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이지우라고 알아요?
사실 좀 과하게 했다는 생각을 했다. 대본리딩 할 때 대본 없이 달리면서 대사를 치는 상대방을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진짜 연기하는 것처럼 했거든.
다른 배우들도 대본을 보고 고개를 들 때마다 내가 눈을 마주치니 부담스러워 했고. 처음에는 눈치 못 채던 사람들도 덮어놓은 대본을 보고는 놀라는 눈치였다.
보통은 이렇게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니 없다. 어떤 미친놈이 대본리딩하는데 4화까지 대본을 다 외워서 오겠나. 처음 데뷔하는 신인도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대본리딩의 목적이 뭔데.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과 스태프가 모여서 가이드 라인 잡는 과정 아닌가. 서로 대사를 주고받으면서 감정선을 공유하고, 극의 톤을 맞추는 작업. 그리고 PD가 구상하는 작품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공사로 치면 측량하는데, 혼자서 포크레인 들고 온 격이니까. 다른 스태프나 배우들이 보기에 초반부터 너무 힘 빼는 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 촬영은 길게 봐야 되니까.
나는 이게 버릇이 되고, 꾸준히 하던 방식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 다른 배우들은 비슷하게 하는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보여주고 싶었다.
대표로 얻어맞은 건 방창익이였기에 내가 방창익을 저격한 모양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려던 메시지였다.
내 노력이 적지 않아 이 자리에 주연배우로 앉은 거라고 말이다.
이 작품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같이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좀 부끄러워하라고.
결국 촬영 현장의 분위기는 배우들이 만들어 가는 거다.
이정건 선배나, 예기성 선생님과 함께 작업 할 때는 이게 참 편했는데.
이정건, 예기성 두 사람 모두 그 짬에 가장 먼저 촬영장에 도착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데, 후배들이 어딜 감히 뻗대겠나. 그리고 지금 이 현장에는 그런 역할을 해줄 배우가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고.
내가 이런 것 때문에 사업으로 바쁜 최지연 선생님에게 다른 촬영장보다 일찍 와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결국 주연배우나 연차가 쌓인 배우들이 분위기를 주도해나가야 하는데··· 상황상 내가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최지연 선생님은 몸조리를 하기 위해 무리할 수 없는 상황에, 사업체까지 운영하고 있고, 젊은 배우들 중 인지도와 연차가 높은 방창익은 대본 한 번 안 보고 리딩하러오는 판이니.
불판 위의 삼겹살을 뒤집고 있는데, 최지연 선생님이 물었다.
"항상 그렇게 대본리딩을 준비하는 거야?"
"네. 그런데 이렇게 대본 안 보고 대본리딩한 건 처음입니다. 그냥··· 좀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를 싫어할 수는 있죠. 이해합니다. 모가 난 성격 때문에 주변에 사람 없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그런 쇼를 한 건 아니었어요."
"그러면?"
최지연 선생님이 뒤적이던 젓가락을 놓고 나를 보며 물었다.
"얼마 전에 이정건 선배를 만났는데요. 보육원 봉사 활동하면서요. 그 선배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자기는 재연배우 출신이고 그 출신을 뛰어넘기 위해서 독하게 연습했다고.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자기관리 하면서 연습한다고요. 주변의 불편한 시선이나 말이 나오는 거 신경 쓰지 말라고. 다른 거 필요없이 실력으로 증명하면 된다고요."
"정건이가 그런 방면에서는 유명하지. 정건이 요즘에도 리테이크 엄청나게 가지? 지가 원하는 만큼 나올 때까지 리테이크 가는 애야. 내가 정건이 리테이크 50번까지 가는 거 봤어."
희미하게 웃었다. 이정건 선배라면 진짜 그럴 거 같았거든.
"이정건 선배,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준비해서 오셨던 예기성 선생님. 그런 분들이랑 작업을 하다가 오늘 대본리딩 하는데, 화가 나더라고요. 증명이 먼저지, 대우가 먼저가 아니잖아요."
이번엔 최지연 선생님이 희미하게 웃는다. 마치 있지도 않은 손자의 재롱을 보는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대우라는 게 스태프가 해주는 게 아니라 팬들이 사랑해주는 만큼 몸값도 올라가는 거고, 자연스럽게 대우라는 걸 받는 거고요. 그리고 팬들에게 사랑받기는 쉽나요? 팬들이 원하는 캐릭터, 연기, 매력 그런 걸 보여주려면 진짜 피가 나고 이갈리게 연습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어휴, 내가 지금 예기성이랑 이야기하는 것인지, 신인배우랑 이야기 하는건지 헷갈린다. 얘."
그냥 입에 발린 소리를 한 건 아니었다. 내가 연기자로서 장기간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팬 관리를 잘했던 거니까. 정확하게는 그것도 일이하고 생각하고 했다.
비싼 푯값을 지불하고, 영화관에 오는 관객들. 안방에서 내 연기를 보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시청자들.
팬 사인회, 팬 미팅, 시사회 등 팬들과 직접 대면하는 행사에서만큼은 카메라 앞에 연기하는 것 이상으로 열심히 했으니까.
불륜, 도박, 이중계약 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했던 내 지난날에 꾸준히 연기할 수 있었던 것도 팬들이 나를 보기 원했기에 가능했던 거였다.
"지우가 오늘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하네. 처음에는 그냥 좀 잘하는 신인인 줄 알았고, 오늘 봉사활동이랑 기부활동을 듣고는 착한 청년 같다 생각했는데··· 지우 참 좋은 배우네. 어머니가 참 자랑스러워 하시겠다. 지우 어머니가 참 부럽네. 일전에 구해준 것과 상관없이 참 대단하고."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좋은 배우'
팬들의 성원과 사랑이야 좋지. 당연한 거다. 어떻게 안 좋을 수 있겠나. 내가 먹고살게 해주시는 분들인데.
그런데 내가 존경하는 사람에게 받는 칭찬은 특별한 느낌이 있다.
예기성 선생님에게 느꼈던 감정과 유사했다.
내 본질은 분명 40대 중반인데, 그런 걸 넘어서 내가 마치 20대의 청년이 된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 성공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지만, 그 성공이 운이 아니라 내 노력과 실력임을 인정해 주는 느낌.
이런 감정의 기저에는 아마도 예기성과 최지연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이 깔렸기 때문일 거다.
연기력이라는 건 어차피 수치화할 수 없는 부분이고 사람마다 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저 부분만큼은 내가 못 따라가겠다 하는 그런 부분. 그런 게 예기성과 최지연 씨에게는 있었다.
내가 60대 노년의 배역을 언제 소화해 봤겠나. 그 나이대에 맞는 배역 수십 개를 해본 사람들이 예기성 선생님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분이고. 내가 못 해봤고, 못하는 연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수준까지 도달하기 위해서 했던 인고의 세월을 거쳐 지금의 위치까지 오신 분들 아니겠나.
부와 명예를 모두 가졌음에도 새로운 배역,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는 배우. 직업으로서의 배우가 아니라 아티스트로서의 배우.
내가 내 계획을 완성한 이후에도 저분들처럼 연기를 위해서, 작품을 위해서 혼을 불태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오는 존경이었다.
살짝 낯간지러운 상황에서 구원자인지 불청객인지 모를 사람이 끼어들었다.
"선생님. 방창익입니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어제 새벽 4시까지 다른 작품 촬영하다가 몇 시간 못 자고 바로 리딩장으로 오는 바람에 많이 부족했습니다. 제가 한 잔···"
대본 리딩장에서 초를 쳤던 방창익이 사과랍시고 소주병과 잔을 하나 들고 나와 최지연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찾아와 앉았다. 최지연 선생님의 옆에 앉을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내 옆에 앉아 말하는 방창익.
그리곤 나와 최지연 선생님의 잔이 사이다 잔인 걸 보고 말끝을 흐렸다.
"그럼 제가 사이다라도 한잔···"
최지연 선생님은 말없이 주는 잔을 받아 채운 뒤 방창익을 보고 말했다.
"창익아, 너 지우한테 고마워 해야되."
"네? 아··· 네. 죄송하게 생각하고 또 본 촬영 들어가면 절대로···"
"내가 거기서 한소리 하려고 그랬어. 만약 그랬으면 PD랑 다른 배우들 얼마나 불편했겠니. 내가 오랜만에 촬영장와서 잔소리나 하고 그래야겠어? 나 오랜만에 촬영장 와서 즐겁게 촬영하고 싶어. 창익아 알겠지?"
방창익은 위에래 입술을 붙여 안으로 말아 넣고 한참을 아무 말 못하고 있었다.
"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리고 지우 씨도 미안 하고요."
"아, 네 뭐··· 선배님이시니 잘하시겠죠. 잘 부탁합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서 인사를 했다.
사실 방창익은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쪽대본으로 돌아가는 현장에서 구르다가, 대본리딩전까지 한숨도 못 자고 온 거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준비 안 하고 대본리딩장에 온 방차익이 잘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후배들이 옆에서 분위기를 망치고 있으면 그가 먼저 나서서 바로잡아야 했었는데 방창익이 그걸 못했으니까.
연차가 쌓였다는 이유, 그 현장에서 제일 준비가 부족했다는 이유가 겹쳐서 대표로 최지연 선생님께 사과하러 온 것 같았다.
웃기는 점은, 정작 내게 시비를 걸고 싸움이 날 뻔했던 건 옆에 있던 다른 배우였었고, 회식을 불참하여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나가버렸다는 거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 드라마의 애청자인 내가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건 그만큼 미래에도 별 볼일 없이 사라진다는 이야긴데.
***
연예 소속사인, 케이플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실.
'본사 기획전략실 정종찬 과장님 들어오셨습니다.'
회사 입구의 안내직원이 다이렉트로 사장에게 알렸다.
차지석 사장은 책상에서 일어나서 본사 과장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정종찬 과장. 말이 본사 과장이지, 실제로는 고구려 그룹의 실질적인 후계자였다.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재벌 3세.
작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졸업하자마자 회사로 들어온 현 고구려 그룹 회장의 아들.
입사할 때부터 말이 많았다. 원래 유학을 갔다가 본사 실장급으로 바로 떨어질 줄 알았던 회사의 후계자. 정종찬은 돌연 유학길을 포기하고 과장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케이플 엔터테인먼트가 업계에서는 나름의 규모가 있다고 하지만, 고구려 그룹 전체를 봤을 때는 작아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급의 차이가 있다.
고구려일보를 필두로, 영화 배급, 영상 제작, 종편 방송국, 리조트 및 관광산업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언론 재벌. 최근의 행보는 단순히 언론 재벌을 넘어 방송 연예계의 지주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 그룹의 후계자. 누구라도 만나서 인맥을 다지고 싶어하는 상대지만, 차지석 사장은 썩 유쾌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차 실장. 오랜만. 아 이제 차 사장이지?"
"정 과장님 어서 오십시오."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지는 차지석 사장을 상대로, 20대 후반 정도의 정종철은 거침없이 하대하지만 자연스러웠다.
"차 사장님, 정태형은 군대에서 잘 지낸대요? 정태형 없으니까 요즘 놀 사람이 없네."
"따로 면회 가보지는 않았습니다."
"역시, 우리 차 사장님 냉정하네. 그래도 정태형 실장님이 직접 발굴하고 키운 사람 아닌가?
"맞습니다."
"크아, 카리스마 있네. 내가 이래서 차 사장을 좋아해. 내가 전에 있던 사장 짜르고, 우리 차 사장님 존나 민 거 아시죠?"
박정태가 병역비리로, 군대 간 직후. 회사 전체적으로 물갈이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지사장으로 앉혀 놨던 전문 경영인을 자르고, 그 자리에 차지석을 앉힌 것이다.
'저 새끼가 또 뭔 짓을 하려고 저런 밑밥을 까나.'
차지석 사장은 정종철과 일찍이 인연이 있었다.
그 당시 정종철이 회사로 출근하다시피 했으니까.
차지석 사장은 예전 실장급으로 일할 당시, 정종철은 박정태와 작당을 하고 회사 연습생들과 술 마시러 다니기 일쑤였다.
박정태는 자기보다 10살도 더 어린 물주의 따까리 짓 하면서 연예인 지망생들을 정종철에게 소개해줬고.
그런 정종철과 박정태의 뒷 처리를 담당했던 차 실장이었기에, 정종철은 귀찮고 피곤한 존재일 뿐이었다.
"차 사장. 내가 차 사장 좋아하는 거 알죠?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더라고. 근데 있지, 싫어하는 것도 이유가 없더라고."
차지석 사장의 포커페이스가 살짝 깨질 뻔 했다.
'술 마시고 사고 친 거 덮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데, 이유가 없다고?'
그러건 말건, 정종철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내가 존나 싫은 사람이 있어서 그런데, 이거 어떻게 안 되나?"
차지석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살짝 난감했다. 그리고 이 정종철이 왜 자신을 사장 자리에 앉히려고 애를 썼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말씀하십시오. 일단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이지우라고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