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부탁하나만 하자
나도 예전에 각본을 읽어만 봤지, 각본이 어떻게 제작사 손에 들어가 제작이 되는지는 몰랐다.
출근하면 주는 게 대본이었으니까.
투고를 하는 것인지 기획을 하는 것인지. 혹은 작가가 얼마를 받아야 정상적인 거래인지.
이런 걸 알 도리가 없었다.
관심도 없었고.
주변에 아는 작가라곤 유수영 한 명 있는데, 드라마 작가로 활동하고 있기에 카테고리가 다르다. 대뜸 가서 각본을 얼마에 팔아야 하는지, 제작사를 상대할 때 주의해야 하는 점은 뭔지, 이런 걸 물어볼 만큼 친하지도 않았고.
그동안 현주가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건, [벡터맨]과 같은 회사 자체 프로젝트이거나, [폭력의 사슬], [민주를 기다리며], [저승 카페]와 같이 아는 사람을 통해서 일했던 것이고.
애초에 현주가 청운 엔터테인먼트에 소속하게 된 것도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지 않나. 그 당시 나와 현주를 엮어서 공격하려는 기자들의 가십성 기사에 대해서 보호하기 위해서였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장인호 사장 머릿속에는 연극 제작사로 회사를 확장시킬 구상이 있었겠지만.
청운 엔터테인먼트는 배우를 서포트 하는 에이전시 성향이 강한 회사. 장인호 사장이 대본이나, 시나리오 보는 눈이 좋다는 걸 나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각본을 팔고 제작사를 선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이수한을 찾아온 것이다.
청운 엔터테인먼트는 나름의 루트로 제작사를 알아보고, 나와 현주도 나름대로 제작사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수한은 제작사의 사장이자 유망한 감독이니, 들어오는 시나리오도 많을 것이고, 시나리오의 시세(?)나 제작사 선정에 관한 노하우가 있을테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 괜찮은 제작사를 못 찾으면 스튜디오 나우에 제작을 맡기는 방법도 있고.
다만 이럴 경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스튜디오 나우에는 2개의 제작팀이 있다. 영화제작을 하는 제작 1팀이 [벡터맨]을 만들기로 했다. 제작 2팀은 TV프로그램 제작팀이지만 현재 하고 있는 다른 프로젝트가 있다. 그래서 티브이 시리즈인 [벡터맨]이 제작 1팀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만약 [찬란하게 빛나는]을 스튜디오 나우에서 찍게 되면 스케줄상 촬영이 한참 뒤로 밀리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TNN에서 확정난 [벡터맨] 편성을 스튜디오 나우가 바꿀 수는 없으니 말이다.
김주하 실장 지금 저렇게 정신없이 바쁜 건 제로나인 스튜디오 건 때문인 것 같은데.
“수한이형이 제로나인에 [벡터맨] CG 견적 내본다고 했던 것 같은데···”
“네. 견적 내러 갔는데, 회사가 도산 직전이라고 거절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사장님이··· 그 자리에서 회사를 살리겠다고 해버리셨고요.”
프린트 출력이 끝났는지, 삐져나온 A4용지를 책상에 ‘탁탁’ 쳐서 정리한 김주하 본부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우 씨 오랜만이 만났는데 제가 오늘은 좀 정신이 없네요. 지금 TV판 [벡터맨] 관련 업무도 밀려있어서요. 나중에 따로 이야기 한번 해요.”
그러면서 김주하 본부장은 제작지원본부 직원들을 이끌고, 사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흐음··· 처음에 견적보다 회사를 샀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친 형이 미친 짓 또 했네. 싶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시기가 그렇다.
향 후 OTT로 영상물 제작 파이가 폭발적으로 커지는 데 반해, 제대로 된 VFX 제작 기술을 가진 업체는 극소수다. VFX 특성상 노가다성, 그리고 많은 인력이 필요한데, 그 정도로 규모를 가진 업체는 현시점에서 없다시피 하고.
액션영화에 진심인 이수한이라면 이런 부분에서 갈증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대규모 액션 장면이 포함된 영화. [아바타], [스타워즈]와 같은 초대형 프랜차이즈형 영화.
[해적왕] 말고···
VFX 스튜디오라면 꾸준히 수요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 등의 외주만으로도 충분히 회사를 유지 할 수 있고, 스튜디오 나우에서도 협력할 건덕지가 많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앞으로 중국 내수용으로 만드는 영화. 여기서 VFX 수요가 어마어마 해 질 거다.
“수한이 오빠는 참··· VFX 전문 스튜디오라니. 좀 섭섭하네. 우리한테 말도 안 해주고. 좀 일찍 말해줬으면 좋았을걸.”
뭔가 아쉽다는 듯, 혼잣말하는 현주.
아··· 최근에 회식도 있었고, 합평도 있었고. 감독과 작가라는 계약 관계 라기보다, 서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공통된 직업적 교감이 더 많았던 두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이수한과 친해진 현주가 이수한에게 섭섭할 수 있겠다 싶었다.
“바빴나 보지, 뭐.”
“아니. VFX 회사 인수할 거란 생각을 갑자기 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김주하 본부장님 말 들어보면 즉흥적으로 일 저지른 거 같더만.”
“이럴 줄 알았으면, [찬란하게 빛나는] 말고 우주 괴수와 우주 전함 나오는 스페이스 오페라나, 사이버펑크 배경의 무협에 도전해 보는 건데··· 내가 쓰면 스타워즈 뚝딱인데, 까비...”
우스운병이 옮았다.
“현주야. 이제 이수한이랑 놀지 마.”
***
시간이 조금 지나고, 사장실에서 사람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이수한은 사장실 문틈으로 얼굴만 빠끔히 내밀고 우릴 보고 손짓했다.
“미안하다. 회의가 길어져서··· 앉아 앉아.”
응접용 소파에 이수한과 마주 보고 앉았다.
"오빠, 오빠! 이제 그러면 전에 시놉시스만 짜놨던 사이버 펑크 도사 액션 활극 시나리오 작업해도 되는 거야? 예전에는 CG 기술이 모자라서 안 된다며!"
"어? 일단 그건 천천히··· 제로나인이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도대체, 사이버펑크랑 도 닦는 도사가 어떻게 하면 같은 화면에 나올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보통은 직원이 사고를 치면, 사장이 수습하는 거 아냐? 이 회사는 어째 사장이 사고를 치고, 직원들이 뒷수습 하는 거 같지. 형 제로나인에 [벡터맨] 견적 뽑으러 간 거 아니었어? 어떻게 하면 견적 뽑으러 갔다가 회사를 사오는 거야?"
진짜 궁금했다. 회사를 인수한다는 건, 영화 한 두 편 말아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
“아, 견적을 뽑으러 갔는데. 회사가 도산 직전이라는 거야. 그래서 견적이나 계약이 불가능하대. 그래서 어쩌겠냐. 이왕 온 김에 샘플 영상이나 좀 봅시다 했는데··· [D-CRAFT]는 그냥 애들 장난 수준이더라고.”
“뭐!?”
“내가 기술적인 걸 정확히는 몰라도 확실히 다른 업체랑 달라. 뽑아내는 영상 퀄리티가 장난이 아니더라고. 자체 소프트웨어라 그랬나? 하여튼 기존 수백 명이 달라붙어야 하는 장면도 이 회사의 자체 기술로 만든 소프트웨어 쓰면 수십 명으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하더라고.”
“자체 소프트웨어? 사장 이름이 뭔데?”
“최영준이었나?”
“최영준··· 최영준··· 아! 최영준?”
“알아?”
"...아니 모르지."
자체 개발 소프트웨어에서 느낌이 오더라니.
아는데 모르는 사람이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 싶었다. 미래에 영화 [악신과 함께] 시리즈를 제작할 제작사 사장이자, 감독이다.
내가 어쭙잖게 중국발 VFX 외주가 수요가 많을 거라든지, VFX가 앞으로의 한국 영화계에 중요한 역할을 할거라는 걸 아는 게 모두 저 최영준이라는 사람의 성공 스토리를 알기 때문이다.
미래에 영화인 치고 저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최영준. 한국 VFX의 선구자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답답하면 내가 뛰어야지 하는 스타일로 유명하다.
원래 영화 연출 전공인 걸로 안다. 영화 찍어야 하는데 CG 기술이 없네? 없으면 내가 만들어야지. 해서 만든 회사가 시니스터 스튜디오라고 알려져있다..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로 중국 영화 외주 받아 회사의 덩치를 키우고, 나중에 영화제작까지 뛰어든다.
그 시니스터 스튜디오에서 만든 영화. 쌍 천만 신화를 기록한 시리즈가 [악신과 함께] 였다.
그런데, 시니스터 스튜디오가 그의 첫 회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로나인 스튜디오가 망하고, 그 핵심기술을 중심으로 다시 세운 회사가 시니스터 스튜디오라 하면 딱 맞아떨어진다.
아무런 기반 없이 그만한 기술력을 가진 회사가 뚝딱 하고 만들어 질 리가 없으니.
나는 미래를 알아도 제로나인 스튜디오가 시니스터 스튜디오의 전신이었음을 몰랐기에 생겼던 오해.
이수한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우스워 보여도, 어쩌면 이수한의 안목이 그만큼 대단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거장은 거장을 알아 본다는 뭐 그런 건가···
"형, [벡터맨]이 끝이 아니구나. 멀리 보면 VFX 회사가 장례성 있지."
"뭔소리야. 우리 라일라 공주님 변신 장면 찍으려고 산 건데. 특촬물은 변신장면이 생명인 거 모르냐?"
"아니, 특촬물이고 나발이고 공주가 왜 변신을 하는 건데?"
"해! 내가 찍는 [벡터맨]은 공주가 변신도 하고, 악당도 무찌르고 로봇도 타고, 우주 전함도 타고 다해! 우리 공주님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아니··· 그럼 [벡터맨]이 아니라, 제목을 [라일라 공주]로 바꿔야지···"
아 좀··· 깨달은 표정 짓지 말라고···
***
충무로. 과거 영화관이나 영화 관계사들이 밀집해 있던 거리였지만, 이제는 멀티플랙스 극장과 반려동물 샵 등에 밀려 말 그대로 이름만 남은 영화의 거리.
그 거리를 지키고 있는 제작사.
영화사 대원.
하지만 충무로가 여전히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단어이듯이 영화사 대원은 충무로를 대표하는 제작사이다.
구식. 그리고 구태의연한 회사. 그럼에도 칸과 베를린을 밥 먹듯이 가는 영화사.
낡은 건물 2층. 90년대에나 볼법한 구식 간판에 ‘대원 영화사’라 적혀있다. 계단실 입구 앞에 붙어 있는 영화 포스터는 귀퉁이가 너덜거리고 햇빛에 바래, 백화되어있다.
2층까지 올라가는 계단 옆에 붙어 있는 포스터들. 80년대, 90년대. 그리고 최근 2000년대와 2010대 영화까지. 영화사까지 올라가는 계단실을 빼곡히 장식하고 있었다.
예기성은 그 계단실을 올라가며 추억에 잠기듯이 계단 한두 개 올라가다 잠시 멈춰 서고. 다시 올라가고를 반복하여 2층까지 올라왔다.
요즘은 영화배우가 제작사에 방문할 일이 사실 잘 없다. 예기성 쯤 되는 ‘대배우’에 올라선 배우라 하면, 더욱 그렇고.
‘끼이이익’
기름칠을 한 지 오래된 듯, 영화사처럼 문도 낡았다.
예기성은 제작사 입구에 들어서고 내부를 보고 추억에 잠겼다.
겉에서 보기와 다르게 넓은 내부. 하지만 깔끔하게 정리해 뒀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너저분하다.
‘그래 예전에는 다이랬지.’
“어서오세- 헙.”
예기성의 얼굴을 보고 놀란 듯이 입을 막는 직원.
다른 직원들도 예기성의 등장에 놀라는 눈치다.
아무리 예기성이 유명한 배우라 해도, 배우를 접할 기회가 많은 영화사 직원이 배우를 보고 이 정도로 놀라는 경우는 잘 없다.
작품을 같이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직장 동료’와 같은 느낌이 드니까. 그래서 영화인들은 감독 배우 가리지 않고 서로 간에 ‘선배’, ‘후배’와 같은 호칭을 쓰는 거고.
직원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김양아, 가서 소금 한 바가지만 퍼와라."
안 쪽 책상에서 들리는 굵직한 저음의 목소리.
삭발에 가까운 머리는 새하얗게 세었고, 코와 턱 언저리에는 하얀 수염으로 덮여있는 노신사, 아니 도사와 같은 분위기의 남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 진권호 감독이었다.
"김양아, 뭐하냐. 소금 안 퍼오고!"
노기가 띈 진권호 감독의 목소리.
김양이라고 불린 여직원은 중간에 끼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해 하고 있었다.
예기성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다가갔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와 감독.
혹자는 말한다.
저 두 사람이 같이 작품을 찍었다면 어떤 영화가 나왔을까.
대단한 영화가 한 편 나오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영화계 알아주는 앙숙. 진권호 감독과, 예기성 배우.
어느새, 진권호 감독 앞에 선 예기성.
예기성은 진권호가 앉은 책상 위로 한 부의 시나리오를 올렸다.
"진 감독, 아니. 권호야. 부탁하나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