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나는 로맨티스트가 아니다
[악의 기록] 시사회 1시간 전. 시사회장 대기실.
제작자인 윤경수와 이수한은 일찍 와서 대기 중이었다.
"하··· 지우 못 온다네. 수한이 형은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뭐 어쩔 수 없잖아."
진짜 괜찮다는 듯, 이수한은 윤경수가 말하는 것을 쳐다도 보지 않고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지우가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 있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이랑 나한테.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뭐?"
갑자기 휴대폰을 '탁'하고 닫은 이수한.
윤경수를 빤히 보고 말했다.
"경수야, 우리 이제 먹고 살만하지?"
"어? 그렇지. 이제는 살만하지?"
"배급사랑 투자자들이 지랄해도 우리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우랑 현주야. 우리 먹고 살만하게 만들어준 지우랑 현주라고. [폭력의 사슬] 몇 번 엎어질 뻔 한거 지우랑 현주 둘이서 개봉관에 걸게 해준 거라고."
"알지···그래도-"
"이번 [악의 기록]? 지우가 판권 사서 왔지. 제작사? 지우가 아니었으면 시작할 생각도 못 했을 거고. 지우가 이거 시작 안 했으면, 너 고향 내려가고 나 만화방에 있거나 [해적왕]만들고 있었겠지."
"아니, 내가 걔네들 욕한 게 아니라-"
윤경수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이수한은 말을 잘랐다.
"자꾸 말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 이 새끼야. 너는, 그리고 나는 욕하면 안 돼. 배급사랑 투자자가 아무리 욕해도 너랑 나랑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현주 첫 공연이고 지우가 거기 출연하는데, 그쪽 공연은 몇 달 전부터 날짜 픽스하고, 티케팅 했었다며. 정 지우 데리고 오고 싶었으면 니가 시사회 픽스하고 조정했어야지."
"하··· 진짜 맨날 나만 나쁜 놈이지."
"어 니가 나쁜놈 맞아. 양심 없는 새끼. 헛소리 하지 말고, 배급사나 투자자들 딴소리 안 나오게 단도리 잘 쳐. 나도 간담회장 가서 기자들 이상한 기사 안 쓰게 말조심 할 테니까.
"아씨, 몰라. 내 회사야? 형 회사지. 투자자랑 배급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형이나 잘해. 어휴 누가 보면 내가 게네들 욕한 줄 알겠네."
대기실 밖에서 다른 배우들이 속속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후.
"사장님, 상영관 입장하실게요."
시사회준비를 하던 스태프가 들어와 입장순서가 됐음을 안내해 왔다.
"갔다 올게, 지우 커버 좀 부탁한다."
***
[악의 기록]의 영화 상영이 끝나고. 곧바로 각종 언론에서 나온 기자들과의 간담회 준비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미리 준비된 간담회장에 자리를 잡은 기자들. 주연인 이지우 보다, 훨씬 티켓파워가 강한 두 명의 배우. 예기성과 이정건이 나오는 영화이다 보니, 그만큼 많은 언론사에서 시사회 신청을 했다.
'와 이거 19세이상 관람만 아니었으면 진짜 천만 각 봤을 것 같은데?'
'그러게. 편집 쪽에서 [악의 기록] 잘 나왔다고 소문 퍼지더니 진짜 잘 나왔네.'
'이수한 감독 로카르노 신인상, 운이 아니었어.'
'이 영화는 이지우 캐스팅이 신의 한 수였다. 이정건, 예기성 사이에서 이 정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냥 씹어 삼켜버리네.'
이미 영화를 다 보고 내려온 기자들. 그 여운이 남았을까. 기자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쁜 이지우였지만, 그럼에도 영화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를 서로 교환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배우들이 준비된 무대에 올라가고, 무수한 플래시가 터진다.
'촥촥촥촥'
잠시 스크린 앞 단상에서 포토타임을 가지는데, 정작 주인공인 이지우가 없었다.
곧, 기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지우 어디 갔어? 설마 안 온 거야?'
'주인공 없이 기자 간담회 한다고?'
'진짜 예의라는 게 눈곱만큼도 없구만.'
기자들이 있는 곳에서 어수선함이 퍼졌다.
언론 시사회에 이지우가 오지 않은 것에 대해, 기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무시라도 당한 것처럼 날이 세운다.
그 분위기를 정리하고자 사회자는 배우들이 앉자마자 바로 질문을 던졌다.
"네 먼저 예기성 배우님에게 이 질문을 안 드릴 수가 없겠네요. 예기성 배우님께서 이 영화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사회자의 능숙한 진행. 연예계에서 가장 연배가 높은 예기성에게 질문을 던짐으로 기자들의 어수선함을 정리하고, 집중도를 끌어올린다.
"하하하, 대놓고 질문하셔도 됩니다. '최 형사' 비중이 작죠. 아마 스크린에 나오는 시간만 계산했을 때는 제가 수십 년간 찍은 영화 중에 가장 작게 나온 영화일 겁니다. 그럼에도 출연했던 이유는, 이 영화가 저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분량보다 배역이 가지는 존재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같은 질문을 이정건 씨에게 드려도 될까요?"
"어··· 예기성 선생님이 너무 좋은 말씀 해주셔서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고민되네요. 도전이라··· 도전. 저도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도전했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배역, 이전과는 다른 캐릭터. 그것도 하나의 도전일 수 있겠지만. 한 배우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예기성 선생님도 그렇고, 여기에 없는 이지우 씨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방금 영화를 보고 내려와서 그런지, 이정건 씨가 '도전' 한다고 하니까 왠지 무섭네요. 하하. 잠시 마이크를 넘겨서 최두호 감독님께 같은 질문 드려도 될까요? 이전 영화 [짝꿍]이 배우로서 마지막 영화고 무술 감독에 집중하겠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 결심을 번복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마지막 액션 시퀀스를 제대로 소화할 만한 배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답답해서 제가 했습니다. 하하!"
"아! '답답해서 내가 뛴다'를 직접 하신 거군요. 하하"
최두호 감독과, 사회자가 분위기를 띄우려 해보지만, 기자단의 분위기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네, 그러면 본격적으로 기자님들 질문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거기 파란 셔츠 입으신 기자분."
기자석 귀퉁이에 앉은 파란 셔츠 입은 기자가 일어났다.
"TNN 연예부 기자 박한용입니다. 오늘 주인공이신 이지우 씨가 나오질 않았는데요. 혹시 오늘 이지우 씨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촬영장에서 혹시 오늘 같은 이런 상황 때문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지우 때문에 문제가 없었느냐는 말을 돌려 말하는 기자.
한 사람이라도 질문을 모호하게 답변한다면 바로 기사 쓸 생각인 듯 표정마저 차가웠다.
그리고 동시에 말하는 세 명의 남자. 이수한, 이정건, 최두호였다.
"지우 다른 작품 중입니다."
"없습니다."
"전혀요."
그리고 잠자코 앉아있던 예기성이 마이크에 대고 조용히 한마디 했다.
"거 어디 기자요?"
***
지창일 작가는 [악의 기록]의 원작자로서 시사회 초대를 받았다.
언론 시사회.
영화의 내부관계자가 아닌, 외부 관계자를 대상으로 하는 최초의 시사회였다.
그리고 시사회 일주일 후 정식 개봉이었다. 추석시즌을 노린 개봉. 원작자로서 별다른 참여는 없었지만 지창일은 진심으로 영화가 잘되기를 바랐다.
각본가로서 개인적인 커리어를 논외로 두고도, 주인공의 모티브가 되었던 사람의 아들이 주연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 덕에 자신의 삼촌이 살아 있을 수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에 주인공 역에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지우가 찍은 다른 영화를 보고 그런 생각을 접었다.
[폭력의 사슬], [민주를 기다리며] 그 외 다른 영화까지. 전혀 다른 캐릭터를 전혀 다르게 표현하는 독보적인 연기력. 20대 배우 중에 비슷한걸 흉내 내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 [악의 기록]까지.
놀라웠다.
어떤 각본을 쓰면, 저런 연기가 나오는 걸까?
반대로 저 연기를 보고 어떤 글을 쓸 것인가?
작가로서 한계를 느꼈다.
그의 연기가 글로 표현이 안 됐기 때문이다.
저 복잡한 서사와 감정을 어떻게 표정으로, 몸짓으로 표현해 내는 것인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리고 저 눈빛에 담긴 감정을 글로 표현한다고 생각했을 때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써야 하나···
어떠한 글로도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커다란 숙제 같은 연기. 작가로서 한계를 느끼게 하는 연기. 지창일 작가는 각본이 연기로 바뀌는 그 과정에 자신의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어떠한 상상을 해도 이지우보다 정확하게 연기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뒤 불 꺼진 상영관에서 한참을 앉아있다가 나왔다.
그때 한 사람이 지창일 작가를 붙잡았다.
"혹시, [악의 기록] 원작자이신, 지창일 작가 아니십니까?"
지창일 작가는 재빨리 자신을 붙잡은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형 네임택에는 '시네르포 조상기'라고 적혀있었다.
"아···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하하, 역시나 내요. 예전 [서울역 브루스]라는 작품으로 서울 독립영화제에 수상 한 적 있지 않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몇 년 됐는데. 용케 기억하시네요."
"저야 뭐 이게 일이니까요. 괜찮으시면 내려가셔서 인터뷰 한번 가능하실까요?"
그렇게 지창일 작가와 조상기 기자는 영화관 1층에 있는 커피숍에 내려가 마주 앉았다.
"이번 영화 어떻게 보셨나요? 원작자로서의 소감 혹은 감상이 궁금하네요."
"사실 원작자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결말도 달라졌고요. 그런 걸 제외하고··· 말한다면.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특히 이지우 씨 연기가 인상 깊더군요. 이게 참··· 저도 글밥먹고 사는데도 이 이상 말로 표현이 안 되네요."
"그렇죠. 이번 영화 이지우 씨 연기가 남다르긴 하더라고요."
"네, 신인이라면 신인인데 연기를 대하는 자세가 진짜 남다르더라고요. 촬영 들어가기 전에 다른 배우들보다 먼저 저를 찾아와서 원작자 인터뷰했었거든요. 그때도 느꼈던 거지만 연기를 대하는 자세가 정말 진지합니다."
"아! 따로 한번 만나셨군요. 하하, 오늘 이지우 씨가 시사회에 나오지 않는 바람에, 이지우 씨에 대한 내용을 하나도 못 적었는데 혹시 이지우 씨에 대한 이야기 하나 해 주실 수 있나요?"
"음··· 젊고, 조용하고, 예의 바르고··· 사실 저는 그날 이지우 씨라는 배우를 처음 알았거든요. 원래 30대 중반의 남자가 주인공이었으니까요. 당연히 그쯤 되는 배우가 캐스팅될 거로 생각했었고요.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는 좀 놀랐죠."
"아 맞다. 이거 원래 군대 간 박정태 씨에게 갔던 역할이었죠? 제가 배우분들 급 나누는 거 싫어하긴 하는데요. 아무래도 박정태 씨와 비슷한 급의 배우가 하지 않아서 아쉽지는 않으셨나요? 예를 들면 이정건 씨가 주연을 했다면 하는 생각이요."
"하하, 저를 너무 놀리시네요. 방금 기자님도 영화 보셔 놓고. 영화 보고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영화 모르는 사람이죠. 그런 생각 전혀 안 했습니다. 이지우 씨 아버지가 주인공 '강현수'의 모티븐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첫 만남에서 그 소리 듣고 '강현수'는 이지우 씨를 위한 배역이라 생각했습니다. 운명적으로 말이죠."
"네?"
조상기 기자는 뭐라 받아 적을 생각도 못 하고 '네?' 라고 말한 뒤 잠시간 멍하게 있었다.
영화 잡기 기자를 하면서 들었던 이런저런 소문들. 그리고 몇달전 크게 올라갔던 기사들을 머릿속에서 조합된다.
"혹시, 이지우 씨 아버지가 국가유공자··· 그러니까 북파공작원 출신으로 국가유공자 인정받으신··· 그 내용과 이 영화의 모티브였던 주인공이 같은 사람이란 말씀이신가요?"
"아?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건가?"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상체를 살짝 숙이며 지창일에게 몸을 가까이하는 조상기 기자.
지창일 작가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살짝 올리면서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고 이지우를 조사하면서, 이미 이지우의 병역비리 관련으로 이지우의 아버지가 국가유공자라는 사실이 기사화되어 퍼졌다는 것을 떠올렸다.
'별문제 없겠지?'
"이지우 씨와 인터뷰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요. 사실 저희 삼촌이 북파공작원 출신-"
"잠시, 잠시만요! 녹음기 좀 켜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인터뷰는 이후로 한참 이어졌다.
***
배우는 연기를 해야지.
나도 안다. 시사회 중요한 거. 내가 영화를 몇 편 찍었는데 그걸 모를까.
이전 삶에서는 단 한 번도 시사회에 불참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번 시사회는 갈 수가 없었다. 배우는 연기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연극은 영화 촬영처럼 촬영을 뒤로 미룰 수도 없고, 날짜를 조정하기도 쉽지 않다.
하물며, 이미 티케팅이 끝난 연극. 나 하나 때문에 뒤로 미루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언론시사회보다 연극을 택했다. 내가 '졸개1', '피코' 라는 중요도가 낮은 배역을 맡았고, 대체할 배우가 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현주의 첫 연극의 첫 공연이라는 게 내게 중요할 뿐.
그리고 [악의 기록]을 관람하며,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강현수'가 되어 그의 고통을 다시 되뇌는 것은 그만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그런 고통 속에서 2시간을 보낼 바에, 그녀를 위해 연기하는 것이 내게는 더 의미 있는 일이었다.
로맨티시스트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그래야 살 수가 있다.
무대 뒤 분장실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이수와 김범이 담배를 피우러 간다고 올라가고, 곧 여이수만 내려오는 게 보였다.
"선배님, 김범은 안 내려 오나요?"
"어? 분장하면 담배 못 핀다고 한 대 더 피고 온 데."
"아···"
그러고 몇 분 후.
채 실장이 급하게 대기실에 들어왔다.
"서 감독 어디 갔어요?"
"네? 감독님 지금 무대장치 확인하러··· 무슨 일 있어요?"
채 실장은 무척이나 당황한 모습이었다. 10월 인대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뛰어왔는지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큰일 났어요. 김범 씨, 지금 119 실려갔어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대기실의 모든 사람이 여이수를 바라봤고.
"야 인마 나 아니야. 안 때렸어."
여이수는 당황한 듯 양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제야 채 실장이 설명했다.
"김범 씨, 주차장에서 담배 피우다가, 후진하는 차량에 부딪혀서 기절했어요."
"네?"
현주의 첫 연극, 첫 공연 1시간 전이었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