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108화 (109/121)

108. 감 드세요

“왜 라일라 공주가 다 하냐고? 그거 진짜 몰라서 물어?”

당당하게 반문하는 이수한.

이걸 이렇게 드리프트 한다고?

이수한이 벡터맨을 흥행시킬 요술봉인 줄 알고 데려와 연출 맡겼더니, 알고 보니 벡터맨 시리즈를 깨부술 오함마였던 건가?

“그거 내가 알아야 해? 내가 형의 연애사까지 알고 싶지는 않은데··· 아니지 짝사랑은 연애가 아니지.”

여이수를 위해서 시나리오를 수정한 걸 비꼬는 듯이 말했지만 이수한은 오히려 당당하다. 이수한이 커피 두 잔을 뽑아서 내 앞에 두며 말했다.

“특촬물은 기본적으로 남자아이 위주의 구성이지? 주 시청자도, 완구 구매하는 성별분포를 확인해봐도 90% 이상 남자아이들이 소비해.”

“그야 당연히 주 고객의 타게팅이 그쪽이니까 그렇지.”

“왜?”

“어?”

“왜 남자아이들만 타게팅이냐고.”

“그야···”

너무나 당연한 거라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커피로 입을 축이며 이수한의 말에 반박할 거리를 찾았다.

변신해서 악당들을 쓰러트려서?

그건 세일러문도 마찬가지다.

치고받고 하는 액션이 많이 나와서?

멀지 않은 미래 일본에서 만든 마법(물리) 소녀가 흥행하고 호쾌한 액션 장면이 많은 화제가 된다.

즉, 이수한 말대로 특촬물에 호쾌한 마법 소녀 하나쯤 껴있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라일라 배역 자체가 동안인 여이수와도 잘 어울리는데다가, 무엇보다 여이수는 액션이 된다.

내가 답을 찾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자, 이수한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괜히 이런 소리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벡터맨] 1기 시청률 확인해 봤거든. 최고 시청률 20%. 대부분 남자아이들이야. 그런데 이거 봐.”

이수한은 냄비 받침으로 쓰고 있던 두툼한 서류뭉치 들어 내게 내밀었다.

“[천사소녀 네티], [세일러 문], [웨딩 피치]. 여자아이들이 주 타겟인 애니메이션. 다 변신해서 치고받고 싸우는 거야. 뭐 그 밑에 깔린 서사는 좀 더 소녀틱한 배경이 많지.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매한가지라 이 말이야. 내 생각에는 [벡터맨]의 매카닉이나, 액션은 남아를 겨냥해서 시원시원하게 하되, 배경의 서사를 라일라 공주 중심으로 좀 더 촘촘하게 가져가면 이거 남자애들 여자애들 모두 환장하게 할 수 있다.”

이게 사랑의 힘인가.

여이수를 메인 주인공으로 밀기 위한 이수한의 노력이 놀랍다.

이수한이 내민 서류에는 국내 방송된 여러 애니메이션의 시청률과 성비 분석. 서류 좌·우측 여백에는 이수한의 개인적인 견해와 [벡터맨]에서 벤치마킹해야 하는 부분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결론은 벡터맨과 라일라 공주를 비슷한 분량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었고.

아니··· 그렇게 치면 벡터맨은 3명인데··· 라일라 공주는 한 명이고. 비슷하게 분량 가져간다고? 김범 우는 소리가 방금 들린 거 같은데.

[벡터맨]을 여자아이들한테 팔아먹겠다라···

잘되면 남자아이 여자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좋아할 만한 웰메이드 특촬물 하나 나오는 거고, 안 되면 두 성별에 외면 받는 거고.

애니메이션에 별 관심이 없던 내가, 프리큐어가 대충 뭔지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이수한이 말한 힘 법사 콘셉트의 마법 소녀가 생각보다 잘 먹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수한이 트렌드를 몇 년 앞서 가져가는 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면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역시, 이지우. 내가 인정한 남자답다.”

“만화책 좀 그만 보고. 투자자랑, TNN 설득할 때는 그런 말투 쓰면 안 되는 거 알지? 페이퍼 잘 만들면 받아줄 거 같긴 한데...”

기획서야, 내 생각에는 이수한이 시나리오 썼다고 하면 웬만하면 다 받아줄 것이다.

뭐 어차피, 이건 내 깊게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내가 출연하는 것도 아니고, 투자한 것도 아니니까. 이수한이 바란 건 솔직한 내 감상평이었을 테니.

시나리오는 이수한이 썼고, 누가 봐도 흠잡을 때가 없었다. 연출도 마찬가지이겠지. 로카르노 신인 감독상에, 백룡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는데.

다만, 이수한의 기획의도가 지금의 시기와 잘 맞아떨어지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미래이기도 했고.

라일라 공주의 저작재산권이 나한테 있는 만큼 [벡터맨]을 잘 만들어서 띄워 주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크게 상관없다는 심정이었다.

마법봉 장난감 팔아서 얼마나 벌겠냐 싶었던 것도 있고.

“크크크, 아동극으로 프러포즈 하는 사람은 형밖에 없을걸?”

나는 그렇게 농담을 던지고, 만화방을 나와 오늘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나섰다.

***

대원 영화사의 한 사무실. 그곳에 한 직원이 카메라와 티브이를 설치하고 있었다.

대원 영화사. 세계 유수 영화제에 작품을 내보인 영화사이지만, 재정적 형편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작가주의 감독이 대개 그렇듯, 예술성과 작품성은 전 세계 어디를 내놔도 떨어지지 않았으나, 흥행성적은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것도 진권호라는 이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최정상 배우라 하더라도, 진권호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거의 무료봉사 수준의 개런티만 받고 촬영한다.

그런대도 진권호 감독이 신작을 준비한다고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배우들이 몰린다.

“준비 끝났나?”

사무실 문을 열고 진권호 감독이 들어왔다.

“네 감독님. 설치는 끝났고, 청소랑 전선만 좀 정리하면 됩니다. 티비 위치는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진권호 감독.

“청소는 뭐 하려 해. 깨끗하구만.”

“하하, 손님 오시는데 해야죠.”

“뭔 신인배우 하나 오디션 오는데 이리 유난이야.”

진권호 감독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전선을 대충 정리해서 밀어 넣은 직원이 이제는 빗자루를 들고 사무실을 쓸기 시작했다.

입구를 막고 있는 진권호 감독을 비집고 들어온 또 다른 여직원.

“잠시만요, 감독님.”

양손이 모자랄 정도로 가득 챙겨 든 과자와 음료수. 위태위태하게 걸어 책상 위로 쏟아 놓았다.

“김양아, 뭐 이렇게 바리바리 사서 와. 나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네? 알아요. 감독님 단 거 안 좋아하는 거. 이거 감독님 거 아닌데요. 오늘 이지우 씨 온다면서요?”

당연한듯 반문하는 김양.

진권호 감독은 아까 탕비실 비었다고 가져간 법인카드의 목적이 이거였나 싶었다.

진권호 감독은 마뜩잖다. 대단한 손님이 오느냥 빡빡하게 청소하는 직원도, 이지우 먹일 거라고 간식을 사오는 직원도.

대단한 신인임을 알고, 시나리오가 좋아서 덜컥한다고 했긴 했는데···

예기성이 아끼는 후배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누가 보면 대통령이라도 오는 줄 알겠다. 하 참.”

“에이, 감독님도 기대 중이시면서. 감상실에서 [폭력의 사슬]이랑, [악의 기록] 시청하시는 거 다 봤어요. [악의 기록]은 원래 예기성 선배님 나와서 안 보고 계셨잖아요. 어떠셨어요? [악의 기록]? 이수한 감독도 이수한 감독이고, 이지우 진짜 연기 잘 하지 않아요?”

“계약한 배우 작품 확인 하는 게 당연하지! 그럼 안 봐?”

“아이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저는 이만 찬란하게 로케이션 갔다 오겠습니다.”

그렇게 도망가듯 자리를 피해버리는 직원.

진권호는 깨끗하게 정리된 사무실에 앉아 콘티와 대본을 펼쳤다.

아직 콘티가 확정이 나지 않아 박현주 작가와 계속 논의 중인 부분을 계속 확인 중이었다.

진권호 감독 생각에는 주인공의 캐릭터성이 부족하다 생각됐다. 작품 중, 주인공이 앓고 있는 병. 우울증, 불안 신경증 등등.

병의 경중을 떠나서, 너무 흔하다고 생각했다. 현대인 중 우울증이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오히려 ‘영혼의 감기’라 부르며 가볍게 여기고, 정신병원을 찾을 것을 사회적으로 권유하지 않는가.

흔하다는 것은 운명적이지 못하다.

주인공의 필연성을 훼손한다.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에는 약하다.

이게 진권호 감독의 생각이었고 생각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박현주 작가를 설득하고 있지만, 굽히지 않으면 독단적으로 다른 각본가를 붙여서 각색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심각한 자폐를 앓는, 소통되지 않는 캐릭터. 태어날 때부터 가진 장애. 운명의 상대를 만나고 운명을 극복해 나가는 서사.

그게 바로 진권호가 원하는 캐릭터고 서사였다.

상투적이라 해도 그걸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권호는 각본을 수정하는 것을 별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 글을 영상 언어로 바꾸는 것은, 글을 새로 쓰는 것만큼이나 창조적인 일이라 생각했다.

박현주 작가? 글 잘 쓴다. 그렇기에 진권호 감독도 설득을 통해서 바뀐 설정에 대해서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똑똑’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이지우 입니다.”

“어, 어서 오게. 앉아”

“감독님, 드시라고 감 좀 사왔습니다.”

“어? 한여름에 감이 어디서 났어?”

“곶감입니다.”

“아···”

이지우가 선물 포장이 된 곶감 한 상자를 책상 한쪽에 놓고 마주 앉았다.

원래 이런 식의 카메라 테스트는 작가와 감독이 함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어차피 작가가 박현주. 이지우가 어떤 연기를 해도 좋은 소리밖에 하지 않을 것 같아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영화사로 오지 않아도 좋다고 미리 말해놨다.

그래서 이지우와 독대로 오디션을 보게 된 것이고.

“바로 시작하지.”

“네. 감독님. 어느 부분 하면 되겠습니까?”

“자네 대본 혹시 안 들고 왔나?”

“네. 다 외워서 왔습니다.”

“어?”’

“음··· 다.외.워.서.왔.습.니.다!”

“귀 아프네. 작게 말하게. 귀가 안 좋아서 물어본 게 아니었네.”

“아··· 네.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진권호 감독은 머리를 살짝 갸웃했다.

이거 맥이는 건가, 순진한 건가 헷갈렸다.

맥이려고 하는 거면, 미치지 않고서야 배우가 감독한테 개길리는 없을 것이고, 순진하다고 보기에는 전에 봤을 때의 모습에서 대화를 주도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영민하고 똑 부러지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던 모습.

그때 분명 멀쩡하게 잘 대화 해놓고 왜 저러는 건가 싶었다.

“흠, 그럼 ‘씬#42 미술대전 떨어지고 나서 화실 안’ 해보겠나?”

잠시 숨을 고르는 이지우. 은은히 머금고 있던 미소가 싹 하고 사라진다. 그리고,

“... 우리 아버지는 내 재능을 마법과 같은 거라고 했어. 남들이 못하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그게 나라고 했어. 마법사는 원래 이상한 거라고. 내가 이상한 건 마법사라서 그렇다고. 그런데 나한테 재능이 없으면 그냥 이상한 새끼인 거잖아.”

이지우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이 눈물이 차오른다.

심각한 정신적 결함. 미술 대회에서 떨어진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정확하게 캐치해서 보여주는 이지우.

진권호 감독은 그 눈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 이거구나! 이래서 그랬던 거구나.’

박현주 작가의 생각이 이지우의 연기로 구현화 되는 것 같았다.

대본에 미쳐 다 쓰여 있지 않은 서사와 감정.

이지우의 연기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세심한 감정을 모두 표현하고 있었다.

너무 뛰어난 자의 깊은 우울. 상실감. 고독감.

진권호 감독이 작품의 캐릭터를 바꾸려고 했던 것은, 내심 이지우 정도 연기력이면 자폐증 증상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잘 표현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웬걸.

방금 연기를 보고 느낀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의 주인공이 자폐증 캐릭터라면, 서사에 포함되어야 하는 주인공의 세심한 감정표현을 몽땅 버려야 했다. 자폐증 주요 증상 중 하나가 감정의 교류가 제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이지우라는 배우를 반만 쓰는 격이었다. 눈빛 하나, 표정 하나로 수십 수백 단어를 대변하는 표현력이 있는 배우인데.

“씬 넘버 120.”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거야. 나는 순간이지만, 그림을 그리던 나는 남아. 순간은 영원이야.”

이후로 몇 개의 씬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배우의 성격이나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대본의 내용과 조금씩 다르게 표현할 법도 한데. 단 한 번의 경우도 대본과 달리 말하는 경우가 없다.

마치 이지우를 위해서 만들어 진 대본처럼.

“수고했네.”

잠시 감정을 추스르는 듯 고개를 숙인 이지우가 곧 고개를 들었다. 위태로워 보였던 예술가는 없어지고, 원래의 그 명민했던 배우가 돌아왔다.

“아닙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 그리고 감 맛있게 드세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꾸벅 인사하고 돌아가는 이지우의 뒷모습, 그리고 남아 있는 곶감 한 박스.

‘박현주와 이지우 두 사람이 만나는 사이라 그랬던가’

작가와 배우의 교감만으로 연기가 이토록 깊어질 수 있음이 놀라웠다.

이지우가 떠난 그 자리에서, 한참을 콘티와 대본을 번갈아 보던 진권호 감독은 수정하던 콘티를 와락 구겼다.

이지우의 연기를 보고 난 뒤, 자폐증이라는 아이템이 정말 별로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박현주 작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톡톡, 토토톡’

문자를 보낼 일이 잘 없던 노 감독의 문자는 서투르고 느렸다.

‘캐릭ㅌㅓ 수정은 없는 거로 하게ㅆㄴㅔ’

진권호 감독이 직접 전화하여 나이 어린 작가에게 사과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거장은 꼴도 보기 싫은지, 오타를 수정할 생각도 않고 ‘보내기’를 눌렀다.

진권호는 사무실에서 나오기 전, 곶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때 문득, 이지우가 사무실에 들어오며 한 말이 생각났다.’

‘감독님 드시라고 감 좀 사왔습니다.’

곶감을 사 와서 왜 감이라고 했을까. 하고 많은 과일 중에 왜 감을 사왔을까. 제철도 아닌데.

처음에 그냥 선물이겠거니 하며 신경 쓰지 않았는데···

아까 그 개기는 모습 하며. 뭔가 잡히는 게 있었다.

곧, 진권호 감독은 헛웃음을 쳤다.

‘이거 먹고 감 좀 찾으란 소리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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