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72화 (73/121)

72. 꼭 한번은 밟아야 합니다

"야이 추잡한 늙은이야. 곱게 늙어야지 너 같은 새끼 때문에 한국 연극이 발전이 없는 거야. 이새끼야!"

분명 저 말을 하기 전에 나와 살짝 눈이 마주쳤다.

이게 참 이상하다.

그 눈빛이 마치 '너 믿고 한번 해볼게' 그런 느낌?

존중과 기대, 그리고 확신이 가득한 모습으로 질러 버리는 모습이었다.

웃기지 않는가. 나는 배우인데.

단순히 웃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장인호가 보내주는 나에 대한 신뢰가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연기? 당연히 잘하지. 내가 짬이 몇 년인데. 그리고 전생에 쌓아 올렸던 커리어는 또 어떻고. 하지만 연기에 관한 신뢰는, 감독 혹은 주변 동료에게 받는 거다.

장인호 사장이 내게 보낸 그 신뢰는 좀 다른 의미였다.

[폭력의 사슬], [민주를 기다리며], [저승 카페]의 흥행 모두가 내 계산이 안배된 성공이라는 것까지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사업가인 장인호 사장이라면 단순히 운이 아니 뭔가가 있다고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혹여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예전 백룡 영화제에서 사고 친 거나, 병역비리, 그리고 검찰청 조사를 돌파해나가는 과정에서 보였던 퍼포먼스. 그리고 최근 아동극을 기획하고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보였던 활약들.

지금 보여주는 장인호 사장이 보여주는 태도는 내가 단순히 연기만 잘하는 배우는 아니었음을 인정받은 것 같았다.

단지 배우 이지우라는 기대를 넘어 인간 이지우에 대한 기대랄까.

내가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기 전에 고민하던 모습. 이해한다. 장인호 사장은 여러 직원의 밥줄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으니까.

장인호 사장은 여이수를 돕고 싶은 인간적인 면과, 회사를 이끌고 가야 하는 사업가로서의 사려야 하는 그런 부분에서 충돌하고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바로 여이수를 내쫓았을 테니까.

항상 사람이, 그리고 배우가 먼저라고 말하던 그가 여이수를 챙기지 못했던 것에 부끄러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 부끄러움을 털어내기 위해 어떤 방법인지 더 묻지도 않고, 방법이 있다는 내 말에 강한 워딩이 포함된 선전포고를 해버린 것 같았다.

그 선전포고에 깔린 것이 나에 대한 믿음이었고.

장인호 사장은 휴대폰을 끄고 '탁'하고 닫아버리더니 비어있는 소파 한쪽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긴장이 풀리는 듯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말했다.

"휴, 속 시원하네. 이윤태 이 새끼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맨날 후배들 똥군기나 잡고. 예전부터 소문이 안 좋았다니까. 여이수 씨 어깨 펴요. 잘했어요. 내가 이윤태 그 새끼 처맞는 꼴을 봤어야 했는데. 아쉽네."

장인호 사장도 연극을 할 때 이윤태와는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았는지, 후련한 듯 말했다.

"그래, 지우야. 니가 말한 방법이 뭐냐. 홍보팀? 홍보팀 데려다 쓰는 거야 뭐 문제겠냐."

"일단 시간 벌어야겠지요. 이윤태 그 사람이 난리 친다고 우리가 해야 할 일 못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아동극 제대로 진행하려면 우리 '라일라 공주'님 폭행사건 정리부터 좀 해야 될 거 같고요. 그거 대응하면서 이윤태 보내버릴 준비 하겠습니다."

"아 맞다. 이윤태, 그 새끼가 여이수 씨 상대로 고소했다고 했지?"

아까 전만하더라도, 여기에 이윤태가 이 자리에 없음에도 이름 끝에 꼬박꼬박 선배님이라 하던 호칭이 어느새 이윤태 혹은 그 새끼로 바뀌어 있다.

"고소 건은 사장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참에 '라일라 공주' 프로젝트를 여이수 씨한테 설명해주고 회사 전속 계약까지 진행하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해야 회사에서도 대응할 명분이 설 태고요."

"명분?"

"네. 이윤태가 갑자기 스태프들이나 배우들 손대기 시작하면 진짜 프로젝트 엎어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아동극 대부분 [벡터맨] 단기 계약으로 계약되어있는데, 이윤태가 [벡터맨] 끝나고 다른 극단 들어가는 거 막는다고 협박해버리면 버틸 스태프나 배우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다른 극단들 단장 중에 이윤태 말 안 듣는 사람 얼마나 있을 거고요."

"그···그건 그렇지. 그런데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냐?"

한다.

전생에 내가 당했던 방법이다.

이윤태는 집요하고 꼼꼼한 개새끼다. 지방에 있는 소극단 까지 다 연락해서 내가 못 들어가게 막았을 정도니까.

"합니다. 불법도 저지르···"

이때 나도 모르게 살짝 여이수를 바라봤다. 여이수는 살짝 움츠러들었고, 나도 당사자 앞에서 실수한 것 같아 아차 싶었다.

"하여튼, 자기 좋자고 그런 일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람인데 전화 몇 통 돌리면 되는 일을 안 할까요. 어차피 아동극 반응 보고 여이수 씨 전속 제안하려고 했던 것 아니었습니까. 그냥 좀 일찍 한다고 생각하고, 여이수 씨 전속 계약하고 일단 급한 폭행 부분 변호사 지원해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여이수 씨 연습에 집중할 수 있게요."

"그게 뭔 차이인데? 그래도 이윤태가 움직이면 어쩌려고? 다른 배우들 피해 가면 안 되잖아."

"에이 차이가 왜 없습니까. 사장님이랑 이윤태 두 사람이 싸우는 게 아니라, 청운 엔터테인먼트가 배우를 케어하기 위해서 하는 일상적이고 당연한 행동이 같을 수가 없죠."

"그런다고 이윤태가 가만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거야 그렇죠. 이렇게 일단 시간 벌어놓고, 이윤태는 따로 조져야지요."

"어떻게?"

확실히 장인호 사장이 이윤태와 친분이 없는 게 맞는 것 같긴 하다. 내가 연극판에 있을 때 이윤태의 만행에 관해서 소문은 꽤 돌았던 것 같은데.

"다들 왜 이 당연한걸 생각 못 하지. 왜 피해자가 여이수 씨 한 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뭐?"

"네?"

나 이외에 다른 3명이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상식적으로 여이수 씨 면접 첫날에 그 짓 하다가 병원 실려갔다는데, 그 이전 혹은 지금 극단원에 있는 사람 중에 더 심하게 당한 사람이 많지 않겠습니까? 이게 사실 피해자들이 부끄러워하면 안 되는 건데 수치심에 말 못하고 앓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을 걸요."

나는 미래를 알고 있기에 피해자가 더 많다는 걸 확신할 수 있다. 그 확신을 뒷받침 할 정도로 어이가 없는 이윤태의 행동이 설득력을 부여한다.

얼마나 세상이 쉬워 보였으면 면접 첫날부터 그 짓을 했을까.

어느새 다시 상체를 당기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골똘히 생각하는 장인호.

"그럼 홍보팀은 어디다 쓰게."

"사회적으로 죽여버리게요."

"뭐?"

"솔직히 연극계 누구누구 하나 성범죄 했다. 뭐 그런 걸로 신문 한 줄이라도 나겠습니까. 우리한테나 이윤태가 유명하지, 일반 대중들은 이윤태가 누군지도 모를 겁니다. 연극을 본 적 없는 대부분의 사람은 연극판이 원래 저런가 보다 하고 말겠죠. 자신과 연관없는 분야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테고요. 일단 판을 키워야죠. '창공' 출신 중에 성공하신 선배들 찾아가서 녹취나 인터뷰 따고, 피해자들 찾아 나서서 고소 준비하고··· 쉽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여이수 씨"

"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아무리 배려를 해준다고 해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여이수 자신 때문에 아동극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앞으로 진행할 연극까지 브레이크가 걸린 상황이니까. 거기에 더해 개인적으로 선후배 관계였던 장인호 사장과 이윤태까지 사이가 틀어졌고.

"힘드시겠지만, 아동극이 진행하는 도중에도, 이번 사건 관련해서 계속 도와주셔야 합니다. 계약에 따로 명시되지는 않겠지만요."

"아! 당연하죠. 제가 폭행한 것 때문에 그런걸요."

"아뇨. 폭행 건도 당연히 회사에서 서포트 하겠지만, 맞고소해야죠. 여이수 씨가 이유 없이 폭행한 게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다른 피해자들 찾아서 묶어서 같이 고소하게 될 겁니다. 그분들 설득도 맡아주셔야 하고요. 그리고···"

일부러 말을 끊어 다시 세 명의 집중을 이끌어 냈다.

"사장님! 사장님 꿈이 연극의 부흥이라면, 꼭 한번은 밟아야 합니다. 꼭 여이수 씨 아니었더라도 사장님이 생각하시는 게 회사만 잘 되는 게 아니라 연극 그 자체의 부흥이었다면, 어차피 죽이고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

어차피 아동극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이 큰 흥행을 못한다 하더라도 '라일라 공주'와 관련된 사업은 계속 밀고 나갈 수 있다. 단지 그 파괴력이 혹은 자리 잡기 까지의 시간이 더 걸릴 뿐이지.

그리고 이번 건만 잘 넘기면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이 흥행 못할 이유가 없고.

먼저 여이수의 전속 제안을 했던 것도 그런 뜻이었다.

장인호 사장이 흘려 넘겼던 건지, 아동극에 애쓰는 내게 주는 선물인지 모르겠지만, '라일라 공주'의 저작 재산권이 내게 넘어왔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던 여이수의 전속 계약 건 또한 진행하기로 했고.

이 둘을 묶어서 어떻게든 내가 이걸 붙잡고 해결해라는 뜻 아니겠나.

내 입장에서도 청운 엔터테인먼트를 종합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어서 내실을 다져놔야 한다. 내가 앞으로 맡을 배역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창공'에 대한 조사는 먼저 채 실장에게 맡겼다. 창공 출신 배우 중 갑자기 연극판을 떠났거나 영화배우로 무대를 옮긴 배우 위주로 조사해 달라고 했다.

장인호 사장에게는 회사와 계약된 로펌을 통해서 이윤태가 여이수에게 한 고소에 대응하고, 맞고소를 준비해달라고 했고.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이윤태와의 트러블을 대략적으로만 전해 들은 서병수 무대감독이 연습을 재개한다고 전해왔다.

그렇게 마지막 연습으로 약 일주일이 지난 후 전체 연습을 하기 위해 배우들이 모였다.

여이수도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표정이 좋아진 상태로 연습실로 왔고.

이전 이윤태에 대한 대응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미리 여이수한테 말해 놓은 게 좀 있다.

내가 투자자나 기획에 관여되어 있다는 점을 굳이 먼저 다른 배우들에게 하지 말아 달라는 것.

그리고 이 팀에 단장이 따로 없지만, 경력으로 봤을 때 여이수 당신이 임시 단장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을 그녀도 알 것이다. 이미 첫 단체 연습 때의 모습으로 여이수의 카리스마가 박살이 났으니까.

연극단의 단장? 카리스마가 절반 먹고 들어가는 직책이다. 그런 카리스마는 보통 실력에서 나오고. 그런데 대본리딩이나 첫 단체 연습때 다른 배우들 앞에서 너무나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줬던 그녀였다.

그렇다고 다른 배우에게 단장 역할을 맡기자니, 또 그만한 경력이 있는 배우가 없었다. 고만고만한 사람 중에서 임시 단장을 맡긴다면 여이수가 또 소외되고 단원들끼리 족보도 꼬여버리는 게 문제였다.

최대한 빨리 컨디션을 끌어올려서 임시단장으로서 권위와 위상을 되찾으라고, 또 배우들을 잘 이끌어 달라고 미리 언질을 줬었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여이수의 커리어, 그리고 그동안 쌓아온 실력을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한 거다.

약속된 연습시간 1시간 전. 나는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었고. 나와 비슷한 시간에 김범이 연습실로 도착했다.

"오 졸개1, 일찍 왔군. 역시 막내는 그래야지. 훌륭하다 졸개1."

"연극 짬으로 치면 너나 나나 막내 아니냐?"

"내가 누구? 연극 1편을 끝내고, 이번 연극의 주인공. 너는 누구? 졸개1. 너와 나의 차이를 그렇게 한두 마디로 줄이려 들지 마라. 건방지다 졸개1."

진짜 그때부터 김범은 말끝마다 졸개1을 달고 살았고 살짝 진심으로 화가 나려 했을 때 여이수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오오?"

"어? 저 아줌마 그때 그러고 나간 거 아니었어? 저 아줌마 계속 '라일라 공주' 하는 거야?

아··· 내부사정을 전혀 알 수 없었던 김범. 그리고 목소리가 너무 컸다.

"저기요? 김범 씨.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선배고, 나이도 많은데 말이 좀 심하신 거 아닐까요?"

어··· 여이수가 웃으면서 말하긴 하는데, 영 불안하다.

"맞잖아요. 나이 많으니까 아줌마. 싫으면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지 한술 더 뜨는 김범.

이거 김범을 말려야 할지, 여이수를 말려야 할지 헷갈리는데.

순식간에 여이수의 표정이 변하는 게 보였다.

"뒤질래?"

"뭐? 뒤질래? 아줌마 지금 그거 나한테 한 소리야?"

주변을 슥슥 둘러보더니 김범이 자신에게 한소리가 맞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여이수에게 다가갔다.

김범이 뭘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었겠지만··· 뭘 어떻게 하려고 했어도 안됐겠지만.

"아니 근데 이 아줌마가 뭘 잘했다고···"

김범이 다가가서 여이수의 어깨를 밀치려는 순간

'팟, 퍽'

칼날처럼 휘어들어가 정확하게 김범의 무릎을 강타하는 로우킥.

이어 무너진 중심을 파고드는 정권 지르기.

"오쓰."

김범은 비명 한번 못 지르고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극진 가라테가 아니라 태권도를 배웠으면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을 거라고 평가받는 가라데 엘리트.

연극배우 여이수였다.

아··· 내가 권위를 세우라고 하긴 했는데···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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