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내가 해봐서 안다
장인호 사장이 진권호 감독에게 전화하는 동안 예기성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신경써 주셔서 감사하다는 의미로 말이다.
“네, 선생님. 작품 끝나는 대로 낚시터 한번 모시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예기성 선생님은 다른 말이 없으셨다. 진권호 감독과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말에, ‘그러냐’ 하고 말았을 뿐.
아마도 진권호 감독이 이 작품을 맡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예기성 선생님과의 전화통화를 끝내고, 장인호 사장을 바라봤다. 장인호 사장은 여전히 통화 중이었고,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든다.
진권호 감독이 연출을 맡기로 한 모양이다.
하, 정종철이. 내가 널 어쩌면 좋냐.
방금의 만남으로 확실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심증이지만, 그동안 이유가 없다 생각했던 정종철의 공격에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다시 태어나고 그냥 행복하게만 살려고 했다.
정확하게는 현주와 어머니.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삶을 살려고 했다. 전생의 잘못이 모두 내 잘못이라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래 내 잘못 맞다. 부인 할 생각은 없다.
전생에 말도 안 되는 계약으로 나를 혹독하게 몰아갔던 소속사? 수시로 나를 죽일 놈으로 몰아갔던 언론사?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둘 다 같은 놈일 수도 있겠네.
그런 것들에 내 잘못을 전가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한눈을 팔아 지금 내 가족과 현주에게 소홀해진다면 그것만큼 한심하게 두 번째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있을까.
그렇기에 내 잘못을 나누지 않고 온전히 내가 감당하려고 했다. 대신 내 잘못만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잊고 살려고 했다.
전생에 내가 죽지 않고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쩌면 복수를 하려고 했을 수도 있겠지. 뒤가 없었으니까. 그때는 내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현주와 어머니가 있다.
다시 태어나고 내 삶의 장르가 어두운 복수물이 아니라, 밝고 희망찬 드라마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새 삶을 살려고 했다.
새로운 삶에서 많은 걸 얻었다. 세화 세호 남매. 이수한을 비롯한 스튜디오 나우의 사람들. 예기성과 장인호 사장이 있는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사람들. 그리고 먼저 가깝게 다가와 주는 촬영장의 스태프들.
행복하게 웃는 어머니와 현주를 보면서 이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생에 또 나를 건드네.
그렇다면, 전생에 원한까지 갚아줄 수밖에 없지 않겠나.
바로 전에 만남으로 분노와 당황으로 뜨거워진,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현주가 살짝 내 옷깃을 잡아당긴다.
"무슨 생각해?"
"아니, 그냥. 좀."
“괜찮을까? 들어보니까 정 선배, 아니다. 이제 선배도 아니지 뭐··· 하여튼 정 과장 그 사람 고구려 일보 사장 아들이라며. 케이박스(고구려 일보 계열 극장)에 영화 못 걸게 막는 거 아니야?”
내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였을까. 걱정되는 듯 말했다.
언론재벌인 고구려 일보의 계열사인 멀티플렉스 극장, 케이박스. 국내 3대 멀티플렉스 상영관인 만큼, 만약 작정하고 영화를 걸어주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관객 수에 치명적이겠지.
하지만.
“막으면 땡큐지. 그런데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거야. 시나리오 계약을 가지고 보복성 운영한다면 공격할 빌미를 주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현주의 걱정처럼 영화관에서 [찬란하게 빛나는]을 걸어주지 않는다면, 결정적으로 극장이 손해이니까. 물론 영화가 흥행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그리고 멀티플렉스 극장이 한 군데도 아니고, 라떼 시네마, SJ엔터테인먼트 계열의 GCV도 있다. 그 외 시기상 아직 단독 상영관도 남아있는 상태고.
이 모든걸 떠나서 케이박스나 케이박스 플러스(배급사) 정도 되는 회사는, 일개 본사 과장이 움직일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다. 그게 본사 과장이 아니라 사장 아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KTVC는 이제 시작하는 방송사이고, 케이플 엔터테인먼트는 고구려 일보 계열회사 중 매출 규모만 봤을 때는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수준이니까 정종철의 입김이 먹혔겠지만, 여기서 더 뭘 한다고?
오너 일가의 감정적인 결단에 회사를 움직인다면 내가 손을 쓰기 전에 투자자나, 주주들이 먼저 들고 일어설 것이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그렇게만 해준다면, 고구려 일보와의 여론전에서도 해볼 만 할 정도로 큰 실수를 하는 거고.
걱정하는 현주를 달래고 있는데, 장인호 사장이 통화를 끝마치고 다가왔다.
“대원 영화사랑 이야기 끝냈다. 이미 진권호 감독이 이야기해놨나 보더라고. 내일 계약서 쓰잔다. 그런데 지우야 괜찮겠냐?”
“네? 뭐가요?”
“아, 너는 잘 모르려나? 진권호 감독 이 바닥에서 유명해. 지랄맞기로. 연기력으로 날고기는 배우들도 진권호 감독 현장에서는 학을 뗀다.”
“왜요?”
“왜긴 왜야, 워낙 까다로우니까 그렇지. 평소에는 괜찮은데 촬영 할 때는 어우··· 편집증 환자도 그거보다는 나을 거다. 우리 소속 배우들도 예전에 현장 갔다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연기 못 한다고 배우들을 아주 그냥 쥐 잡듯이 잡아요.”
“아···네. 그런 거야 뭐.”
그러다 현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동안 [찬란하게 빛나는] 시나리오를 수정할 겸 내가 연습하는 것을 받아줬던 현주.
현주가 웃고 있었다.
나도 마주 웃어줬다.
[찬란하게 빛나는]으로 개화한 것은 현주뿐만이 아니었다.
***
종방연.
종방연은 보통 드라마의 마지막 방영 전후에 한다. [응답하라 119]의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회식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드라마 촬영의 마지막쯤에는 스태프도 그렇고, 배우들도 그렇고 체력적 한계에 부딪힌다. 그렇기에 마지막 촬영 후 쫑파티는 원하는 사람만 참석 하는 편이다.
그러나 종방연 때는 거의 대부분 스태프와 배우들이 참여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고깃집 정도로 예상했다. 진짜 망한 드라마 같은 경우에는 종방영을 촬영 후 쫑파티로 합치는 일도 있지만, [응답하라 119]는 그런 경우가 아니니까.
잘하면, 소고기 정도 사주려나?
시청률 15%. 분명 종편드라마치고 대단한 거다. 하지만 아직 지상파 방송중에서 40% 넘는 드라마가 간간이 나오는 시기다. 그러다 보니 종방연을 해줘도 얼마나 크게 해주겠냐 싶었던 거다.
그런데, 김수호의 말로는 [응답하라 119]의 종방연이 호텔 컨벤션 센터로 잡혔다고 한다.
내가 이 시기의 분위기를 잘 못 읽고 있었던 거지. 내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15%와 지금의 종편 방송사의 15%의 차이를 정확하게 몰랐던 거다.
그 차이를 종방연을 하는 호텔 입구에서 느낄 수 있었다.
호텔 입구에서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
이미 전해 듣기로, 연회가 진행되는 내부에도 ‘연예가 보도’와 ‘한밤의 티브이연예 쇼’ 취재팀이 대기 중이라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예상해서 호텔 컨벤션 센터로 종방연을 계획하지 않았을까 싶다. TNN 입장에서 자사 드라마 종방연에 공중파 TV 연예 쇼에서 취재를 나오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겠나.
TNN의 첫 드라마. 그것도 별 기대도 하지 않았던 시험 삼아 투자했던 드라마가 역대 종편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갈아치우고, 종영 할 때까지 동 시간대 시청률을 유지했으니 좋을 수밖에.
거기에 더해 연회장 입구까지 가는 길에 수많은 화환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주연배우들의 소속사부터 시작해서, 촬영 스태프를 지원했던 스튜디오 나우, 다른 종편 방송사 등등... 걔중에는 TNN의 모회사인 SJ엔터테인먼트 사장의 화한까지 있었다.
이번 드라마의 성공으로 TNN 뿐만 아니라, SJ엔터테인먼트도 드라마에 관심을 두는 것이 느껴졌다.
드라마 중반부터 예산을 확대 편성 받았지 않은가. 그 정도로 신속한 결정이 이뤄졌다는 것은 방송국 상부가 그만큼 관심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류창진 PD와 유수영 작가는 바로 후속편인 [응답하라 112]의 편성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 드라마가 흥행했구나 싶었다.
얼떨떨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 이름이 적힌 지정석에 앉아 기다리고 앉았다. 드라마국 국장과 몇몇 관계자가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오! 이지우 씨! 이리로 잠시 와봐요.”
드라마 국장이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며 어서오라 손짓했다.
“하하, 이지우 씨. 여기는 TNN사장님 이십니다. 사장님 그때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응답하라 119] 촬영 스태프 문제 유출로 고생하다가 이지우 씨가 스튜디오 나우 연결해서 해결한 것 말입니다.”
“아! 맞다 그랬었지. 반가워요. 이지우 씨.”
“네, 안녕하세요.”
TNN사장이 가볍게 악수를 권했다.
사실, TNN사장이 누군지 방금 처음 알았다.
드라마 종방연에 드라마 국장은 몰라도, 사장까지 온다니. TNN이 이번 드라마에 애착이 컸음이 느껴졌다.
망한 드라마는 국장은커녕, 법인 카드만 달랑 주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데 드라마 종방연을 호텔 연회장에서 진행하는데다가, 사장이 직접 와서 축하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아마도 종방연을 맞이해, 기자들에게 종편 드라마도 공중파 못지않게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 차기작도 기대해 달라. 뭐 이런 걸 어필하려는 것 아니겠나.
“그때 스튜디오 나우에서 아동용 드라마 편성 조건으로 하지 않았었나?”
“네 [벡터맨]입니다.”
이제 생각났다는 듯이 사장이 말했고, 드라마 국장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냥 [벡터맨]이 아닌데. 아직 소식이 안 갔나? 소식이 갔으면 저런 담백한 대답이 나올 수가 없는데.
이참에 미끼 좀 흘리면, 덥석 물겠다 싶어서 말했다.
“[벡터맨] TV판 이수한 감독이 직접 연출 한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기대중입니다.”
드라마 국장과 TNN 사장의 눈이 커진다.
“누구요?”
“이수한 감독이요.”
어어? 하는 눈빛. 머릿속으로 자신이 아는 이수한과, 지금 말한 이수한이 동일인물인지 계산하는 모습이었다.
“하하, [악의 기록] 이수한 맞습니다.”
“아···아니, 이수한 감독이 뭐가 아쉬워서-헙.”
급하게 입을 다무는 드라마 국장. 어차피 방송사 입장에서는 외주계약한 금액만 주면 끝이니까. 그 금액을 가지고 누굴 어떻게 뽑아 쓰는 건 외주 제작사의 재량이었다.
아동용 드라마에 할당된 예산으로는 잡을 수 없는, 아니 기성 영화감독이라면 모두가 거절할 만한 아동용 특촬물 연출을 이수한이 한다? 이 자체로 마케팅 포인트가 될 만한 일이었다.
“뭐, 워낙 특이한 형이니까요.”
“작년 백룡영화제 감독상 수상자의 특촬물··· 기대되네요. 예능국에 말해서 확실하게 푸쉬하라고 일러둘게요.”
그렇게 말하곤, TNN 사장은 단상으로 걸어갔다.
***
10명씩 앉을 수 있는 원형 테이블이 10개. 약 100명이 안 되는 인원이 앉아 있는 연회장.
TNN 사장이 한마디 하고, PD, 작가 순으로 마이크를 잡고 ‘고맙다’, ‘감사하다’ 등의 말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무래도 나는 이런 광경을 수없이 경험했다 보니 좀 무덤덤할 수밖에 없었고, 하릴없이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는데, 아무리 봐도 이지혜가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면 되는데, 대상이 이지혜다 보니 그게 안 된다.
이지혜가 죽었던 시기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지만, 지금은 아니었을 텐데.
혹시나 해서 케이플 엔터테인먼트 소속 다른 배우와 함께 온 매니저를 붙잡고 물었다.
“이지혜 선배님은 오늘 안 오셨나 보네요?”
차지석이나 정종철이 나를 싫어한다는 건 그들만의 문제. 말단 매니저까지 나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던 건지, 별다른 의심 없이 말해줬다.
“네. 연락이 안 된다고 하던데요.”
뭔가 쎄한 느낌이 왔다. 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 근거를 대라고 하면 할 말 없는데, 확실한 느낌.
“수호 씨, 저랑 어디 잠시 갑시다.”
“어? 아직 음식 나오지도 않았는데.”
원래라면, 먹방을 찍으며 타 방송국의 인터뷰도 예정되어 있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급하게 차에 올라, 류창진 PD에게 전화했다.
“...이지혜 씨 집 주소 확인되면 문자 좀 찍어 보내주세요.”
이지혜의 집 주소가 필요했다. 연회장에 와있던 케이플 엔터테인먼트 직원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내가 이지혜와 가깝게 지낸다는 걸 차지석이나 정종철이 알게 되면 이지혜를 추궁하거나 마크할게 뻔했다.
그렇기에 알만한 사람, 그리고 알아봐 줄 수 있는 류창진 PD에게 전화한 것이다.
류창진 PD가 받은 프로필에는 집 주소가 안 나와 있을지 몰라도, 종방연 핑계로 소속사에 물어봐 줄 수는 있을 테니까.
‘띠링’
얼마지나지 않아 류창진 PD에게 문자가 왔다.
“수호 씨, 이 주소로 가주세요. 빨리요.”
한동안 머리를 꽉 채웠던 [찬란하게 빛나는]과 정종철, 그리고 [벡터맨] 까지.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미래를 안다. 그렇기에 이지혜가 죽는 게 지금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나 때문에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바꾼 역사 때문에 이지혜의 운명도 바뀌었다면? 그 연결점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와 류창진 PD의 말을 엿들었던 이지혜에게 그 영향이 갔다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종방연에 더는 있지 못하고 뛰쳐 나온 거였다.
이지혜가 어떻게 죽었더라.
그 당시 무명 여배우의 죽음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도하지 않았기에 기억에 없다. 아니, 보도했어도 20년이 훌쩍 지났기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초조했다. 왜 좀 더 신경을 쓰지 못했을까 후회가 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막다른 곳에 몰려 죽어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절망감.
세상에 혼자 남은듯한 고독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지 않는가. 죽음을 결심한 사람이 얼마나 힘들게 삶을 정리하는지 말이다.
어느덧 도착한 교외의 한 빌라.
“수호 씨,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차 문을 닫고 나가려는 찰나.
“지우 씨. 잠시만!”
그러더니 김수호가 앞좌석 수납장에서 주섬주섬 무언갈 꺼내 주었다.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요.”
마스크, 그리고 선글라스. 아마도 내가 지금 이지혜의 집을 찾아가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말리지 않고 믿어주는 게 고마웠다.
무리한 내 부탁에도 군말 없이 나를 믿고 이지혜의 집 주소를 알아봐 준 류창진 PD에게도 고마웠고.
류창진 PD가 보내준 문자에 적혀있는 주소. 그 집에 도착해서 벨을 눌렀다.
‘딩동딩동’
“이지혜 씨? 이지혜 씨!”
‘쿵쿵쿵쿵’
초조함에 문을 두드려 보지만, 한참이 지나도 미동이 없는 문.
119에라도 신고해야 하나. 신고 해서 뭐라고 해야 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끼이익’
걸쇠를 건 문이 살짝 열리면서 이지혜가 나왔다.
“어머? 지우 씨가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생각보다 멀끔한 모습. 그녀의 얼굴에는 내가 갑자기 찾아온 것에 의아한 모습이 한가득 이다.
“종방연에 안 오셨길래요. 혹시나 해서 찾아와봤어요.”
“아···네. 제가 오늘 몸이 안 좋아서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그렇게 문을 닫으려 할때, 내가 문을 잡았다.
이상하겠지.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겠지. 그래도 이럴 수밖에 없었다.
이지혜가 전생에 나와 같은 선택을 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찾아왔는데, 차라도 한 잔 주실 수 없나요? 할 이야기도 좀 있고요.”
잠시 고민하던 이지혜가 문을 열었다.
조그마한 투룸. 거실 겸 주방이 있는 곳이었고,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깨끗하게 정리돼있는 집안, 위화감이 들었다. 뭔가, 있어야 할게 많이 없는 집이었다.
"뭔가 휑하네요."
"아, TV랑 커피포트 아는 동생한테 줘버려서요···노트북도 잘 안 써서 친구 줘버렸고."
내 예상이 맞는구나. 역시구나··· 싶었다.
이지혜의 심리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삶을 정리하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찬장을 한참 뒤지던 그녀가 말했다.
"집에 뭐 마실 게 없네요··· 요 앞 편의점에 잠시 갔다 올게요. 뭐 마실래요?"
"아··· 괜찮은데, 콜라 하나만 부탁할게요."
원래의 나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거절했을 거다. 하지만 일부러 마실 음료 하나를 부탁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지혜가 나가자마자 일어났다.
그리고 원래 티브이가 있었을듯한 서랍장 위. 아까부터 너무너무 궁금했던 흰 봉투에 손을 뻗었다.
내가 해봐서 안다.
유서는 원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놔두는 거다.
그 봉투는 내 예상대로 이지혜의 유서였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진 이름.
'이지혜 리스트'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