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95화 (96/121)

95. 대비

방송의 시작은 편성이다.

편성이 없이는 그 어떤 좋은 기획도, 제작사의 역량도 의미가 없다.

아무리 거대한 제작사라도 이 편성 권한을 가지고 있는 방송사 앞에 ‘절대 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OTT서비스가 나오지 않은 이 시기의 편성이라 함은 제작사 입장에서 유일한 밥줄이나 마찬가지이다. 편성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제작사의 명운이 갈리기도 하는 시기니까.

아침부터 이수한과 최지연을 이해시키느라 늦어버린 점심.

TNN 본사 인근 한식당으로 TNN 드라마국장을 불렀다.

“국장님 이리로 앉으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시라고 하셨죠?”

고급스러운 내부 인테리어와, 칸막이로 쳐져 있는 룸 형식의 식당이었다. 비밀이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한 식당.

비싼 집이다.

그리고 제일 비싼 음식을 시킬 거다.

밥은 내가 먹고, 계산은 국장이 하거나, 이수한한테 시킬 거다. 아니면 같이 온 최지연 선생님께서 하시거나.

다른때면 모르겠는데 오늘은 그래도 된다.

류창진 PD를 통해 드라마 국장과 면담을 잡았다. 원래 드라마 국장 정도 되면 배우가 오라 가라 할 위치가 아니다.

옆에 있는 드라마국장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최지연 선생님께서 동행한다는 핑계. 그리고 어떻게서든 오늘 약속을 잡아 달라 류창진 PD에게 요청했기에 마련된 자리다.

마성국 드라마국장.

MBS 드라마국 CP로 근무하다가, 류창진에 비해 1년 정도 빨리 스카우트 되어 TNN 국장이 된 사람이라 들었다.

기본적인 드라마에 대해 이해가 있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TNN측에서 외주제작사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제작의 파이를 키워서 성장시키겠다는 의미로 전문가를 스카우트 한 거겠지.

드라마국장이 자리에 앉기전 이수한 감독에게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지연 씨. 그런데··· 옆에 분은 이수한 감독님 아니십니까?”

“네 안녕하십니까. 이수한입니다.”

“아! 역시 맞군요. TNN 드라마국 국장 마성국입니다. 최근 작품 잘 봤습니다. [악의 기록] 맞죠? 여기 있는 지우 씨 주연으로 한 작품.”

"네, 맞습니다."

나와 대동한 최지연과, 이수한을 보고 지금 이 자리가 나이 어린 배우의 투정을 받아주는 자리가 아님을 알아차린 듯 했다. 드라마국장의 표정이 굳는다.

식전음식이 나오고 간단한 담소가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식사가 진행되고 후식이 나오는 타이밍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국장님. [응답하라 119] 상황은 보고받으셨죠?”

“네··· 스태프 구해달라고, 류 PD가 아주 그냥 하루에 한 번씩 전화가 오네요. 안 그래도 본사(SJ엔터테인먼트) 측에 계열 제작사의 인원이라도 좀 파견 보내줄 수 없느냐고 요청 중에 있으니까 조금 기다려 보세요. 허허.”

민망하다는 듯이 웃는 드라마국장. 어찌 됐건 회사의 문제로 촬영이 지체되고 있다. 그 때문에 남은 스태프와 배우들이 고생하고 있고.

“이해합니다.”

“저희도 확인해 보니까, KTVC측에서 드라마 쪽 인력을 정규직 채용을 미끼로 사람들을 빼가고 있네요. 우리 쪽 정규직 인원 중에서도 이직자가 나왔고요. 저희도 지금 강력하게 대응준비 하고 있습니다.”

변명하듯 말하는 드라마 국장.

방송계 자체가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인력을 외부에서 조달하는 것에 고도화된 산업이다.

쉽게 말해 방송사가 외주 제작사에 하청주고 외주제작사는 다시 프리랜서나 전문팀(액션, 미술, 음악 등)에게 도급계약을 맺는다.

즉, 하청에 다시 하청. 비정규직, 혹은 프리랜서로 계약하고 부려 먹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대부분 비정규직 스태프들은 고용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 KTVC에서 신규 드라마국 인력으로 정규직 뽑는다는데 안가는 놈이 이상한 거지.

아, 이영진 그 새끼는 빼고. 정규직이었다면 한 직급 높여서 갔겠네. 싸가지만 없는 줄 알았는데 개념도 없었네.

그런데··· 또 KTVC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혹시 KTVC와 TNN사이가 원래 이렇게 나빴나요?”

“아뇨. 서로 모회사가 고구려 홀딩스, SJ엔터테인먼트다 보니까 영화계에서 라이벌 관계이긴 하지만··· 이제 시작한 종편 방송사끼리 사이 나쁠께 뭐가 있겠습니까. 이제 사이가 나빠지는 중이죠. 여기 계신 최지연 씨 회사 일도 그렇고, 이번에 인력 빼가는 것도 그렇고요. 솔직히 최지연 씨 회사 일도, 드라마 끝나고 보도했어도 시기적으로 문제가 없는 이슈였으니까요. 일단 사장님께도 보고가 된 사항이고, 회사 차원에서 강력하게 항의할 예정입니다.”

확실히 국장급에서는 류창진 PD에게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나왔다.

KTVC, 그리고 고구려 홀딩스. 이 정도면 거의 확실한 거 아닌가.

단순히 우연인 걸까.

아니면 고구려 홀딩스가 SJ엔터테인먼트와 대립각을 세우는 걸 감수할 만큼 나를 미워할 이유가 있는 걸까.

어쨌건, 고구려 홀딩스 덕분에 여기 있는 사람들이 오늘 웃게 됐다.

“국장님. 이렇게 자리에 모신 건 다름이 아니라. 혹시 스튜디오 나우라는 회사를 아시나요?”

“아뇨 처음 듣습니다. 드라마 제작사인가요?”

방송가와 영화판이 따로 돌아가는 판이다. 아직 생긴지 1년 조금 넘은 스튜디오 나우를 모를 수 있다.

[악의 기록]이 유명한 거지, 스튜디오 나우가 유명한 게 아니니까.

“아뇨. 영화 제작사입니다. 여기 이수한 감독님이 대표로 계시고요. 대표작은 [악의 기록]이 있습니다.”

작게 ‘아’하고 탄성을 지르는 드라마국장.

그제야 이 자리에 이수한이 나온 이유를 깨달은듯했다.

“국장님. 아시다시피 [응답하라 119] 촬영은 지금 당장 다시 시작해도 16화 완결을 제시간에 내려면 B팀까지 돌려야 합니다. 근데 현장은 B팀은커녕 A팀 인원도 안 채워져 있는 상황이고요. 제가 촬영하는 드라마이니만큼 저도 애정이 크고, 할 수 있다면 돕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수한 대표님에게 제가 부탁을 했습니다.”

“아, 걱정 마세요. 비용 부분에서는 확실하게 맞춰서···”

마치 이수한이 승낙을 한 것처럼 성급하게 결론을 내버리는 드라마국장.

지금 이수한에게 돈이 중요하겠나. [악의 기록] 극장 수익만 수백억 대인데···

“아니죠··· 국장님. 어차피 지금 스튜디오 나우 제작팀이 영화를 찍는다면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투자받을 수 있는데 뭐하러 드라마를 하겠습니까. 제가 이수한 대표님에게 이런 자리를 권유하는 게 민망했던 게, 제가 이수한 대표님께 아무 약속도 할 수 없겠더라고요. 그 부분을 국장님께서 이수한 대표를 설득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고요.”

블러핑이다. 스튜디오 나우 제작 1팀 [악의 기록] 끝내고 놀고 있다. 제작 2팀은 EBS 교육방송에 교양 프로 하나만 납품 중이고.

내말이 끝나자 드라마국장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시선을 돌린다.

아마도 TNN이 뭘 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거겠지.

그때 그동안 잠자코 있던 이수한이 드라마국장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먼저 선수를 쳤다.

“사실 우리 회사는 딱히 드라마에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드라마 찍을 이유도 없었고요. 그런데 지우 말 들어보니까, 사정이 딱하네요. 제가 지우랑 그냥 배우 감독 사이로 아는 것도 아니고, 지우가 나오는 드라마를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죠.”

이수한은 앞에 있는 후식용 수정과로 입을 적시고 말을 이었다.

“어···음. 저는 장사꾼이 아니라서 흥정을 못하겠네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우를 돕는 건 돕는 거고, 우리 회사에서 TNN에게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편성 하나 주세요. TV판 [벡터맨 : 시즌 2] 우리 회사에서 합니다. TNN이던, 루니버스(애니메이션 전문 채널)든 상관없습니다. 26부작 특촬물 편성 주시면, 이번 [응답하라 119] 끝날 때까지 확실하게 서포팅 하겠습니다.”

이수한이 돌발 행동 하는게 아니었다.

미리 합을 짜맞춘 내용이다. 내가 스튜디오 나우를 거론하면서 국장에게 이수한을 설득해달라는 말을 하면, 이수한이 도와주는 대신 편성을 달라고 딜을 치기로 한 것이다.

몇 시간 전.

류창진 PD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이수한의 만화방으로 달려갔다.

이태환 감독, 이수한 감독 그리고 현주가 합평을 하고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이수한에게 간단하게 계획을 설명했다.

“그래서 뭐, 나보고 [벡터맨] 찍으라고? 아닌가? [응답하라 119]를 찍으라고?”

너무 간단하게 설명했나···

“아니지. 형이 [응구]를 왜 찍어. 편성을 따오라고. 이 우스운 인간아. 지금 발등에 불 떨어진 게 누구야? TNN이잖아. 당장 [응답하라 119] 사람이 없어서 강제 휴방하게 생겼는데, 그냥 사람만 빌려줄 거야? 스튜디오 나우가 파견용역업체도 아니고, 사람을 뭐하러 빌려줘. 대가리 때기 해봐야 돈도 안 되고 직원들만 힘든데.”

“이상한데, 뭐 이따위 고용계약이 있냐. 제작사한테 사람만 빌려달라니··· 드라마 통째로 주는 것도 아니고.”

이수한이 의아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방송사가 제작사에 드라마를 수주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런 식으로 제작사의 일부 인원만 받아가는 경우는 없다.

스튜디오 나우는 촬영용역회사가 아니라, 제작사니까. 일반적으로 외주제작을 할 때는 기획부터 외주제작사에 맡기는 형태다.

외주제작사는 그 예산 안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드라마를 만들어 납품을 해야 하고.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이수한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게 아니었다.

다른 제작사에는 없고, 스튜디오 나우에만 있는 것.

스튜디오 나우에는 이수한이 회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불러들인 [폭력의 사슬] 촬영팀이 있다.

일반 제작사에 비해서 비대한 규모를 가진 제작 1팀.

대부분 연출과 촬영에 특화된 인원들이다.

이수한이 대단한 안목과 혜안이 있어서 그들을 불러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냥 불쌍한 후배들 회사에서 일 배우면서 밥이나 먹고 다니라고 불러들인 영화인들.

그렇다고 그들이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대학에서 연출을 전공하고, [폭력의 사슬]과 [악의 기록]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다.

촬조부(촬영+조명)에 인원이 없어서 카메라 돌릴 사람이 없는 지금의 [응답하라 119]에서 꼭 필요한 인재들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제작사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방송사에 갑질 해보겠어. [응답하라 119] 깔끔하게 마무리해주는 조건으로 TV판 [벡터맨] 편성 따오면 돼. 내가 최지연 선생님한테는 이야기를 다 해놨어. 만약 이수한 감독이 TNN 편성 따내면 벡터맨 제작을 스튜디오 나우에게 맡기기로 말이야.”

“그럼 연출은? 벡터맨 연출은 누가 하고?”

“아무나 데리고 와서 하면 되지. 꼭 형이 [벡터맨] 연출 안 해도 돼. 누가 닭 잡는데 RPG7을 써. 이런 쪽은 차라리 광고 쪽 감독이나, 애니메이션 하던 감독이 더 감이 좋아. 그쪽으로 알아보면 노는 감독도 많고.”

“나는 잘 모르겠다. 영화 찍기도 바쁜데, 굳이 드라마를 손대야 하는지.”

“기회야 이건. 지금이야 [폭력의 사슬], [악의 기록]이 잘돼서 회사를 유지하고 있지만, 차기작, 그리고 차차기작 성공할 자신 있어? 형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거 알잖아. 게다가 스튜디오 나우 인원들이 공짜로 드라마 촬영장을 배울 기회잖아. 안 그래?”

내가 이렇게 이수한을 푸쉬하는 이유가 있다.

몇 년 뒤 찾아오는 코로나.

코로나로 극장과 영화산업 전체가 휘청거리는 날이 온다. 감염 위협으로 발길이 끊긴 극장가.

하지만 같은 영상매체임에도 드라마는 거의 타격을 입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드라마 외주제작사들은 어마어마한 성장을 한다.

지금 외주제작사가 영상을 판매할 수 있는 창구는 지금은 지상파 3사와 일부 종편방송사밖에 없다. 한정된 수요. 그래서 ‘절대 을’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거대 OTT기업들이(넷플릭스, 디즈니 등)이 폭발적인 성장을 하며 한국에 진출하게 된다. 이때부터 외주제작사들은 ‘절대 을’이 아니라 방송사와 OTT기업 사이를 저울질하며 협상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글로벌 OTT기업답게 세계적으로 흥행하는 작품이 몇 개 터지고, 그만큼 외주제작사에 자본이 쏠리고 성장하게 된다.

그런 세계적인 흐름에서 스튜디오 나우가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 영화 드라마 가리지 않고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다져놓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고구려 홀딩스가 만들어준 기회가 너무 좋다.

[응답하라 119]로 드라마를 배우고, 이를 통해 TV판 [벡터맨]으로 실습한다.

“형이 한다고만 하면, 바로 최지연 선생님께서랑 류창진 PD한테 전화해서 TNN드라마 국장 약속 잡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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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국장이 한참을 고민했다.

“사실 이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루니버스라니요··· 같은 SJ 계열사지, 루니버스가 우리 회사 하청업체가 아닙니다. 이건 저희 사장님이 오셔도 바로 결정 못 하는 일입니다.”

아··· 역시 이렇게 날림으로 편성은 못 먹는 건가.

룸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하려고 할 때쯤. 드라마국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루니버스는 힘들어도, TNN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애들 보는 시간이면··· 평일 오후 5시는 잡아야 할 텐데··· 예능국은 제가 설득해보겠습니다. 어떻게든 시간 잡아내야죠. 허허 이수한 감독님 회산데요. [벡터맨] 기획 올려주십시오.”

“역시 마 PD, 아니, 마 국장. 편성 내줄 줄 알았어!”

최지연이 만연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자 드라마국장은 의외라는 듯 최지연 선생님께 물었다.

“아니, 최 배우는, 어째 스튜디오 나우가 [응답하라 119]에 합류하는 것보다, [벡터맨]이 편성 나는걸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머? 마 국장님, 내가 [벡터맨] 제 1 투자자라는 거 말 안 했었나요?"

마치 진짜 놀란 듯 연기하는 최지연 선생님.

"이거··· 제가 오늘 세 분한테 완전히 작업 당한 거 같은데 맞죠?"

오늘 밥값은 최지연 선생님께서 하는 걸로 남은 세 사람은 암묵적 합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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