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94화 (95/121)

94. 적당히 하라고

부족한 예산은 감독의 실력을 높인다.

특히 이 분야에 특화된 감독이 이태환 감독이다. 독립영화 특성상 재촬영이 힘들다. 비용적인 문제, 그리고 제한된 스태프와 배우들의 스케줄 등으로 그날 찍어야 하는 분량을 반드시 찍어내야 한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정교한 콘티 때문이다. 영화를 발로 찍기로 유명한 이태환 감독은 촬영 로케이션을 수없이 답사하고, 원하는 장면의 배경을 찾으면 그 지역의 시간대별 변화를 통째로 외워버린다.

머릿속에 있는 배경에 꼼꼼하게 작업한 콘티를 더해 완벽한 장면을 만들어 놓고 촬영한다. 그렇기에 시간과 동선 낭비가 없다.

드라마와 영화. 분야는 다르지만 류창진 PD도 이태환 감독과 유사한 스타일이다.

철저한 사전계획표를 통한 계획 수립. 상부 관계자와 시청자가 뭐라고 하든 개썅마이웨이로 콘티 변경 없이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한다.

덕분에 다른 드라마 한번 촬영 나가면 16~20시간씩 찍는 데 반해, [응답하라 119]의 촬영시간은 12시간 내외로 끝이 나는 편이다.

그동안 촬영장 분위기가 좋았던 건 이 영향도 컸다. 감독이 고집부리지 않고 여러 장면을 재촬영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일찍 퇴근시켜주니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하지만, 요즈음 촬영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지금도 촬영계획보다 한참 늦어진 시간임에도 촬영이 끝나지 않고 있다. 거기에다가 준비할 시간도 많이 필요한 야외촬영. 촬영 시작한 지 18시간이 지나는 중이었다.

“카메라 조명 위치 바꿔서 다시 갈게요.”

류창진 PD의 ‘컷’ 사인에 맞춰 이영진 AD가 다음 촬영을 위해서 현장을 통제해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원래 카메라 2대로 찍었던 현장. 하지만 최근 계약직 스태프들이 대거 빠져나가 버리면서 카메라 1대로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 씬 찍고, 조명 카메라 위치 바꿔서 다시 찍고···

이게 반복되니 가뜩이나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시간은 배로 걸리고 남은 사람들의 부담은 가중되고 있었다.

스트레스와 피로가 겹쳐진 촬영현장.

예전 독립영화를 찍을 때처럼 내가 손을 거드는 방법도 있지만, 그때는 촬영 스태프 4~5병의 소규모 촬영현장이었고, 지금처럼 배우와 스태프 합쳐서 40~50명이 넘는 현장에서 나 하나 돕는다고 달라질 상황은 아니었다.

차라리 집중력을 끌어올려 테이크를 짧게 가져가서 빠르게 촬영을 끝내주는 게 더 도와주는 것이다.

대기실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은 야외촬영장. 스태프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동안, 나는 대기하고 있던 청운 엔터테인먼트 소유의 차량에 앉았다. 다음 촬영할 대본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늘어지는 촬영 대기시간. 얼마쯤 대본을 보고 있었을까.

살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리는 싸우는 듯한 소음.

현장을 통제하던 이영진 AD와 일반인이 마찰이 생긴듯했다.

또 하필 바로 옆에서 싸우는 통에 대본에 집중이 안 될 정도였다.

“아 왜, 길을 막고 지랄이야.”

“가세요.”

“니들이 전세냈냐고.”

“허가받았으니까, 가시라고요.”

짜증이 묻어나는 이영진 AD의 말투.

저건 아닌데, 싶었지만 참견하지 않고 넘어가려 했다. 배우랍시고 끼어들어 봐야 고생하는 스태프들에게 잔소리하는 것밖에 안될 것이다. 게다가 저런 실랑이에 잘못 휘말려 사고라도 나면 오늘 촬영에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살짝 취한듯한 남자는 이영진 AD의 말투와 태도 때문에 더욱 화를 내면서 막무가내로 지나가려 했다.

“우리 집이 저쪽이라고. 네가 뭔데 가라마라야! 비키라고!”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소란이 소동으로 번질 조짐이 보였다.

저대로 놔두면 몸싸움 나겠다 싶을 정도로 서로 간에 오가는 대화의 수위가 높아졌다.

안 그래도 늦어지는 촬영 때문에 부담이 큰데 이런 소동으로 촬영이 더 늦어지면 좋지 못할 거라 판단했다. 오늘 촬영이 다음 촬영으로 밀리면, 다음 촬영에서 또 시간이 늦어지고. 악순환이 될 터였다.

또 너무 불손한 이영진 AD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 기도 했고.

“통행에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잠시 촬영 중이니 불편하시더라도 오늘만 다른 길로 가주실 수 없을까요?”

결국 내가 차에서 내려 취객에게 사과했다.

내 사과 때문인지, 내 뒤를 지키고 서 있는 김수호의 팔뚝의 두께 때문인지 몰라도, 취객은 분노조절 하고 돌아섰다.

여기까지, 잘 마무리 됐다 싶었는데.

‘찰칵, 찰칵’

여기저기서 들리는 셔터음. 이영진 AD와 취객의 실랑이로 주변의 관심이 집중된 상태에서 내가 등장하자 여기저기서 휴대폰을 든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향해 한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다시 차에 타려고 하는데.

“구경났어? 가던 길 가세요. 좀. 바빠죽겠는데 돌겠네.”

이영진 AD가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짜증을 냈다.

아··· 새끼 아까부터 거슬리네.

촬영장 힘든 거 이해한다.

저렇게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사운드에 잡소리가 잡히거나 카메라에 잡히는 경우가 생긴다. 그 때문에 현장정리나 필요에 따라서 통제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알고.

내가 AD가 얼마나 힘든지 겪어보진 않았지만, PD들이 무용담처럼 말하는 AD 시절의 고생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기에 대략적으로는 안다.

다 좋다. 그런데 그걸 저런 식으로 풀면 안 되지.

“저기요. 말 좀···. 예쁘게 안되나요?”

“하··· 이지우 씨도 그냥 들어가 계세요. 정리되면 호출할게요”

지나가던 행인들한테 하던 말투보다는 누그러뜨린 말투. 딱 조연출이 데뷔 2년 차 배우에게 할 법한 말투긴 한데···

오랜만이네, 이런 대우.

하기야 저 정도가 스탠다드긴 하지. 류 PD가 유독 나를 편애 하는 거고.

조연출을 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연예인들을 얼마나 많이 봤겠나. 그중 사라진 사람은 얼마나 됐을 거고.

얼핏 듣기로는 원래 이 편성이 이영진 AD가 PD로 진급하면서 맡기로 했는데 류창진 PD가 KBC에서 스카웃 되면서 류창진 PD에게 돌아갔다고 했었던가.

거기까진 내가 알 바 없고.

“조 감독님, 살살합시다. 제가 여기서 저분들이 우리 시청자가 될지도 모르고 어쩌고 해봐야 안 들리실 거 아니까, 다른 말 안 할게요. 저분들이 잘못한 거 아니잖아요. 현장통제 잘 부탁할게요.”

“하··· 네네. 들어가 계세요.”

귀찮다는듯, 한숨쉬며 손을 휘젓는다.

여기서 더 말해봐야 서로 간에 감정만 상할 뿐인 걸 알기에 돌아가려고 했다.

이영진 AD와 대화가 길어지자, 이게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주변에서 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 씨바, 진짜 사진 찍지 말고 갈 길가라고.”

내가 돌아서자 마자 이영진 AD가 사진을 찍는 몇몇 사람들에게 고함을 쳤다.

이건 좀 거슬리는 정도가 아닌데.

“이영진 씨. 적당히 하라고.”

방송하다 보면 이런 애들 꼭 있다.

선민사상에 찌든 애들.

방송일 하는 게 대단한 일을 하는 거라 착각하는 애들. 연예인뿐만 아니라 이런 생각하는 관계자들을 한 번씩 만난다. 이런 애들은 연예인처럼 이미지 관리 할 필요 없으니 더 막 나가는 거지.

촬영한답시고 도로 통제하면서 사과는커녕 신경질 부리거나, 촬영하고 난 뒤 뒷정리 제대로 안 하고 내버려둔다거나, 남의 집 마당에서 허락도 없이 들어가 촬영한다거나···

일을 일답게 안 하는 애들이다. 프로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할 말 많은 표정으로 노려보는 이영진 AD.

이영진 AD와 이지우 주연의, [폭력의 사슬] 시즌2 찍기 직전. 소동을 듣고 온 류창진 PD가 달려왔다.

“야, 이영진 너 배우분한테 뭐 하는 짓이야!”

“드러워서 진짜. 굴러 온 돌 따까리 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나 안 해. 안 한다고.”

손에든 무전기를 바닥에 내팽개쳐버리고 뒤돌아 사라지는 이영진 AD.

“안 하긴 뭘 안 해, 이 새끼야. 나도 너 안 써! 너 하나 없다고 드라마 못 찍겠느냐.”

시발. 근데 진짜 못 찍을 줄 몰랐다.

***

-방금 TNN에서 연락 왔는데 오늘 촬영 연기되었다고 하네요. 재촬영 일정은 픽스되면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수호 씨도 오늘은 푹 쉬세요.”

촬영시간이 길어지고, 촬영시간이 점점 당겨지더니 오늘은 새벽부터 촬영 나간다고 준비를 했는데···

원래 오늘 예정되어있던 [응답하라 119]의 11화 촬영이 연기가 되었다. 지난주 벌써 4화까지 방영이 끝난 상태. 이번 주에 6화까지 방영되어버리면 비축된 촬영분이 2주도 남지 않는다.

드라마 한편 평균 70컷 잡고 1주일에 한편씩 뽑아내도, 16화 미니 시리즈 완결에 B팀 까지 빡빡하게 돌려야지 안정적으로 방영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동안 그만둔다고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각 파트별 용역업체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 위주였다. TNN 직계약도 몇몇 그만뒀지만, 이영진 AD처럼 정규직 직원이 그만둔다고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이영진 AD의 개인 사정을 깊게 알지는 못해도, 그렇게 그만두고 나가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그것도 정규직인데.

전생을 포함해도 저런 식으로 나가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응답하라 119]의 첫 방영 이후 계속해서 촬영장에서 이탈자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대략 남은 분량과, 촬영 일자, 그리고 촬영속도를 미루어 봤을 때 이 속도 대로면 15화, 16화 쯤 방송사고 각이다.

방금 닫았던 폰을 열어 류창진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우 씨. 어쩐 일이에요?

“이영진 씨 진짜 그만뒀나요?”

-네··· 뭐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딱히 지우 씨 탓도 아니고, 제가 나중에 확인해보니까 지우 씨가 할 말 하셨더라고요.

“괜찮은 거죠?”

한참을 대답이 없는 류창진 PD.

-괜찮아야죠. 지금 빠진 인원들 구멍 메꾸는 중인데, 아시다시피 지금 업계가 양적으로 팽창 중이라서 보충이 쉽지가 않네요. 외주 쪽으로 파견인력들 알아보고 있으니 곧 정상화 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힘내십시오.”

이건 나도 답이 없다.

사람이 없다는데 어쩌겠나. 내가 용역업체 사장도 아니고. 이건 뭐 다시 태어나고 말고를 떠나서 불가능 한 일이니까. 내 영역을 벗어난 일이기도 하고.

어영부영하다 보니 아침 9시다. 빡빡한 스케줄 사이에 생긴 휴일이었다. 화실로 출근할까 하다 전화기를 들었다.

지금 현주는 뭐하려나.

현주가 바쁘면 그림 그리면 되는거고, 한가하면 같이 점심이나 할까 싶어서 전화기를 들었다.

-어, 지우야. 이시간에 왠일이야? 오늘 촬영이라고 안했어?

“오늘 촬영연기 됐어. 뭐해?”

“나? 오늘 합평있는날. 수한이 오빠랑, 태환이 오빠가 시나리오 봐준다고 해서. 태환이 오빠도 새로 각본 쓴거 내가 봐주기로 했어.”

아··· 그러고 보니 이수한이랑 이태환이랑 선후배 관계고, 두 사람이 연출한 작품 모두 현주가 공동각본으로 작업했구나.

가끔 저렇게 모여 서로 글을 봐주는 걸로 알고 있다.

잠시만.

용역 파견 업체를 통해서 제작인원 충당하는 게 아니라, 스튜디오 나우에서 TNN으로 파견형식으로 제작인원을 보내준다면?

아니, 왜 이걸 생각 못했지?

"현주야, 수한이 형. 아니, 이수한 사장님 전화 좀 바꿔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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