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그 새끼가 이 새끼였다
[응답하라 119]의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이어진 전체회식. 대본리딩날 이후 처음으로 있는 전체 회식이었다.
아마, 지금 성적이라면 종방 기념 연회도 거하게 열어주지 않을까 싶다.
이틀 전 방영했던 14화 최고 시청률이 12%.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주인공들이 행복해지는 16화 시청률은 15% 예상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종편드라마 최초로 15% 벽을 뚫은 작품으로 남게 될 것이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 회식. 매번 자체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있으니 좋을 만도 하지.
그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 내 주변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이지혜.
아까 나와 류창진 PD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도 그렇고, 지금도 내 주변에서 술 마시고 있는 것을 봐서도 그렇고. 아마 차지석 사장이나, 정종철이 심어놓은 사람 중 하나겠지.
무엇보다 이지혜 소속사가 케이플 이거든. 이유는 몰라도 차지석과, 정종철이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나를 묻으려 하는 지금. 이 정도는 합리적 의심이다.
늦은 밤, 거기에 실내임에도 커다란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미래를 알고 있어서 그런가 더 짠하기도 했고.
이지혜 저 사람도 연기하러 현장 와서, 남의 이야기 엿듣는거나 하고 싶었겠나. 다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겠지. 그게 답답하니까 나쁜 생각마저 했던 걸 테고.
이지혜는 앞으로 자살한다. 내 입장에서는 20년이 훌쩍 지난 기사라 가물가물하긴 하는데, 내 기억에 이지혜는 접대를 위해 촬영현장이 아닌 다른 현장에서 일했다고 했다. 접대 대상의 골프장 따라가기도 하고, 술집을 따라가기도 하고···
꿈을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기 쉬운 오류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해봐야 조, 단역만 전전하다 버려질 뿐일 텐데 말이다.
더 이상 꿈을 이루지 못한다고 판단한 이지혜는 결국 자살한다.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지장을 찍은 유서.
그 유서에는 이지혜가 만난 사람들 이름과 대화내용이 적혀 있었고, 그 유서가 밝혀진 사건이 바로 ‘이지혜 리스트’ 사건이다.
크게 숨을 들이켜고,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지혜 선배님 한잔 드릴까요?”
“네!? 네.”
화들짝 놀라는 이지혜. 그동안 커피를 건네며 간간이 인사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내가 먼저 말을 건 건 처음이었다.
내가 전생에 있었던 일 때문에 여자 관계에 있어서는 병적으로 깨끗하게 구는 편이라, 또래 여배우들에게는 절대 먼저 말을 안 건다.
게다가 작품선택 할 때 멜로 영화나 드라마는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고, 조금만 진한 성적묘사가 있어도 쳐다도 안 본다. 아무리 흥행하고 좋은 영화라 해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채워진 필모그라피만 봐도, 러브라인이 있는 작품은 [응답하라 119] 정도인데, 키스하는 묘사만 나오고, 키스씬 자체를 빼버렸다.(유수영 작가를 겨우 설득했다. 나와 현주의 관계를 아는 유수영 작가가 욕하면서 대본 수정을 해줬다.)
그렇기에 이지혜에게 먼저 말을 거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네··· 지우 씨도요.”
음··· 할 말이 없네. 어색하기도 하고. 대뜸 삶은 아름다워요··· 이럴 순 없잖아. 도움도 안 될 테고.
다행히 이 어색한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지혜도 불편했었던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지우 씨 나이도 어린데, 정말 잘하시네요. 촬영장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뭘요. 지혜 선배님이 잘 받쳐주셔서 그런 거죠.”
“그래도요··· 그렇게 하기 쉽지 않은데···”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 걸요. 하하.”
백룡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의 웃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색한 웃음.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도 긴장하고 있기도 했고.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있었다.
“그죠··· 저도 예전에는 연기하는 걸 참 좋아했는데. 갈수록 이게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내가 꿈꾸던 배우라는 직업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이런 이야기 하면 우습긴 한데, 제가 아는 선배도 그걸 고민하던 분이 있었죠. 저도 그랬고요.”
“지우 씨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한다.
나라고 왜 그런 경우가 없었겠나. 오히려 나만큼 절실하게 배우라는 직업에 후회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하죠.”
“...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그냥, 그 상황에서 도망쳤어요. 아주 멀리.”
“아··· 네.”
안 믿어도 어쩔 수 없다. 전생의 일이니까.
아들, 아버지, 남편 그 모든 역할에서 실패하고, 결국 배우라는 직업만 남았을 때 나는 죽음으로 도피했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먼저 말을 꺼냈다.
“제 아는 선배는 좀··· 특이하게 극복하신 분이 이예요. 연극 하시는 분인데, 극단 단장이 성추행했는데 처음에는 꿈을 위해 참아야지 하다가···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어서 극단장을 반죽여 놓고 도망친 분 계세요. 그런데 그분 지금도 연극 생활 잘 하고 계십니다. 오히려 극단에 들어갔을 때보다 잘풀렸죠.”
괜스래 머쓱해져 눈앞에 있는 사이다 잔으로 입을 축인 후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요. 숲을 보려면 숲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에요. 숲 안에 있으면 나무 밖에 안보이니까요. 대사, 발성 뭐 그런 기술적인 것도 중요한데. 배우는 삶의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결국,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연기에서 도망치고, 제 삶을 돌아보게 됬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연기가... 좋아지더라고요.”
언젠가 부터 조용해진 주변의 테이블. 모두 내 말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삶에서 도망친 내가 이런 말을 하니, 스스로 부끄럽다.
주변에서 집중해서 듣는 사람들의 눈빛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이지혜에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대충 얼버무렸다.
“잘 될 겁니다. 모두.”
***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장인호 사장은 요즘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지우의 영입 이후, 잇따른 영화와 드라마의 성공. 그리고 새로운 사업인 연극 진출 성공. 그뿐인가, 연극의 흥행으로 [벡터맨] IP가 티비로 확장되어 [벡터맨] TV판 2기까지 제작되는 중이다.
사람도 많이 늘었다. [벡터맨] 아동극에서 연극을 했던 배우 중, 장래성이 보이는 사람을 추가로 계약했다. 그 인원을 케어할 매니저도 신입과 경력직 두루 뽑았고. 연극을 제대로 기획하기 위해서 공연제작 지원팀 충원까지.
실무는 아랫사람이 한다 쳐도, 이 모든 일을 총괄하고 확인하는 대만 하루 대부분을 쓸 정도였다.
장인호 사장이 몸소 회사의 성장을 느낀 건 자신의 휴대폰 요금 고지서를 받았을 때였다.
32만 원.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나올 수 없는 전화 요금이었다. 그만큼 통화를 자주, 오래 한다는 방증이었고, 전화요금 이외에도 접대 명목으로 나가는 식비만 한 달에 1000만 원 이상 나갈 정도였다.
평소에 연락을 잘 하지 않던 업계 관계자들. 하지만 좋은 관계는 계속 유지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장인호 사장은 본인이 밥을 샀다.
이지우의 광고 한번, 출연 한번 잡아달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식사와 술값을 모두 장인호 사장이 결제했다.
“와··· 동수야. 나 말년에 진짜 이게 무슨 고생이냐.”
“사장님 어제도 많으 드셨어요?”
“어. 예전에 나 연극 할 때 우리 극단 스폰서 해주시던 사장님 계시거든. 지우 광고 건으로 만났다가 어제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영감쟁이 환갑 넘었는데도 술이 쎄. 말술이야. 어휴···”
“어휴, 승낙하신 거 아니죠? 안 그래도 지우 씨 [응답하라 119] 촬영 끝나고 스케줄 빡빡한데···”
“당연히 거절했지. 스케줄 안 나오는 거 뻔히 아는데. 곧 [찬란하게 빛나는]도 촬영 들어가야 되고.”
지금 쏟아지는 광고. 그동안 대중의 화제성과 별개로 광고 모델로서의 파워가 얼마나 있는지 확인이 안 됐던 이지우.
커피 광고와 은행광고. 두 편의 전혀 다른 분위기의 광고로 이지우의 브랜드 파워를 증명했다.
우선 커피광고를 기획했던 광고회사의 전략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이지우가 커피를 먹는 모습만 줄창 틀어줬던 커피광고.
믹스커피를 타 먹는 사람들의 취향은 까다롭지 않다. 까다로운 사람들은 직점 원두 갈아 마실 테니까. 즉, 레드 모카건 화이트 모카건 어느 회사에서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제품 간 변별력이 떨어지는 시장.
고만고만한 제품들 사이에서 눈이 띄기 위해 제품 이지미와 이지우의 이미지를 일치시키는 광고를 만든 거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극복하고, 성공한 남자가 마시는 커피.
제품의 주 고객층인 20~40대 여성의 마음을 흔드는 한 여자만 바라보는 연하남.
거기에 기부와 봉사활동으로 쌓아올린 긍정적인 이미지까지.
기존 단단했던 믹스커피 시장을 부숴버리면서 신제품을 안착시켰다.
그리고 은행광고.
광고회사의 전략은 실패했지만, 광고효과는 성공적이었다.
이지우가 가지고 있는 신뢰와 믿음의 이미지에 플러스 알파를 기대했지만,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중장년층에게는 그다지 웃긴 광고가 아니었다.
헌데, 이지우를 잘 알고, 관심이 있는 20~30대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올라왔다.
이는 신규고객 유치로 이어졌고, 이벤트성으로 만들어진 ‘이지우 사랑 나눔 적금’. 1계좌당 은행이 5,000원씩 기부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하루 만에 완판되는 기염을 토했다.
두 광고 덕분에, 이지우가 움직이면 고객이 움직인다는 공식이 성립하게 되었고, 광고주들이 가장 사랑하는 모델로 입지를 다진 것이다.
그만큼 청운 엔터테인먼트로 들어오는 광고 기획서도 늘어났다.
이동수 실장은 냉장고에서 숙취해소제를 꺼내 뚜껑을 따 장인호 사장에게 건네며, 장인호 사장 책상 위로 서류를 한 뭉치 올렸다.
“다행히네요. 여기 지우 씨 앞으로 들어온 협찬 건이랑, 광고 기획서들··· 이건 예기성 선생님 앞으로 들어온 부천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제안서··· 그리고 이건 채 팀장이 주고 간 [벡터맨]맨 아동극 2기, 작가 리스트입니다. 전화도 몇 군데 왔는데요. 고구려일보 기획전략실 정 과장이라는 사람이 사장님을 찾네요. 다른 데는 모르겠는데 고구려 일보라서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고구려 일보? 거기서 전화가 왜 와? 지우 신문에 나갈만한 일 있나?”
“아뇨아뇨, 지우 씨 일이 아니라, [찬란하게 빛나는] 대본에 관심 있다는 투로 이야기하더라고요.”
“너 고구려 일보에도 [찬란하게 빛나는] 대본 넣었냐?”
“아뇨, 근데 대원 제작사 빼고 웬만한 제작사에는 다 돌리긴 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인호 사장.
청운의 대표배우라 할 수 있는 예기성 선생님과 대원 제작사의 진권호 감독이 워낙 사이가 좋지 않기에 보내지 않은 것을 이해했다.
그런데 제작사가 아닌, 신문사에서 대본에 관심이 있다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일보에서 영화 대본에 왜 관심을 가져?”
“고구려 일보 자회사 중에 케이콘이라고 제작사 하나 있잖습니까. 영화 제작사. 제작사만 있나요. 극장도 있지, 배급사도 있지.”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그럼 케이콘에서 연락 와야지. 왜 고구려 일보에서 연락이 오느냐 이 말이야.”
“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
“전화 온 사람이 정 과장이라고 그랬지?”
“네? 네.”
장인호 사장은 뭔가 떠오른 게 있는 듯,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화 몇 통화까지 끝낸 뒤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상하네. 예전에 백룡에서 지우 남우주연상이 거의 확실하다 그랬거든? 근데 주최사인 고구려 일보에서, 남우조연상이랑 남우주연상을 같은 작품에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지우 남우주연상을 막았단 말이야? 상식적으로 그럼 남우조연상을 다른 작품에 주고 지우한테 남우 주연상이 가야지 말이 되는 거 아니냐?”
“음··· 뭐 그렇죠.”
“근데, 유례없이 주최 측에서 반발이 심했데. 지우 남우주연상을 주는 것에. 그런 고구려 일보가 [찬란하게 빛나는]에 관심을 두고 연락했다··· 뭔가 앞뒤가 안 맞지 않냐?”
“안··· 맞죠?”
“정 과장이라는 사람 전화번호 줘봐.”
장인호 사장이 정 과장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열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네 장인호 입니다.”
- 진권호 일세.
“누구요?”
-나, 진 권 호라고. 장 사장, [찬란하게 빛나는] 읽어 봤는데, 작가랑 이지우 한번 볼 수 있나?
***
고구려 일보에서 현주의 [찬란하게 빛나는]에 관심이 있다라···
고구려 일보의 기획전략부.
뭐 그럴 수 있다. 고구려 일보는 신문사 이외에도, 지주회사의 기능도 겸하고 있으니까. 회사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기획전략부에서 그룹의 계열사 일을 교통정리 할 수도 있겠지.
괜찮은 사업이 있으면 계열회사에 발전시켜보라고 할 수도 있을 테고.
문제는 전화온 사람이 정종철이라는 게 문제다.
심지어 직접 작가와 만나고 싶다고 제안을 해왔다고 한다.
백룡영화제 뒤풀이에서의 만남, KTVC의 [시사 저격] 등등, 분명히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전생에서도 나를 딱 죽지 않을 정도로 굴렸던 게 케이플 엔터테인먼트였다는걸 생각해보면, 이것도 정종철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궁금했다. 왜 이렇게 나를 싫어하는지.
제작사 관계자와 함께 청운 엔터를 찾은 정종철.
제작사와 작가가 함께하는 미팅. 거기에 나도 참여했다.
남자친구로서 참여한 건 아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각본을 제작사에 돌리면서 내건 조건이 있었다.
‘주연배우는 이지우로 캐스팅할 것’
그렇기에 나도 주연배우 입장에서 그 미팅에 비집고 들어간 거였다.
나를 싫어하는 정종철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그리고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지 이유를 알아보려고.
현주와 사장실에서 기다리던 중, 제작사 관계자와 정종철이 청운 엔터테인먼트 사장실로 들어왔다.
해답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정종철이 들어오자마자, 현주의 놀란 음성.
“어? 선배님? 여긴 어쩐 일로···”
현주의 움츠러든 어깨. 놀라서 입을 가리는 손. 불안한 눈.
그때 깨달았다.
이번 생에 내가 현주와 공개 연애를 결심하게 했던 새끼이자, 저번 생에 내가 쫓아냈었던 스토커.
그 새끼가 이 새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