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추잡한 늙은이
장인호 사장 뒤에 채 실장의 양손에는 피자 십여 판이 들려있었다.
장인호 사장은 한 손에는 피자 몇판과, 한 손에는 전화가 들려 있었고.
"이윤태 선배님을 개 패듯이 팼다는 게 혹시 여이수 씨 맞습니까?"
딱 그 한마디에 앞뒤 상황이 모두 이해가 됐다.
여기 연습실에 모인 사람들이 따지고 보면 장인호 사장의 후배나 다름없지 않겠나.
저 연습실 사람들의 생각에는 그저 장인호 사장이 고용주나 돈줄에 불과하다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장인호 사장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힘든 여건에서도 연극판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버텨준 고마운 후배들.
예전 극단 시절이 생각도 나고, 혹시나 배우들이 굶지는 않을까 걱정 돼서 첫 리허설 한단 소리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겠지.
장인호 사장과 마주친 여이수는 당황해서 뭐라 말도 못하고 있었고. 여이수 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에서 연신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이수 씨' 이런 소리만 계속 들렸었다.
이윤태라···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 그리고 여이수가 이윤태를 개 패듯이 팼다면,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전생에도 엄한 짓 하다가 처맞았으니까. 이윤태가 이윤태 했겠지.
이윤태는 지금 기준으로 한 10년 쯤후에 완전히 몰락한다.
수십 년간 쌓아온 명성과 영향력을 미투 운동 한방에 잃고, 나락까지 가버린다. 단순히 여이수 뿐만이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 집요하고 오랜 시간 동안 그 더러운 짓을 해온 거다. 10년 후, 미투 운동의 활발하게 진행되고, 이윤태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속속 등장한다. 이후, 확실한 건수만 엮어 징역까지 산다. 그것도 꽤 오래. 그가 한 짓에 비해서 그게 오랜 시간이겠냐만은.
어쨌든, 장인호 사장과 여이수가 마주친 그 복잡 미묘한 상황에서 장 사장의 한마디에 그 모든 상황이 대충 이해가 되었고, 이 상황에서 내가 교통정리 못 하면 '라일라 공주'고 나발이고 연극까지 딜레이 되게 될 것 같았다.
이윤태 같은 쓰레기 때문에 우리 현주 작품이 늦는다? 전생에 연극판에서 내가 쫓겨 난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덮어두더라도 저건 못 참는다.
그리고 힘들게 생활했던 '창공'의 신입 시절 나를 버티게 도와줬던 여이수에 대한 호감도 남아있었고.
여이수한테 처맞은 이윤태가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그게··· 맞긴 한데요. 제가 쪼오금. 진짜 쪼금 때리긴 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여이수.
아무리 장인호 사장이 나이가 많다 하더라도 남자 아닌가. 내가 생각하는 그런류의 사건이 맞다면, 여이수 입장에서 이런 사람이 오가는 통로에서, 그것도 남자인 장인호에게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기 난감했을 것이다.
"허, 참 도대체 어떻게 때렸길래 늙은이를 전치 8주가 나오게···"
장인호 사장은 얼굴이 붉어지며 뭐라 뭐라 소리치려고 하지만 잘 나오지 않는 듯 혼잣말을 했다.
휴 다행이네. 그래도 죽이진 않았네.
"어? 사장님! 그 피자 배우들 주시려고 사오신 거 맞죠? 제가 들게요! 들어가실 거죠? 잘됐네 안그래도 지금 연습 잠시 쉬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내가 장인호 사장 손에 들려 있는 피자가 아니라, 장 사장의 손을 잡아끌었다.
장인호 사장을 먼저 연습실로 밀어 넣고, 자연스럽게 뒤에 있는 채시원 실장의 피자를 받아들어 연습실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채 실장에게 눈짓과 턱짓으로 여이수를 가리켰다.
채 실장도 매니저 생활 꽤 오래 했을 텐데 이 정도 눈치도 없으면 안되지.
내 앞에 있던 장인호 사장도 내가 양손에 피자를 들고 있으니까 엉겹결에 밀려서 연습실 안쪽까지 들어와 버렸고.
"피자 한 조각 하시고 연습하세요. 우리 장인호 사장님이 사오셨어요! 자, 박수!"
일부러 크게 말했다. 장인호 사장이 다시 연습실 밖의 여이수에게 가는 걸 막기 위해서 답지 않게 분위기를 띄우며 장인호 사장을 소개한 것이다.
"와~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어휴··· 먹고 합시다."
서병수 무대 감독도 이미 분위기 잡고 한소리 하기는 글렀다고 판단했는지 먹고 다시 연습하자고 하자, 다른 배우들도 피자 앞으로 몰려들었다.
"어이 졸개1, 피자 먹어라."
건들거리면서 내게 피자 한 조각을 내미는 김범.
이 새끼가 미쳤나···
"졸개? 그럼 너는 백터맨 타이거라고 불러줄까?"
"어허! 어디 이름 없는 졸개 따위가 주연 배우님한테 반말을 해! 떽! 그럼 못써!"
반쯤 장난으로 한 말인 건 아는데, 내가 있는데 자신이 주연배우를 차지한 것이 뿌듯해 하는 게 눈에 보인다.
피식 웃으며 김범이 주는 피자를 받아 들고 연습실 한쪽에 앉았다. 김범도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옆에 풀썩 주저앉았고.
"하-씁. 이거 생각보다 재밌네. 이거 왜 재밌냐. 노래하고 춤추는 거. 생각보다 나 뮤지컬 쪽에서 재능이 있을지도?"
"지랄병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지. 걷는 거나 다시 배워 인마. 요즘 벡터맨은 일수 받으러 다니냐?"
"왜 내가 걷는 게 왜! 뭐!"
"무릎 오므리고, 평소 걷는 것처럼 걸으면 안 돼. 동선 꼬이잖··· 아니다. 어휴 내가 또 뭘 너한테 그걸 설명하겠냐. 설명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영상 매체 연기만 하다 온 배우가 연극이나 뮤지컬에 처음 오면 걸음마부터 다시 배운다는 말을 한다.
편집된 장면, 그리고 바스트, 롱, 오버숄더 등등. 신체 일부만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혹은 전체가 나오더라도 영상에서는 극히 일부분뿐이고.
하지만 연극은? 말 그대로 온몸으로 연기해야 한다. 걷는 모습부터 뛰는 모습 하나까지 관객의 눈에 다 들어온다. 그런 부분까지 다 컨트롤 해서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의식하며 연기를 해야 연극을 잘한다고 할 수 있고.
일반인이 일평생 거울을 보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연극배우라 하면 거울을 보고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고, 어떤 움직임을 하더라도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그려져야 하는데. 김범한테 그 수준을 요구할 수도 없다.
그걸 내가 김범을 붙잡고 일일이 가르쳐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왜 또 연극은 잘 하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말도 없고. 연기학원에서 배웠다는 것도 한 두 번이지.
"하··· 새끼. 연극은 내가 잘 아니까 걱정 말라고. 그건 그렇고 저 '라일라 공주' 괜찮은 거 맞아? 채 실장님이 그러던데. 저 여자 니가 추천했다고. 니가 추천했다길래 나도 엄청나게 기대하고 봤는데···내가 봤을 때 그냥 그런데? 잘하는 거 맞아? 내가 좀 연기에 대해서 알려줘야 하나?"
이게 뭐 교수가 학부 졸업생을 바라보는 관점 뭐 그런 건가. 졸업한 학부생으로서 막 많이 아는 것 같지만, 박사 과정 끝낸 교수도 자기분야에서 모르는 게 많거든.
[폭력의 사슬]이 애를 다 버려 놓았네. 확실히 영화가 너무 크게 성공했다. 김범 허파에 바람이 빵빵하게 찰 만큼 말이다. 나로서는 김범 니가 더 걱정이다만···
"범아. 아니 범이 형. 내가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혹시라도 여이수 선배한테 깝치지마. 알았지? 진짜 내가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연기든 뭐든 진짜 깝치면··· 이것도 아니다. 그냥 한번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뭐든지 몸으로 배우는 게 최고긴 하지."
허파에 바람 좀 빼줄까 하다가 말았다. 전생의 김범은 조폭연기 등으로 오래 시간 연기판을 굴러다니면서 내공을 쌓고, 이후에 주연 연기에 진입했다. 그런데 지금은 불과 2년 만에 아동극이지만 주연을 맡았고.
[폭력의 사슬]이 지난 생과 달리 크게 성공했고 그에 따라 김범의 위치도 달라진 상태다. 뭐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김범의 허파에서 바람 빼주겠지. 실패를 계속하다 보면 성장하는 거니까.
"이새낀 뭐만 하면 아니래."
그렇게 피자를 먹으며 김범과 티격태격하며 놀고 있는데, 연습실 문이 열리면서 채시원 실장이 들어왔다.
딱 봐도 심각한 표정으로 장인호 사장의 귀에 뭐라 소근거리는게 보였다.
내가 앉아있는 위치가 딱 연습실 문이 있는 반대편이었는데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여이수가 핸드폰을 쥐고 고개 숙인 모습으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고.
내가 기억하던 항상 당당하고 밝았던, 그리고 멋있었던 선배 여이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대충이나마 왜 저러고 서 있는건지 예상이 됐기에 나도 살짝 마음이 안 좋았고.
그때, 문앞을 가리는 장인호 사장의 모습. 장인호 사장이 문을 닫을 때 살짝 표정이 보였는데, 딱 아까 화를 참던 모습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내가 먹던 피자 조각을 버리러 가는 틈에 혹시나 장인호 사장과 채시원 실장이 차를 타고 떠날까 봐 김범에게 먹던 걸 던지다시피 하고 일어났다.
"야, 이거 나 마저 먹어라. 나간다."
"에이씨, 먹던걸 주고 가냐. 안 먹어 이 새끼야.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여기 와있는데. 순 양아치 새끼."
그런 김범의 투덜거림을 뒤로 한 채, 장인호 사장과 채시원 실장의 뒤를 쫓았다.
***
장인호 사장은 아직 운전기사가 없다. 그래서 연습실까지 올 때도 자기 차량을 자신이 직접 몰고 왔고.
내가 주차장으로 올라 갔을 땐, 이미 채시원 실장과 장인호 사장이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있었다. 여이수가 이제 막 차를 타서 출발하고 있었다.
"사장님!"
내가 달려가 차를 막고 본 네트를 탕탕 치자, 그제야 장인호 사장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야! 이 차 비싼 거야!"
내가 차 문을 손가락질하자 그제야 문을 열어 주는 장 사장.
냅다 문을 열고 탔다.
"사장님 회사 가시죠? 저도 같이 가요."
"왜? 너 연습 안 하냐??"
"연극의 주인공이 빠지는데 연습이 되겠습니까. 서 감독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그리고 저도 투자자로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고요."
"흠··· 알았다. 일단 가자."
잠시 고민하던 장인호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출발시켰다.
내가 미리 내가 투자나 기획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배우들에게 하지 말아달라 부탁했다. 시간이 지나서 스태프와 배우들이 섞이면 자연스럽게 퍼질 내용이지만, 같이 호흡을 맞춰서 연극을 해야 되는 다른 배우들과 시작부터 선입관이나 차이 같은 걸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돈 많은 어린 배우가 취미로 연극을 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별로고, 돈으로 배역 샀다는 이야기도 별로니까.
이런 부분은 같이 연습하고 호흡을 마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내용이다.
내가 연극에 커리어가 없는 것이지, 연극 연기에 실력이 없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내가 여이수가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 자체가 장인호 사장한테 무슨 일인지 꼭 알아야겠다고 어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서 따라가는 것은 아니고, 혹시나 장 사장이 잘못된 판단을 할까 봐 따라나선 것이다.
정확하게는 이제 시작하는 아동극 뮤지컬이나 다음 연극 프로젝트에 끼칠 영향 때문에 장 사장의 눈이 흐려질까 걱정되어 따라온 것이 맞다. 그만큼 이윤태가 가지는 연극계의 파워는 막강하다.
겨우 구한 스태프들이 이유도 없이 빠져버린다거나, 배우들이 우수수 빠져버린다거나. 혹은 대관 계약이 끝난 공연장이 갑자기 취소된다거나.
대충 방금 생각해낸 이윤태가 할 법한 일이 이 정도이다.
이윤태는 연극계 원로로서 각종 연극제 심사위원은 물론이고 각종 정부지원금 심사에 관여하고 있다. 거기에 현직 연극단의 단장들 대부분이 그의 후배나 마찬가지.
연극판에 일단 발을 들이면 이윤태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구조.
연극배우 하나둘은 묻어버리기에 충분한 영향력이 있기에, 배우나 스태프들 미래를 담보 잡고 압력을 행사했다.
차가 출발하고 회사까지 들어가는데, 4명 모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이수는 말없이 휴대폰만 꼼지락대고 있었고.
퇴근 시간에 걸려 도로 위에서 한참을 허비한 끝에 회사에 도착했다. 이미 꽤 늦은 시간이었고, 회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일단 사장실로 가지."
"네, 저는 커피 타서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채 실장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장 사장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돌아가는 사정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사장님 저도, 지우 씨 도와서 커피 타고 들어가겠습니다."
다행이 채 실장이 눈치껏 대답해 줬고, 여이수와 장인호 사장은 사장실로 들어갔다.
채 실장과 커피를 타면서 슬쩍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사장님 왜 이렇게 화난 거예요?"
"하··· 이윤태라고 아세요? 연극계 원로이신 분?"
"네 알죠. 대충은."
얼마나 쓰레기인지 내가 제일 잘 알지. 미래에 피해자를 자처한 사람만 5명이 넘었으니까. 아마 수치스러움에 밝히지 못한 사람은 더 많겠지.
"아시는구나··· 여이수 씨가 그 이윤태를 아주 그냥 복날 개 패듯이 팼다고 하더라고요. 이가 3개 날아가고, 장 파열에··· 전치 8주가 나왔대요. 세상에 겉보기에는 여리여리한데··· 하여튼 이윤태가 여이수 씨를 폭행으로 고소하는 바람에 여이수 씨가 난감한가 보더라고요. 이윤태는 우리 사장님한테 당장 여이수 당장 짜르라고 하고."
어쩐지, 꼭 받아야 할 전화라는 게 경찰이나 검찰 그런 쪽이었나 보지.
그제야 연기에 집중 못 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전화를 받으러 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장님이 이윤태랑 친해요? 이윤태 맞은 것 때문에 저렇게 화내시는 거라고요?"
채 실장은 아무도 없어 불이 다 꺼진 사무실을 의식적으로 둘러보며 듣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에이, 아니요. 그냥 같이 연극을 하면서 아는 사이죠! 뭐. 그것보다 여이수 씨 말 들어보니까, 이윤태가 여이수 씨 성추행··· 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사장님이 좀 빡치시 것 같은데."
"사장님이 어떻게 하신다는 말은 없고요?"
"그건 이제 들어가서 들어봐야죠."
혹시나가 역시 나네. 의외였던점은 여이수가 과거에는 그러한 수모를 참고도 '창공'을 택했다는 건데, 이번생에는 아동극을 택했다는 점이다. 여이수의 심경변화의 이유까지는 몰라도,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장인호가 혹시나 이윤태 편을 들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런건 아닌듯 싶으니까.
채 실장과 커피를 들고 사장실에 들어가니 장 사장과 여이수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장 사장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고, 여이수는 이등병처럼 굳어 있었다.
나와 채 실장이 자리에 앉자마자 장 사장이 입을 열었다.
"여이수 씨··· 상황은 이해가 되는데··· 조금 심하셨어요. 나이도 많은 양반인데··· 잘못됐으면 어떡할 뻔 했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운동을 좀 해서."
"아니, 아니 죄송할 게 뭐 있나. 죄송할 일은 아니지. 여이수 씨는 정당 방위한 건데. 미안해요 내가 말실수 했어요."
양 손을 흔들며 아니라고 말하는 장인호.
이윤태가 맞아 죽었으면 여이수가 살인자 될 뻔했다는 의도로 한 말이었겠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오해 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다시 말이 없는 장 사장.
이제 나오지 않아도 된다, 미안하게 됐다. 이런 말은 하고 싶어하는 게 뻔한데. 장 사장도 도저히 그 말이 안 떨어 지는 게 보였다.
여러 직원이 애써 프로젝트 만들어서 이제 한 달 뒤면 첫 공연 올려야 한다. 사업가로서, 그리고 사장으로서 정 들기 전에 여이수를 내치는 게 맞는다는 걸 장인호 사장도 알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적으로는 그 말이 안 나오는 거지.
"사장님 제가 밖에서 대충 듣고 왔는데요.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뭐? 어떻게?"
고개 숙이고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있던 여이수도 번쩍 고개를 든다.
"사장님이 걱정하시는 게 뭔지 알아요. 이윤태 그 사람이 꼬장 피울까봐 걱정되는 거 맞으시죠? 저한테 홍보팀 붙여주시면 그 사람 꼬장 못 피우게 막아볼게요."
"뭐? 홍보팀?"
"대신, '라일라 공주'만 따로 때서 저작 재산권 저한테 주세요. '라일라 공주' 만드는 거 어차피 제가 계속 코칭하면서 키워야 할 텐데 아예 제가 맡아서 키워 보게요."
고개를 갸웃하는 장 사장.
"그게 돼?"
연극을 시작으로 키우려 했던 '라일라 공주'.
어차피 이번 연극이 실패하면 저 '라일라 공주' 스타 만들기 계획도 쓸모없어진다.
그렇게되면 굳이 이윤태와의 관계 따위도 신경 쓸 필요 없어질 테고.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장 사장으로서는 선택지가 생기는 거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장 사장의 판단을 도와주기로 했다.
나를 믿을 필요까지도 없다. 내가 해온 것만 믿으면 된다 생각하고 일단 질렀다.
거절한다고 해도 프로잭트 자체가 날아가는 건 아니니까. 여이수를 뺀 프로잭트가 될 뿐이지.
만약, 수락한다면 장기적으로 연극 제작에 플러스가 될일이기도 하고.
"방법이 있냐?"
"네."
그때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올라와 있던 장 사장의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인상이 확 구겨지는 장인호 사장.
"네, 선배님. 장인홉니다."
스피커 너머 뭉개지는 소리로 격양된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살짝 눈이 마주친 장 사장이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야이 추잡한 늙은이야. 곱게 늙어야지 너 같은 새끼 때문에 한국 연극이 발전이 없는 거야.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