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86화 (87/121)

86. 남우주연상

“이지우요? 알고 있습니다.”

“하기야 우리 차 사장님이 요즘 뜨는 애를 모를 리가 없죠?”

차지석 사장은 검지로 턱을 살짝 긁으면서 말했다.

“혹시 이지우한테 관심 있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냥, 싫어요. 말했잖아. 이유가 없다고.”

차지석은 다시 한번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눈가를 긁었다. 표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차지석이 예상하기로 분명히 이유가 있다. 단지 정종철 자신이 모르거나 혹은 모르는 척하는 것일 뿐이다.

정종철이 차지석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사고 치는 걸 열심히 막아줬으니까 좋다고 하는 것일 뿐이라는 걸 안다.

‘뭘까··· 왜 저럴까?’

“전에 한번··· 마킹 한 적도 있습니다. 일단 그런 쪽으로 나오는 게 없습니다.”

차지석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이미 이지우 뒤 한번 털었다가 거하게 말아먹지 않았나. 여자친구라 알려졌던 박현주. 위장취업으로 기사 한번 썼다가 외주업체가 고발당해서 케이플 엔터테인먼트에서 쏘는 기사 루트가 하나 박살이 났다.

“흐음··· 그래? 그럼 그 주변 쪽은 뭐 나올 건더기 없나?”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조그마한 식당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쪽은 깨끗합니다. 사생활이라는 것도 없고 평소에는 화실에서 그림만 그린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따로 만나는 지인이라고 해봐야 이정건, 예기성인데, 털어봐야 나올 것도 없는 사람들이고 괜히 털었다가 꼬리 잡히면 민망한 상황 나올 겁니다. 특히 이정건 쪽 소속사 쪽에서 가만 안 있을 겁니다. 그거 말고는 이수한 감독밖에 없는데···”

“없는데?”

“그 사람은 그냥 오타쿠라 뭐 털 게 없습니다. 작품 안 할 때는 만화방 개조한 사무실에서 아예 안 나오니까요.”

“아··· 씨발. 방법 없나?”

정종철은 티테이블에 발을 올리고 꼬으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길 몇 분.

“그럼 이건 어때? 얼마 전 새로 개국한 종합편성 채널 KATV 일죠?”

“네 압니다.”

고구려 일보의 지주회사인 고구려 홀딩스. 그쪽에서 투자하여 개국한 종편 방송사 KRTV. 계열회사 중 고구려 일보의 이미지를 가져와 뉴스와 시사보도 쪽에 집중하여 키우는 중이었다.

“거기 이번에 새로 편성할 예정인 시사보도 프로그램 있거든? 그쪽으로 뭐 엮어서 보낼 것 없나?”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

백룡영화상 시상식.

국내에 가장 권위가 높은 영화상. 부산국제영화제나 여타 국내에서 개최하는 국제영화제는 말 그대로 국제영화제. 출품작 자체가 여러 나라에서 들어온다.

그에 반에 국내 영화만을 심사하여 수상하는 영화상은 여러 개가 있지만, 그 권위와 역사는 백룡영화상을 최고로 꼽는다. 이는 내가 죽기 직전까지 변함이 없다.

유독 백룡영화상과 나는 인연이 깊다.

내가 조폭연기로 본격적으로 연기력을 인정받고, 그것을 공인받은 것이 백룡영화제 '남우조연상'이다. 이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내 연기인생의 무명생활. 그 기나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다시 태어나 신인상을 받음으로써 비공식 그랜드 슬램(신인상, 남우조연상, 남우주연상)을 달성하기도 하기도 했고.

그리고 이번에 남우주연상까지. 전생에 백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두 번 받았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받는 날이 내 제삿날이다.

미래가 사라진 날이기도 하다.

내 인생 최고의 날도, 최악의 날도 함께한 백룡영화제 시상.

오늘 다시 한 번 영광스럽게도 백룡영화상에 남우주연상으로 초청받았다.

심지어 관계자들에게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유력하단다.

[악의 기록].

심지어 보는 것 조차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최종편집본을 보지도 않은 영화.

사실 그다지 황송하지도 영광스럽지도 않은 초청이었다.

"야, 이거 만약에 너 남우주연상 받으면 이거 최연소 수상 아니냐?"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떨며, 메이크업 하는 곳까지 따라온 장인호 사장.

"사장님. 상은 내가 받는데, 사장님이 더 긴장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니, 니가 상을 받으면, 우리도 마케팅 적으로다가···"

"배우가 상을 받는데 마케팅은 무슨."

"하여튼! 너 이번에는 수상소감 할때 사고 치지 마라."

"현주야 결혼하자?"

"너 인마!"

"현주야 내 아를 나아도?"

"하··· 평소에는 애어른 같더니 오늘 왜 이러냐. 이 바닥에서 수십 년 구르면 니가 모르는 소식통이 다 있어요. 내가 다 들은 게 있으니까 수상소감 할 때 사고 치지마라. 알았지!"

"받을 일 없다니까 그러시네."

수상소감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21살짜리 배우에게 남우주연상이라니. 나이를 떠나 필모그레피상 상업영화가 단 한 편밖에 되지 않은 검증되지 않은 신인에게 주기에는 너무 큰 상이다.

수상자 선정은 결국 영화상의 권위와 관련되어 있다. 검증되지 않은 배우에게 덜컥 최고의 상을 안겨줬다가, 그 배우가 다음 작품에서 말도 안 되게 형편없는 연기를 한다면 상의 권위는 떨어지지 않겠나.

그 이외에도 올해 참여하는 심사의원의 성향이라든지, 경쟁작들 배우들 등, 상을 주지 않을 이유는 무수히도 많다.

이건 내 개인적인 내 경험에서 나오는 감일 뿐이지만, 남우주연상은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레드카펫을 밟고 시상식장, 내 지정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차례로 자리를 잡는 [악의 기록] 출연진과, 스태프들.

내 왼쪽에는 이수한 감독. 오른쪽에는 이정건 선배와 예기성 선생님께서 앉았다.

"축하한다. 남우주연상."

먼저 이정건이 툭 하고 치며 말했다.

"쉿! 선배님. 주변에서 들어요."

정작 나는 관심도 없는데, 장인호 사장도 그렇고 유독 주변에서 호들갑이다.

장난치는 이정건 선배를 만류하려 했지만, 이정건은 지지 않고 말을 보탰다.

"내가 들은 게 있다니까. 이번에 너는 남우주연상, 이수한 감독님이 최우수작품상이랑 감독상."

"선배,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2년차 신인한테 남우주연상 주는경우가 어딨습니까."

"아냐, 내가 봐도 이번에 나온 남우주연상 후보들이 좀 약해.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이정건에 이어서 이수한까지 합세했다.

술자리에서나 할법한 이야기다. 전후좌우 모두 영화계 관계자 아니면 선배님들인데, 이 양반들이 나 묻어 버리려고 작정했나. 그러면서 이정건은 남우조연상에 자기 이름 쏙 뺀다.

그렇게 시상식이 진행되고, 시상식의 중반이 지날 때쯤이었다. [악의 기록]은 최두호 감독이 기술상(무술)을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남우조연상의 시상이 진행됐다.

"남우조연상, [악의 기록] 이정건!"

이정건이 나를 지나치며 수상을 하기 위해 무대 위로 올랐다.

"감사합니다. 좋은 기회를 준 이수한 감독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함께 했던 모든 촬영 스태프들에게···"

약간 뻔하다 싶은 수상소감을 끝내고 내려온 이정건.

다시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준비해라."

몇개의 시상식 순이 지나가고, 남우주연상 후보들이 차례로 호명되었다.

그때까지는 분위기가 여유로웠다. 이수한 감독도 웃으면서 내게 귓속말로 '내가 이번에 너 못 타면, 다음 작품 백룡도 거부한다' 이런 농담을 할 정도였으니까.

어디서 뭘 들었는지는 몰라도, 나 빼고 모두 내가 수상하리라 기대하고 있는 상황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제 33회 백룡 영화제 남우주연상. [창고지기] 박진성! 모두 축하의 박수 부탁합니다. 박진성 씨. 수상소감 부탁합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수상이었기에, 아쉽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애매한 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주변에서 너무 기대한 탓에, 내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주변의 기대를 부응시키지 못한 느낌?

"하, 씨. 이상하네. 내가 분명히 들은 게 있는데."

그동안 열심히 농담했던 이정건도 민망해했었고, 예기성도 짧게나마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수한 감독.

이수한 감독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전 부산국제영화제처럼 대놓고 짜증 내거나 아쉬워하진 않았지만, 간간이 보이던 우습지 않은 형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까지 [악의 기록]에서 나온 상은 남우조연상과, 기술상 단 두 개뿐. 각종 해외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초청되고 있는 작품의 수준으로 봤을 때 최우수작품상이나 감독상 둘 중 하나는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상 모두 만약에 받는다면 이수한이 수상하게 될 터였고, 수상소감 또한 그가 하게 될 것이었다.

"형, 하지마."

이제 무명 감독도 아니고, 한 제작사의 대표를 맡고 있고 차기작 투자를 이끌어내야 할 감독으로서 이수한이 사고를 칠까 싶었지만, 혹시 그래도 모르는 거니까.

그리고,

"감독상, [악의 기록]의 이수한! 모두 축하의 박수 부탁하겠습니다!"

백룡영화제 감독상으로 호명되는 이수한.

이수한은 무표정하게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상과 꽃다발을 받아들고 마이크 앞에 섰다.

"수상소감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도록 함께해준 김주하 실장님과 경수를 비롯한 스튜디오 나우 식구들, 그리고 배급에 신경 써주신 SJ엔터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예기성, 이정건 선배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덕분입니다. 주제넘게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100년쯤 후에 지금 오늘의 영화제를 본다면 우리 모두 이 시대를 살아간 영화인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 기록에는 나이나, 경력이나, 배경은 모두 사라진 영상만, 영화만이 남을 것입니다. 이 영화도 오늘의 이 상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와 함께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 상을 배우들에게 바칩니다.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하, 이수한도 많이 컸네.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좀 이상하긴 한데. 진짜 이제 20년 후쯤 봤던 거장의 모습이 벌써 나온다.

이제 이수한 밑에 있는 식구가 몇인데. 예전을 깽판을 치려고 해도 아무도 봐주질 않았을 테고, 이제 깽판을 치려고 하면 회사에 직원들이 맘에 걸릴 것이다.

"축하합니다. 감독님."

수상소감을 말하는 내내 굳어있던 표정의 이수한이 다시 지정석이 앉았다.

"참··· 미안하다. 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이러더니만, 백룡에서 또 이러네."

"뭐가?"

"그냥 내 입장에서는 좀, 아니 많이 그래. 제작사를 만들자고 한 것도 너고, 각본 수배해온 것도 니가 했고, 연기야 뭐 말할 것도 없고. 니가 다 만들어 놓은 판에 나는 하던대로 했을뿐인데. 니가 받아야 할 상을 내가 훔친 느낌이다."

"그럼 다음 작품 좋은 거 써서 나 쓰면 되지. [해적왕]같은 거 말고."

"하···"

이수한이 헛웃음을 쳤다.

이어서 피날레. 최우수작품상까지 [악의 기록]이 하게 되었고, 이때 이수한은 제작사 대표로 수상소감을 하게 되었으나, 감독상에서 할 말을 다 해버렸는지 간단하게 끝내버렸다.

백룡영화제 10개 부분의 후보지명에 4개 부문 수상.

역대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사상 최고의 쾌거였다.

시상식이 끝나고, 백룡영화상 뒤풀이가 이어졌다.

작년과는 차이 나는 대우였다.

우리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몇몇 배우와 감독들이 [악의 기록]팀에게 함께 할 것을 권했다.

당연히 이정건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핑계로 빠져버렸고, 나와 예기성 이수한 만이 참여한 뒤풀이였다.

오늘 각종 수상 후보였던 몇몇 감독들과 주·조연을 가릴 것 없이 유명한 영화배우들이 다 모인 자리였다.

보통 데뷔 2년 차 신인이라면, 이런 자리에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감격해 했겠지만···

나는 일찍 빠져서 차라리 현주와 조촐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만 예기성 선생님도 함께하는 자리라서 선듯 먼저 가겠다고 말을 못 하고 있었다.

새벽 늦게까지 하는 조개구이집. 거기서 열심히 조개껍데기 까면서 빠질 타이밍만 보고 있었다.

'딸랑'

가게 입구의 도어벨이 울리는 소리.

이 시간에도 손님이 오는구나 싶어서 뒤를 돌아봤다.

낯선 듯 익숙한 두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고 예기성 선생님.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이수한 감독 축하해요."

"어서와요 정 과장. 오늘 영화상 준비한다고 고생 많았어. 아버님은 잘 계시지? 차 사장도 오랜만이네."

예기성과 반갑게 인사하는 두 사람.

예기성은 새로 온 두 사람을 내게 소개시켜 줬다.

"인사하렴, 백룡영화상 주최사인 고구려 일보 정종철 과장. 이쪽은 케이플 엔터 사장 차지석 사장."

차지석과 정종철.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잊을 수 있을까.

전생에 나를 죽도록 괴롭히던 소속사 사장 차지석.

그리고 정종철은 그 모회사의 사장인데.

저 둘 얼굴을 보자마자 어쩌면, 진짜 백룡의 남우주연상은 원래 내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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