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혼난다
시사회가 끝나고 다음날. 내 입장에선 [벡터맨 :카오스의 비밀]의 첫 공연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이른 아침잠에서 깨기도 전에 예기성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낚시나 하러 가자.
짧은 한마디. 재빨리 오늘 스케줄을 떠올린 뒤, 바로 새로 이사한 집의 주소를 문자로 찍어 보내드렸다.
이제 선생님 스타일이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낚시도 하실 줄 모르는 선생님께서 매번 낚시를 가자고 하는 이유도 조금 알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혹은 어제 시사회에 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 혼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항상 배우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분이니. 그리고 그 어떤 배우들보다 솔선수범하는 분이기도 하고.
예기성 선생님의 눈높이에는 시사회에 불참한 내 모습이 오만해 보였다 하더라도 할 말 없었다.
그리고 예기성 선생님께서 계시는 자리에 내가 안 나간 게 큰 실수이긴 했다. 이 부분은 내가 선생님께 따로 문자도 보냈고, 장인호 사장도 따로 예기성 선생님에게 말씀드렸다고는 했지만 바쁘다 보니 못 챙긴 부분이었다.
아침에 예기성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생각난 게, 전화를 드리거나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였으니까.
조용히 씻고 집을 나서려는데, 어느새 방문을 열고 어머니가 나오셨다.
"꼭두새벽부터 어디 가니?"
"예기성 선생님께서 오랜만에 낚시 한번 가자고 하시네요."
"아··· 잠시만 지우야."
그러더니 어머니는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한 김치 냉장고 한쪽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내시는 것이었다.
"이거 들고 가. 선생님 가져다 드려. 항상 감사하다고 인사 좀 전해주고."
"네? 이게 뭔데요?"
"김치랑, 젓갈이랑 좀 담았다. 내가 뭐 선생님께 드릴 게 있겠니. 이거라도 가져다 드리렴."
"아··· 네. 알겠어요. 얼른 들어가서 더 주무셔요. 아직 해도 안 떴네."
곱게 보자기에 싼 음식들. 미리 준비해 둔 것인지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하기사. 내가 소속사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하고, 걱정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예기성 선생님과 같은 소속사라 말하고 어머니를 안심시켰으니까.
아파트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몇 분 지나지 않아 예기성 선생님의 차량이 내려왔다.
내가 타자마자 예기성 선생님은 곧바로 출발했다.
예전과 같이 예기성이 직접 운전하여 도착한 곳은 예기성과 몇 번 방문했던 경기도 외곽의 낚시터였다.
라면을 끓이고, 먹고.
커피를 끓이고, 마시고.
이전 경수형에게 배워둔 낚싯대 조립법을 기억해내어, 선생님과 내 낚싯대 세팅을 했다.
그렇게 낚시를 모르는 두 낚시꾼은 자리에 앉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지우야."
"네 선생님."
"김치 맛있더라."
"어머니께서 선생님 드시라고 좀, 싸주셨어요. 가실때 들고가셔요."
"감사하다고 전해주렴."
그러곤 또 한참 말이 없으신 예기성 선생님.
"현주 양이 이번에 연극 하나 올렸다지? 너도 이번에 첫 연극 무대 섰다고 들었다. 그것 때문에 시사회 못 왔고."
"네 맞습니다. 선생님 죄··· 송합니다."
그가 연극 이야기를 하자 올게 왔구나 싶었다.
"배우가 연기했는데, 그게 뭐가 죄송해. 마케팅이니, 기획이니, 그런 건 장 사장이나 배급사가 하는 거고. 배우는 연기를 해야지. 잘했다."
"...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사회 불참을 따로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 없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오늘 너를 부른 이유는 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시는 걸까.
"너 그렇게 연기하면 혼난다."
"네?"
너무나 뜻밖의 말에 놀랐다.
"참··· 처음 연기하는 것을 봤을 때는 너무 기술적으로만 해서 문제더니, 이번에는 너무 캐릭터에 몰입해서 문제야. '강현수' 캐릭터에 너무 몰입했지? 그래서 현실과 연기가 헷갈렸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니가 캐릭터를 잡아먹어야지, 캐릭터한 테 잡아먹히면 어떻게 하니."
이건 좀 아픈데.
연기에 관한 조언. 틀린 곳이 없었다. 따로 변명할 것도 없이 정확하게 보셨으니까.
내가 아픈 이유는 저 '혼난다'라는 말 때문이었다.
혼난다···
혼난다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초등학생 때였다. 아니 국민학교였던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와중 명칭이 바뀌어 초등학교 바뀌었기 때문에 기억이 정확지 않다.
어쨌든, 친구와 싸웠다. 뭐 때문에 싸웠는지 기억은 나질 않는데 꽤 격렬했던지, 나는 코피가 나고 그 친구도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
결국 담임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교무실에서 벌 서며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때 그 친구의 아버지가 먼저 오셨다.
친구의 아버지는 담임 선생님 앞에서 그 친구를 다그치고 혼냈다.
그리고 친구를 데려가는데 교무실 창밖으로 친구 부자가 교문을 나서는 모습을 봤다.
친구의 아버지는 친구를 업고 가고 있었다.
멀리서 보는 그 모습이 그렇게 다정해 보일 수 없었다.
한참을 늦게 온 어머니의 손에 끌려 집에 도착해서 어머니한 테 혼났을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허함, 허전함, 느꼈던 거 같다.
어머니를 원망하는 게 아니라, 내가 없는 게 정확하게 뭔지를 알았다고 할까.
예기성 선생님에게 '혼난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초등학교 때의 기억이 올라왔다.
분명 잘못을 탓하고, 연기방식을 문제 삼고 있었지만, 그 기저에 깔린 따스함이 있었다. 심지어 내가 연기한 다른 작품까지 봤음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나도 안다. 몸이 20대라고 내 정신이 20대가 아니지 않나. 예기성의 의도를 모를 만큼 어리진 않다. 배역에 몰입해서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배우들이 얼마나 많고, 공황장애, 우울증 달고 사는 게 배우의 숙명 아니었나. 실제로 그 당시 나는 위태롭기도 했고.
내가 [악의 기록] 마지만 촬영때 사전에 상의도 하지 않은 애드립을 한 거나, 그러다 쓰러진 것. 모두 지나친 몰입 탓인 부작용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본 사람이 예기성 선생님이다. 혹시라도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그런 부분을 조심하란 이야기겠지.
그 '혼난다'라는 말에 담긴 따뜻한 감성이, 다 큰 어른을 울렸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연기 잘했어. 영화도 잘 나왔고. 죄송하고 말 고의 문제가 아니잖니. 그런데 지우야 연기 오래 해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감정도 소모적인 거고 많이 쓰면 그만큼 지치는 건데, 그렇게 몸을 혹사하다가 마지막 촬영 때 병나지 않았니··· 지우야, 지우야? 너 우니?"
"쓰읍. 아뇨. 괜찮습니다."
나도 모르게 훌쩍이며 코를 마시고 말했다.
참··· 예기성 선생님은 뭔가 그런 게 있다.
마흔 중반인 내 나이를 잊게 한다.
정신은 40대라도, 감성은 20대인지 저 '혼난다'라는 말에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허허, 다 잘하는 줄 알았던 지우가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네. 잘하고 있어. 괜찮아. 대신, 몸 생각 하면서 하자. 우리 직업은 몸이 생명 아니니."
"네. 잘하겠습니다.
처음이었다.
뭔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느낌.
이번 생을 시작하고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 살아가기로 했고, 연기는 그 수단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다른사람에게 내가 이 정도가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어졌다.
당신이 걱정하는 그런 것 아니라고. 당신이 봐왔던 많은 배우와는 난 다르다고. 훨씬 잘할 수 있다고 말이다.
코를 훔치는 척하면서 맺힌 눈물을 닦고 다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하겠습니다."
***
[[악의 기록], 개봉 첫날 관객 스코어 33만 명. 역대 청불영화 최고 흥행 성적]
[[악의 기록], 개봉 첫주 전국 관객 수 150만 명 들어. 역대 청불영화 사상 최고기록]
[[악의 기록], 개봉 22일만에 관객 수 500만 명 돌파!]
[청불 영화 최초 천만 관객 영화 가시권]
청운 엔터테인먼트 사장실.
장인호 사장은 출근하자마자 신문의 연예란을 훑었다.
보기만해도 배가부른 기사들이었다.
청운 엔터테인먼트는 요즘 날마다 잔칫집 분위기이다.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은 매 공연 매진하며 순항하고 있었고, 소속 배우인 이지우와 예기성이 찍은 영화 [악의 기록]이 대박이 터지면서 정신없이 바빠졌다.
특히 이전에 찍은 커피 광고는 아주 노가 났다고 했다. 이지우 예기성이 동시에 출연한 광고가 아직도 티브이에 나오는데 거기에 [악의 기록]의 흥행까지 터져버린 것이다.
이로서 예기성 배우의 커피광고 재계약도 문제 없을 것이다.
이지우도 이번 배역 이미지가 너무 강하기에 당장은 광고가 안 들어오고 있다. 하지만 배우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기에 차기작 선택만 잘한다면 한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인호 사장은 걱정되었다.
이 모든 화제의 중심인 이지우가 연극을 한다고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주연 배우면 말을 안 한다. 조연, 그것도 가면탈을 쓰고 나오는 조연이다.
조연 역을 하면서도 가장 먼저 출근해서 마지막 뒷정리까지 손수 하는 모습. 그런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면서도, 한창 영화 홍보와 활동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 얼굴도 안 나오는 연극을 하고 있으니 장 사장 입장에선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지우가 연극을 하고 있다고 공개할 수도 없다. 회사의 투자금으로 진행되고 있는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의 흥행에 악영향을 미칠까 공개도 못 하고 있는 실정.
장인호 사장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지우를 회사로 불렀다.
"지우야, 연극도 좋지만··· 뭐 회사가 추진하는 일이고. 니가 기획부터 맡아서 하다 보니 애착이 가는 건 알겠는데··· 일 좀 하자 응?"
"일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인형 탈이 얼마나 더운 줄 아십니까? 그거 쓰고 춤추면 죽어요. 이 정도면 열심히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장인호 사장은 내 앞으로 서류 뭉치를 탁하고 내렸다.
"이게 뭔지 아냐?"
"뭡니까?"
"그동안 니 앞으로 온 시나리오랑, 드라마 기획서."
"와, 그동안 현주랑 짝짜꿍 맺고 절대 안 보여 주시더니 많이도 모으셨네요."
"이것도 상대 쪽에서 홀드 잡아준 것만 이 정도야. 시기가 촉박한 건 아예 다 빼버렸으니까. 원래 이 두 배는 됐을걸. 서울 공연 아직 한 달 남았는데, 서울공연까지만 끝나고 지방 공연은 다른 배우 구하자."
차기작이라···
나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현주에게도 이미 말해 놓은 상태이고.
이미 공연은 완벽하게 자리 잡은 상태였다. 공연 회차가 진행될 수록 완성도가 올라가는 연극 특성상, 이미 공연은 내가 더 손댈게 없을 정도로 잘 돌아가고 있었다.
일단 여이수가 완전하게 폼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완전체 여이수를 필두로 연극팀 전체가 똘똘 뭉쳐 매 공연을 올라가고 있었다.
뭐, 여이수 한 테 맞기 싫으면 해야지. 어쩌겠나.
그리고 각성체 김범까지. 이번 연극에서 가장 발전한 건 김범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연습 때와는 전혀 다른 퍼포먼스를 공연에 보여주고 있었다.
확실히 김범은 실전파다. 공연 회차가 진행될수록 발전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 개인적으로도 예기성 선생님과 약속한 것도 있고··· 빨리 연기를 하고 싶었다.
"정 연극이 하고 싶으면, 제대로 하던가. 우리 회사 연극 아니더라도, 다른 배역 알아봐 줄게. 당장 주연급까지는 힘들더라도···"
"아뇨. 연극은 충분해요."
개인적으로 이번 아동극으로 연극 연기에 대해서 전생의 한을 푼 느낌이다.
그럼에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현주의 작품이기도 하고, 내가 춤추고 노래하면, 아이들이 웃으니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게 내 나름대로 무너졌던 내 일상을 치료하는 기분으로 하는 중이었다.
"그럼 딱 서울 막공(마지막 공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차기작은 빠르게 잡는 걸로···"
"안 그래도 생각해 둔 작품 있어요."
"어? 어떤 작품."
"잠시만요."
이미 어떤 작품을 할지는 고민을 끝마쳐 놓은 상태였다. 어떤 작품이 흥행할지 알기에 오히려 선택권이 좁았다.
내 앞에 놓여있던 서류뭉치를 뒤져서 내가 원하는 작품을 찾았다.
내년 봄에 방영되는 작품이니, 잘하면 나한 테도 왔겠다 싶은 작품.
내 나이대와 잘 맞으면서, 확실하게 흥행할 수 있고, [악의 기록]에서 연기했던 강렬함을 희석할 수 있으며, 연기의 깊이와 폭 모두를 어필 할 수 있는 작품.
"어! 있다!"
한동안 내 개인폰으로 전화를 줄기차게 하더니. 회사로 미리 기획서를 보내놨었다.
[응답하라 119]
본격 일상 힐링드라마의 성공을 알리는 작품.
원 역사대로라면 케이블 TV 드라마가 지상파 드라마를 상대로 하여 유의미한 성적을 낸 최초의 드라마.
유류상종 콤비의 대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