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엄한 아버지도, 자상한 어머니도 없었다
서병수 감독은 지금 상황에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분명 잘한다고 생각했다. '졸개1'과 '피코'라는 배역 자체가 극의 중심과는 거리가 먼 배역. 그럼에도 여러 배우 중에서 튄다고 생각했다.
영상연기를 하다가 연극판에 오는 사람이 하는 실수. 예를 들어 표정이나 감정연기는 충실하지만, 분할된 화면이 아니라 몸 전체가 나온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해 나오는 실수들. 이지우는 그런 실수가 전혀 없다.
연습 때 '졸개' 와 '피코' 두 배역을 바꿔서 할 때마다 걸음걸이부터 손짓 하나까지 모두 바뀌는 이지우를 보고, 참 잘한다고 생각했다.
연극이 처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이 어떻게 관객에게 비칠지 정확하게 아는 움직임이었다.
'벡터맨 타이거'의 연기··· 처음엔 가능할까 싶었다.
연기력이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인 시간 자체가 부족하기에.
그럼에도 이지우가 할 수 있겠다는 말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감독은 책임을 지는 위치이고, 그 순간 가장 간절해야 하는 것은 서병수 본인임에도, 더 간절해 보이던 이지우의 눈빛.
자신이 투자한 돈이 생각나서 저러나?
여자친구의 첫 연극을 망칠까 봐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오로지 연극의 퀄리티를 위해서 투자금을 무대장치에 쏟고, 배우들의 보장게런티를 주장했던 이지우였음을 기억해 냈다.
지금 이지우의 눈빛은 그런 의미가 아녔다. 조금 더 좋은 배역을 얻기 위해 애쓰는 배우들의 눈빛을 자주 보지 않았던가. 이미 영화계에서 탄탄하게 커리어를 쌓아 올리고 있는 배우가 보일 법한 눈빛은 아니었다.
배역을 욕심내고 원하는 배우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서병수 감독은 그 간절함에 넘어갔다.
반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올린 무대. 이런 식으로 배우를 쓰는 것은 정상적인 감독이라면 하지 않을 일이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큰 사고나 실수가 발생하여 연극을 망치게 되면, 서병수 감독의 커리어에도 지장이 생길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아동극이 다른 연극에 비해서 난도가 떨어진다 해도, 이 아동극이 보통 아동극인가. 일본에서 수입한 특수효과 장비가 대거 투입되었고, 거친 액션까지 포함되어 동선의 복잡함만 따지면, 대규모 뮤지컬에 못지않다.
플롯이 단순하다고 연극마저 단순하지는 않다는 의미다.
서병수 감독은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극을 관람했다.
부디 큰 사고만 없이 넘어가 달라고, 믿어본 적 없는 신에게 빌었다.
막이 오르고, 시작된 연기.
불안했던 서병수 감독의 마음과 달리 매끄럽게 진행되는 오프닝.
그리고 원래 저 배역이 저 배우의 것인 마냥 자연스럽게 '벡터맨 타이거'를 연기하는 이지우.
그 연기는 완숙한 주연 배우의 연기였다.
안정된 발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대사와 감정 전달. 몸의 언어로 표현되는 상황의 묘사까지.
기쁜 듯이 화답하는 어린 관객들. 그 솔직함 만큼 반응 또한 극적이다. 꾸밈없이 즐거움과 기쁨을 마음껏 표현하는 어린아이들.
연극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의 환호성이 공연장을 가득 메운다.
그 함성에 맞춰 서병수 감독은 맥이 '탁' 하고 풀려버린다. 혹여나 사고가 생기지 않을까 긴장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환호에 화답하는 이지우라는 배우. 일부러 분장(벡터맨 슈트)를 갈아입지 않고 무대 아래까지 내려와 아이들 한 명 한 명 챙기며 사진을 찍어준다.
활짝 웃으며 퇴장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서병수 감독은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연극을 무사히 끝내서 드는 안도감이 아니었다. 연극이 생각보다 훌륭해서 드는 충만감도 아니었다.
선배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시작했던 아동극. 그리고 큰 기대 없이 자신의 할 일만 하자는 식으로 참여했던 지난날의 후회였다.
"엄마엄마, 우리 이거 또 보러오자."
"아빠, 나 '벡터맨 타이거' 칼 사줘! '벡터맨 타이거'가 짱세!"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아이들.
연극에 빠진 건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여보 괜찮았지?"
"어! 너무 좋던데? 뮤지컬 처음 보는데 와, 이거 영화나 드라마랑은 차원이 다르네."
"여보··· 당연히 차원이 다르지, 2D와 3D잖아."
"아하!?"
서병수 감독은 새삼 아동극에서 매력을 느꼈다.
그것도 한 배우의 연기 때문에 말이다.
서병수 감독과 같은 전문가도 아동극에 다시 빠져들게끔 하는 연기. 일반인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새롭게 연극의 매력을 알아가는 아이들의 엄마 아빠를 보고 서병수 감독은 생각이 많아졌다.
아동극 전문 무대감독.
서병수 감독은 꿈이 생겼다.
***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은 주 4일 공연이다. 화, 목, 토, 일. 그 중 토, 일은 하루에 2번씩 공연이고.
한 배역으로 같은 연기를 수십 번 반복한다는 이야기다.
리허설을 아무리 해봐야 실제 연극에 한 번에 비할 수 없다. 그렇기에 첫 공연이 중요하다.
첫 공연이 무사히 끝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실제 공연 회차가 쌓여, 배우들도 여유를 가지고 무대에 임할 수 있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성황리에 끝난 첫 공연.
스태프와 배우들 사이에서 자잘한 실수가 터졌지만, 관객의 관람에 영향이 갈만한 실수는 없었고, 신인배우들의 비중이 높았던 공연치고는 비교적 무난하게 공연이 끝났다.
나도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공연이었고.
만화 주제가를 그대로 사용한 엔딩곡. 어린 관객들이 다 같이 부르며 호응해 줄 때는, 이래서 가수들이 공연을 하는구나 싶을 정도의 감동이 있었다. 만연한 웃음을 띠고 솔직하게 즐겨주는 관객들이 고마웠고, 그보다 더한 감격이 있었다.
[악의 기록]이 얼마나 힘들었었나. 누구에게도 말 못할 내 과거를 들추는 '강현수'라는 역할은 나 스스로 족쇄를 만들었다. 자신을 스스로 학대하듯 나를 몰아붙여야 잠들 수 있는 나날이었다. 죄책감이라고 해도 좋을 그 감정들.
아이들이 웃는 모습으로 퇴장하는 모습을 보며, 그 죄책감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최소한 위로는 되었다. 좀 더 연기를 할 수 있는 힘을 얻은 느낌이었다.
공연의 뒷정리까지 끝나고 이어진 회식.
첫 공연 후 회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 성공적인 첫 공연을 기념하여, 채 실장은 서병수 감독에게 회사 법인카드를 넘겼다. 장 사장은 오늘 일이 바빠 참석하지 못하지만, 소고기 사 먹으라고 했다고 한다.
장 사장이 급하게 회사로 간 건, 아마도 아동극에 대한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겠지. 김범의 사고로 내가 대타로 들어갔고, 그쪽 방면으로 혹여나 기사가 터질 수도 있으니까.
'벡터맨 타이거'는 아이들이 좋아하고 우상처럼 여기는 캐릭터이다. 그런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영화에서 연쇄살인범의 배역을 맡아 칼질하고, 총질한다면 부모로서 충분히 주저되지 않겠나. 내가 아기 아빠라도 찝찝할 것이다. 애들이 보고 말 고의 문제라기보다, 이미지의 문제니까.
나도 공연 후의 여운을 느끼며 함께 호흡했던 배우들과 함께 자리했다. 김범도 부상이 크지 않아 회식자리에 참여했고.
"자자, 잔들 채워 주세요!"
고기가 어느 정도 구워지자, 서병수 감독이 일어나 소리쳐 어수선한 분위기를 집중시킨다.
"지난 몇 달 동안 연습한다고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연습 간에 지랄도 많이 하고 쓴소리도 많이 했지만, 이게 다 연극 잘되라고 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 서울공연, 지방투어까지 많이 남았는데 모두 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또 혹시 압니까. 연극이 잘 돼서 서울 앙코르 공연까지 하게 될지. 하하하."
서병수 저 양반, 원래 저렇게 말이 많았던가. 손에 든 잔이 무거워지기 시작할 때쯤,
"그리고 우리 연극 투자자이시자, 오늘 공연의 가장 큰 공로자이신 이지우 씨. 한 말씀 하시죠."
아··· 또 뭐 이런 걸 다. 부담스러운데.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서 잔을 들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연극 뒤풀이에서 내가 건배 제의를 할 날도 오고. 무슨 말을 할까. 잠시 고민해봤지만, 생각해본 적도 없고 바로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힐끔 여이수를 쳐다봤다.
항상 연극의 뒤풀이에서 꿈을 이야기하던 선배가 보인다.
그리고 오늘 이룬 내 꿈이 생각났고.
"앞에서 너무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저는 짧게 하겠습니다. 여기있는 모든 분은 꿈 하나만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이 자리에 있다는 걸 압니다. 여러분의 꿈을 응원합니다. 제가 '꿈을' 하고 외치면, 모두 '위하여' 해주시면 됩니다. 자- 꿈을!"
"위하여!"
***
'지우분식'
허름한 간판 아래 좁은 유리문에는 이례적으로 '임시 휴무'라는 종이가 걸려있다. 무려 사흘 동안 쉰다고 적혀 있었다.
이십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우분식'의 사정을 아는 인접 상인들은 모두 이 휴무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지우분식' 사장인 박과녀 씨가 분식집 근처 신축한 지 몇 년 안 된 아파트로 이사 가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으로 불리기보다 '지우분식 사장님', 혹은 '지우 엄마'라고 더 많이 불린 중년의 여성.
그녀는 어제 새벽부터 바지런을 떤 덕분에 일찍이 이사를 끝내고 영화관에 갈 수 있었다. 하필 개봉일과 겹친 이사 날.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쉬는 날 영화도 볼 수 있어 좋아라 했다.
밖에서 큰일을 하는 아들을 이사한다고 불러들일 수는 없는 일. 그녀는 아들에게 이사는 알아서 할 테니 이사는 걱정하지 말라 몇 번을 당부했다.
그러고 오늘.
"[악의 기록] 한 장 주세요."
그녀는 어제 다 못 끝낸 잠정리와 청소를 끝내고 다시 영화관을 찾았다.
두 번째 보는 [악의 기록].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는 영화였다. 첫 관람의 충격은 이제 가시고 이제 주인공 '강현수'가 아니라 아들이 보였다.
언제 저리 컸을까.
왜 벌써 저리 컸을까.
장성한 아들이 대견함 보다, 슬픔이 먼저 자리한다.
"무엇이 옳은 일입니까? 어린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드는 회초리를 학대라, 폭력이라, 악이라 할 수 있습니까?"
아들의 저 대사가 폐부를 찌르듯이 박힌다.
아들이 그녀를 변호해주는 듯해서 더 슬프게 들린다.
새로 이사한 집에 돌아온 그녀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넓은 집을 보며 참았던 감정이 복받쳐 오는 것을 느꼈다.
영화를 보며 꾹꾹 눌러왔던 슬픔이 끝을 모르고 쏟아져 나왔다.
한 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녀는 부모였다. 아비 없는 아들을 키우는 그녀는 어머니이면서 아버지여야 했었다.
어디서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엄하게 키웠다.
그게 자식을 올바르게 키우는 법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인제 와서 드는 생각은 저 혼자 저리 바르게 큰 아들에게 좀 더 어머니가 돼주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엄한 아버지처럼만 할 게 아니라, 자상한 어머니도 되어줄걸.
운동회라도 같이 가 줄걸.
소풍이라도 같이 가 줄걸.
좁은 분식집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결혼할 때 조그마한 집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좀 더 쉴걸. 아들과 같이 있어 줄걸.
이렇게 혼자서도 잘해낼 아이였는데.
아들은 엄한 아버지도, 자상한 어머니도 없이 훌쩍 커 버렸다.
그녀는 넓은 집에 주저앉아 한참을 오열했다.
***
첫 공연이 끝나고 다음날.
간만에 이수한네 만화방을 찾았다.
나는 연극의 준비로, 이수한은 편집으로 서로 바빴었다. 그는 시사회, 나는 첫 공연을 기점으로 다소 여유로워진 상태였다.
일단 정식으로 사과할 생각이었다. 시사회 불참한 이유를 설명은 했지만, 제대로 사과를 안 했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걸 잘 지켜야 하는데.
제작사 대표 대 배우, 혹은 감독 대 배우. 이런 거 다 떠나서 형 동생 간이라도 지켜야 할 예절은 있지않은가.
"형, 나왔어.
"어 어서 와."
나른하게 소파에 누워 만화책을 보고 있는 이수한.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든 음료수 캔과 컵라면 등을 보면, 며칠전 시사회가 끝남과 동시에 이러고 있었던것 같은데.
"어후 형, 온종일 만화 보면 안 질려?"
"아까워서 그래."
"뭐가?"
"이 만화방. 내가 가진 재산 중에 제일 비싼 건데, 영화 찍고, 편집하느라 제대로 못 놀았어. 오늘부터 열심히 놀아서 뽕 뽑아야지."
잠시 뻘쭘한 침묵이 이어지고. 이수한은 무심하게,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만화책만 넘겼다.
"미안해. 시사회 못 가서. 현주 각본 첫 공연이라."
"푸- 내가 미안하다야. 현주랑 너랑 첫 공연인데, 내 영화 시사회라서 못 갔다. 퉁치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웃고 마는 이수한.
이수한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일상적인 모습에서 느껴지는 진심.
제작사 대표로서 화가날 법도한데, 아무일 없다는 듯이 넘어가는 그가 고마웠다.
그때였다. 만화방 입구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경수형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급하게 달려온 듯 경수형은 숨까지 헐떡이고 있었다.
"수한이형, 아니지. 사장님! 전화 왜 꺼놓은 거야? 할 이야기 있는데, 어? 지우도 와있었네. 잘 왔다. 오프닝 성적 집계 됐어!"
그제야 만화책을 덮고 소파에 파묻힌 몸을 비스듬히 세우는 이수한.
나도 경수형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33만!"
사실 처음 저 숫자를 듣고 큰 감흥이 없었다.
내가 전생에서 영화를 본격적으로 찍은것은 10년쯤 후다. 그당시 오프닝 최고기록이 [엔드게임]의 127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살던 때와, 지금의 극장 환경이 차이가 나기에, 지금 저 오프닝 관객 스코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수한의 벌어진 입을 보고 잘 나왔구나 싶었는데, 이어지는 경수형의 말을 듣고 심하게 많이 잘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대 청불 영화 사상 최다 관객 수, 2위와 두 배 차이. SJ에서 내일 바로 개봉관 수 늘려주기로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