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109화 (110/121)

109. 러시아에 에어컨 팔기

나는 감독의 연기지도를 즐기는 편이다.

전생에 유일한 취미가 술마시고 영화인들과 대화 하는 거였다.

그만큼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 토론 하는 것을 좋아한다.

감독의 연기지도도 마찬가지.

영화에는 감독이 구상하는 세계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배우는 감독이 구상한 세계관 안에서 감독의 의지를 실천하는 대변인이자 대리인이다.

내가 생각하는 세계관과 감독이 구상한 세계관의 충돌할 때, 새로운 합의점을 탐구하고 찾아냈을때 희열.

영화 촬영 후반이 되면 몰입으로 인해 배우들은 캐릭터의 이해가 깊어진다. 때로 세계관의 주인이었던 감독 보다 더한 이해를, 퍼포먼스를 보여 줄대가 있다.

과연 진권호의 영화세계는 얼마나 깊을 것이며, 어떤 영화를 보여줄 것인가.

전생의 이시기에 나는, 대학생이였고 내가 본격적으로 활동할때에는 진권호 감독은 이미 은퇴 한 뒤였다.

그렇기에 이 세계적인 감독이 구상한 세계가 궁금하고 기대가 됐다.

딱, 현주의 각본에 손 대기 전까지 말이다.

현주의 각본은 완벽하다.

최소한 나에게는.

[찬란하게 빛나는]의 초고가 나오고, 둘이서 틈틈히 계속 수정을 했다. 나는 [응답하라 119]의 마지막 촬영 이후에 본격적으로 현주와 이 각본을 맞춰보기 시작했고.

현주의 각본을 연기하며 느낀 기묘한 몰입의 감각.

이전 [폭력의 사슬]에서 느꼈던 몰입의 느낌과 유사했다.

[저승 카페]는 조연이기에 비중이 작아 보여줄 기회가 없었고.

[민주를 기다리며] 에서는 영화의 미장센에 가려서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연기법.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메소드니, 분석적 연기법이 아니라, 마치 내가 캐릭터와 동화 되는 듯한 느낌. 아니 어쩌면 나의 일부를 꺼내어 보여주는 느낌.

현주의 의 머릿속에 있던 내 모습을 꺼낸 듯한 캐릭터.

그런 캐릭터를 연기 하는 나.

현주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내가 연습하는 모습을 찍은 영상을 보고, 난 처음으로 내 연기에 낮설음을 느꼈다.

감정이 올라 올때마다 되새김질하는 난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내 연기를 보고 ‘내가 이정도 였다고?’ 하는 생각이 드는 연기.

전생의 연기, 메소드와 분석적 연기법을 합친 연기와도 달랐고, [악의 기록]에서 처럼 지나친 과몰입으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졌던 연기와도 전혀 다른 연기.

카메라 속 캐릭터는 마치 내 속의 일부분을 펼쳐놓은 듯한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너무 놀라 다른 대본을 가지고 테스트 해봤으나, 이전 연기와 별다를 바 없는 연기였다.

현주의 대본에서만 발현되는 이 기묘한 능력.

지금의 [찬란하게 빛나는] 대본은 현주의 필력과 이 능력을 합쳐 만든 작품이다.

현주가 대본을 쓰고, 내가 연기하고. 내 연기를 보고 현주가 다시 수정하고. 그걸 다시 연기하고의 반복. 대본에 나와 있는 단어 하나, 쉼표하나 까지 세심하게 세공하듯 만들어진 작품.

각본 수정을 반복하며 나는 이 연기법을 내 몸에 익히고 발전시켰다.

그런데 그런 작품에 진권호 감독이 칼을 댄다고 한거다.

속에서 천불이 나지.

그렇다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감독에게 신인배우가 찾아가 영화를 볼 줄 모른다고 쿠사리 줘봐야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대본에는 보이지 않는, 나를 염두해두고 쓴 각본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감독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진권호 감독님 감 좀 잡으시라고, 한여름에 감 찾으러 다닌거고.

“어떻게 진권호 감독이랑은 잘 만나고 왔어? 오늘 카메라 테스트 맞지?”

회사에 도착하자 마자, 사장실로 들어가는 장인호 사장과 마주쳤다.

사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일개 배우의 스캐줄을 왜 그리 잘 아시는지.

“네. 카메라 테스트는 맞는데, 잘 만나고 왔는지는 저도 잘···”

“왜? 뭐 있었어? 너 답지 않게 말을 흐린다?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 하자. 커피 한잔 말아주라.”

“어차피 믹스커피인데, 누가 타든 똑같을 텐데요. 현주 보러 가봐야 되는데···”

“에이, 그래도 기분이 있지. 한잔 말아줘, 응? 나는 그 커피믹스 봉지에 니 얼굴 있어서 못 뜯겠어. 우리 배우 상처날까봐.”

장인호 사장이 너스레를 떨며 TV를 켠다.

음··· 봉지 디자인이 좀 그렇긴 하네. 왜 얼굴 있는 부분에 절취선을 만들어 놔서.

장인호 사장과 사장실에 들어가고 몇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싸장님! 지우 여기 있어요?”

“어? 어! 나 여기있어.”

“도대체 뭐 어떻게 한거야? 진권호 감독님 문자왔어!”

“뭐라고?”

“원래 각본대로 진행하자고!”

그러면서 현주는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내게 보여준다.

서툰 솜씨로 쓰여있는 문자. 원래 각본대로 진행하자는 내용이였다.

후···

만약 진권호 감독이 화를 냈다거나, 각본 수정을 계속 요구했다면 계약 파기까지 생각했던 나로서는 한시름 놓이게 하는 연락이였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뻤다.

진권호의 세계관에서 연기 할 수 있게 됐으니.

그동안 보아왔던, 진권호의 작품들을 되세기고 있을 때였다.

장인호 사장이 생각없이 틀어놓은 TV. 거기서 익숙한 사람이 인터뷰 하고 있었다.

-개인정보 보호와 가짜 뉴스 생산을 막아야 하며, 언론의 횡포를 근절해야 하는데에는 초당적인 협력이 필요한 만큼···

작년에 재선한 지일권. 이제는 4선, 당 중진인 그가 언론개혁을 부르짖고 있었다.

정종철을 반쯤 죽여줄 판이 짜여지고 있었다.

***

시간이 빠르게 지난다.

진권호 감독과 카메라 테스트 한지 벌써 한달 가량 지난 상태였다.

대원 영화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의 프리프로덕션이 진행 되었고, [벡터맨]은 벌써 촬영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어차피 대원 영화사와 진권호 감독은 내가 신경쓸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내 기억으로 진권호 감독이 찍은 영화가 100편 가깝다. 70년대 초에 데뷔 한 그는 당시 반공영화를 1년에 몇 편씩 찍어내며 영화 찍는 기술을 배웠다.

그가 인터뷰 하기로, 자신은 둔재이며 영화를 반복해서 찍고 실패를 경험했기에 지금의 수준 만큼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정도니까.

그만큼 많은 영화를 찍었기에, 미술, 촬영, 조명 등. 그와 일하는 사람은 정해져있다.

소위 말하는 진권호 사단.

특히 미술 분야는 국내에 따라올 팀이 없다. 디테일, 영화의 이해도 등. 거기에 더해 수많은 영화를 찍으며 사극부터 근현대까지 재현 안해본 영화가 없다. 이런 미술팀의 역량은 영화의 완성도를 극적으로 끌어올린다.

문제는 [벡터맨] 이었다.

아니, 문제는 이수한이었다.

사랑에 심취한 이수한이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여이수, 그러니까 라일라 공주가 전투모드로 변신하는 10초 짜리 한 장면에 [벡터맨] TV판 제작비 절반을 태웠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제로나인 스튜디오 전원이 달라붙어서 한달동안 작업했고.

아, 물론 결과물은 좋다. 과장을 안 보태고 지금 시기의 히어로물 [강철남]에 비해서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잘 뽑았다.

제로나인 스튜디오가 원체 기술력이 좋기도 했고, 원래 CG은 들이 붓는 돈에 정비례해서 나오는 거니까.

원래 [벡터맨]의 화면 몇번 깜빡이고 옷 바꿔 입는 변신장면 이랑은 비교가 불가능 했다.

여이수의 손 동작 발 동작 하나에 슈트가 착착 감기듯이 달라 붙었고 살아 있는 기계처럼 매카닉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저 슈트 뽑는 것만 해도 수천만원은 들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이게 얼마짜리라고?”

“에이, 얼마 안해. 어차피 우리 회사 직원들 데리고 한거야. 제로나인 직원들 실력이 좋더라고. 아참 슈트는 그냥 내 돈으로 했어. 촬영 끝나면 만화방에 전시해 놓으려고. 일부러 제작비로 안잡고 내 개인 사비로···”

“김주하 실장님 말은 좀 다르던데. 제로나인 직원들 크런치 모드로 한달동안 집에 못 갈정도로 작업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벡터맨] TV판 예산 절반 부어서 외주 돌렸다고 하던데?”

“제로나인 직원들 너무하네. 내가 보너스로 월급 2배로 주기로 했는데··· 그걸 다 꼰지르냐···”

“이정도면 횡령 아니야? 배임인가?”

“아닐걸? 제로나인 직원 보너스도 내 돈으로 했고, 외주 돌린 제작비를 인 마이포켓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게 횡령이냐. 사장으로서 어! 정당한 그 뭐냐···”

“권리행사?”

“어, 그래 권리행사지.”

“권리남용이겠지.”

모르겠다··· 내 작품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한참동안 이수한의 덕질의 결과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저 슈트는 할리우드 납품하는 모형 제작 회사에 직접 의뢰했으며, 슈트 디자인은 국내 유명한 일러스터와 몇일 밤낮을 회의를 해서 뽑았고, 모티브는 어쩌고 저쩌고, 슈트의 기믹은··· 출력은··· 끝도없이 이어지는 설정.

이 형은 진짜다.

진짜 영화 감독 안됐으면 방구석 히키코모리 됐을 거다. 작업실도 만화방 아닌가. 폐인되기 딱 좋지.

이수한의 설정 놀음도 살짝 지겨워 질때쯤.

‘띠리리리리’

내 휴대폰이 울렸다. 처음 보는 휴대폰 번호였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이지우 씨. 저 정 CP입니다.

TNN 드라마국 [응답하라 119] 담당 CP였다.

“네 안녕하세요.”

- 다름이 아니라,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나 해서요.

“혹시 무슨일인지 먼저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 아, 이번에 [응답하라 119] 일본 판권 계약건으로 JHA사와 미팅을 했는데, 담당자가 이지우 씨 팬이라고 하네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 식사 같이 가능 할 까 싶어서요. 아!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청운 엔터테인먼트에 먼저 전화를 했는데, 장인호 사장님이 이지우 씨와 직접 통화 하라고 하시네요.

“아··· 네.”

몇 번의 사건을 겪으며 장인호 사장은 나를 소속 배우가 아니라, 동업자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일본 방송관계자와의 비공식 미팅. 다분히 사적인 자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자리였다. TNN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일종의 접대이니까.

장인호 사장이 내 의견을 존중해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자리가 불편할 것 같으면, 가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었다.

이미 일본 진출은 어느정도 장인호 사장과 이야기가 된 사항이었다. 내 첫 드라마 주연작인 [응답하라 119]가 일본에서 올라오는 반응을 봐서 일본 쪽 스케줄도 잡아보자는 정도로 대략적인 그림만 그린 상태였다.

- 불편한 일은 없을 거라 약속 드립니다. 일본쪽 담당자가 이지우 씨와 사진 한번만 찍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통 사정을 하는 바람에요···

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가서 맛있는거 먹고, 사진 한번 찍고.

언젠가 써먹을 일이 있을지 모를 일본쪽 관계자들과 안면도 터놓고.

알겠다고 대답을 하려던 차, 10초짜리 라일라 공주 변신 장면을 무한 반복 재생해서 보고 있는 이수한의 뒷통수가 보였다.

“네 저녁에 시간 됩니다. 위지랑 시간 찍어서 보내주세요.”

이수한이 틈틈히 우리 어머니 가게가서 일 돕고, 어머니 말동무 해주고···

그런 것만 안 했어도 내가 저 뒷통수를 수십번을 더 갈겼을 거다.

통화를 끝내고 때리고 싶어지는 뒷통수에 대고 말했다.

“형, 노트북 좀 빌리자.”

그래도 형이니까, 일단 형 작품은 살리고 봐야지.

***

여의도 모처 고급 한정식집.

양 국의 방송사 직원들 보다 먼저 도착해서 앉았다.

원래라면 내 역할은 꽃병풍 쯤 이었을 것이다.

일본 방송사 관계자들과 밥 한끼 하면서 악수하고 사진찍고. 계약이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좋은 분위기 만들어 주고.

주연배우가 이 자리에 앉을 만큼 [응답하라 119]의 일본진출에 진심이다! 이런 어필 좀 해주고.

TNN은 처음 만든, 그것도 자체제작으로 만든 드라마가 대박을 치고, 해외 판권까지 파니 얼마나 좋겠나.

일본을 시작으로 태국, 미얀마 동남아, 그리고 중국까지 줄줄이 계약이 예정되있다고 한다.

그 시작이 일본이다. 아직까지는 문화 강국인 일본과의 계약을 얼마나 유리하게 가져가느냐에 따라 뒤따르는 타국의 계약 조건이 요동칠 게 뻔했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니까 책임 프로듀서가 저자세로 내게 부탁하는 거 였을 테고.

나는 먼저 일본에서 방영한 [저승 카페]로 일본에서 인지도가 좀 있다. 일본애들이 잘 생긴 남자배우가 멋진 제복(저승사자 배역이라 주로 검은 정장과 코트를 입고 출연했다) 입고 커피를 만드는 모습에 환장한다나.

거기에 [악의 기록]이 일본에서 괜찮은 흥행성적을 내면서, 나는 일본에서 부는 한류열풍에 편승하는데 성공했다.

[응답하라 119]의 일본 판권의 1등 공신이 어떻게 보면 나인 셈이다.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TNN 관계자들이 JHA관계자들을 데리고 룸으로 들어왔다.

“곤니찌와, 이 사마!”

룸 안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보고 반갑게 웃는 JHA 관계자.

“곤니찌와 아키야 고노 상.”

일본어는 여기까지···

JHA 관계자는 자리에 앉자 마자 통역을 다그쳐 말을 전했다.

자신의 딸이 이지우를 너무나 좋아해서, 이번 [응답하라 119]의 판권 수입을 추진하게 되었다는 둥, 최근 [악의 기록]을 봤는데 한국은 좋은 감독, 좋은 영화가 계속 나와 부럽다는 둥···

그렇게 식전 이야기가 잠시 이어졌다.

“이수한 감독을 아신다고요? 그것 잘 됐군요. 이수한 감독도 일본 문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렇군요.”

“네. 혹시 이수한 감독의 차기작에 대해서 아십니까?”

“아뇨. 들은바가 없습니다.”

이야기가 이수한과 [벡터맨]으로 넘어가자 TNN 관계자의 눈이 흔들렸다.

[응답하라 119]계약에 [벡터맨]을 왜 꺼내?

이 새끼 왜 이러지? 이런 표정이였다.

미리 설명할 시간이 없어서 말 못했지만, 걱정 마라.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제가 사실 혼자 보기 너무 아쉬워서 같이 보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미리 도착해서 테이블 아래에 충전시켜 놓은 노트북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재생.

오늘 나는 특촬물의 원조의 나라에, 특촬물을 팔아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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