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107화 (108/121)

107. 반 만 죽읍시다

A4용지 4장에 빼곡히 적혀있는 유서.

앞부분 가족에 대한 사랑, 미안함. 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뒷부분은 그동안 이지혜가 만나 왔던 사람들의 이름과 했던 이야기 등이 날짜순으로 적혀있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슬프게 마지막 장에는 그녀의 주민등록번호가 적혀있었고, 그 위로 지장이 찍혀 있었다.

주민번호에 쓰인 나이가 지금의 나보다 고작 두 살 많다.

24살 여자애가 살아보겠다고, 꿈을 이뤄보겠다고 참았던 고통이 너무나 컸다.

저 또래의 못 나가는 연예인들이 대부분 그렇겠지.

내가 살았던 미래에는 ‘이지혜 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은 밝혀졌어도 거기에 누가 있었던 건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저 가십성 유튜브나 찌라시에 누구누구가 있다는 루머만 돌 뿐.

왜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겠다.

하···

정종철, 정종철, 정종철···.

그리고 이지우, 이지우, 이지우···

언론 재벌 3세가 연루된 리스트를 언론에서 한 줄이라도 쓸 수 있었을까.

아마 그 어떤 언론사에 제보했어도 받아 쓰는 기자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 기자가 기사를 올려도 데스크에서 다 막았겠지.

정종철 외에도 여러 사람의 직책과 이름이 있었고,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정종철의 이름이 적혀있었던 날에는 예외 없이 내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KTVC 드라마 국장, 사장을 만난 이야기, 영화제작사인 케이콘 관계자를 만났던 일. 그리고 나눴던 이야기.

거기에 더해 정종철의 각종 히스테리, 그리고 짜증과 욕설이 적 날 하게 적혀있는 유서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새끼 진짜 미친놈이구나.

그리고 느꼈던 것은 분노였다.

정종철이 남에 인생을 조진 게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망가진 한 여자의 삶이 적혀있는 종이.

그 글을 읽으며, 자신을 스스로 돌아봤다.

속에서 꿈틀거리는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동정심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질감에 가까웠다. 그리고 내 전생에 못했던 일을, 이지혜의 손을 빌어 한다면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 이건 양보다.

정종철? 솔직한 말로 몇 년 지나면 고구려 일보를 통째로 살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어렵게 돌아갈 필요도 없지. 투자회사 몇 개 세워서 고구려 일보 지분 확보하고, 대표 재선임 요청하고, 우호지분 모아서 정종철 일가 모가지 날리면 훨씬 더 저렴하게 할 수도 있을 거다.

정가(가)의 우호 주주들 얼마나 충성심이 강한지 의리게임 하는 것도 좋겠네. 빨리 돌아서는 사람의 지분에는 10배 쳐주고, 늦을수록 8배, 6배, 4배, 2배 낮춰서 부른다면 몇 명이나 남아 있을까. 아니 얼마나 빨리 돌아설까.

지분만 있으면, 국내 대형 로펌 몇 개 앞세워서 횡령, 배임, 탈세, 뭐 하나는 걸리겠지.

뭘 모르는 소리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 모두가 무서워 하는 게 언론이라고?

임명되지 않고, 선출되지 않으며, 무책임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게 언론 아니냐고?

그런 언론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돈이다.

내가 이렇게 재미있는 이벤트를 내가 이지혜한테 양보하는 거다.

내 해묵은 원한보다,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찾은 나보다, 이지혜의 원한이 더 깊고 검을 테니.

어느정도 생각이 정리되고.

‘달칵’

문이 열리고, 이지혜가 들어왔다.

그리고 거실 중앙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시선이 내 손으로 갔다.

“왜 남의 물건을 함부로 손대요!”

내 손에 들려있는 흰 봉투를 보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미안합니다. 그런데 너무 뻔하잖아요. 그렇게 티를 내는데 어떻게 안 봅니까.”

“이리 줘요.”

“내가 도망치라고 했던 의미는 이런 게 아닌데···”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녀가 낚아채듯 유서를 가져갔고, 나는 선선히 내어주었다.

이지혜의 눈에 독기가 차오른다.

“니가 뭘 안다고 그래. 니가 그렇게 잘났어? 잘나면 이래도 돼? 소름 끼쳐. 돈 많다고, 힘 있다고 마음대로 하는 새끼들.”

수치심과 극도의 피해망상. 그리고 서러움 등이 뒤섞여 그녀는 턱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

그녀의 눈에 차올랐던 독기가 흘러내렸다.

이미 갈 때까지 갔다고 생각했는지, 어느새 말을 놓아버린 이지혜.

뭐라고 해야 이해를 시킬 수가 있을까.

“정종철··· 복수하고 싶지 않나요?”

“하··· 애새끼 아니랄까 봐. 하는 일마다 성공하고, 주변에서 우쭈쭈 해주니까 인생 쉬워 보이지? 니 말 한마디면 모두가 친절하니까 세상이 다 그렇게 친절한 거 같지? 지금 꽃밭 일 때 즐겨. 내가 먼저 가지만, 너도 멀지 않았을걸?”

악에 받친 이지혜의 말.

그녀의 악에 받친 말에 상처받긴커녕, 그녀의 분노에 공감이 더해진다.

이지혜에게 복수는 너무나 허황 되 보였나 보다.

“뭐, 꼭 그렇지는 않고요. 음··· 주변에 아끼던 물건 나눠주고. 유달리 친절하게 굴었다가 어떨 때는 날카롭게 굴었다가. 어떤 게 진짜 내 모습인지 헷갈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 맞다. 병원에서 의사가 창문 열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요? 병원은 아직 안 가봤나? 웬만하면 직접 운전은 하면 안 되고. 혼자 있는 시간 줄여야 하고. 의사가 나한테는 고층 아파트는 웬만하면 살지 말라고 그러던데.”

분노와 증오가 가득 찼던 이지혜의 눈에 의아함이 차올랐다.

그 눈에는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이지혜가 긴장하지 않을 정도의 느린 동작으로 일어나 좁은 투룸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인터넷에 이것저것 검색하지 않았어요? 자살, 혹은 고통 없는 자살. 시체 온전히 남기는 법. 이런 거.”

식탁 아래 검은 비닐봉지. 그 안에 상표도 안 땐 빨랫줄을 들어 식탁 위로 ‘툭’하고 올려놨다.

“시체 온전히 남기는 법은 안 알아봤나 보네. 목메는 건 좀···그렇지 않나? 치우는 분들도 힘들어할 것 같고. 마지막 모습 추하잖아. 배우라면 죽을 때도 좀··· 멋져야 되지 않나. 이런 거 신경 쓰는 게 더 이상한가.”

“!”

“도구적 자살.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수단으로 삼는 방법. 그거 좋은 생각 아니에요. 목숨을 걸고 상대방 죽이겠다는 결심은 훌륭한데, 방법이 잘못됐어요. 이건 도망치는 것도, 맞서 싸우는 것도 아니잖아요.”

삶에서 도망친 내가 할 소리는 아니다만, 공감과 이해. 그리고 자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냥 개죽음이지···”

이지혜의 눈에서 불이 확 켜지는 듯하다.

“우리 이렇게 합시다.”

“뭐··· 어?”

나는 주저앉아 있는 이지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어 눈을 마주쳤다.

“우리 반만 죽읍시다.”

“그게 무슨···”

“이지혜 씨, 이런 유서 적어놓고 죽어봐야 정종철 콧방귀도 안 뀔 겁니다. 기사도 안 날것이고요. 기사가 난다고 해도 정종철 이름은 절대로 기사 안 나갑니다. 그리고 정종철 망하는 모습은 살아서 보셔야죠.”

“···”

“일단 기다리세요. 참고 견디란 소리는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계약파기 당할 때까지.”

“그러면 위약금이···”

“위약금, 제가 다 내어 드립니다. 정확하게는 새로운 회사가 다 내어 드릴 겁니다. 제가 이지혜 씨와 금전거래가 남으면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상하니까요. 대신, 제가 판을 만들어 놓으면, 지금 이 유서에 남겨져 있는 내용 한 번만 읊어주면 됩니다. 그게 법정이 될지, 기자회견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거면 되나요?”

“그거씩이나 인 겁니다. 사회적 죽음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연예인으로서 재기는 불가능 할 겁니다.”

내가 말한 반이 죽는다는 것이 의미하는바. 그건 연예인으로서, 사회적으로서의 죽음을 의미했다. 개명, 성형수술. 그런 걸 해도 결국 그녀의 남은 평생을 따라다닐 꼬리표.

이지혜가 되려 웃었다.

“하··· 지금 죽으려고 결심한 사람한테 그 정도가 문제일까요. 그럼 정종철 차지석 죽일 수 있나요.”

“네 그거면 됩니다. 그거면 그 두 명 확실하게 반죽일 수 있습니다.”

반은 내 몫이니까.

원래 이지혜는 단순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처리되고 후에 유서가 공개되며 논란이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논란이 된 이후 재수사까지 이어졌지만 결국 결정적인 증거 부족으로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이제 이지혜가 살았다.

증언, 통화기록, 다이어리··· 증거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판이 짜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지혜와 대화를 했다. 이지혜는 그동안 정종철이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 나를 묻어버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소상히 알려줬다.

나는 이지혜에게 앞으로의 행동지침을 간단하게 알려줬다.

남은 계약기간 동안 최대한 조용히 있으라 말했다. 어차피 [응답하라 119]도 끝났겠다, 들어오는 배역 다 거절하고 계약 파기 될 때까지 버티라고 했다. 고향에 돌아가 숨어도 좋고.

혹시나 정종철이나 차지석과 마주치게 되면 다 녹음하라고 했다.

욕하거나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내용이면 더 좋고.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했다.

어차피 정종철을 법정까지만 끌고 가면 국민 개새끼 확정이다.

어감 좋네. 국민 개새끼.

빌라를 내려와 회사 밴에 탔다.

“지우 씨, 어디로 갈까요?”

“... 현주 집 앞으로요.”

감정의 소모가 너무 컸다.

현주가 너무 보고 싶었다.

“수호 형. 창문··· 좀 닫아주세요. 오늘 고마웠어요.”

***

몇 주가 흘렀다. 그동안 [응답하라 119]촬영으로 밀렸던 CF를 찍고, [응답하라 119]으로 파생된 몇 가지 스케줄을 소화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런 바쁜 와중에서도 꼭 해야 하는 개인적인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이수한의 만화방.

오래된 것 같은데,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여기서 웃고 떠들며 놀던게 엄청나게 먼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 봐야 고작 몇 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나이 먹으면 저장된 기억이 많아서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이수한이 슨 시나리오 검토.

언제부턴가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나 또한 좋은 시나리오를 읽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기꺼이 하겠다고 했다.

[벡터맨] TV판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온 만화방.

치열했던 지난 몇 주의 흔적이 고스란히 만화방에 남아있었다.

컵라면과 종이컵의 내용물은 대부분 말라 비틀어져 찌꺼기가 바닥에 눌어붙어있었고, 소주병 맥주병 할 것 없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그리고 소년만화 쪽에 꽂혀 있어야 하는 만화책은 대부분 이수한의 침대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고, 순정만화 쪽에 꽂혀 있어야 할 만화책들은 이수한의 책상 주변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어림잡아 몇 주간 먹고 자고 글만 쓴 듯, 만화방에 코를 찌르는듯한 개밥 쉰내에서 광기가 느껴졌다.

“형. 나왔어. 일어나봐.”

소파 위에 노트북을 껴안고 누워있는 이수한을 흔들었다.

내가 이수한의 전화를 받고 여기까지 오는데 1시간이 안 걸린 것 같은데 이수한은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오로라 매지컬 파우어··· 어? 지우야 벡터맨들은 어디 갔어?”

“정신차려 형. 나 오늘 바빠. 오후에 스케줄 또 있어.”

“아이고, 국민 광고 모델 나셨다. 또 광고 찍냐?”

“물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그리고 오늘은 광고 아니라 카메라 테스트.”

“그 정도면 노 젓는 게 아니라 보트 뒤에 솔리드 코어 엔진 단 거 아니냐?”

“도대체 자기 전에 뭘 본 거야?”

이수한 옆쪽에 굴러다니는 SF 단편선을 주워 테이블 위로 올리며 말했다.

“보여줘 TV판 [벡터맨].”

“내가 노트북을 어디다 뒀더라.”

노트북을 꼭 껴안은 채 두리번거리면서 무언가를 찾는 이수한.

“노트북에 쓴 거 아니야?”

“어. 어제 자기 전까지 썼는데 노트북이 안 보이네.”

“어휴··· 인간아.”

잠이 덜 깬 이수한의 품에 있는 노트북을 내가 집어들자 그제야 ‘아!’하면서 노트북을 내어줬다.

노트북을 펼치자마자 뜨는 한글창.

평소 이수한의 작업방식과 다른 집필 방식. 테이크를 길고 굵게 가져가는 그의 방식에 맞춰서, 영화 한 편을 주욱 이어서 쓰는 평소의 방식과 다르다.

TV 시리즈. 그리고 한 편당 약 20분 정도 되는 영상물에 맞춰서 스토리를 잘게 쪼개 놨다.

한 편 한 편에 기승전결을 담으면서, 전체적으로 벡터맨의 목표의식이 흔들리지 않게 마지막 편까지 구성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이거 어떻게 찍을 생각이지? 예산이 남아도나? 싶은 장면들도 더러 있었지만, 서사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캐릭터였다.

“형, 재밌는데. 딱 하나만 물어보자. 이거 장르가 뭐야?”

“뭐긴 뭐냐. 액션 히어로 장르지.”

“내가 아무리 봐도, 이거 라일라 공주를 메인으로 세운, 마법 소녀 물 같은데. 그래 좋다. 뭐 벡터맨들의 활약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 치자고. 그런데 왜 마법공주 마법봉이 오함마처럼 생겼냐고. 좋아. 그래 여기까지는 뭐 비슷한 밈도 있고, 마법공주가 하트 그려진 오함마를 쓸 수 있다고 쳐. 진짜 진짜 양보해서 라일라 공주 오함마 쓴다 치자. 근데 왜 마법 안 쓰고 물리 마법만 쓰는 건데? 마법의 정권? 매지컬 춉? 기가스메셔 로우킥? 진짜 너무 한 거 아냐?”

“아동 특촬물이니까 당연히 격투가 메인이 되어야지.”

“아니, 근데 왜! 그 격투를 벡터맨이 안 하고, 라일라 공주가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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