말없이 술과 곶감을 먹었다.

“찬호야.”

“네, 형님.”

“기성이 알지?”

"한국에서 예기성 선배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당연히 알죠."

"갑자기 예기성이··· 부럽다."

"네?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냥··· 좀 부러워. 예전에는 예기성이 한심한 패배자라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부쩍 부럽다는 생각이 드네."

"하, 참. 형님도··· 예기성 선배님이 패배자면 한국 영화계에 승리한 사람이 어딨습니까. 솔직히, 예기성 선배님 인품도 훌륭하시고, 연기도 잘하시잖습니까. 십 년도 전에 캐스팅 깐 것 때문에 아직 꽁해 있는 거면서."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언제 캐스팅 깐 걸로 꽁해 있었다고 그래. 꿈도 없고 비전도 없는 겁쟁이라서 싫어하는 거지."

십여년전, 진권호 감독도 예기성도 국내를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로 전성기를 누리던 때였다.

진권호 감독은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의 성과를 얻은 때였고, 예기성은 국내 정상의 배우로서 활동하던 시기.

자신감에 차있던 진권호는 예기성을 캐스팅하려고 했다.

‘상을 위한 영화는 찍지 않네.’

대본을 본 예기성의 매몰찬 거절.

그 당시 한국영화는 각본, 미술, 연기, 촬영 모든 게 미숙했던 시기였다.

연출만으로 이모든 걸 극복할 수 없다 생각했던 예기성의 판단은 거절이었다.

세계무대로 계속 도전해야 한다는 작가주의 감독. 권위 있는 세계의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대중들의 관심을 영화로 이끌어야 한다는 권진호 감독.

영화계가 발전하려면 많은 인재가 영화판에 유입되어야 하고, 많은 인재가 유입되기 위해서는 영화계의 상업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 생각하는 예기성 배우.

영화계의 발전을 위해서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이 캐스팅 거절은,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거절 이후 10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실적을 올린 진권호 감독. 하지만 작가주의 감독의 한계에 부딪힌 진권호 감독은 투자자들에게 외면받는 감독이 되었다.

멀티플렉스 극장의 등장과 동시에, 가장 강한 티켓 파워를 가지게 된 예기성. 돈은 많이 벌었으나 뛰어난 연기력에도 해외 수상실적은 전혀 없는 국내용 배우에 머물렀다.

“에이 형님. 예기성 선배가 거절한 시나리오로 결국 상영관 걸었다가 완전히 망했잖습니까. 그 이후로 예기성 선배 싫어하는 거 맞으면서.”

“아니라고 인마! 예기성 그놈이 출연했더라면 달랐을 거라고.”

성난 진권호의 말에, 그냥 웃고 마는 양찬호 미술감독.

요 며칠, 예기성이 와서 했던 말을 계속 곱씹게 된다.

‘새 시대의 파도가 목 밑에 찼다.’

자기 뜻을 이어줄 새싹을 만난 예기성은 진권호 감독에게 고개를 숙여 부탁을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만들어 놓은 토양 위로 자라날 거목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어쩐지 진권호는 예기성에게 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기 뜻을 이어줄 후배를 둔 예기성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애써 실망한 마음을 추스른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배우는 나이가 들수록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줄어든다.

실력과 상관없이, 나이 때문에 맡을 수 있는 배역에 한계가 생겨버린다.

하지만, 감독은 나이가 들어도 감각만 유지한다면, 언제까지고 영화의 중심에서 연출 직을 맡을 수 있다.

진권호는 아직 현역인 셈이다.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찬호야.”

"네.”

“잘하자.”

“네.”

현시점, 가장 화제성이 높은 배우. 좋은 각본. 그리고 수십년간 한국 영화의 정갓점에 있었던 감독과의 만남.

진권호 감독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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