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왕따 멈춰!
시간은 빠르게 흘러 연말이 되었다.
시상식 초청이 정식으로 이뤄지고, [응답하라 119]에 관한 스케줄이 하나씩 생겨갈 때 쯤.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은 내년 초 서울 앙코르 공연까지 대관 계약을 끝마쳤다.
약 한 달간 12회 추가 편성된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 앙코르 공연. 나는 매 공연 250석가량의 자리를 서울과 경기도 인근 보육원과 취약계층 아동에게 기부하기로 했다.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은 각종 특수효과 때문에 티켓값이 비싼 편에 속한다. 좌석배치에 따라 가격이 차이가 나지만 보통 3만원 후반대. 비싼 자리는 4만 원 초반 정도이다. 성인들을 타겟으로 하는 대형 뮤지컬이나 공연에 비하면 반값도 안되는 수준이다. 하지만 아이들과 같이 오는 부모들은 공연을 보러 온다기보다, 애들을 돌보러 오는 느낌이기에 반값이라도 반값이 아닌 느낌.
이 비싼 티켓이 그냥 날아가는 일 없게, 서울시 아동복지과와 협조해서 긴밀하게 스케줄을 조절해 나갔다. 아무렴. 공연 한 번에 1,000만 원씩 기부하는 거나 마찬가진데 꼼꼼해야지.
채 실장이 그런 부분에서는 머리가 좀 아플 거다. 다행스럽게도 기부의 목적과 취지에 공감한 서울시 측에서, 보육원과 공연장까지 오가는 차량지원까지 받아냈다.
이런 세부적인 스케줄 조율에 내가 따로 나설 일은 없고, 기부금을 전달한 이후에 채 실장을 통해서 간간이 결과만 통보받았다.
진행과정을 들을 때마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면서 기분이 좋았다.
내가 공연이 끝나고 무대 인사를 할 때에는 ’피코’의 인형 탈을 갈아입고 무대 인사를 나갔다. 채 실장에게 진행사항을 전달받을 때마다 인형 탈을 쓰고 무대인사 할 때의 아이들이 자꾸 생각나는 거였다. 다가와서 사진을 찍고, 소리 지르고, 웃으면서 말을 건네는 그 아이들 모습.
그 아이들의 설렘, 기쁨, 환호. 그런 것들이 생각나면서 마음속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많은 것들에 대해서 소외당하며 살았던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로 문화생활을 나눠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만감이 들었다.
회사가 그렇게 바쁜 동안에 나는 [응답하라 119]의 대본에 집중했다. 방영까지 약 넉넉하게 4개월 정도 남은 시점. 6화 대본까지는 이미 뽑혀 나온 상태였고, 남는 시간을 활용하여 대본 숙달에 집중하고 있었다.
소방서라는 작고 특수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드라마.
대본을 읽으면서 느낀 건 유수영 작가가 이런 걸 참 잘한다는 거다. [저승 카페]도 카페라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판타지를 잘 살렸는데, 이번 [응답하라 119]는 좀 더 캐릭터에 집중한 느낌이다.
다양한 캐릭터 사이의 케미와 잔잔하게 느껴지는 휴머니즘.
[응답하라 119]의 주요 출연자만 15명이 넘는 드라마다. 주인공만 6명. 그중 여자 주인공 1명에, 남자주인공 5명.
이 외에 사고를 당하거나, 병원에서 근무하는 역할의 조연들까지, 배우들이 많이 출연하는 드라마다.
그렇기에 대본리딩을 하기 위해서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제작 여건상 주요 출연자 대본리딩을 생략하고 바로 전체 대본리딩을 하는 현장. TNN에서 이 인원을 다 소화할 수 있는 회의실이 없었기에, TNN 방송사 인근 세미나실을 대관하여 대본리딩이 진행되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세미나실을 들어서자, 이미 대부분의 배우는 자리에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이때 내가 회귀했음을, 그리고 20대의 몸으로 다시 연기하는 것임을 상기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존중받는 배우가 아니라, 존중을 이끌어 내야 하는 배우 말이다.
일단 내가 들어오자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많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내가 들어가는 순간, 살짝 목소리 톤이 낮아지는 느낌. 그리고 이내 자신들 끼리 이야기 속닥거리는 말까지.
분위기를 무시하고 그중에 연륜과 경력이 가장 높은 최지연 씨에게 먼저 찾아가 인사했다.
“지우 씨 어서 와요.”
전보다 훨씬 좋아진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는 최지연 씨.
“홍삼즙 잘 먹고 있습니다.”
괜히 이야기했나 싶었다. 내가 홍삼즙 이야기를 꺼내고 동시에 몇몇 배우들이 나와 최지연 씨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냥 일전에 받은 홍삼즙에 대한 감사한 뜻을 전하려고 한 것뿐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보다.
‘원로배우한테 그런 것도 선물 받는 사이야?’
‘너희끼리 짜웅하고 우리는 안중에도 없나 보지?‘
‘데뷔 2년 차 밖에 안되는 주제에 뭐 저리 나대?’
이런 의문을 가진 눈빛이었다.
감독 눈에 잘 들어서 영화 두 편을 대박 낸 신인.
그런 주제에 시사회부터 인터뷰 등 공식석상에는 전혀 안 나오는 건방진 신인.
조연으로 들어간 드라마의 경쟁 드라마들이 폭삭 망해서 화제가 된 신인.
딱 그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내 모습 말이다.
그러면서도 출연료를 가장 많이 가져가는 내가 얼마나 아니꼽겠나.
나를 제외한 주연배우 5명은 20대~30대 배우 중에서 인지도 대비 출연료가 저렴한 배우 위주로 뽑은 상태이기에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비슷한 나이 또래에게 경력은 훨씬 적은 내가 주연자리를 차고 나가니 더욱 노골적으로 티를 냈었고.
캐스팅에서부터 제작진들의 생각이 읽힌다. 주인공 중에서 메인 캐릭터인 내가 화제성과 연기력이 검증됐으니, 보조를 맞춰 극의 흐름을 이어가는 배우들은 연기력에 초점을 맞춰 뽑은 듯했다.
종편 드라마에서 필요한 화제성은 나 하나로 충분하니, 몸값 싼 배우 중에서 경력이 되고 연기 잘하는 배우 위주로 뽑았겠지. 제작비도 절감하고, 극의 완성도도 올릴 겸.
거기에다가 여기서도 내가 막내다. 주요 배우들은 5년에서 10년 차 이상으로 채워져 있었다. 무명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독 주연급으로 치고 나가기에는 조금 애매한 배우들.
그들은 여러 다른 현장에서 서로 얼굴을 익히고 친분을 다져놨는지 서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부산스럽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나 빼고. 내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뻘쭘한 분위기에서 스태프와 배우들 한 명 한 명 찾아가 인사를 했다. 웃는 낯으로. 뭐 이런 거 한두 번 해보나. 직업이 배우인데, 얼굴에 철판 깔고 인사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지.
인사를 받는 배우들의 반응이 뜻뜨미지근 하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니, 그동안 촬영현장이 편하긴 했다. [폭력의 사슬]이나 [민주를 기다리며]에서는 감독부터 배우들 모두 무명이었고 나도 무명이었으니까.
[저승 카페]에서는 조연이었기에 크게 주목받는 일 없었고. 배우들의 견제나 시기보다는 스태프들의 눈총이 조금 거슬렸을 뿐이었다.
[악의 기록]은 이수한 감독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데다가 스태프들도 [폭력의 사슬]때 호흡을 맞춘 스태프들이 많았기에 서로 간에 신뢰가 있었고.
그런 걸 떠나서, 견제 아닌 견제를 하는 동년배 배우들을 보니 살짝 화가 났다. 그런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있으면 대본이나 한 줄 더 보지.
운이 필요하긴 하지만, 결국 이 바닥은, 특히 배우라는 카테고리는 실력으로 위아래가 나뉘는 건데.
문득 최고의 위치에서도 자신을 채찍질하는 이정건 선배가 생각났다. 그 어떤 현장이든 최선을 다했다던 이정건 선배.
그리고 어느 현장이든 실력으로 증명하면 된다는 그의 말.
리딩장에 모인 배우들을 주욱 한번 둘러봤다. 애매한 위치와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채운 경력.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시기하고 질투하나 싶었다.
이 새끼들을 어떻게 하나.
처음엔 저승카페에서처럼 커피라도 만들어서 나를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이럴 때는 묘책이나, 기책. 이런 거 필요 없다.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잘 해버리면 되는 거다.
***
4시간에 걸친 대본리딩이 끝나니 해가 벌써 지고 있었다. 이어서 바로 회식이 계획되어 있다. 모든 출연진과 스태프들이 모이는 자리는 보통 전체 대본리딩이 끝이기 때문이다.
세미나실 인근 고깃집. ‘못골가든’ 이라고 쓰여 있는 가게였다. 삼겹살, 목살 뭐 그런 거 파는 가게. 웬만하면 소고기 사주지. 제작비 모자란 거 너무 티 내는 거 아닌가 싶은데.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별문제 없이 회식이 진행되었다. 류 PD가 일어나서 잘 부탁한다고 한마디 하고, 건배 제의 하고. 뭐 그런 거.
그렇게 구워지는 고기만 먹고 있는데, 최지연 씨가 다가와 내 앞자리에 앉았다.
“지우 씨도 술 안 먹나 봐요?”
“네. 제가 술을 못 먹습니다. 선생님 제가 한 잔··· 아!”
“저도 못 먹어요. 호호호.”
그러네. 그냥 아무리 용종 떼듯이 암을 뗐어도, 대장암이셨는데. 벌써 술을 먹기에는 좀 그렇지.
"나도 오랜만에 현장 나와서 그런지 아는 얼굴이 지우 씨밖에 없네요."
"저도 종편 드라마는 처음이라, 다 모르는 분들밖에 없네요."
반쯤 남은 사이다병을 들어 최지연 씨의 잔을 채웠다.
"우리도 짠 할까요?"
"네, 선생님의 건강을 위하여!"
사이다 잔을 살짝 마주 부딪쳤다.
“크으··· 요 몇 년 계속 일만 하다가 이렇게 연기하러 나오니까 좋아요. 젊은 사람들 얼굴도 보고. 확실히 나는 사업보다 현장이 좋은 것 같아.”
“지금도 방송국 PD들이 줄 서지 않습니까? 원하시면 언제든지 배역 잡으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이건 개인적인 궁금증이었다. 처음 만날 때에 비해서 격식 없는 수수한 복장. 그리고 지금 이 모습이 훨씬 잘 어울리고 편해 보였다. 딱히 화려하게 치장하거나 비싸 보이는 액세서리는 없는 모습을 봐선, 돈이 좋아서 사업을 하는 게 아닌 느낌이 들었다.
그런 최지연이 뭐하러 힘들다고 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두고 크게 사업을 벌이고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 뭐 그런 거였다.
사실 내게 다가와 말 거는 사람이 없었기에 좀 심심하기도 했고.
“뭐 자식 때문이죠.”
“네?”
최지연 씨는 결혼도 안 한 걸로 아는데··· 아까 우연히 여배우 중 한 명과 결혼 관련 이야기를 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 ‘결혼 안 하는 것도 좋다. 나 봐라 잘 살지 않느냐.’ 뭐 그런 식의 농담.
“내 자식 같은 애들 도우려고 하는 거에요. 돈 많이 벌어서 애들 옷도 사입히고, 밥도 먹이고, 장난감도 사주고. 고아원, 미혼모 지원 사업에 돈이 많이 들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런 애들 한둘 도와주다가 보니 사업이 커졌네요. 사업이 커지니까 그만두는 것도 쉬지 않아요.”
그녀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나이 먹은 아줌마의 한풀이 비슷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뜻밖에 이런 모습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고급 레스토랑이나, 비싼 브런치 카페에서의 모습보다, 약간 허름한 삼겹살집의 감성이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랄까.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이 연기만을 파고든 인생. 그러다 지인의 권유로 함께 사업을 시작하고 확장했다고 한다. 방송과 사업을 병행하다가, 우연히 쇼 프로의 패널로 참여하게 된, 미혼모를 다루는 프로그램.
그때부터 결손가정이나, 고아들에 대해서 조금씩 관심을 두고 지원하다가 몇 년전부터는 방송을 그만두고 사업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어차피 유산을 남겨 줄 사람도 없는 최지연은 버는 족족 기부하고 있다고 했고.
뭔가 간질간질한 느낌. 전생에는 이런 사람인지 몰랐다. 원래라면 난 이시기쯤 한창 대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고, 최지연 씨는 사업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막상 최지연 씨가 기부나 봉사활동에 대해서 잘 알고, 또 사업체도 크게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까 이게 인연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고.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름 명분을 만들고 있었던 것 같다.
최지연 씨의 사업체가 망하는 걸 알고, 그걸 무시하려고 했었다. 내가 한 행동의 나비효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이 계속 불편했었다. 내가 나서서 최지연 씨의 회사가 망하는 건 아니지만, 거짓 뉴스로 고통받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못 본채 지나가는 것이 꺼림칙했다. 그리고 최지연 씨의 저 말을 듣기 전까지 개인이 돈 벌려고 사업하는 것까지 내가 개입해서 내가 돕는 것이 오지랖이라 생각했었고.
최지연 씨를 돕는 게 아니라, 최지연이 후원하는 수많은 아이를 돕는 행동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대단하시네요. 저도 요즘 그런 쪽에 관심이 많거든요. 최근에 그런 쪽으로 기부도 했고요. 해보니까 정말 좋더라고요. 밥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 애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뭐 그런 느낌?”
“기부요? 어떤 거?”
최지연 씨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봤다.
“[벡터맨]이라고 아시나요?”
“알죠. 명세기 완구업체 사장인데. 몇 년전에 꽤 흥행했던 드라마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 드라마의 스핀오프 격으로 지금 아동극하고 있거든요. 그 아동극 표를 사서 서울시랑 협업해서 취약계층 아동이랑 보육원 애들한테 나눠주고 있습니다.”
“아! 나 뭔지 알 것 같아. 그 가로등 옆에 플랜카드 붙어있는 거 본 것 같은데. 지우 씨 보기보다 진짜 진국이네. 나이도 어린데 벌써 그런 생각을 다 하고.”
“아뇨, 제가 사실 그 아동극에 한발 걸쳐···”
완구업체, 기부, [벡터맨], 저작재산권, 특수효과, 놀고 있는 스튜디오 나우... 머릿속에서 떠도는 키워드가 합쳐지면서 구체화 되기 시작했다.
이거 되겠는데?
“선생님, 혹시 사업 확장 계획 없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