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75화 (76/121)

75. 설계 혹은 우연

"김범 많이 다쳤대요?"

"모르겠어요, 제가 갔을 때는 범이 씨 기절해있고 구급차 타는 것만 봤어요. 경호 씨가 따라가긴 했는데."

"하···"

로드매니저와 함께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이야긴데.

그때 관람석에서 회사의 첫 연극을 보기 위해 자리하고 있던 장인호 사장이 서병수 감독을 데리고 대기실로 들어왔다.

"채 실장, 어떻게 된 거야. 범이 괜찮데?"

"아니아니 사장님. 잠시만요. 그건 일단 따로 사람 보내서 확인하는 걸로 하고, 배우들 다 모여봐요. 하··· 내가 이걸 물어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 같긴 한데, 지금 타이거 배역 대사 다 외운 사람 있나? 일단, 노래는 립싱크로 때운다 치고 대사라도 대충 외운 사람 없어요?"

사장의 말을 가로막은 서병수 감독. 그는 이 아동극을 정상적으로 올릴 책임이 있다. 사장과의 입장 차가 있는 만큼, 그가 우선시하는 것은 김범의 안위보다 연극일 수밖에 없었고.

연극 중 A, B팀 나눠서 교대로 하는 대형 연극이 아니다. 65분짜리 비교적 짧은 아동극. 거기에다가 가장 체력적 부담이 큰 주인공이 김범과 여이수다. 둘 다 담배를 그렇게 피우면서도 체력 하나는 발군인 두 사람. 배우를 두 팀으로 운영하는 것은 비용적인 면에서도 부담이었고, 주연 배우들의 컨디션도 바쳐줬기에 애초에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서병수 감독의 말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마치 수십 년 전 내가 애송이었을 때, 기회를 잡기 위해 안달 나 있던 그때처럼 가슴이 떨려왔다.

단역시절 구멍 난 배역을 맡기 위해 대본을 달달 외우고, 촬영이 끝났음에도 아쉬움에 촬영장을 떠나지 못했던 그때의 그 시절이 생각난다.

나서는 배우가 없자,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서병수 감독이 장인호 사장을 바라봤다.

"사장님. 이거 잘하면 오늘 공연 못 올릴 수도 있겠는데요. 일단 혹시라도 모르니까 김범 씨 연락 한번 다시 해보시는 게···"

장인호 사장이 애써 무표정을 연기해보지만. 아쉬움은 감출 수 없었다.

채 실장이 눈치껏 김범에게 전화하기 위해 폰을 꺼내고.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내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제가 해봐도 될까요? 대사는··· 다 외우고 있습니다. 당연히 노래도 다 알고 있고요. 주인공 군무랑 피코 군무는 동작이 똑같고 위치만 다르니까 자리 배치만 다시 하면 되고요."

대본 자체를 외우는 건 사실 어렵지 않았다. 초안이 나온 상태에서부터 몇 번을 읽었고, 현주가 수정할 때 같이 수정한 부분도 있으니까. 남은 한 시간으로 내가 할 부분만 다시 집중적으로 본다면··· 가능하다. 아니 가능해야지.

김범이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내 앞에서 벡터맨 타이거 주제가를 수천 번 불러서 강제로 외웠으니까.

동선과 호흡도 최대한 김범이 했던 걸 떠올리며, 다른 배우들과 맞추면 된다.

내 원래 배역이었던 '피코' '졸개1'은 다른 배우 중 한 명이 해도 충분한 역할이다. '피코'는 대사가 몇 줄 없고, '졸개1'은 대사가 아예 없고, 군무만 존재하는 배역이니까.

내가 걱정하는 것 그것보다 좀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제가 해도, 사장님은 괜찮으시겠어요?"

오늘 [악의 기록] 시사회였다. 영화 홍보는 몇 주 전부터 하고 있었다. 내 얼굴이 박힌 포스터가 며칠 전부터 걸려있었으니까. 청소년관람 불가 영화 주인공으로 내가 나온다. 영화의 모토가 두 악인의 대결인 만큼, '악인'으로 나오는 내가 아동극 주인공으로 해도 되느냐, 이런 질문이었다.

"해야지. 연극인데. 해야지. 오늘 온 어린 손님들 다 그냥 보낼 수는 없잖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대답하는 장인호 사장.

어쩌면 고민이 필요없는 질문 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의 앞으로 마케팅 측면에서 부정적인 영향이 갈 수 있더라도, 오늘 온 아이들을 실망하게 한 채 보낼 수는 없겠지. 그게 장인호 사장의 판단이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굳은 내 표정과 달리 내 심장은 기쁨으로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나는 장인호 사장에게 짤막하게 대답하고, 서병수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님. '피코' 배역 조정해야 할 것 같은데요. '졸개1'은 군무만 있으니까 자리 비우고 그냥 하더라도 '피코'는 '졸개2' 하시는 김 선배한테 맡기던가 해야 할 것 같아요."

"지우 씨, 진짜 괜찮겠어요?"

"네! 할 수 있습니다."

원래 나는 '피코' 인형 탈과, '졸개'의 가면을 쓰기로 했기에 분장이 필요 없었다. 급하게 분장을 하고, 동선 체크만 부랴부랴 한 채 무대 위로 올랐다.

원래 공연 시작 시간보다 5분 정도 딜레이 된 공연 시작.

무대의 커튼이 올라가고, A열 중앙에 자리한 현주. 그리고 세호 세화 남매가 보였다.

벡터맨 타이거 복장을 한 내 얼굴을 보자마자,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뜨는 현주의 얼굴이 보인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감았다 뜬다.

그제야 관객석이 보인다.

객석을 가득 메운 어린아이들. 웃고 떠들고, 기분 좋아 소리까지 지르는 아이들이 보였다.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관객매너. 하지만 이것 자체가 아동극의 매력이다. 어린 관객의 반응을 유도하고, 함께 TV판 주제곡을 부르며 공연을 시작했다. 아이들의 기대와 기쁨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나는 이걸 보고 싶었다.

아이들의 웃는 모습. [악의 기록]에서 부터 나를 따라오던 지긋지긋한 어둠들. 후회, 회환, 그리움 등, 그 모든걸 잊을 수 있는 빛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걸 하고 싶었다.

이윤태를 박살 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큰 만족감이 나를 채운다.

연극 무대 주연.

전생에 못 이뤘던 꿈이었다.

***

응급실.

"괜찮다고! 진짜 괜찮다니까!"

"범아, 일단 진정하고. 다친 부위가 머리니까, 일단 CT든, MRI든 찍어보고 그때 결과 나오면···"

"아니 내가 괜찮다는데 왜 난리야. 경호형, 나 주연이라고. 주연. 나 없이 공연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검사고 나발이고 일단 공연장으로 가자 어? 안 뒤질 테니까, 검사는 공연 끝나고 받아도 되잖아."

김범이 침대에서 계속 일어나려 하고, 로드매니저는 그런 김범을 계속 말리고 있었다.

그때 울리는 로드매니저의 전화.

"어? 실장님 전화 왔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나도 공연장 확인해 볼게."

김범의 로드매니저 정경호는 김범에게 잠시 기다려보라는 듯이 손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 혹시나 공연이 취소됐다면, 김범이 무리하게 공연장을 갈 필요가 없으니까.

"네, 실장님. 지금 범이 깨어났고, 진료 받고 있습니다. 네? 지우 씨가요? 하···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네네, 그럼 일단 사진 찍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그때 출발하겠습니다. 출발할 때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경호형, 뭐래? 공연 취소한 데? 아니지? 지금 출발하면 늦지 않게 도착할 것 같은데. 일단 차부터 준비···"

"지우 씨가 올라갔데."

"그래 올라가야지, '졸개1'인데. 우리 택시라도 불러야 할 거 같은데. 차 밀리려나, 그럼 지하철? 아니면 방금 타고 온 구급차 다시 못 타나? 역시 그건 안 되겠지. 그냥 지하철 타자. 아직 30분 남았으니까 어떻게든 도착만 하면···"

"아니, '벡터맨 타이거'로 지우 씨가 올라갔다고."

"...뭐? 지우가 왜? 왜 벡터맨으로 올라가?"

"지금 리허설 급하게 하는 중이라네. 지우 씨 실력 잘 알잖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단 너 치료부터-"

"하··· 씨발···"

방금 전까지 침대 위에서 눕지 못하고 반쯤 걸터앉아있던 김범은 허탈한 듯 뒤로 몸을 눕혔다.

백터맨의 평상복이라 해도 무대의상이다. 묘하게 화려한 김범의 옷. 그리고 진하게 칠해진 메이크업까지.

김범의 볼을 타고 마스카라가 번져 검은 물이 흘렀다.

김범의 로드매니저는 말없이, 침상의 커튼을 닫아 주고 나왔다.

주차하려고 후진하는 차가 빨라 봐야 얼마나 빨랐겠는가. 김범이 차량에 부딪힌 사고는 전혀 문제가 없었으나, 차에 밀리면서 넘어졌고 넘어지면서 머리를 난간에 부딪친 게 문제였다.

가벼운 뇌진탕이었고, CT 사진을 본 응급실 의사도 안정을 취하라는 말 정도로 진료를 끝내버렸다.

너무나 허무한 검사 결과.

"범아, 집에 갈래? 사장님이 며칠 쉬래···"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는 김범의 로드 매니저. 김범의 옆에서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봐왔던 그였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공연장으로 가자. 형. 다른 배우분들한테도 사과하고, 서 감독님이랑도 다시 이야기해봐야지."

"아니야··· 괜찮데. 범아 일단 오늘은 쉬자. 가봐야 마음만 상하지."

"가자, 형. 아까 그렇게 가달라고 했을 때 안 갔잖아. 이번엔 내 말 들어주라."

"하··· 알았다. 차에 타."

김범은 공연장에 도착해서 무대 뒤편 스태프 전용 통로가 아니라, 정문을 그리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티케팅을 감독하던 직원이 제지하려다가, 김범의 복장을 보고 멈칫했다. '벡터맨 타이거'가 변신하기 전 모습이었으니까. 그리고 포스터에 박혀있던 김범이었으니까. 메이크업이 번져 엉망인 몰골. 직원은 그런 김범을 제지할 생각도 못 하였다.

공연장에 들어간 김범은 통로 한 쪽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미 중반을 지나고 있는 공연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벡터맨 타이거'가 있었다.

군데군데 어레인지 된 대사. 각본과 미묘하게 달라진 대사는 운율이 담겨있어 리듬감이 넘친다.

어린 관객을 배려한 듯, 쉽고 빠르게 이해되는 대사들이 극을 쉽게 즐기게 해준다.

무대를 넓게 쓰라던 조언을 몸으로 보여주는 듯한 움직임.

캐릭터 성이 느껴지는 걸음걸이, 손짓, 몸짓.

스포트라이트가 비치지 않는 순간에도, 연기에 집중하는 모습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벡터맨 타이거'였다.

김범은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아쉬웠다.

지난 1년간 연극을 하면서 얻은 경험치. 자신의 발전을 그 누구보다 이지우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폭력의 사슬]에서 이지우의 연기를 보며 느꼈던 벽. 영상연기로는 자신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연기.

이번 연극으로 이지우에게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이지우에게 조금이라도 되돌려주고 싶었다.

아니, 그 정도는 안 되더라도, 최소한 연극 연기는 자신이 이지우보다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구라 불러도 좋을 사람. 그 사람과 동등해지고 싶었고, 영상연기로는 그게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채 실장이 연극을 권했을 때 두 말없이 연극판에 온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왜 연극도 잘하는 건데···

김범은 뱀 같은 열등감에 잡혀먹히기 직전,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냈다.

무대 위 이지우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김범은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번에는 깜짝 놀라게 해주리라.

다짐하며, 무대위 '벡터맨 타이거'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

장인호 사장은 아동극이 끝나는 걸 보지 못하고, 회사로 이동했다. 이지우의 도움으로 오늘 연극은 어찌어찌 넘겼다 하더라도, 연극을 오늘 하루하고 말 것이 아니니까.

서울 공연만 주당 4회에 한 달 동안 이어진다. 이후 광역 시급 도시까지 계속 공연이 기획되어 있고.

공교롭게도 [악의 기록]의 상영 일정과 똑같다.

홍보에 큰 비용을 쓸 수 없는 아동극의 특성상, 작은 구설수도 치명적이다. 그렇기에 이지우가 아동극과 [악의 기록]을 동시에 한다는 기사를 막기 위해 한 발 먼저 움직였다.

홍보팀을 불러다 놓고 이지우와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이 동시에 노출되는 기사를 확인하라고 말한 뒤,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장 사장 본인도 관련 기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동극', '벡터맨', '카오스의 비밀' 등 몇 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검색했다. 홍보팀에서 돈을 주고 쓴 기사 몇 개만 검색되고, 별 기사가 검색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 기자들이 아동극을 보러 올 일은 드물 테니까··· 그렇게 안심하고, '이지우'를 검색하는 순간.

오늘 날짜 기사 수십 개가 주르르륵 나열되었다.

장인호 사장은 깜짝 놀라,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시네르포 단독) [악의 기록] 원작자 지창일 작가와의 인터뷰 '주인공 강현수의 모티브는 이지우의 실제 아버지다.']

[이지우의 아버지는 [악의 기록]의 실제 모델]

[국가유공자 아들 이지우, 아버지를 연기하다.]

['특수임무유공자 예우 관련 법안' 발의한 국회의원 지일권, '이지우의 아버지는 나의 생명의 은인']

[시사회 이모저모, 이지우, [악의 기록] 언론 시사회 불참, 촬영팀과 불화?]

ㄴ기자님 눈치 챙기세요.

ㄴ넌씨눈ㅋㅋㅋ

장인호 사장은 '어어?' 하며 기사를 읽어내렸다.

아동극과 관련된 기사는 찾아볼 수 없고, 시사회 불참한 기사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지우와 이지우의 아버지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기사가 뜬 시간을 확인해보니 최초 기사는 시네르포의 조상기 기자가 지창일 작가와 인터뷰 한 뒤 쓴 기사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머진 조상기 기자의 기사를 받아쓴 기사들이 대부분이었고.

기사의 조회 수가 높아지니 정치부 기사까지 합세. '특수임무 유공자 예우 관련 법안'을 발의한 지일권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악의 기록] 주인공 '강현수'. 캐릭터 배경이 북파 공작원이고, 지일권 의원이 북파공작원 출신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그런데 여기서 또 폭탄선언이 터진다.

지역구 3선 의원으로 당의 중진인 지일권이 이지우 아버지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밝혔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스토리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시사회 만으로 이렇게 뜨겁게 달궈졌던 영화가 있었던가.

정신없이 관련 기사를 읽고 있는데,

사장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장 사장이 대답하기도 전에 홍보팀장이 문이 벌컥 열렸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급해서요. 지우 씨 기사 보셨습니까? 지금 인터뷰 요청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우선순위 체크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아냐, 괜찮아. 내가 지금 막 홍보팀장 부르려고 했어."

장인호 사장은 손을 털어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 뒤 다시 말했다.

"지금 공연 끝났을 테니까, 지우한테 전화해서 이 기사 사실관계 빨리 확인해 보라고. 이거 마케팅적으로 써먹어도 되냐고도 물어도 보고. 이수한 사장이랑, 배급사 쪽에서도 알려주고."

영화 마케팅 책임이 있는 배급사 SJ엔터테인먼트.

이런 이슈를 활용하는 것은 기획사보다 배급사 쪽이 훨씬 더 많은 채널을 보유하고 있다.

이슈 자체가 영화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에 소속사에서 단독으로 이지우를 띄우는 것보다 영화와 연계시켜 띄우는 게 효율적이라는 게 장 사장의 판단이었다.

장인호 사장은 소름이 돋았다.

설계라면 천재이고, 우연이라면 신이 내린 사람인데, 어느 쪽이든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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