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나한테 부탁이라는 걸 하네
정종철이 청운 엔터테인먼트에 오기 몇 시간 전.
진권호 감독이 먼저 청운을 찾았다.
당연하게도 [찬란하게 빛나는]의 메가폰을 잡기 위해서였다.
첫인상부터 범상치가 않았다. 백발의 반삭발. 그리고 하얀 수염까지. 부리부리한 눈과 처진 입꼬리가 마치 그의 고집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예기성과 동년배 감독. 지금 활동하는 영화계 인사 중 가장 연배가 높다. 심지어 그는 감독 아닌가. 연기에 비해 연출은 트렌드의 변화가 빠르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연구하지 않으면 도태되기에 십상이다. 노배우는 많아도 노감독이 드문 이유가 이 때문이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수십 년간 유지한 감독.
나 또한 존경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감독 최초로 칸과 베니스 경쟁부문 진출. 그리고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받은 명실상부 아시아 최고의 영화감독 중 한 명.
내가 아무리 연기를 많이 했고, 돈을 많이 벌었어도 진권호의 영화적 권위와 명성 앞에서는 몇 수 접어줘야 한다. 이건 전생의 나를 가져다 대도 마찬가지다. 아니 그 어떤 배우가 와도 똑같다.
진권호가 선택한 배우만이 그의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
진권호의 무대는 세계니까.
비록, 경쟁부문에서 수상한 실적은 없지만, 동양에 작은 나라에서도 영화를 찍고 있고, 이 정도 영상을 찍어낼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린 사람이다.
나와 현주는 거장과 마주앉아 있는 시간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각본 어떻게 보셨나요.’
이 한마디 하기가 힘들다.
진권호 감독과 예기성 선생님의 불편한 관계에 관한 소문을 들었기에 우리가 먼저 각본 이야기를 꺼내기도 조심스러웠던 거다.
“나는 예기성을 싫네.”
“아··· 네···”
현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진권호.
시작부터 묵직하다.
음··· 뭐, 같이 욕해달란 말은 아니겠지.
그래도··· 의리가 있지. 영화를 안 찍었으면 안 찍었지, 예기성 선생님을 팔아먹으면서 영화를 찍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수한 감독이었으면, 진짜 쌍욕 해드릴 수 있는데··· 까비.
“예기성도 나를 싫어해. 그렇다고 해서 서로 모르진 않네. 아니, 너무 잘 알지. 그래서 더 싫어하는 거일 수도 있고.”
탁하고 진한 목소리.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고 두리번거린다. 장인호 사장이 서랍에서 재떨이를 가지고 왔지만, 현주의 눈치를 살짝 보고 테이블 위에 라이터와 담배를 다시 올려놓았다.
“내가 예기성을 잘 알아. 잘 알아야 구석구석 꼼꼼하게 싫어할 수 있거든. 그래서 예기성이 호구처럼 보여도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하고 다닐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멍청할지언정 어디서 헛소리하고 다닐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안단 말이야.”
진권호 감독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예기성 선생님과 참 안 맞겠다 싶다.
평소 신사답고 부드럽게 말씀하시는 예기성 선생님과 달리, 진권호는 말투와 행동이 나이에 맞지 않게 거침이 없다.
“그런데 예기성 이놈이 나한테 부탁이란 걸 하네. 하 참···이거 안 들어줘야 하는데. 내가 이 부탁을 안 들어주고 예기성을 놀려먹어야 하는데. 예기성과 나 사이에는 이런 걸 들어줄 의리가 없으니까 거절해야 재미가 있는 건데. 이거 내가 안 찍고 다른 놈 주자니 제대로 찍을 놈이 없네.”
“아!”
그러면서 티테이블 위로 [찬란하게 빛나는] 대본한 부를 툭 하고 올렸다.
분명, 대명 영화사에는 보내지 않은 각본이 어떤 경로로 진권호 감독에게 들어갔나 싶었더니.
예기성 선생님이었구나···
하··· 내가 뭐라고. 현주가 뭐라고 거기 가서 부탁까지···
“작가 양반. 나 돈 얼마 못 줘. 아마 각색도 좀 해야 될 거 같고. 그래도 괜찮아? 괜찮으면 오늘 싸인하고.”
“괜찮습니다. 대신··· 주연은 꼭··· 지우를···”
부끄러운듯 내 이름을 말하는 현주.
그제서야 진권호는 나를 보며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예기성이 파도가 목 밑에까지 찼니 마니 하던 애가 너라며?”
“네?”
“아, 예기성이 그런 이야기는 안 하나? 그런 게 있어. 주연? 오케이. 대신 오디션은 봐야 해. 아무리 각본이 좋아도, 어떤 배우인지 카메라 한 번 안 올려 보고 영화 찍을 수는 없잖아?”
여기서 오디션은 여러 사람을 불러 놓고 경쟁을 시키겠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카메라 테스트 한번 하고 영화로 그려질 캐릭터 이미지를 그리겠다는 의미가 강했다.
당연히 오케이 할 줄 알았던 현주가 의외의 답변을 했다.
“생각을 좀 해봐도 될까요?”
진권호는 끄덕이더니 기분 나쁜 내색 없이 명함 한 장을 올려놓고 ‘생각정리 되면 연락해’ 정도의 말을 하고 떠나버렸다.
***
다시 현재, 청운 엔터테인먼트 사장실.
“어? 선배님? 여긴 어쩐 일로···”
“현주야 오랜만이네.”
정종철이 현주를 보고 인사하자, 현주가 무의식적으로 내 팔을 살짝 잡는 게 느껴졌다.
옛날 쫓기던 기억이 되살아 나는 듯, 움츠러들고 있었다.
“어? 현주 씨랑 정 과장님이랑 아는 사이였어요?”
정종철이 현주에게 먼저 인사를 하자, 장 사장이 의아함을 표한다.
하기야, 우리끼리는 정 과장 부르는 게 당연했으니, 현주가 그동안 눈치 못 챘을 수 있다.
“네, 현주랑 같은 대학 나왔습니다. 제가 현주를 쫓아다녔죠. 하하.”
마치 어렸을 적 했던 짓궂은 장난을 고백하느냥 웃어넘긴다.
정종철의 뱀처럼 웃는 면상을, 현주를 부르는 입을 부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이지우입니다.”
“이렇게 또 만나네요. 이지우 씨.”
내게 명함을 건네는 정종철. 그 명함을 확인하지 않고 책상 위에 올려놨다.
책상에 제작사 측과 마주 앉고, 책상 아래에서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게 현주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모인 사람들이 책상에 자리 잡자 말자 바로 대화가 이어졌다. 제작사 직원이 두 부의 계약서를 꺼내 대본에 관해 말을 쏟아냈다.
“대본 잘 읽어봤습니다. 일단 원고료는 여기, 계약서 하단에 보시면 나와 있고요, 각본 수정에 관해서는 작품 진행하는 동안 꼭 작가님 동의 후에 하는 걸로 저희 측에서 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투자는 저희 쪽에서 다 알아서 하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감독은 지금 송원효, 감독과 김종훈 감독에게 일단 보여 드렸어요. 사실, 각본이 워낙 좋아서···”
각본이 어떻고, 투자가 어떻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사실 그 순간 제작사 직원이 하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 전생과 현생에 풀리지 않았던 미스터리가 풀렸기 때문이다.
왜 정종철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내내 의아했던 그 물음.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랬었구나. 니가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있구나.
모든 게 백룡 영화제에서 시작했던 거다.
전생에 백룡 영화제 남우 조연상을 수상받고, 케이플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다.
이번 생에서는 백룡 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라간 날 저녁, 정종철에게 직접 케이플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할 것을 권유받았고.
아니면, 재작년 백룡 영화제 신인상을 수상했을 때, 그때 이후로 스토킹을 멈췄다고 했다.
그때부터 현주와 공개연애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파편화되었던 정보들이 현주를 중심으로 해석하니 모두 풀렸다.
정종철이 백룡 영화제에서 나를 본 순간, 나를 망가뜨리기로 한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내 옆에 현주가 있었기 때문이고.
놀고 있네.
이건 내가 봤을 때 진짜 놀고 있는 거다. 나와 현주를 보고 노는 거지. 괴롭히고, 고통받는 상대방을 보면서 즐거워 하는 게 놀고 있는 것 아니면 뭔가.
현주 앞에 놓여 있는 계약서를 살폈다.
거액의 원고료. 얼마 전 이수한과 상담했을 때 들었다. 신인 작가의 각본 가격은 1,000만 원을 넘지 않는다고 말이다.
작가에게 돌아가는 건 엔딩크레딧에 이름을 올려주는 것과 돈 1,000만 원이 끝이라는 말이다. 당연히 각색의 권한도 제작사가 가져가는 게 통상적인 이바닥 룰이다.
감독 위주, 그리고 제작사와 배급사 위주로 돌아가는 사업이기에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 계약서. 각본료만 3000만 원을 제시했다. 현주가 단독으로 쓴 장편영화 각본이 이번이 처음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신인에게 업계 평균 3배를 각본료 제시한 것이다. 각색이 필요할 때는 현주의 동의가 있어야만 진행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언급한 감독들도 소위 말하는 A급 감독들이었다. 작품성과 흥행성을 두루 갖춘 감독들이었고, 이전에 찍었던 작품의 숫자를 생각하면 절대 이수한에게 밀리는 감독은 아니었다. 이수한 감독도 흥행성과 작품성을 두루 인정받았지만, 아직 두 작품밖에 찍지 않은 감독이니 말이다.
뿐만아니었다. 고구려 일보 계열의 배급사인 케이박스플러스에서 집중적으로 마케팅 해준다고 계약서상에 명시해놨다. 그것도 마케팅 계획을 풀어쓴 기획서를 붙임으로 계약서 뒤에 넣어두었다.
이 정도면 역대 최고 대우로 각본을 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조차도 좀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였고, 장인호 사장도 계약서를 훑어보고 이게 맞나 싶어 확인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시나리오를 제작사에 팔 때, 제발 사달라고 제작사에 사정해야 한번 읽어줄까 말까 하다. 사주는 게 아니라, 읽어줄까 말까.
그 이수한도 [폭력의 사슬]을 찍을 때 각본을 사주는 제작사가 없어서 직접 찍지 않았나.
계약서를 내려놓는데, 그 순간 정종철과 눈이 마주쳤다.
정종철은 웃고 있었다.
어디 거절할 테면 거절해보라 하는 식이었다.
“계약서 잘 나왔죠? 제가 신경을 좀 썼습니다. 우리 현주 각본 아닙니까.”
‘우리 현주’라는 말에 내가 욱해서 욕이 나올 뻔했는데, 그 찰나에 내 말을 막아서듯 정종철이 말을 이었다.
“선밴데 이 정도는 해줘야죠.”
좋은 선배인 척을 하시겠다.
전생에 그렇게 시달리고, 이번 생에 다시 너를 보니 이제 나도 너를 좀 알 것 같다.
새장에 가두고 새의 털을 하나씩 뽑는 걸 즐기는 타입이구나.
이걸로 나와 현주를 엮어서 영화 찍는 동안 계속 괴롭히겠지.
전생에 나를 거액의 계약금을 미끼로 소속사에 묶어 놓고 뺑뺑이 치는 걸 즐겁게 보고받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생각이 없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저희 제작사 이미 확정 났는데?”
마주 웃어주었다.
정종철, 지금 웃어둬라. 내가 너를 아주 우스운 꼴로 만들어 줄게. 그때도 웃을 수 있나 한번 보자.
“네? 하하, 이지우 씨.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끼지 마시고요. 장 사장님? 저희 오늘 [찬란하게 빛나는] 이 작품 계약하기로 약속 잡고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눈은 나를 보는데 말은 장인호 사장에게 건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가는 정종철의 얼굴을 바라보곤 미소 띤 얼굴로 답했다.
“작품 하는데 애 어른이 어디 있나요. 그리고 정 과장님이라 그랬나?”
일부러 아까 받은 정종철의 명함을 앞뒤로 훑어봤다.
마치 너 따위는 기억에 없다는 듯이,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계약서 위에 그 명함을 올리고, 정종철 쪽으로 스윽 밀었다.
“우리 현주 첫 단독 작품 하는데, 아무 제작사랑 할 수가 있나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현주 작품인데. 대원 영화사 아시죠? 진권호 감독님 계신 곳. 우리 현주 대본을 드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시고 찾아오셨더라고요. 우리 현주가 쓴 [찬란하게 빛나는] 맡아서 해보고 싶다고요. 우리 현주가 각본이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에요. 우리 현주 각본이 좀 잘 나오긴 했죠. 그렇지 현주야?”
그러면서 살짝 현주와 장인호 사장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실 아직 진권호 감독과 계약서를 오간 상황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의 표정을 확인한 거였다.
변화 없는 두 사람의 얼굴. 현주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장인호 사장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아!”
진권호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이미 일이 엎어졌다는 걸 느꼈는지 정종철 옆의 제작사 직원이 소리 낮춰 탄성을 지었다.
진권호 감독. 이 판에 껴들었으면 모르면 안 되는 사람이다.
아니, 일반인 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 최고의 거장.
칸과 베니스가 사랑하는 작가주의 감독.
무섭게 일그러지는 정종철의 얼굴.
그 얼굴을 보고 좀 더 웃어주려는데, 현주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긴장이라도 했는지, 축축하다.
정종철의 일그러진 얼굴을 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앞으로 기회는 많으니까.
“아니 그러면 미리 말씀을 주셨으면 헛걸음 안 했을 거 아닙니까.”
“어휴, 어떻게 그러나요. 그런 중요한 일을 전화 한 통으로 전할 수 있나요. 이렇게 얼굴 보고 죄송하다고 말해야죠. 제가 사과의 의미로 요 앞 한정식집 예약해놨는데. 어떻게 식사는···”
“안 합니다.”
“아쉽네요, 그 집 코다리 찜 잘하는데. 먹고 가시지.”
장인호 사장은 살짝 화가 난 듯 말하는 정종철의 말을, 유들유들 받아넘겼다.
장인호 사장 연극판에서 오래 굴렀다더니 뻥은 아니었나 보네. 애드리브가 자연스럽다.
원래 정종철이 현주를 스토킹하던 그 빌어먹은 자식인지 몰랐을 때는, 진권호 감독과, 케이콘(고구려 일보 계열 제작사)의 조건을 비교해보려고 했었다. 어떤 조건을 가져다 대도 ‘진권호’ 이 이름값에 비교하긴 힘들겠지만. 비교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니까.
제작사 직원이 짐을 다 싸자, 정종철은 인사도 없이 나가버렸고.
“살펴 가세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케이콘의 직원과 정종철이 빠져나가고. 장인호 사장이 걱정되는 듯이 물었다.
“야, 너! 이거 어떻게 하려고 그래? 현주가 진권호 감독한테도 생각해 본다고 했다며. 그걸 떠나서 너 정 과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그러냐···”
장인호 사장의 역정에 대답하지 않았다. 장인호 사장을 무시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현주가 걱정돼서 먼저 현주를 살폈다.
“현주야, 케이콘은 안 되겠다. 차라리 진권호 선생님이랑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숫자로 보이는 조건이다가 아니-”
현주가 결정해야 할 문제인데 내가 먼저 나서서 진권호 감독과 계약을 하는 것으로 끌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잘했어. 매번 잘난척하는 얼굴 꼴 보기 싫었는데. 아주 그냥 쌤통이다.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