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딱 대!
여이수는 이지우와의 만남으로 충격을 받았다.
이지우가 말했던 '꿈을 나누는 사람' 이라는 말.
그녀가 늘 하는 말이었다.
'해달별' 극단을 해체 했을 때 단원들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고.
연극은 혼자 할 수 없으니까. 같은 꿈을 꾸고 같이 이루는 극단원들. 그녀에게 극단원들은 함께 꿈을 나누고 나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지우가 말했던 꿈을 나누는 대상과 의미가 달랐다. 이지우는 관객과 꿈을 나누는 연극인을 말했다.
정말 당연한 건데 잊고 지냈던 것이었다.
여이수는 단장이 되고 난 뒤 관객이 아니라 항상 단원들만 생각했다.
그녀에게 단원들은 힘겨운 상황에서 챙겨야 하는 식구들이었다. 그래서 항상 단원들과 꿈을 나눈다고 생각했다.
돈은 없어도 꿈을 나누는 동료가 있다는 그런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다.
돈을 주고 연극을 관람하는 것은 관객들이고,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관객이다. 그런데 연극을 하는 자신과, 동료에게 취해 있던 것은 아닐까.
소위 말하는 예술뽕에 취해서, 연극을 하는 자신을 동정하고 연민했던 것은 아닐까.
답이 없는 물음이 여이수를 괴롭혔다.
진심으로 관객을 존중하는 사람은 이지우인데, 꼴에 연극인이라고 그가 준비하는 아동극을 하찮게 여겼다.
아동극을 하는 것을 쪽팔려 했던 자신이 쪽팔린다.
진짜 제대로 연극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동극을 준비하던 이지우였는데.
여이수는 부끄러움과 연극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창공'의 면접장으로 향했다.
아동극은 '창공'의 입단에 실패 했을 때의 스페어타이어 같은 존재였었다. 그런데 면접장으로 가는 내내 계속 아동극과, 이지우의 모습이 계속 생각나며 마음이 답답했다.
극장 한편에 마련된 사무실로 갔다. 여이수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한 단원이 바로 단장실로 안내해 줬다.
여이수는 작지만 한 연극단의 단장으로 있었다. 그 경력을 인정받아 극단 '창공' 측의 배려로 다른 테스트 없이 간단한 인터뷰 형식으로 면접하기로 했다.
공개 오디션으로 배우를 모집하는 청운 엔터테인먼트 와는 차이가 나는 대우.
오랜 시간 연극판에서 굴러 온 그녀의 커리어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창공' 이었으나···
글쎄, 이걸 대우라고 생각해야 할까. 연극배우를 연기 한 번 안 보고 뽑는 게 맞나?
며칠전 이지우와의 만남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이수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들어간 단장실.
"안녕하세요. 여이수 입니다."
"어 그래그래, 어서 와. 내가 우리 여 배우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창공'의 단장 이윤태. 그가 일어나 여이수를 반겼다. 백발이 성성한 장발을 뒤로 질근 묶은 주름진 얼굴. 개량한복까지 걸치니 누가 봐도 도사 아니면, 예술가를 떠올릴법한 인상이었다.
책상 앞에 자게로 된 명패에는 '단장 이윤태'라고 쓰여 있었다.
사실 여이수는 이윤태를 처음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여이수가 어찌 이윤태를 모를 수가 있겠나. 연극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윤태의 극본을 연습 안 해본 사람이 없을 텐데.
그리고 그는 지금에 와서 대형 극단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업계 전설 중 한 명이다.
그만큼 돈은 못 벌어도, 극단 '창공'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연극판에서 인정을 해주는 분위기였다.
간단한 소개와 근황을 나누고, 이윤태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럼 내일부터 극단으로 나오는 걸로 하지."
"네?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이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여이수는 좋으면서도, 뭔가 아쉬운··· 그런 기분이었다. 이대로 극단에 들어가면 끝인가, 하는 생각.
그리고 한편으로는 의아함이 생긴다.
극단 '창공'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연습했다고 하던 선배들의 이야기. 그런데 간단한 면접으로 입단이 결정된다는 게 쉽게 이해가지 않았다.
분명 이윤태는 자신의 연기를 본적이 없을 텐데.
이윤태가 여이수가 운영했던 '해달별'의 연극을 보러왔다면, 자신이 못 알아 봤을 리가 없다. 자신이 못 봤다고 해도 단원들 중 누구 하나는 이윤태를 알아봤을 테고, 그랬다면 여이수도 알았을 테니까.
"그래그래, 오늘은 다른 거 말고 잠시 발성이나 보자."
첫 만남부터 연기수업을 하는 이 상황이 의아했지만, 여이수는 테스트라 생각하고 임했다.
'창공'에서는 이제 막내나 다름없고, 본격적으로 배역을 위한 경쟁을 해야 되니까.
여이수는 벌떡 일어나 연기 준비를 했닺
"어떤 거 하면 될까요, 선생님."
"선생은 무슨. 단장이라 부르게. 내가 쓴 작품 알고 있나?"
"네! 단장님! 예전에 연극 [게릴라] 여자주인공 '엄순이' 역 한 적 있습니다."
씩씩하게 말하는 여이수와, 고개를 끄덕이는 이윤태.
이윤태는 어쩐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ㅈ"[게릴라] '엄순이' 대사 중 아무 대사나 한번 쳐봐."
여이수는 오랜 여전 대학생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당시 연습했던 대사를 쳤다.
"어허, 단전에 힘을 넣어야지. 연극 발성은 복식호흡이 기본이야."
은근하게 아랫배에 손이 올라온다.
여이수는 너무 놀랐지만, 가까스로 대사를 놓치지 않고 마저 했다. 이정도 임기응변이야 여이수에게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를 치려는 순간.
징그럽고 흉물스러운 손이 밑으로 조금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웃기게도 그 상황에서 생각난 건, 얼마 전에 최종합격 통보를 받았던 아동극이었다.
동시에 드는 기성 극단에 대한 혐오감.
대형극단에서 커리어 좀 못 쌓으면 어떤가.
꿈을 위해 이런 것까지 참아야 하나.
그런 생각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한 남자가 떠올랐다.
연극인보다 더 연극인 같았던 배우.
꿈을 나누자던 배우.
그리고, 눈을 뜨자 눈 앞에 몸을 나누자고 덤벼드는 늙은 짐승이 보였다.
여이수는 하던 대사를 멈추고 아래를 바라봤다.
일말의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이 없는 추악한 얼굴이 보였다.
'이러려고 테스트가 없었구나'
테스트가 면접으로 바뀐것도, 면접이 단장과 1:1 면접으로 바뀐 것도, 모두 여이수의 경력에 대한 존중이 아니었다.
"뭐해? 계속 대사 안 하고."
"디질래?"
여이수의 말에 이윤태는 눈만 끔뻑거리며 올려봤다. 그러더니 오히려 역적을 내기 시작했다.
"뭐? 너 지금 뭐라 그랬냐. 너 연극 더 안 할 거야? 내가 전화 한 통이면-"
'퍽-'
이윤태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어느새 날어온 여이수의 주먹이 이윤태의 턱을 돌려버렸다.
볼품없이 나동그라지는 이윤태. 눈만 끔뻑 거리면서 이게 현실인지 꿈이지 헷갈려 한다.
"뭘 놀래. 나한테 이렇게 한 사람 처음이야 뭐 그런 거냐? 딱 대! 씨발아!"
여이수는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이윤태를 두들겨 팬 후, 도망쳤다.
뒤로는 '창공'의 배우들이 쫓아오고, 앞으로의 뒷감당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여이수는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었다.
간신이 뒤쫓아오는 '창공'의 단원들을 따돌리고, 택시를 탔다.
그리고 차오르는 호흡을 정리할 틈도 없이 지갑 안에 넣어놨던 청운 엔터텐인먼트 회사의 채시원 실장의 명함을 꺼냈다.
여이수는 채 실장이 전화를 받자마자 외치듯이 말했다.
"채 실장님 맞으시죠? 저, '라일라 공주' 할게요!"
***
여이수가 캐스팅 확정됐다는 소식을 채시원 실장 편으로 들었다.
다른 배역의 배우들까지 속속 캐스팅이 완료되고, 아동극 프로젝트의 진행은 급물살을 탔다.
연습실 대여, 특수효과팀 섭외. 작사와 작곡가 섭외···등등.
그리고. 연습.
나는 현주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무려 '졸개1 & 피코(라일라 공주의 애완용 로봇)'의 역을 따냈다.
꼭 아동극뿐만 아니라, 뮤지컬 자체가 인건비가 부족하고 원활한 배우수급이 안되기에 앙상블(군무, 멀티배역, 합창 등을 하는 배우)은 기본이다.
'졸개'와 '피코'. 두 배역 모두 가면과 인형 탈을 쓰고 하는 배역.
얼굴이 노출 안 되는 배역이기에 부담도 적다. '이지우'가 연극을 한다는 사실도 숨길 수 있고.
일단 마케팅 측면에서 [악의 기록]은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이고 주인공이 사람 많이 죽이는 캐릭터이다. 그런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텀도 없이 아동극 포스터에 나온다?
결정권을 가진 부모들이 봤을 때 좋을 수가 없고, 아동극의 마케팅적 측면에서는 마이너스 일 수밖에 없다.
아동극에서 배우로 등장하고 싶은 것은 전적으로 내 개인적인 욕심이다.
현주가 집필하는 모든 작품에 출연하고 싶었다.
현주의 꿈을 나로 인해 이루고 싶은 그런 욕망 때문에 시작한 출연이었다. 그렇기에 인형 탈이든 분장이든 문제 될 게 없었다.
채 실장과 장 사장도, 내가 맡은 배역이 다른 배우로 쉽게 교체가 가능한 배역이기에 허락해줬다.
장인호 사장은 최소한 나에게 현주가 어떤 사람인지 알거든.
캐스팅이 끝난 뒤, 약 한달이라는 시기가 지났다. 대본 리딩과, 개인 연습을 끝내고 첫 리허설이 시작됐다.
"다시요. 여이수 씨 대사부터 다시 할게요."
수 차례 NG를 만들어내는 여이수.
최종병기 그녀라 생각하고 데리고 온 여이수가 도통 극에 집중을 못 하고 계속 실수를 연발하고 있었다.
다른 배우도 아니고, 여이수가 말이다. 지금의 그녀 모습은 내가 연극판에서 유일하게 선배라 생각하고 인정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심지어 연습실에는 그녀의 학교나 같은 극단에 소속된 후배들까지 몇몇 있었다. 무대감독에게 깨지는 모습은 옆에서 보는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방으로 꾸벅 인사하는 여이수.
냉냉한 연습실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휴대폰 벨 소리.
'띠리리리리'
"하··· 진짜. 휴대폰 누구야! 지금 장난해? 기본이 안된 사람들이라 무슨 연극을 한다고."
아니겠지. 아닐거야. 설마 저것도?
하지만···
혹시나 해서 여이수를 슬쩍 보니 딱 그 표정이었다.
'조땠다'
하··· 여이수 선배 너 마저··· 과거로 돌아오니 대단하게만 생각됐던 미래의 거장들에게 실망만 하게 된다.
이수한도 그랬고, 강진호도 그렇고.
예기성 선생님은 지금도 레전드시니까 제외하고.
여기에 모인 배우들 대부분이 어느 극단 소속이 아니라, 캐스팅으로 섭외된 팀에 가깝다. 당연스래 중심을 잡아 줄 단장이 없는 상태고. 배우 중 가장 고참으로 분위기를 주도해야 하는 여이수는 뭣 때문인지 몰라도 정신 못 차리고 있었다.
서병수 감독은 이 기회에 푸닥거리 한번 해서 배우들 군기를 잡을 필요를 느꼈는지 팔짱을 끼고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진짜 이러다가 무대에서 사고라도 터지면 그냥 욕 한 번 먹고 끝날 일이 아니니까. 관객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고요 속에 휴대폰 벨 소리만 울리고.
"감독님··· 죄송한데 저 전화 꼭 받아야 돼서요."
여이수가 그렇게 말하더니, 쪼르르 달려가 휴대폰을 들고 연습실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연습실에 와있는 모든 배우가 황당한 상태로 여이수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서병수 감독은 '허, 참'을 연발하며 여이수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아닌데···
내가 그 모습을 보고 든 생각은 실망이 아니라 오히려 걱정에 가까웠다.
내가 아는 여이수라는 사람은 절대 대충 하는 사람이 아니었거든. 아무리 시간이 변했어도 사람의 결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연극이 좋아서, 사람이 좋아서 젊은 나이에 극단을 차리고, 그 극단이 망했는데도 다시 연극판으로 돌아온 사람이 여이수다.
연극을 대할 때 항상 진심이었던 여이수가 이토록 연극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서병수 무대 감독에게 다가가 잠시 확인해 보고 오겠다고 말한 뒤, 바로 여이수를 쫓아갔다.
서병수 무대감독 입장에서 나는 좀 애매하지 않겠나. 배우로서 커리어는 몰라도, 투자자니까. 그리고 이 기획이 이정도로 큰 볼륨으로 만든 당사자이기도 하고.
연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을때 내가 투자를 했다거나, 혹은 기획에 깊이 관련됐다는 말은 다른 배우들에게 하지 말아 달라 미리 부탁해 놓은 상황.
그럼에도 내가 추천했던 배우가 연습 분위기를 조져놓는 그 상황에 내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연습실 문을 딱 열었을 때, 여이수와, 장인호 사장이 마주하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장인호 사장은 평소 사람 좋은 모습의 표정은 찾을 수 없었고, 굉장히 화난 모습으로 말했다.
"이윤태 선배님을 개 패듯이 팼다는 게 혹시 여이수 씨 맞습니까?"
누가 누굴 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