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배우는 연기를 해야지
"어머어머, 어떻게 내 정신 좀 봐. 죄송해요. 제가 요즘 좀 예민해서요"
'끄으으윽'
"김범! 숨 쉬어 숨! 휴···휴지 좀 줘요. 애 게거품 문다."
김범이 뭐 어떻게 해보려고 다가간 건 아니었을 거다. 김범이 그 정도 양아치는 아니니까. 화도 나고, 좀 만만하게 봤겠지.
여이수의 사정을 모르는 김범이 봤을 때, 여이수가 그동안 보여왔던 연기력이나 태도 같은 게 좋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특히 연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여이수의 모습이 진지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테고.
김범은 보기보다 아동극에 진심이었으니까.
첫 주연.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이겠나. 이전 연극에서는 조연만 하다 왔다고 했고, [폭력의 사슬] 때는 거의 모든 화제성을 내가 쓸어가 버렸었다. 그런 상황에서 들어온 연극 배역이 주인공인데···
아동극이라 처음 거절했다가 결국 하게 된 것도 주연으로 연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앞에서 벡터맨 타이거 노래 부르는 것을 봤을 때, 김범이 말은 안 해도 연극 무대에서 주연으로 선다는 것에 기뻐하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연극 내용 중 '벡터맨 타이거'와 '라일라 공주'는 러브라인도 있다.
자신과 극의 중심에 서서 아동극을 이끌어가야 하는 히로인이 연극을 제대로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여이수를 트집 잡았던 거고.
다만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투르다. 김범답다고 할까. 아쉽고 서운하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 자체를 모른다. 무슨 말을 하려 했건 간에 깡패처럼 건들거리면서 다가가면 누구라도 쫄지.
그리고 상대는 상처 입은 짐승··· 이라 표현하기엔 좀 조그맣고 동안이긴 하다만.
사자의 힘을 가진 미어캣쯤 될까. 미어캣도 짐승은 짐승이니까. 좋지 않은 사건을 겪고 가뜩이나 예민한 상태일 텐데. 거기서 깝치니···
괜히 이윤태가 전치 8주가 나온 게 아니다.
김범은 한참 뒤에 정신을 차리고 연습에 합류했다.
***
아동극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김범도 여이수를 인정 아닌 인정을 하고, 또 여이수도 폼이 올라오고 있었다.
심리적 압박에서 좀 더 자유로워져서일까. 혹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내가 알던 여이수의 모습이 다시 나오게 되었고, 김범과의 호흡도 점점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 호흡이 좀 불균형하다.
연습하다가 뭔가 마음에 안 든 게 있었는지 여이수가 김범을 불러 세웠다.
"김범 씨, 아까 2막에서 지문에서는 대사치고 움직이는 걸로 나와 있긴 한데, 그렇게 하면 저랑 벡터맨이랑 거리가 너무 떨어진 상태에서 대사하게 되잖아요? 여기서는 대사를 치면서 움직이면 더 좋을 거 같은데요?"
"네 형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니 여이수를 누님이나 선배라고 부르면 이해하겠는데, 여기서 형님은 왜 나오는 거냐고.
생활 하다 온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잘 맞아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김범도 연기가 진짜 좋아졌다.
내가 이래서 김범을 좋아한다. 상승 욕구가 확실하다. 예전 내게 진지하게 대학 가겠다는 말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내 연기를 보고, 내가 해준 코멘트를 일일이 적고 실행하려던 모습이 겹쳐진다.
얼마전, 걷는 모습 한번 지적했다고, 걷는 모습까지 다 뜯어고쳐 온 저 모습.
저런 거 보면 본바탕이 나쁜 애는 아닌데 참···
배우들중에서 경력은 짧아도 가장 기가 쎈 김범이 여이수를 형님 취급(?)하니까 덩달아 다른 배우들도 여이수를 대하는 게 달라지고, 거기에 맞춰 연기 폼까지 올라오니 여이수를 중심으로 금방 체계가 잡혔다.
뭐, 여이수한테 맞기 싫으면 해야지.
나도 짧은 기간이나마 내 배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윤태나, 다른 상황들을 잊고 연습에만 집중했다.
전생을 포함해서 연극을 다시 하는 게 15년 만이다. 신입 시절 혹독하게 배웠던 만큼 연극의 기본기에는 자신 있었지만 그래도 연극은 오랜만이었기에 감각을 끌어올린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연습실에서의 단체연습이 끝나고, 대관한 공연장에서의 런스루(공연 전 리허설)를 앞둔 시점에서 이윤태의 공격이 시작됐다.
연습이 끝나고, 친분이 있는 배우들끼리 삼삼오오 연습실을 빠져나가는 상황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첫 공연이 이제 보름도 안 남았는데."
처음에는 크지 않다가 '안남았는데'에서는 거의 고성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병수 무대감독이 배우 두 명을 세워놓고 소리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말하면 끝나? 시발, 아무리 아동극이라고 해도 이딴 식으로 해도 되는 거냐고. 니들 이윤태한테 전화받았지. 맞지? 사실대로 말해봐. 이윤태가 '창공'으로 오라든? 아니면 아동극 하면 다른 극단 못 들어가게 틀어막는다던? 어! 솔직하게 말해보라고!"
서병수 감독 앞에 선 두 명의 배우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이가 없네. 니들이 배우야? 지금 공연 보름 남았는데 그만둔다고 말하는 게 말이 돼? 장난하는 거야? 상식적인 거냐고."
이미 장인호 사장과 채 실장에게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전해 들은 서병수 감독이다. 웃기게도 이윤태는 서병수 감독에게도 이 작품을 그만두라고 대놓고 협박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따로 부탁한 대로 그 모든 사항을 녹취해놓았다.
이미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의 청사진을 본 서병수 감독은, 이윤태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윤태가 제시하는 조건이나 협박보다, 이 작품만 잘 띄우면 2편 3편까지 길게 갈 수 있다는 나름의 확신이 섰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 이윤태가 전화 오면 녹취해달라는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것일테고.
이러한 협박이 서병수 한태만 온 것은 아니었다.
한창 연극 무대를 준비하는 세트 제작팀에서도 그만둔다는 이야기가 나왔었고, 스태프 중 몇몇은 계약 해지하고 빠지기로 한 상태였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그만둔다고 한 사람은 예외 없이 잘라버렸다. 장 사장 나름대로 10년간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쌓아온 인맥이 있지 않겠는가. 영화나 드라마 세트를 만들던 업체. 그중에서 연극무대도 꾸며본 경험이 있는 업체를 수배해서 채웠다.
여기까지는 효과적으로 이윤태의 공격을 막았으나.
오늘 드디어 처음으로 배우 중에서도 이탈자가 나왔다.
배우가 빠져버리면 이건 쉽게 메꿀 수 없는 구멍이다.
개인연습 포함해 한 달이 넘게 연습하고 준비해왔던 배우들. 새로 배우를 구한다 해도 연습하고 무대 위로 올리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촉박한 시간에 치여 무대 위로 올린다면 무대 퀄리티가 떨어질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특수효과가 많이 들어가는 무대이다. 폭죽과, 화염 등이 올라오고 군무와 와이어 액션까지 들어간다. 퀄리티를 떠나서 연습부족 때문에 사고 위험성도 덩달아 올라갈 수 있었다.
그때 채 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짤막하게 섭외가 됐다는 채 실장과의 통화.
전화를 끊자마자 서병수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그만하시죠. 선배님들도, 지금 당장 그만두겠다 그러지 마시고. 한 며칠 머리 식히면서 생각정리 하시고 그때 다시 이야기하죠. 상황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서병수 감독이 나를 보며 반문했다.
"드디어 하는 거야?"
"네. 이윤태가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주는데, 해야죠."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홍보팀과, 채 실장. 그리고 여이수가 만든 반격이 시작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바보라서, 혹은 반격할 줄 몰라서 안 했던 게 아니니까.
여이수의 성추행 관련 고소도 일부러 참던 중이었다. 이전에 있었던 피해자들과 함께 터트리기 위해서였다.
제일 먼저 터트린 건 서병수 감독에게 했던 녹취 파일이었다.
대략 지금 하고 있는 아동극에서 빠지지 않으면 앞으로 서병수 감독에게 자신이 쓴 각본을 절대 맡기지 않을 것이며, 서병수 감독이 올리는 연극은 어느 연극제든 수상하기 힘들 거라는 협박.
이걸 홍보팀을 통해서 기사로 만들어 쐈다.
모 연극계 원로, 무대감독 협박. 폐쇄적인 연극계의 갑질.
대충 이런 내용으로 틀을 잡고, 녹취 내용을 텍스트화해서 기사가 올라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이어서, 여이수를 포함한 익명의 3명의 여성이 이윤태를 대상으로 고소장을 접수한다.
[모 연극계 인사. 성추행 및 성폭행혐의 입건]
ㄴ연극계 좀 오래 있던 사람들은 누군지 다 알걸. ㅊㄱ 단장 ㅇㅇㅌ임. 개 쓰레기로 유명함
ㄴ내가 언젠가는 한번 터질 줄 알았음. 후배들 등쳐먹고, 지원금 슈킹하고. 조사해보면 더 나올 거 많을걸?
ㄴ연극 잘 몰라서 그런데 연극판 다 저럼?
슬슬 달궈지는 여론. '모 연극계 원로'라고 해봐야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몇몇이 되겠나. 업계 사람들 입장에서는 바로 특정 지어진다고 봐야지.
장인호 사장은 회사와 계약된 로펌과 계속 접촉하여서 고소 건을 서포트 했고, 채 실장이 실제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참여를 유도했다.
내가 홍보팀을 데리고 했던 건 좀 다른 거였다.
서병수 감독이 당했던 협박 녹취록과 피해 여성들과 묶고, 기사 아래 댓글까지 싹 긁어서 자료를 만든다. 그리고 여러 커뮤티니에 뿌린 다음. 댓글로 '저거 이윤태 아님?' 이런 식으로 흘리고. 최대한 공론화 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이 정도쯤 되자, 그만두겠다던 배우들도 사실을 이야기했다.
이윤태가 직접 전화 와서 지금 그만두면 '창공'으로 받아주겠다고, 반대로 그만두지 않으면 아동극 끝나고 어느 극단에도 발 못 붙치게 할 거라 협박했다고 했다.
참··· 이윤태도 어지간한 게, 끽 해봐야 20대 중후반 밖에 안되는 애들 데리고 이런 장난을 치고 있는 거다.
그것도 내게 했던 방법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서병수 무대감독도 그 전화를 똑같이 받았고 똑같은 고민을 했었기에 그들이 얼마나 고민했을지 충분히 이해했다.
그 두 명의 배우가 그만두기로 한 것은 묻어버리기로 했다.
이쯤 되면 이윤태도 후달리겠지.
스태프나 무대장치 쪽은 장인호 사장 쪽 인맥으로 커버 쳐버렸고, 오히려 자신이 저지른 성범죄로 조사받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만둔다던 배우들이 돌아온 뒤, 사흘 후. 그러니까 장인호 사장이 이윤태에게 선전포고 한지 딱 십오일 되는 날이었다.
내가 준비한 진짜 필살(必殺)기, 그러니까 이윤태를 사회적으로 죽일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터졌다.
[배우 서예정 씨 인터뷰. '창공' '이윤태 단장은 악마다']
[배우 서예정 폭로! 무대 뒤의 악마 이윤태 단장]
[극작가이자 '창공' 단장 이윤태, 성추문 사태. 피해자 다수]
배우 서예정을 설득하기 위해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이미 영화 쪽에서 많은 작품을 찍었고, 앞으로도 찍을 예정이었던 배우니까. 그녀에게 이런 인터뷰와 기자 회견을 부탁하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었다.
여이수가 찾아가 당신과 같은 피해자가 셋이나 더 있고, 이런 피해자가 앞으로 더 생기지 않게 도와 달라는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 호소가 먹혔다.
서예정은 그동안 모아놓았던 증거를 보여줬다.
음담패설과 협박이 담긴 문자기록과 녹취록.
원래라면 한참 뒤 미투 운동이 한창 전개되었을 때 공개될 그 내용들.
청운 엔터테인먼트에서 계약한 변호사들이 빠르게 전략을 짜고, 홍보팀은 보도자료를 돌렸다.
[한국 극작가협회, 협회장 이윤태 영구제명 만장일치 이사회 결정]
[서울 연극 협회 이윤태를 최고수준의 징계, 제명]
이윤태의 권력 기반까지 모두 박살이 나는 것을 확인하고 화실에 돌아왔다.
오늘은 딱 한 잔만.
소주 한잔을 잔에 따르고 꿈을 생각했다.
예전 연극배우라는 꿈을 꿀 때의 나.
그 꿈을 박살 낸 이윤태.
성공하고도, 갚지 못했던 복수.
그리고 지금의 꿈.
오랜만에 마신 술이 쓰다.
'띠링'
휴대폰을 열어보니 채 실장이 정말 오랜만에 스케줄을 잡아 왔다.
문자로 [악의 기록] 개봉전시사회 일정을 보냈다.
스케줄을 주욱 훑어 보는데···
언론 시사회 날짜와,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의 첫 공연 날짜가 겹쳤다.
당연히 벡터맨 해야지.
아무렴. 배우는 연기를 해야지 배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