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꼭 찾아가겠습니다
“이야, 이 드라마 웃기네. 잘하면 뜨겠는데? 너 긴장해야겠다. [중증외상 센터] 방영이 다음 주지?”
“습, 습. 그러게. 후후.”
이정건은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러닝머신을 뛰었다.
티브이에는 오늘 첫 방영인 [응답하라 119]가 나오고 있었고, 이정건의 매니저는 티브이를 보며 연신 웃으며 말했다.
“크크크, 골 때리네 진짜. 저거 유수영 작가라고 안 했냐? [저승카페]랑 느낌이 완전 다른데?”
“내가 보기엔 비슷한데. 유수영 작가가 고삐를 풀었다고 해야 하나, 족쇄를 풀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공중파보다는 종편 쪽이 표현을 할 수 있는 영역이 넓으니까. 심의도 덜 까다롭고.”
“그건 아니지 않나? 작품 배경도 스타일도 완전 다른데?”
이정건이 러닝머신에서 내려오면서 말했다.
“작품에 흐르는 정서가 비슷하잖아. 그리고 캐릭터 조형이 비슷해. 그리고 사건도 비슷하고. [저승 카페]는 특별한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였다면, 이건 평범한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라는 게 차이점인 거 같고.”
“하기야 소방대원들 하시는 일이 특별하긴 하지.”
“어, 그런데 솔직히 소방대원에 대해서 사람들이 별 관심 없잖아? 그러니까 개그 요소를 넣어서 시청자를 잡으려는 전략인 거 같은데··· 머리 잘 썼네. 형 올 추석부터는 유수영 작가 집에 선물 꼬박꼬박 넣어야겠다.”
이정건의 매니저는 다이어리를 펼쳐 '유수영 작가, 선물 보낼 것' 이라고 간단하게 메모한 뒤, 말했다.
“그런데 이지우 쟤, [악의 기록]에서 봤던 거랑 또 다르네. [악의 기록] 촬영장에서 만났을 때는 오줌지리겠더니만, 여기서는 또 완전 개그캐가 잘 어울려.”
매니저 옆, 소파 위로 털썩 주저앉은 이정건. 목에 걸려 있는 수건으로 아무렇지 않게 땀을 닦았다.
“그러니까 신기한 거지. 코믹한 연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니가 못하니까 어렵다고 하는 거 아니야?”
“나 코미디도 할 수 있거든? 안 시켜줘서 문제지.”
“야 인마, 내가 니 옆에서 10년간 같이 활동했는데, 너 존나 노잼이야. 안 웃기니까 안 시켜주는 거지. 세상 진지한 새끼가.”
“노잼? 나 대유잼이거든. 그리고 형이 잘 몰라서 그런데, 원래 정극 연기하던 사람은 개그가 어려울 수밖에 없어. 연기에 관객의 반응까지 고려해서 넣어야 하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정건은 티브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코미디 연기를 할 때는, 몰입한 감정에 플러스알파로 보는 사람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연기를 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연기를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과의 가치관이나 눈높이의 차이 때문에 안 웃기는 경우도 많고. 유치하거나 썰렁하거나 그렇게 되는 거지.”
“엥? 개그맨들 개그쇼 프로 나와서는 그렇게 안 하잖아. 그것도 연기 아니야?”
“정극연기가 아니니까. 개그맨이 정극연기 했을 때 묘하게 안 어울린다는 느낌 받은 적 없어?”
“있···지? 이미지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서사를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야. 개그쇼는 서사가 없잖아. 정극연기는 서사를 표현하면서 개그씬을 소화해야 해. 그래서 어려운 거야. 타고나거나 관객의 반응까지 계산해서 연기를 할 만큼 똑똑하거나. 그게 돼야 되거든.”
“그게 되는 게 이지우다? 쟤 데뷔한 지 2년밖에 안됐잖아. 그래서 니가 봤을 때는 이지우는 타고났다 이 말이네?”
“아니, 어···”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나도 모르겠다는 거야. 분명히 표현력이나 대사를 치는 거 보면 분석이나 피나는 연습이 없으면 나오지 않는 포텐인데, [악의 기록]이나 [응답하라 119]에서 감정 터트리는 연기나, 개그씬 소화하는 것 보면 또 타고난 거 같기도 하고···”
“어우 지겨워. 무슨 설명이 이렇게 길어. 맞다 아니다만 말하면 될 거를. 너 이거 봐 존나 진지하잖아. 노잼 새끼.”
***
[[응답하라 119], 첫 방영. 종편 방송사 최초 1화 시청률 5% 벽 돌파]
[이슈메이커 이지우. 첫 장편 드라마 첫 주연 [응답하라 119]. 종편 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다]
[대 이변, [응답하라 119] 종편이라 가능했다!]
아침에 기사 헤드라인만 훑고 출근했다.
이제 2화가 방영됐을 뿐인데 호평 일색이다.
여지것 소모되지 않았던 소방대원이라는 소재. 수준높은 대본. 배우들의 열연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정확하게는 만들어낸 기적.
[응답하라 119] 8화의 촬영준비가 한창인 촬영장. 그곳에 퇴원한 최지연 선생님께서 들어왔다.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와! 선생님 얼굴이 더 좋아지셨어요!”
‘짝짝짝짝’
박수를 치는 스태프와 배우들.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촬영장에 들어오는 최지연 선생님.
3일간 입원했던 최지연 선생님께서 촬영 현장으로 복귀했다. 딱히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었고, 얼마 전에 건강검진했을 때 건강하다 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따로 최지연 선생님께서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에는 완구회사에 문제가 생기고, 이슈화되는 시기에 일부러 환자 코스프레 한 건 아닐까?
한때 잘나가던 여배우였고, 지금도 미모를 잃지 않은 노년의 여배우. 동정표를 얻기에 딱 좋으니까.
최지연 선생님의 사업가적 기질을 고려하면 마냥 내 생각만 그런 건 아닐 거다.
이미지로 먹고사는 배우생활을 수십 년 했으니 어쩌면 당연히 고려했던 것일 수도 있고.
나는 미리 뽑아놨던 커피 두 잔을 들고 류창진 PD와 이야기 하고 있는 최지연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복귀 축하합니다.”
“다 지우 덕분이지 뭐.”
간단한 안부인사와 근황이 오간 후,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최지연 선생님께서 류창진 PD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류 PD, CP랑 국장은 어떻게 설득한 거야?”
“설득이요? 무슨 설득이요?”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이런 상황이면 편집을 하거나, 그게 안 되면 방영을 연기하는 게 일반적이거든? 그런데 편집이 전혀 안 된 게 나갔더라고. 어떻게 설득한 거야?”
그러자 류창진 PD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님께서 지우 씨랑 처음 일하셔서 잘 모르셔서 그런 겁니다. 저는 이렇게 될 줄 알고있었습죠.”
나를 보고 느끼하게 웃는 류창진 PD.
아, 선생님도 참··· 저런 거에 수긍하면 안 되는데. 류창진 PD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인터뷰 자리에서 썰을 너무 풀었던 것 같다.
“지우 씨가 저한테 미편집분 그대로 방영하라고 하는 순간, 지우 씨에게 다 방법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따로 보고 안 하고 독단으로 진행했죠.”
류창진 PD가 [저승 카페]에서 검찰청 런웨이 뽕을 제대로 맞았나 보네. 그때 시청률 상승 폭이 거의 수직으로 오르긴 했으니까.
나로서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이지만 그냥 살짝 웃어주고 말았다.
이제 와서 겸손 떠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승 카페]에서 보인 행동력. 그리고 최지연 선생님에게 인터뷰 전략을 설명했을 때의 분석력을 보여줬다.
이 상황에서 운이 좋다고 말해서 애매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 보다, 유능한 이미지가 나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하는 말에 더 큰 힘이 실릴 테니까 말이다.
KTVC [시사 저격]의 방송은 분명히 의도가 숨겨져 있는 공격이었다.
원래 내가 알고 있는 미래가 바꼈으니. 나로 인해 바꼈다거나, 나를 위해 바뀌었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터였다.
어쨌건, 첫 공격을 잘 막았으니 앞으로 어떤 공격이 이어질지 모른다.
지금은 그게 차지석이든, 정종철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연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능력이니까.
공격을 잘 막아내기 위해서 발언권, 영향력··· 뭐 그런 것들을 부지런히 키워놔야 했다.
그때였다.
스튜디오를 문 열고 오는 사람들. 분주하게 일하던 스태프들이 경직되며 갈라진다. 그 사이에서 한 무리의 인파가 걸어왔다.
주변 스태프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꾸벅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류창진 PD가 짜증 난다고 노래를 부르던 그 '갈팡질팡하는 상부' 인듯했다.
그들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류창진 PD가 있는 이쪽으로 바로 다가왔다.
"아이고 류 PD, 고생했어. 내가 우리 류 PD사고 칠 줄 알았다니까."
"어서 오십시오 국장님.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부족한 인원 장비로 이렇게 애써 줬는데 내가 가만있을 수 있나. 응원차 들렀지."
"응원은 안 오시는 게 응원 같은데···"
구시렁대는 류창진 PD를 드라마국장과 같이 온 책임 프로듀서가 막아섰다.
"에헤이, 류 PD 또 그런다··· 그래도 국장님이 [응구]팀 장하다고 카드 들고 오셨는데."
"허허, 사람 참. 여깄네."
미리 준비한 듯, 품 안에서 나오는 카드 한 장.
"아 네. 이제 가실 거죠? 우리 촬영해야 하는데."
류창진 PD는 드라마 국장이 내미는 카드를 쏙 하고 빼서 돌아섰다.
류창진 PD 진짜 캐릭터 제대로 잡았네.
오늘만 사는 컨셉인가.
[저승 카페] 때, '이것만 찍고 퇴사할 거야' 를 밥 먹듯이 말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원래 성격이 반골 기질인 모양이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는 친절한편이었는데, 이런 부분에선 빠꾸없네.
뻘쭘해 하는 CP와 드라마국장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
류창진 PD가 촬영 준비를 위해서 자리를 떠나 버렸기 때문에 분주히 오가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나와 최지연 선생님만이 한가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이지우입니다."
"오, 이지우 씨! 반가워요. 연기 잘 봤어요. 어휴 실물이 훨씬 좋네. 이대로만 쭈욱! 해줘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그때그때 말하고."
"네! 꼭 찾아가겠습니다."
"어머? 국장님. 저는 안 보이시나 봐요? 예전에 같이 작품 할 때는 안 그러시더니, 국장 되시고 너무 한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최 선생님께서 이번에 출연 결정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연출 하고 싶었다니까요."
드라마국장과 최지연 선생님은 예전 배우와 연출자 관계로 만난 적이 있었던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
케이플 엔터테인먼트 사장실.
박살 나 있는 티브이 때문인지, 아니면 마주 앉은 두 사람의 기운 때문인지 사장실의 분위기가 어쩐지 어둡다.
"방법이 있긴 합니다."
"뭔데요? 이번에는 확실한 거 맞아요? 차 사장님 말대로 했다가 도와주는 꼴 났잖습니까."
차지석은 [시사 저격]을 활용하자고 하게 정종철이였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말해봐야 들을 것 같지도 않았고.
"이건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라, 일단 이런 방법이 있구나, 하고 넘기셔도 됩니다."
정종철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말이 없었다.
"KTVC도 곧 드라마국이 생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 팀 꾸리고 있을걸?"
"네. 저도 그 소식 듣고 생각난 아이디어입니다. 정 과장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방송계 인력난이 심한 편입니다. 종편 방송사가 하나둘 생겨나면서 지상파에 쏠렸던 인재들이 많이 유입되고 있죠. 그 중 종편 방송사에서 종편 방송사로 이직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정 과장 아니라 사장. 재밌네, 계속해봐요."
"[응답하라 119]는 TNN 자체 제작팀에서 제작 중이고, 지금 시점에서 TNN 드라마 제작팀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스태프 중 헤드를 제외하고는 계약직 비중이 높습니다."
"사람을 빼 오자?"
"네. 맞습니다. KTVC는 인재를 확보하고, [응답하라 119]의 완성도는 낮아지겠죠. 방송계 전반적으로 인재 수급이 안 되는 상황이기에 빠르게 보충하기도 힘들 겁니다. 비용이 좀 들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