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81화 (82/121)

81. 현주는 알고있다

대장암. 최지연. 그리고··· 사업이 잘된다는 말.

몇가지 키워드가 머릿속을 헤집으면서 '확' 하고 전생에 있었던 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최지연 환경호르몬 사건’

시사보도 프로그램 한 방에 최지연 씨의 회사가 통째로 날아가고, 최지연 씨도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지병이 악화하여 죽는다는 기사. 그리고 그 지병이 대장암이었다는 것도 기억이 났다.

"천운이시네요. 정말."

"그러게요. 천운이죠. 늦게 연락한 거 미안해요. 어쩌다 보니 경우 없는 사람이 되었네요. 일찍 연락하고 싶었는데 경황이 없었어요."

"아뇨아뇨, 그런 일을 겪으셨는데 당연히 연락 못할만하죠. 이해합니다. 그리고 정말 다행이고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내가 다른 걸 뭐 더 해드릴 수 있는 건 없고, 사례금을 드리자니 또 이지우 씨 부자라고 하더라고요. 이번 영화 초기 투자자이시라고···"

영화 [폭력의 사슬]에 이어 [악의 기록]까지. 두 영화를 묶어서 기사가 한 번 난 적이 있다. 내가 워낙 언론매체에 드러나는걸 꺼리다 보니 가십성 짜집기 기사가 난 것이다.

두 영화의 초기 투자자로 내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 이게 부풀려져서 영화계의 큰손이니, 갑부니 하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소리란 걸 알 수 있다. [폭력의 사슬]이야 수익률 자체는 높았지만, 투자금이 2,000만 원정도 밖에 들어가지 않았고, [악의 기록]은 아직 영화관에 걸려 있는 상황. 정산되려면 4개월 가까이 남은 셈이다.

뭐 사실이든 아니든 그게 나에게 뭐가 그리 중요한 일이겠나.

나한테는 코인이 있는데. 그리고 내가 주식을 시작한 게 영화판에 자리 잡은 40대 초반이었다.

코인으로 한 번 터트리고, 시간이 지나고, 40대에 관심 있게 봤던 주식들 위주로 한 번 더 굴린다면 부자니, 갑부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재벌 소리 들을 텐데.

지금이야 내가 20대 초반이고 전생에 주식시장에 관심이 없었던 때라 확신 있는 종목을 못 고르고 있을 뿐이다. 화장품 주식이나 테슬라가 뜬다는 걸 알아도 지금 거기에 돈을 넣고 계속 신경을 쓰는 것 보다, 연기에 집중하고 코인시장이 열리면 거기다가 때려 박는 게 이득이니까.

"정말 괜찮습니다. 선배님. 홍삼즙이면 됐···"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였다.

최지연 씨가 운영하는 업체. 방영되는 그 시사보도의 내용이 좀 거슬렸다.

최지연 씨가 판매하는 아동복이 저질 원단을 사용하고 완구제품에서는 다량의 환경 호르몬이 나온다는 보도내용. 그 보도로 최지연 씨가 운영하던 사업체는 쫄딱 망한다.

최지연 씨는 이와 관련되어 보도 프로 그램 PD를 상대로 명예훼손과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한다. 소송을 진행하면서 사업체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게 밝혀진다. 환경호르몬이 나오긴 하지만 국내 기준치보다 훨씬 적은 양이었고 인체에 해가 없다는 내용. 오히려 다른 업체의 제품보다 더 안전한 제품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진다.

그 결과가 나온 게 5년 후다.

이미 사업은 망해버리고, 최지연 씨는 대장암으로 사망한 후였다. 아마도 재판과정과 사업체가 망하는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던 모양이다.

웃긴 건, 최지연 씨의 사업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으면서도 그 보도를 했던 PD는 무죄판결을 받는다는 것이다.

시기상으로는 내년이나 내 후년? 그쯤에 보도가 나간다.

알려줘야 하나? 알려준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내가 지금 이런 사실을 말해줘 봐야 나를 이상하게 볼 뿐인데.

“내 나이쯤 되면요, 그리고 죽다 살아나면요, 생각이 많아져요. 돈 버는 것도 좋고, 지금 하는 사업도 좋지만 내가 진짜 좋아했던 게 뭘까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이지우 씨한테 사례를 한다 하더라도 목숨 값을 돈으로 갚는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생각도 들고요.”

“네? 혹시 그러면···”

“요새 가장 잘나가는 배우한테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좀 웃기긴 하는데. 그래도 내가 제일 잘하는 걸로 이 빚을 갚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지우 씨 드라마 주연은 처음이라면서요?”

“네. 주연으로 드라마 들어가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요, 저를 구해 줬던 사람이 후배라는 말을 듣고 많이 놀랐어요. 그리고 그 후배가 주연인 배우에 저도 배역이 있다는 것도 놀랐고요.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제 나름에 방식으로 빚을 갚아보려고 해요.”

“나름에 방식이라는 게 혹시, [응답하라 119]에 출연하시는 건가요?”

“네. 방금 형섭이(캐스팅디렉터) 한데 말해주고 오는 길이에요. 아마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확정 나지 않을까 하네요.”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사실 내가 감사할 일은 아닌데, 뭔가 감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위해서 급이 안 맞는 드라마를 하는 건 사실이니까.

종편 드라마. 미래에는 공중파와 비교해서도 절대 꿀리지 않는 드라마가 많이 나오지만, 지금 시기만 해도 많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많다. 거기에 TNN에서 처음 제작하는 드라마이니만큼 준비도 많이 부족하고.

최지연 씨가 공중파 드라마에 출연하고자 한하면, 그 나이대에 맞는 역할을 금방 잡을 수 있는 급이니까. 연기 잘하는 노 배우는 그만큼 귀하다. 그런 최지연 씨가 종편 드라마에 나 하나 보고 출연한다는 게 좀 머쓱하다고나 할까.

“아니에요. 제가 고맙고 감사하죠. 이지우 씨 때문에 하는 게 맞지만, 일단 대본이 좋잖아요. 지우 씨 때문에 출연을 결심한 게 맞긴 한데, 만약 대본이 안 좋았다면 좀 더 고민했을 것 같아요. 우리 잘해봐요.”

"네, 선배님."

***

이수한의 만화방에서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축하할 일이 많다.

[악의 기록] 791만 명. 역대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중 최고 기록을 경신한 기록이다.

그리고 현주의 첫 연극 작품의 성공적인 데뷔와 김범의 첫 주연 배우까지.

맴버들의 공통점이라면 역시, [폭력의 사슬]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그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 위치도 많이 바뀌었고.

이수한은 어엿한 제작사 사장이자 2 작품을 성공한 감독이 되었고, 경수형은 제작자로서 필모를 쌓아가고 있다. 경력 하나 없던 나는 벌써 드라마 주연배우를 하고 있고.

사람들 변화의 중심에는 [폭력의 사슬]이 있었다.

근황 이야기가 떨어지고, 곧 공유한 추억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경수형 그때 누구 편 들었어요? 스태프랑 단역배우들이랑 싸울 때?"

김범이 윤경수를 향해 물었다.

"나? 당연히 스태프 편들었지. 포스터에 얼굴 잘 안 나와서 그렇지, 붐대(마이크)든거 나야."

"수한이 형은?"

"나는 내 편. 제작비가 날아가고 있는데 누구 편이 어딨냐. 다 패고 싶었지··· 어? 잠시만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야, 김범이랑 이지우! 너희 둘은 그때 왜 거기서 담배 피우고 있었냐? 싸움 말리던가 안 하고."

"저요?”

"나?"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김범이 선수를 쳤다.

"아니, 나는 말리러 가고 싶었는데. 지우가 못 가게 말렸다니까!"

"내가?"

"어! 니가. 내가 초중고 12년, 업계 경력 2년 해서 총 양아치 경력 14년인데, 내가 봤을 때 이지우 이 새끼가 진짜 어마어마한 양아치라니까요. 진짜 사람들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데 나보고 가지 말라고 하면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모여있는 사람을 주욱 둘러보며 반응을 이끌어내는 김범.

"뭐라고 했는데?"

"배우는 몸이 생명이라고. 저거 말리다가 사람 다치면, 나중에 유명해졌을 때 인터넷에 글 올라온다고 말리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안 갔지. 아니 못 갔지. 이지우가 말려서."

뭐지? 이새끼 회피기동 봐라?

"아니 내가 했던 말이랑 뉘앙스가 너무 다르잖아! 촬영하다 배우가 다치면 촬영 못 하니까-"

"와, 이지우 너무했네."

"그렇게 몸 생각하는 놈이 촬영하다가 기절하냐?"

나를 질타하는 사람들 속에서 현주가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엉엉엉, 우리 지우 건드리지 마세요. 우리 지우 약 해요. 맨날 쓰러지고···”

“현주야, ‘약’이랑 ‘해요’는 띄우지 마. 이상하게 들리잖아. 그리고 한 번밖에 안 쓰러졌어. 술 좀 그만 먹고.”

“젊은 녀석이 저렇게 약에 빠져서는···”

“현주야 발음 좀··· ‘약에 빠져서’가 아니라 ‘약해빠져서겠지’. 그리고 나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야.”

내 기억으로 현주의 술버릇이 원래 이렇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업되는 타입이었지, 지금처럼 처지거나 하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환생하고는 현주가 술 먹는 거 몇 번 보기는 했는데, 이렇게 취한 건 또 처음 보네.

하기야 한창 놀 시기인데 매일 같이 글과 마감에 씨름하니 스트레스가 쌓였겠지.

몇 잔 연거푸 마신 현주는 결국 뻗었고, 소파 하나를 치워서 눕히고 담요를 덮어두었다.

술자리도 마무리되어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이수한과 나만 제정신으로 뒷정리하고 있었다.

정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이수한이 물었다.

“대리 불러서 갈 거야?”

“글쎄··· 현주 대리 불러 가기도 힘들 것 같은데? 현주 업고가다가 사진이라도 찍히면. 좀 그래. 아무리 공개연애라도···”

“그건 좀 그러네. 그럼 그냥 자고 가.”

“그래도 돼?”

“뭐 어려운 일이라고. 이불이랑 베게 줄 테니까 현주 옆에서 자던가.”

“형은 바로 자려고?”

“아니, 나는 맥주나 한 캔 더 마시면서 만화나 좀 더 보다 자려고. 너 내일 스케줄 없어?”

“스케줄은 아니고, 개인적인 약속 하나.”

이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탠드를 켜고 책상 앞에 앉는다.

나도 바로 눕기에는 애매해서 이수한의 옆에 앉았다. 스마트폰 없으니 심심하네. 현주는 집에다 연락했나 모르겠다. 장인어른 장모님, 걱정하시지 않으려나. 내일 외박했다고 궁디팡팡 하면 어쩌나.

캄캄하고 조용한 만화방.

바로 전에까지 환하게 불 켜고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놀던 게 거짓말 같다. 사람이 확 빠져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내 화실은 더 휑하구나. 여기는 그래도 꾸며라도 놨지. 내 화실은 이젤 몇 개랑 라꾸라꾸 하나가 다니까.

“요즘 얼굴 좋다.”

“어?”

약간 뜬금없는 이수한의 말. 이수한이 만화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얼굴 좋다고. 그냥. 뭘 털어냈는지 몰라도, [악의 기록] 촬영할 때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조마조마했다. 너 언제 쓰러지나 싶어서.”

“그랬나··· 티가 났나?”

“어, 티 존나 나.”

[악의 기록]으로 극에 달했던 트라우마. 터질 듯이 꽉 찬 고름을 짜낸 기분이다. 과거에 묶여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했다. 꾹꾹 눌러담아 왔던 후회와 회한을 터트리고 나서야 현재를 보았다.

“현주가 걱정 많이 하더라. 한편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무슨 말이야?”

이수한은 보던 만화책을 엎어놓고, 뻘쭘한 듯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나도 각본을 쓰고, 현주도 각본을 쓰잖아? 글을 쓰는 사람은, 사람을 본다. 작가라는 사람들은 사람을 관찰하는 게 일인 사람들이야. 나도 [악의 기록]의 끝이 돼서야 니가 보이더라고. 니가 그동안 억지로 밝은척하고 괜찮은 척했다는 거. 그런데 현주가 몰랐을까? 당연히 알지. 다만 니가 말을 안 하니까 물어보지 않았던 거고. 나도 계속 궁금하더라. 니가 뭘 잃었기에 그런 연기가 나왔는지.”

현주가 요새 나만 보면 괜찮냐 호들갑 떠는 이유가 있었네.

현주는 알고 있었네.

내가 잃은 것? 미래를 잃었지.

나는 과거를 현재처럼 사는 사람이니까.

충동적으로 내 비밀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다.

술을 끊기를 잘한 것 같다.

아마도 술을 마셨다면, 다 말해버렸을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참 허술한 양반이, 한 번씩 핵심을 찌른다.

이수한은 딱히 내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던 듯, 다시 만화책을 펼치며 말했다.

“어찌 됐건, 요새는 얼굴 좋아 보여서 안심된다. 그래서 현주도 좋아하더라고.”

“다 괜찮아 졌어. 아동극 하면서 재충전도 했고. 고마워 형.”

잠시간 이수한의 뒷모습을 보다 나도 잠이 들었다.

***

다음날. 현주의 정신 줄을 붙잡아놓고, 숙취 음료 먹이고, 해장시켜서 집으로 보내고, 나는 내 개인적인 일을 하러 왔다.

이게 일이라고 하면 일인데, 또 취미라고 하면 또 취미가 되는 그런 일이다.

고아원 봉사활동

이정건이랑 연탄 봉사활동 한 다음, 봉사활동도 좀 취향에 맞춰서 해야겠다 싶어서 선택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 이정건이 빠질 수 없지.

내 소개로 한번 온 뒤로는. 나보다 보육원 원장이랑 더 친한 눈치다.

애들 점심 먹이고, 식판 150개의 설거지까지 끝낸 다음 이정건과 나란히 앉았다.

“야, 너 기부 좀 했냐? 너 올해 [폭력의 사슬]투자금이랑, 광고랑 이것저것 많이 하지 않았나? 내년에 세금 폭탄 맞기 싫으면 알아서 기부 많이 해놔라.”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알고는 있었지만, 그동안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이다.

소득이 많을수록 세금을 많이 떼는 건 당연한 거다. 어차피 낼 세금, 기부하면 그만큼 세금에서 공제된다. 연예인 같이 이미지가 중요한 직업은 보여주기식으로라도 기부를 많이 하는 편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꼭 이미지 때문은 아니더라도, 많이 할 생각이었다.

“너 이번에 드라마, 종편꺼 들어간다며? 축하한다. 첫 주연.”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아직 보도 안 나간 걸로 아는데.”

“어? 어쩌다 보니. 우리 매니저가 알려주던데?”

확실히, 이정건이 소속해 있는 회사가 정보력이 좋다. 검찰 내부에서 병역비리 조사하는 것을 알고 내게 귀띔해줬던 것도 이정건이였었다.

“선배님은 차기작 안 들어가시나요?”

예의상 한 질문이었다. 이정건이 뭐가 아쉬워서 작품 텀을 그렇게 타이트하게 잡겠나. 이번 [악의 기록]의 성공으로 ‘바른생활 사나이’ 이미지까지 털어냈는데. 아마 모르긴 몰라도 섭외 엄청 들어갔을 거다. 광고 몇개 찍으면서 원하는 배역 들어올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도 전혀 아쉬울 게 없을 것이다.

“나? 나도 이번에 드라마 들어가. 전미도 작가. SBC.”

“축하합니다! 언제 방영됩니까? 본방송 사수 할게요.”

“못할 껄?”

“네?”

“[응답하라 119]랑 같은 시간대거든.”

뭐지 이 선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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