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3000만큼 표 살께
이정건이 나랑 같은 시간대의 SBC 편성 드라마라.
“어··· 선배님 저 조지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죠?”
“내가 조지려고 하면 조져질 거냐?”
“그건 아니죠.”
20대의 이지우도 안 되고, 40대의 이지우라면 더 안 되지. 내가 난데.
사실 우리끼리 이러는게 웃기는 일이다.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는 게 괜히 생긴 말이 아니다. 톱스타 여럿 데리고 찍어도 대본이 재미없으면 망하는 판이 드라마 판이니까.
“그리고 나 하나 잘한다고 띄울 수 있는 판이 아닌 건 너도 잘 알잖아?”
“알죠.”
이정건이 뭐, 나 한번 죽여볼 거라고 같은 시간대 드라마 한 건 아닐 거로 생각한다. 아마 자기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겠지.
“연기라는 게 누가 잘해서 이긴다, 진다 이런 게 없잖아? 그런데 자꾸 지는 느낌이 드네. 당연히 인지도가 내가 높으니까 인기야 더 많겠지.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인기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 지우야, 내가 지금 이 생활 10년 차거든. 너 내가 어디 출신인지 아냐?”
“글쎄요··· 단역? 보출(보조출연자)?”
“재연배우. [사랑과 전쟁] 출신이야. 내가 그 암담한 바닥에서 실력으로 여기까지 왔어. 너야 영화 한방에 떠서 잘 모르겠지만, 재연배우가 여기까지 오는 거 절대 쉽지 않다. 재연배우라는 꼬리표가 한번 붙으면 절대로 땔 수가 없거든. 그 꼬리표 때려고 진짜 독하게 연습했고.”
이정건이 재연배우 출신이었나? 인정. 그건 그거대로 대단하네.
재연드라마(사랑과 전쟁, 솔로몬의 선택 등)의 포맷 특성상 매주 방영된다. 거기에 더해 배우 풀이 매우 작아서 한번 재연배우로 쓰인 배우는 단역이상의 배역을 주지 않는 게 방송영화계의 관례다. 재연드라마에 한 번 나오면 특유의 쌈마이한 연출(드라마국이 아닌 예능국에서 연출한다)과 극심한 이미지 소모, 그리고 주로 불륜과 치정 중심의 아이템으로 인해서 시청자들의 뇌리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고정돼버린다. 그래서 대부분의 드라마국 PD들은 재연배우들이 출연하는 걸 거부한다. 정극에서 재연배우가 나오는 순간 시청자들이 외면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배우로서, 이런 식으로 한번 붙어보는 것도 재밌지 않겠냐? 너도나도 주연으로, 같은 시간대에.”
뭘 하든지 진지한 그의 성격. 그리고 지독하다 생각될 정도의 엄격한 자기관리의 이유가 그런 거였나. 그런 부정적인 관례와 관습을 부숴버릴 정도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정건이 있었겠지. 이정건의 근본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내가 연기를 하면서 어디서 쫄아본적이 없거든. 어디서 연기하든 열심히 하고 실력으로 증명하면 되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좀 쫄리네.”
하지만, 이정건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나는 영화로 한방에 뜬 배우가 아니다.
그리고, 이정건의 상대는 내가 아니다.
***
이정건과 봉사활동을 끝낸 다음 날, 회사를 찾았다.
곧 연말이다. 세무에 관한 내용을 좀 상담받아야 할 것 같았다. 이정건 말대로 올해 수입이 적지 않은데, 바빠서 쓰질 못했다. 회사에서 그동안 활동한 기록도 확인하고 연계된 세무사가 있는지 확인도 할 겸 왔다.
김수호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서니 이동수 실장은 없고 채시원 실장만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채 실장님. 안녕하세요. 별일 없죠?”
“어서 와요 지우 씨. 어쩐 일이에요?”
“그냥 볼일 보러 나온 김에 뭐 알아볼 것도 좀 있고 해서 들렸어요.”
“아참, 지우 씨 기사 올라 온 거 봤어요?”
“네? 어떤 기사요?”
“조상기 기사 알죠? 시네르포.”
“네 알죠. 조··· 상기 기자.”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그런 별명은 좀 그렇지. 그리고 나한테는 누구보다 갓상기 기자 아닌가.
“조상기 기자가 이지우 씨 기사 하나 올렸는데, 대박이네요. 이거 봐요.”
그러면서 채 실장은 자신이 보고 있던 모니터를 살짝 내 쪽으로 돌렸다.
***
영화 칼럼
[이지우의 기록]
시네르포, 조상기 기자
이지우는 연기를 잘한다. 배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연기를 잘한다는 말이 칭찬으로 하는 것이 맞겠느냐마는, 그럼에도 잘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는 본질이다. 화가의 본질은 그림에 있고, 배우의 본질은 연기에 있다. [악의 기록]에서 이지우의 연기는 그 본질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단순히 직업적 가치로서 잘한다는 의미를 넘어선 사람을 장인 혹은 명장이라 부르는 것처럼, 이지우의 연기도 그런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데뷔작인 [폭력의 사슬]의 타오르는 청춘에서부터, 선을 믿는 악인이 된 [악의 기록]까지. 절대 많다고 할 수 없는 그의 필모그래피지만 벌써 그는 대중에게 많은 것들을 보여주었다.
[폭력의 사슬]과 이후 [민주를 기다리며] 그리고 [저승 카페]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기술자의 면모를 보여줬다. 캐릭터를 끌어와 정확하게 연기하는 모습은 연기를 기술적으로 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것도 아주 숙련되고 기능성이 좋은 기술자 말이다. 이게 나쁘다거나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번 [악의 기록]에서의 연기는 캐릭터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어 내었다. 연기가 아니라 삶이다. 짙은 독백연기와 선과 악을 고민하는 존재. 그리고 그 결론이 악임을 선선히 수용하는 단계를 이지우 방식으로 관객에게 납득시킨다.
다소 황당하고 억지스러운 전개와 배경을 이지우의 삶으로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도구로 사용한 방식은 기존 이지우의 연기의 핵심이었던 정교한 전달력이라든지, 절제된 표현력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감정연기였다.
<중략>
[악의 기록]은 많은 것을 남겼다.
예기성의 건재함을 확인했고, 이정건의 새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지우라는 배우의 성공을 남겼다.
영화 촬영 이후 공식석상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지우가 새로 드라마를 준비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지우의 시대를 산다. [이지우의 기록]에 남겨질 [응답하라 119]는 어떠한 이지우가 기록될지 기대가 된다.
***
“채 실장님 이거 얼마 주셨어요?”
“뭐? 아니에요. 이거 돈 주고 쓴 기사 아니라 칼럼이라고요.”
“이 사람 뭐 잘못 먹었나.”
“그러게 나도 놀래는 중이었어요. 조상기 기자가 이지우 씨 엄청나게 좋게 봤나 보네. 원래 이런 기사 쓰는 사람이 아닌데.”
“그러게요. 내가 저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어쩌면 조상기는 타고나게 반골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대부분 기자들이 나에 관한 기사를 쓰는 것에 대해 소극적이고 적대적인 상황에, 대놓고 저런 칼럼을 내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반골 기질 아니겠나.
거기에다가 칼럼을 쓴 타이밍 봐라. 영화가 상영관에서 내리자마자 올리지 않았나. 기자의 자존심으로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저런 걸 것이다. ‘어떠한 외부영향 없는 내 의견이다’ 라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전생에는 나를 그렇게 깠었는데···
“아참, 채 실장님. 혹시 올해 제가 들어갔던 광고나 작품들 관련해서 자료 좀 볼 수 있을까요? 세금 때문에 그래요.”
“내년 소득세? 아 그거면 우리 회사로 계약돼있는 세무사 연결해 줄 거예요. 내년 5월에 회사에서 다 알아서 해 줄 텐데?”
“혹시나 해서요. 올해 얼마 안 남았는데 미리 준비해야죠. 뭐 기부나 이런 쪽도 좀 알아보려고요.”
“아, 하기야 세금 감면 혜택도 있고, 이미지 끌어올리는 데는 그것만큼 좋은 건 없죠. 지금 지우 씨 이미지 너무 딱딱하니까.”
이미지 때문에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렴 좋았다.
기부라는 게 사실 그렇다. 절세를 목적으로라면 다른 방법도 많고, 기부해도 기부금의 일정 % 만큼을 공제받는 거지 기부한다고 해서 기부 금액 100%가 절세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다시 연기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 아이들의 웃음이었기에 나름 갚아주려고 하는 것뿐이다.
절세를 생각했으면 회사가 아니라 세무사를 바로 찾아갔지.
보육원 봉사를 하면서 느꼈던 게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기부를 하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걸 내가 직접 찾아다니면서 조사할 수는 없으니 회사에서 방법을 찾으러 온 거고.
아무래도 10년 이상 회사를 키워 온 만큼, 많은 연예인이 있었을 것이다. 때마다 찾아오는 기부 행사에 무슨 무슨 연예인이 ‘통 큰 기부를 했다.’, ‘누구누구 기부금액 쾌척’ 등의 기사가 나오니 회사에도 그런 쪽 자료가 있을까 싶었던 거다.
내가 전생에는 기부랑 담을 쌓고 살았거든.
“아이들을 돕는 기부나 그런 쪽으로 회사랑 연개되있는 거 있을까요?”
“글쎄요. 회사에 따로 그런 게 있지 않아서요. 홍보팀은 혹시 알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수해복구나, 산불 같은 거 나면 홍보팀이 배우들이랑 자선단체랑 이어주는 거 몇 번 보긴 했는데···”
채 실장은 자신이 담당하는 파트가 아니라서 그런지 말끝을 흐린다.
어쩔 수 없이 직접 알아보러 다녀야 하나.
가능하면 아이들을 돕고 싶다. 딱 이 정도의 생각만 하고 발전을 못 시키는 중이었다. 직접 가서 기부금 조금 전달하고, 보육원 가서 잡일 조금 도와주는 것 말고는 더 할 수 있는 방법을 못 찾았다.
나는 사실 아이들을 별로 안 좋아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안 좋아했다. 귀찮고, 피곤하고 시끄럽고.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고 관심이 있었다면··· 전생에 그런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테니.
좋아하게 된 계기는 그리움 때문이었을 거다. 그리고 후회 때문일 거다. 이미 되돌린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없을 테니까.
아이들이 좋아지고 나서, 좀 더 행동하게 된 계기는 세화 세호 남매와 있었던 사건이 컸다. 세화 세호 남매가 어두운 골방에서 나와 다시 웃을 수 있게 된 지금,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 아마 그때 후견인 관련 업무를 할 때, 연기보다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이게 보람인지, 속죄 혹은 참회에서 나오는 감정인지 매일같이 감정을 분석하는 나도 확실치 않다. 다만, 내가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세화 세호 남매사건 이후, 비슷한 시기부터 보육원에 봉사활동 다니게 된 거고.
결정적으로 [악의 기록]에서 연기하며 들춰졌던 내 트라우마를 아동극으로 치유하면서, 이걸 꾸준하게 해서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이정건 선배한테 물어볼 걸 그랬나. 이정건 선배는 이런 거 잘 알 것 같은데. 다음에 이정건 선배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어? 지우 언제 왔어? 별일 없지?”
사장실에서 장인호 사장이 나와서 간단하게 내게 인사를 건넨 후, 곧바로 채 실장에게 다가갔다.
“채 실장. 우리 그때 [벡터맨] 서울 앙코르 계획 어떻게 하기로 했지? 대관 확인해서 알려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채실장이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관련 자료를 뒤적였다.
“사장님. 앙코르 공연을 할 수 있긴 할 거 같긴 한데, 기존 계획했던 것보다는 좀 횟수를 줄여야 할 것 같아서요.”
“왜? 관객이 그만큼 안 나올 것 같아?”
“네. 이미 홍보가 될 만큼 된 공연인데, 서울 마지막 공연 때는 예매율이 좀 떨어지는 추세였었어요. 지방 공연 다 끝나면 2달 정도 걸릴 텐데, 그정도 텀으로 기존 계획대로 공연 횟수 가져가면 이거 적자 날 수도 있겠는데요.”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 이야기였다. 공연이 꽤 흥행한 만큼, 지방공연이 끝나는 시기에 맞춰 서울 앙코르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는 내용을 사전에 들었기에 알고 있었다. 나도 투자자니까. 다만 그 횟수에 대해서는 아직 미정인 상황이었다.
섣불리 공연을 길게 잡았다가 표가 안 팔리면 대관료나, 홍보비, 배우들의 인건비 등에서 적나가 날 수밖에 없으니 신중한 것이다.
장인호 사장과 채시원 실장의 이야기를 듣던 중. 어어 하는 순간에 몇 가지 생각이 조립되고 합쳐진다.
[악의 기록]의 흥행으로 러닝개런티와 투자 배당금이 예정된 상황. 이미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에 투자했던 금액들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돈을 벌어들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저 아동극을 하면서 내가 얻어갔던 것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고.
꿈을 돈으로 살 수는 없는 거니까.
그리고 꿈은 나눌 수 있는 거니까.
“사장님, 그 표 직원 할인되나요?”
“무슨 소리야? 너 또 뭐 하려고 그래?”
“표를 좀 사려고요. 한 3,000장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