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두 번
그제야 방금 내가 응급조치를 중년의 여성이 브라운관에서 자주 보던 그 중년의 배우라는 걸 기억해 냈다.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더라. 이 추형섭이라는 캐스팅디렉터도 아마 방송생활 하면서 오며 가며 한 번쯤 봤던 것 같다. 예전에 내가 거절했던 다른 드라마 캐스팅 건으로 지나치듯 만났었다. 이름이나 경력, 그런 건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얼굴만 아는 그런 사람.
그런데 분명 내 기억으로 [응답하라 119]의 주인공 어머니역은 최지연 씨가 아닌 다른 분이 맡았었는데.
"최지연 선배님이 주인공 어머니 역을 하시는 건가요?"
"네? 아뇨. 아직 확정 난건 없어요. 이래저래 공은 들이고 있는데, 최지연 씨가 요새 사업 때문에 너무 바빠서 힘들다고만 하시네요. 사실 최지연 씨랑 저랑 좀 개인적인 친분이 있거든요. 오늘도 그래서 만나기로 한 거고요.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 좀 꺼내보려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네요."
개인적인 친분까지는 크게 궁금하지 않았고, 주인공 어머니 역에 최지연이라···
확실히 잘 어울린다. [응답하라 119]의 일상파트는 시트콤적인 재미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 점에서 예전이긴 하나, 시트콤에서 어머니 역을 몇 번 하셨기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트콤뿐만 아니라 정극, 사극을 가리지 않고 많은 배역을 거친 최지연 선배님. 아니 저 정도 연배면 선생님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배우지.
경력이나 커리어 모든 면을 봤을 때, 사실 바쁜 시간 쪼개서 종편 드라마에 고생하러 올 레벨은 아니었다.
최지연 씨라면, 방송경력이 몇 년인데. 대충 어림잡아도 데뷔하신 지 40년은 되셨을 거다.
연기를 잘하시는 노 배우는 언제나 귀하다. 연기를 잘하시는 노 배우들은 대게 손주랑 놀다가 심심할 때 연기를 한다거나, 연기에 대해 열정이 가득하지 않은 이상 배역에 적극적이지 않다.
내가 한창 연기를 할 때에는 최지연 씨가 뭘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지금 기준 몇 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시어머니, 어머니 등의 역할 위주로 비중 있게 출연하시던 분이다. 배역 자체가 조연이라 그렇지, 연기력은 뭐 말할 것도 없고. 대중에게도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널리 알려진 배우.
지금 당장 공백기가 몇년 되는 걸로 알지만, 수십 년 연기를 노배우에게 최근 몇 년 정도의 공백이 무슨 큰 문제이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지우 씨, 미안한데 제가 지금 최 선생님 가족분들이랑 매니지에도 연락을 드려야 하고, 차 끌고 최 선생님 병원도 따라가 봐야 될 것 같거든요. 다음에 좀 더 이야기합시다. 앞으로 볼일 종종 있을 거예요"
그렇게 추형섭 캐스팅디렉터의 공치사를 몇 번 더 듣고 현주가 있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생명이 오가는 긴박했던 순간의 긴장감과 떨림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겨우 현주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후··· 진짜 놀랬다. 무슨 이런 일이 있냐."
"그런 건 언제 배운 거야?"
"뭐? 어떤 거?"
"방금 그거. 심폐소생술, 응급처치?라고 하나? 방금 진짜 의사 보는 줄 알았어."
현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묻는다.
"아··· 그거? 오늘. 나 다음 드라마 들어가는 거 말해줬지. [응답하라 119]라고. 구조대원 역할이라 카메라에 나올 때 좀 어설프게 나오면 안 되잖아. 그래서 오늘 구급법 조금 배웠지. 오늘 배운 걸 오늘 바로 써먹네."
"와, 무슨 그런 우연이있냐. 저분 오늘 죽을 운명은 아니었나 보다."
"그러게, 허 참. 이런 일이 다 있네. 새삼 소방관님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 그 상황에서 진짜 오만 생각이 다 들더라. 이분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거면 어떻게 하나. 부담감이 진짜 엄청나네."
"연기 처음 하는 사람도 비슷한 걸 느낄 걸. 수십 명이 바라보는 현장. 조명 카메라. 거기에다가 방영이나 상영하면 수십 수만 명이 그걸 볼 거 아니야. 나도 니가 연기하는 거 보면 그런 생각 똑같이 들어. '저걸 어떻게 하나?' 하고 말이야."
"후하-"
긴장감을 털어내기 위해서 한 번 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미세하게 손끝이 떨린다. 그리고 숨이 터질 때의 느껴졌던 바람. 그때의 감각이 정말 인상 깊었다. 긴장감과 안도감. 알 수 없는 충만감.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감정의 복기를 계속하던 와중.
그때 우리 테이블로 레스토랑의 매니저? 혹은 관리인급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손님. 감사합니다. 저희 가게에서 성의 표시를 조금 해드리고 싶은데 샐러드와 와인을 서비스로 드려도 될까요?"
내가 누군지 충분히 알지만, 굳이 아는 체를 하지 않는 모습. 확실히 비싼 레스토랑답게 서비스 스탠다드가 잘 잡혀 있는 느낌이었다.
"아뇨, 차를 끌고 와서요. 와인은 괜찮고, 샐러드만 추가해 주셔도 됩니다."
원래 시킨 메뉴에다가, 서비스된 샐러드. 거기에 와인 대신 받은 요리까지.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뷔페에서 먹는 것처럼 폭식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저 하고, 간단하게 나온 디저트를 먹을 때 쯤 이었다. 현주는 치즈 케이크. 나는 초콜릿 무스케이크.
"나 요즘 새 글 쓰고 있어."
"어? 어떤 거? 글이야 항상 쓰고 있지 않나?"
"그렇긴 한데, 완전 새로운 작품이야. 그동안 항상 다른 각본 각색하거나, 아니면 보조작가로 활동한 거잖아.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도 결국엔 원작이 존재하는 거였고. 이번엔 완전히 내 작품 쓰고 있어."
먹던 조각케이크을 내려두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현주의 작품··· 내게는 중요하다. 인제 와서는 단순히 여자친구의 작품이라서가 아니다.
[악의 기록]을 하면서 나름 느낀 게 있다. 스스로 한계를 자각하게 됐다고 할까. 몰입으로 망가지는 연기의 벨런스. 그리고 정신.
지나친 몰입으로 합의되지 않은 즉흥연기가 나왔다. 전생의 나였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연기였다. 만약 그 당시 상대 배우가 예기성 선생님과 이정건이 아니었다면, 큰 사고가 있을 수도 있었다. 혹은 김수한이 아니었다면 촬영분량을 통째로 날렸을 테고.
영화 촬영 막바지에 주연배우가 병원 실려간다면, 촬영은 중지되고 개봉은 연기되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스태프와 배우들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어졌을 일이었다.
그리고 지독한 감정적 후폭풍. 촬영하는 내도록 내가 '강현수'인지 '이지우'인지 헷갈렸다. '강현수'의 심리적 충격이 리테이크 할 때마다 내 정신을 괴롭혔다. 감독이 '액션'이라는 소리를 할 때마다 가족을 잃는 기분이었고, 복수에 눈이 먼 괴물이 되는 듯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이 된듯한 몰입에서 나를 잊지 않게 해준 작품이 있다.
바로 현주가 각본에 참여했던 작품들.
[폭력의 사슬], [민주를 기다리며], [저승 카페].
완전한 몰입. 그러면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게 해줬던 대본이었다. 세 작품을 작업하면서 느꼈던 완전한 몰입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현주가 나를 생각하고 쓴 글이라서 일까. 혹은 내가 현주를 아는 만큼 현주의 생각이 느껴져서일까.
나 스스로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다는 자각 없이도 만족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었다.
메소드 연기와, 분석적 연기를 나눠서 하던 이전의 연기법과는 차원이 다른 연기였다.
오롯한 현주의 작품.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작품인데?"
"화가. 화가가 주인공인 영화야."
이 역할은 내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직감 들었다.
***
기억 속에서 '최지연'란 이름도, 레스토랑에서의 사건도 희미해질 때쯤 이었다.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의 서울 막공.
장장 2달에 걸친 서울 공연이 끝났다. 일주일 휴식기 후에,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전국 투어가 예정되어 있고.
그간에 나는 새로 들어온 배우에게 '피코'와 '졸개1'의 배역을 인수인계했다.
김범은 주연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아니 장악했다.
머리에 빈 곳이 많아서 그런가, 진짜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아니면 공연 첫날 교통사고에 머리를 다쳐서 그럴 수도···
연기가 말도 안 되게 늘었다. 내 개인적으로 연기는 기술적으로 해야 하고, 기술은 훈련을 통해서 발전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김범의 발전 속도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아마도 공연 이후에도 연습량이 상당할 거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거든. 보통 공연 직전까지 맹연습하는 배우들도, 공연 일정이 일단 시작되면 해이해 지기 마련이다. 일단 공연만으로도 피곤하니까.
그런데 지금의 김범의 발전속도를 보면 공연 이후에도 연습량이 상당하다고 봐야 한다.
여이수와의 케미도 훌륭하다. 공주님과 공주를 지키는 용사. 그 배역에 딱 맞는(?) 케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사랑과 존경이기보다, 폭력과 공포에서 나오는 케미이지만.
뭐 아무튼. 숭배의 이유가 다르다 해도, 보이는 사람한테는 비슷해 보이니까.
그렇게 서울 공연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응답하라 119]의 준비를 할 때였다.
소속사와 계약할 때 최대한 버라이어티 쇼 프로나 토크쇼 프로는 섭외 자제해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그래서 영화 홍보라 할지라도, 그런 쪽 방송은 안 나가는 중이었다.
청운 엔터태인먼트도 지금 당장은 내가 아동극에 출연하는 것을 숨기고 싶어 했기에 그런 프로를 강하게 권유하지 않았다.
덕분에 대본분석, 캐릭터 분석. 그리고 UDT 전역자와의 인터뷰. 구급대원들과의 인터뷰 등등을 하며 여유롭게 준비 중이었다.
[응답하라 119]가 4월 방영예정이고 편성확정이 되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내 휴대전화기가 잘 울릴 일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친분이 있는 배우들이나 스탭들이 많은것도 아니고. 데뷔 2년 차기에 아는 감독이나 PD가 없기에 개인적으로 배역제안이 들어올 일도 없다.
광고나 대부분의 배역 제안은 회사로 들어간다. 친한 몇몇 배우들은 다 전화번호가 저장되어있다. 그만큼 연락을 올 일도 드물다.
살짝 의아한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올 일도 잘 없는데, 모르는 번호라.
"여보세요? 이지우입니다."
-안녕하세요. 일전에 신세 졌던 최지연입니다. 연락이 너무 늦었죠?
최지연이라는 이름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떠오르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레스토랑, 심폐소생술··· 아! 그제야 내가 누굴 구했는지 생각이 났다.
그나저나 최지연 씨의 캐스팅이 완전히 무산되고 다른분 물색 중이라고 얼핏 들었던 거 같은데.
"아! 최지연 선배님. 안녕하세요. 말씀 낮춰 주세요."
-감사인사를 하고싶은데. 전화로 하긴 좀 그렇고, 한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네. 제가 선배님 쪽으로 가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나이 차이가 큰 후배를 대한다기에는 더없이 정중하다.
그런 것과 별개로 사실 좀 귀찮다.
나보다 연차가 낮거나, 나이라도 어리면, 정중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괜찮다고, 누구나 그 상황이었다면 나와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고 말이다.
대외적으로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에 내 출연사실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 내가 작품을 들어가는 텀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짧다. 다음 작품인 [응답하라 119]를 준비하기에도 부족한 시간.
하지만 상대는 40년 경력의 노배우다. 선배에게 예우를 안 할 수도 없고, 만남을 거절하기에는 명분도 없었다. 좋은 뜻으로 보자고 하는 까마득한 선배에게 귀찮다고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게 해서 바로 약속을 잡고 최지연 씨를 만나러 갔다.
청담동의 한 브런치 카페. 약속시각에 20분 정도 일찍 와서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최지연 씨도 약속시간 10분 전에 도착해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다른 한 손에는 커다란 보자기가 들려있었고, 나는 그것을 들어주기 위해서 다가갔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지우 씨, 반가워요."
인사를 하며 그녀의 손에 든 보자기를 들어 드렸고, 그녀도 화답하며 건넸다. 내가 앞장서서 미리 자리 잡은 자리로 그녀를 안내했다.
"연락이 많이 늦었죠?"
"아뇨. 전혀요."
앉은 자리에서 마주하니, 곱게 늙은 느낌이다. 다른 뜻이 아니라, 진짜 점잖고 고상한 느낌으로 늙으셨다는 말이다.
젊었을 때 미녀 배우로 활동한 배우가 늙었을 때의 모습. 그 전형적인 모습이랄까.
말투와 행동이 브라운관을 통해서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연기 경력이 긴 만큼 여러 배역을 하셨고, 최근에 많이 맡은 역할은 어머니 혹은 시어머니 등의 배역 등이었기에 생긴 괴리였다. 실제 모습은 좀 더 고상하고 품격있는 느낌이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네. 덕분에요. 정말 덕분에 괜찮아 졌어요. 그거 선물이에요. 홍삼 즙. 따로 사례하겠지만, 그래도 이 자리 나오는데 빈손으로 올 수가 없어서 주문했어요. 날씨 추워지는데 꼭 챙겨 먹어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공치사라 생각됐다. 뭐 목숨을 구해 드린 건 맞지만 홍삼 즙에 더해 따로 사례까지야.
내가 요새 구급대원을 조사하면서 그런가. 당연한 일을 하고 사례받는 느낌이었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면, 능력이 있다면 똑같은 행동을 했을 거다.
"이지우 씨가 제 목숨을 두 번 구했더라고요."
"네? 두 번이요?"
나도 모르게 마시려고 들었던 커피를 그대로 내려 두었다.
앞뒤 자르고, 다소 뜬금없는 그녀의 말. 두 번이라니?
"지우 씨가 응급조치 잘해준 덕분에 병원에서 간단한 검사만 하고 나왔거든요. 그런데 검사 결과가 안 좋으니 종합검진을 잡아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대장내시경 간에 용종을 하나 땠는데··· 조직검사 해보니까 악성이라고 하더군요."
그녀의 말을 처음에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대장내시경 간에 용종··· 그리고 악성.
아마 20살의 나였다면 저게 무슨 말인지 몰랐을 거다.
그리고 40대 중반인 나는 저게 무슨 소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대장암이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났다.
최지연 씨는 원래 대장암으로 죽을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