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98화 (99/121)

98. 짬뽕과 사이렌

이지우의 광고모델이 확정 난 직후, 광고 제작사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어떻게든 [응답하라 119]가 방영하는 중에 광고가 나가야 효과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물론 모델은 1년으로 계약하고 드라마 방영이 끝나도 광고는 계속 송출된다. 그 효과를 최대치로 뽑기 위해서는 배우가 티브이에서 나오는 동안 광고도 같이 나와주는 게 좋다.

며칠째 이어진 콘셉트회의. 그럼에도 직원끼리 의견이 갈릴 뿐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일단 신제품 브랜드 컬러가 레드 아닙니까. 악마의 커피 어때요? 신제품이니까 강렬하게 가야죠. 생각해보면 [저승 카페]에서도 결국 배역은 저승사자였지 않습니까. 이걸 살짝 틀어서 ‘악마의 커피’ 렉심 레드 모카. 괜찮지 않아요? [악의 기록]에서의 이미지도 딥다크 하잖아요. 피도 많이 튀고.”

“아니 어떻게 저승사자 컬러가 레드에요, 블랙이나 화이트지. 그리고 지금 방영되고 있는 작품은 [응답하라 119]잔습니까. 드라마 톤에 맞춰서 화사하게 가야죠. 광고주가 기대하는 게, 이지우 씨의 신뢰, 믿음, 기부 그런 이미지 아닙니까. 구세군 냄비 느낌의 밝고 따스한 레드로 가죠.”

“겨울 지난 지가 언젠데, 구세군 타령이세요. 그보다 신제품을 강조할 키워드 선정이 필요합니다. 광고주도 일반 믹스 커피 대비 진한 풍미를 내세워 달라고 했고요. 저승의 맛 레드 모카? 악마적 유혹 레드 모카? 이런 식으로요.”

치열하게 설전 중인 회의장.

그때, 구석에서 가만히 이지우의 프로필을 보고 있던 한 직원이 손을 들었다.

“이 대리 말해봐요.”

“이거 신제품인 거 강조하지 말고, 그냥 이지우한테 묻어가죠.”

앉아있는 다른 모든 직원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발상이었다. 어떻게서든 신제품의 새로운 맛과 향을 이지우와 연결하려고 했던 직원들.

일순, 회의장이 조용해 졌다.

“계속해봐요. 이 대리.”

회의장에서 가장 상석에 있던 남자가 말하자, 이 대리가 말을 이었다.

“제가 이지우 씨 분석하면서 느낀 건데요. 이지우 씨는 이미지가 이미 확고하게 만들어졌어요. 그것도 세대별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20~30대에는 국민 연하남 플러스 짐승남, 하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하겠지, 이런 이미지가 강하고요.”

직원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자료를 뒤졌다.

“40~50대에는 기부천사, 건실한 공무원 이미지가 강합니다. 오히려 강렬한 이미지는 10대에 많이 분포되어있어요. 인터넷 짤방으로 본 [민주를 기다리며], [악의 기록]의 이지우의 모습 때문에요. 사실 10대는 주 고객층이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 없고요.”

“묻어가자는 게, 신제품이라는 걸 강조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이지우와 커피를 노출 시키자?”

“네. 사실 믹스커피라는게 그렇잖아요. 마시던 걸 잘 안 바꿉니다. 소비재인데 기존에 커피믹스가 워낙 확고하게 시장을 잡고 있어서 신제품인 걸 강조해봐야 호응이 낮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새로운 제품 이미지를 만들지 말고, 이지우 씨 이미지를 제품에 덧씌우는 겁니다.”

“음. 그런 식이라면··· 떠오르는 게 줄창 이지우가 커피 마시는 것밖에 떠오르는 게 없는데.”

원래 커피 광고라는 게, 모델이 나와서 커피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긴 한데, 그보다 더 파격적이다. 대사 한마디, 나레이션 하나 없이 커피만 줄기차게 마시는 모습을 광고로 찍자는 이야기.

“네 맞습니다. 그냥 15초 동안 이지우 커피 마시는 것만 보여주는 겁니다. ‘신제품 나왔으니까 먹어보세요.’ 가 아니라, ‘이지우가 먹는 커피다’ 먹어봐! 완성된 이지우의 이미지에 올라타는 거죠.”

저마다 생각에 잠긴 직원들. 영상이 잘 못 나오면 밍밍하고 시선을 못 끄는 광고가 되기에 십상인 도박과 같은 방법. 하지만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

“이 대리 일단 외국이나 다른 회사 식음료 쪽에서 비슷한 레퍼런스 뽑아봐요. 이지우의 레드모카··· 이거 잘하면 될 거 같은데?”

또 다른 광고 제작사.

비슷한 상황. 전혀 다른 결론이 나왔다.

“은행에서 젊은 배우를 쓰자고 하는 게 결국 이지우 씨 이미지 때문 아닙니까. 기본적인 이지우 씨 이미지가 봉사와 신뢰에요. 나오기만 하면 신뢰와 봉사라는 이미지는 기본으로 먹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지우의 각종 기부와 봉사활동의 기사가 나간 후,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박현주와의 교제를 잘 이어오고 있다는 일화가 퍼져 신뢰의 이미지가 생긴 상태였다.

거기에 가장 신뢰받는 공무원인 소방공무원의 이미지까지 쌓은 상태.

“그러니까 어차피 먹고 들어가는 이미지 말고, 새로운 걸 추구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이지우 씨로 웃겨보는 겁니다. 이지우가 출연하는 아주 웃기는 광고! 똘끼 충만한 그런 광고!”

“은행 광고로 웃기는 광고를 찍자고? 그것도 이지우를 데리고?”

웅성이는 회의실 직원들. 모두 상급자의 눈치를 살핀다.

“오케이. 진행시켜!”

***

[응답하라 119] 11화.

63빌딩 계단 오르기 대회장 근처 중국집.

구조대장이 최지호(이지우)와 김 반장(방창익)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왔다. 대원들은 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유니폼 복장이었다.

“오늘 내가 쏜다. 많이 먹고. 오늘 힘내고.”

“어우 대장님 왜 그러십니까 부담스럽게··· 이번에 셋째 가지셨다면서.”

“부담 좀 가지라는 의미에서 사주는 거야 인마. 뒤에서 2등 하는 건 괜찮다. 그런데 서초 소방서에 지면···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알지?”

“네! 감사합니다. 오늘은 짬뽕 먹어야겠다. 이상하게 소방서에서 내가 짬뽕만 시키면 출동이 걸리더라고요.”

김 반장이 너스레를 떤다.

그때 화장실에 갔다 온 최지호가 들어왔다.

김 반장과 최지호는 눈이 마주치지만, 너스레를 떨던 김 반장의 표정이 차갑게 변한다.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63빌딩 계단 오르기 대회’ 현장.

예전에는 구조대원들이 화재 대비 훈련의 일환으로 참가하다가, 어느새 소방서별 비공식 체력측정이 되어버렸다. 대부분 특수 부대에서 근무한 구조대원들답게, 승부욕이 강한 집단이다.

이런 대회라 하더라도 질 수 없었고. 소방서별로 티는 안내지만 보이지 않는 경쟁이 생겼다.

여기서 일반인들은 가벼운 복장으로 참가하는 데 반해, 구조대원들은 23kg 장비를 모두 지고 올라간다.

최지호(이지우)가 속해 있는 소방서 대표로 최지호 대원과, 김 반장이 대표로 출전했다.

어느새 두 사람 모두 모든 장비를 다 착용한 상태에서 출발선에 섰다.

‘출발’이라는 신호와 동시에 두 사람이 경쟁하듯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계단을 오르는 두 사람이 교차로 보이고, 이어서 서초 소방서의 구조대원들이 다시 보인다.

UDT대 특전사.

서초소방서 대 최지호와 김 반장이 속해 있는 소방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그리고 결승선 앞.

최지호가 소방관들 중 1등으로 결승선을 지났다. 무거운 장비를 지고 올랐음에도 일반인들 최고기록과 별 차이 없는 기록이었다.

탈진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기뻐하는 최지호와,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 김 반장의 모습이 대비된다.

“두 사람 모두 고생했다. 자 이제 복귀하자. 복귀해서 내가 밥 사줄께.”

“구조대장님 오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서초 소방서를 이겼는데 그냥 넘어갈 수 있나. 카드가 죽지, 내가 죽냐. 걱정 마, 김 반장. 형 아직 안 죽었다.”

최근 두 대원 사이에서 생긴 불화. 아마도 구조대장이 콕 집어 두 사람을 대회에 내보낸 것도 화해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그럼에도 복귀하는 차량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세 명 모두 쉬는 날이지만, 대회에서 사용한 장비 반납을 위해서 소방서에 도착한 세 사람.

“김 반장이랑 지호. 잠시만 기다려봐. 나 서류 작성해야 하는 것만 금방 하고 내려올게. 그때 밥 먹으러 가자.”

“아닙니다. 대장님. 그럼 그냥 짜장면이나 시켜주십시오. 소방서 식당에서 먹고 가겠습니다.”

“무슨 점심으로 짬뽕 먹어놓고 저녁에 짜장을 먹냐··· 그럼 카드 줄 테니까 먼저들 먹고 있어. 난 짬뽕.”

구조대장은 바로 옆에 있던 최지호에게 카드를 넘기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짜장 곱빼기로 시켜라.”

김 반장은 최지호에게 냉랭하게 말하고 샤워실로 들어가버렸다.

김 반장이 사라지자 휴대폰을 들어 전화하는 최지호.

최지호는 아직도 63빌딩 계단오르기 대회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얼른 밥 먹고 퇴근하고 싶은 마음에 가장 빠르게 오는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황금성이죠? 여기 소방서인데요. 짜장 곱배기 하나랑, 짬뽕 두 개··· 네? 짜장면이 안 된다고요? 그럼 간짜장··· 네? 춘장이 없다고요? 그러면 그냥 짬뽕으로 통일해 주세요. 짬뽕 세 개에, 단무지랑 양파 많이요.”

최지호는 그렇게 전화를 끊고 소방서 내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수저와 물을 세팅하는 모습이 잠시 비친다.

그리고 쾌속배달을 자랑하는 황금성의 음식이 배달되었다.

때마침 샤워를 끝내고 식당으로 들어오는 김 반장.

“어? 황금성이네. 여기 맛없는데.”

“그냥 빨리 오는 곳에서 시켰어요.”

“잠시만. 왜 짬뽕이 세 개야? 나 짜장 곱배기 시켰는데.”

“오늘 춘장이 다 떨어져서 짬뽕 밖에 안된다고 해서 그냥 짬뽕 세 개 시켰는데요.”

“그러면 볶음밥이나, 잡채밥을 시켰어야지 왜 하필 짬뽕이야.”

“통일시키려고···”

“야, 나 소방서에서 짬뽕 먹으면 출동 걸리는 거 모르-”

‘위이이이잉, 제영 공단 화재사고. 소방, 구급, 구조 출동, 펌프, 탱크, 사다리, 화학···’

김 반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대충 사고의 규모가 예측된다. 소방서에 있는 거의 모든 장비와 차량에 출동이 걸렸다.

이 정도면 비번인 사람도 비상전화를 돌려 출동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김 반장과 최지호는 잠시 눈이 마주치고. 두 사람은 들었던 젓가락을 집어 던지듯 버리고 차고로 달렸다.

***

벼락치기 하듯, 최근 [응답하라 119]의 촬영장은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스태프들의 대규모 이탈. 촬영중지. 스튜디오 나우의 합류로 다시 촬영 재개가 되기까지.

방창익은 스튜디오 나우의 합류로 좀 편해지길 기대했으나, 촬영중지 때문에 밀린 촬영을 소화 하기 위해 더욱 빡빡해진 촬영스케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힘들지만, 불평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방창익은 고개를 들어 불평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든 배우를 봤다.

“너는 지치지도 않냐? 나는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당연히 지치고 힘들죠.”

며칠전 63빌딩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 했던 촬영. 그것도 구급대원이 착용하는 장비를 모두 차고 했었다. 그 이후 이틀간 방구석에서 골골대던 방창익과 달리, 이지우는 광고촬영을 하다가 왔다.

이틀간 철야 하다시피한 두 개의 광고 촬영. 그리고 바로 이어서 오늘 드라마 촬영을 하러 온 이지우.

쉴 때는 죽은 것 같이 쓰러져 있다가도 촬영이 시작되면 귀신같이 일어난다.

“야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냐?”

잠시 촬영을 멈추고 쉬는 시간. 방창익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봤다. 어떻게 그런 컨디션으로 감정이나 연기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

“글쎄요··· 미래를 위해서?”

알 듯 모를 듯 한 말만 하고 다시 앉은 채로 잠이 든 이지우였다.

한쪽에서 류창진 PD가 이지우를 보고 다가왔다. 그는 이지우에게 할 말이 있는 듯, ‘이지...’ 까지만 말하고 자는 이지우를 보자 말을 멈췄다.

“류 PD님 무슨 일 있어요?”

“[응답하라 119] 마지막 회차까지 광고가 다 팔렸거든요. 그거 고맙다고 인사나 할까 싶어서 왔는데··· 자네요.”

“아··· 지우 씨 요 며칠간 철야로 광고촬영 했다고 하더라고요. 깨울까요?”

“아뇨아뇨, 좀 더 쉬게 놔두세요. [응답하라 119] 광고를 산 회사가 이지우 씨가 촬영했던 그 광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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