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작가님의 남자친구
평소보다 조금 늦게 청운 엔터테인먼트로 출근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의례적으로 하는 외래진료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건강상에는 큰 문제가 없고, 스트레스 관리만 계속해주면 된다는 의사의 말이었다.
사실 나 하나 없다고, 신사업이 안 돌아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거면 이 사업 접어야지.
하지만 나 때문에 기존 기획을 대폭 확대 변경하게 됐으니까. 도의적 책임, 또한 현주의 첫 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애착. 그리고 앞으로 내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면 내 울타리가 되어줄 청운이라는 회사를 키우기 위해서도 나는 이 프로젝트를 나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맡아야 할 배역을 모두 스튜디오 나우에서 수급할 수는 없으니까. 원하는 배역을 맡기 위해서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싸이즈를 좀 키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팔자에도 없는 회사원 노릇을 하는 것이고.
아무래도 청운은 배우 위주, 그리고 에이전시 위주의 회사다. 통칭 기획사로 불리는 회사처럼 배우나 아이돌을 데뷔전부터 트레이닝 시키고 만들어 가는 회사와는 차이가 있다. 몇 년 전 주식시장에 상장한 대형 기획사와는 아직 비교하기도 힘들 정도니까.
지금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주 전략은 연극 혹은 영화계의 무명 배우를 데려와 영업력을 바탕으로 키우는 것이 주로 사용하던 방법이다. 나나 김범이 딱 그런 케이스다. 무명이지만 가능성과 재능을 가진 배우를 계약하는 방법.
다만 이 방법에는 성장에 한계가 명확하고, 다른 대형 기획사처럼 아이돌을 기획하기에는 인력도, 노하우도 없는 상황.
거기서 '연극', 그중 아동극을 기획하는 것은 똑똑한 발상이다.
대박이나 초대박은 없어도 안정적으로 연극판에 진입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소속사라는 게 결국 사람 장사인데, 연극의 오디션 부터 소속사 업무까지의 연계를 생각하면, 연극판에 진입해서 두각을 보이는 인재를 빠르게 수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 않겠나.
그렇기에 이번 아동극 프로젝트는 일종의 마중물 같은 거다. 배우 에이전시 위주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시금석.
갑자기 투자금이 추가된 프로젝트.
다만 내가 넣는 투자금은 이미 특수효과에 쓰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상황이었다. 다만 아직 특수효과팀을 섭외할지, 아니면 기계만 대여하고 우리 인원으로 채울지 등의 자잘한 세부 결정이 필요한 일이 남았다.
그리고 오디션.
기본적으로 배우 친화적인 회사다. 거기에 장 사장은 연극에 대한 애착이 상당하고. 연극의 부흥을 꿈꾸는 장 사장 답게 업계표준보다 훨씬 좋은 대우로 아동극 배우를 모았다. 거기에 기획을 다시 짜면서 추가로 연습 간 수당까지 챙겨주는 이례적인 대우까지.
모집공고가 갱신되고 난 다음, 추가로 많은 배우가 지원했고, 제법 경쟁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다.
회사에 도착하니 회사 입구가 어제와 다르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A4용지. '벡터맨 1차 배우 오디션'이라 적혀있고 아래에는 화살표 모양과 2층이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아, 오늘 오디션 날이었구나.
그제야 오늘 날짜가 생각난다.
한 며칠 공연 기획 수정에 정신없다 보니 놓친 일정. 사무실에 들어서 현주의 작업실로 향했다. 현주의 작업실 앞에서 신사업 인원들이 오디션 준비를 한다고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그 중앙, 채 실장이 몇몇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채 실장은 나를 보더니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어서 와요 지우 씨."
함께 있던 스태프는 오늘 면접을 진행할 무대감독 서병수 감독이었다. 장인호 사장의 후배이자 채 실장의 지인.
지인이라서 능력이 없는 사람을 친분으로 앉혀 놓은 것은 아니었다. 서병수 감독은 나중에 성인 뮤지컬을 활발하게 연출 하는 사람이다. 연극판이라서 인지도가 떨어질 뿐이지 지금도 무대감독치고는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 중 한 명이고.
"이지우 씨도 면접에 들어오시나요?"
서병수 감독이 나를 보며 묻는다.
"네? 저요?"
신종 암살법인가. 아니면 농담인가.
"안 되죠. 하하, 여기 오디션 보는 분들 다 선배들이나 마찬가지인데."
아무리 영화와 연극의 카테고리가 다르다고 해도, 연기하는 사람들인데 데뷔 2년 차 신인배우가 오디션장에 면접관으로 간다? 안 될 말이다. 그러라는 법은 없지만, 기분이 있지 않은가. 오디션에 지원한 참가자 중, 신인배우도 많지만, 경력이 4~8년 된 꽤 오래 연극 활동을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배우들이 면접관으로 앉은 내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자괴감이나 자존심은 둘째 문제고, 이 연극 자체를 더 우습게 알지 않을까?
내가 연극 쪽에 굉장한 커리어가 있다면 어떻게 비벼서라도 들어가 보겠지만, 영화도 아니고 연극판에서 내가 면접관으로 앉는 것은 오버였다.
"아쉽네요. 같이 들어가면 좋았을 텐데."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니 농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미 몇 차례 회의로 내 생각과 의도를 잘 알고 있는 서병수 감독이다. 아동극부터 시작할 연극의 부흥. 스타를 만들고, 그걸 장기적으로 이끌고 갈 계획. 또 연극을 재미있게 보고 자란 아이들이 연극이라는 취미를 계속 가지고 가, 미래에는 특정 소수의 매니악한 취미가 아닌 좀 더 대중적인 취미가 될 수 있게끔 하자는 원대한 이상까지.
몇 번의 회의로 이러한 내 생각을 신사업 팀원들과 서병수 감독에게 주입해놓은 상태이다. 처음에는 나이 어린 투자자가 하는 잔소리쯤으로 치부하던 서병수 감독도 체계가 갖춰진 내 말이 현실성이 보이자 나를 믿어 주는 중이었고.
심지어 서병수 무대감독은 나를 '벡터맨 타이거'로 캐스팅 하려는 무리수를 뒀다. 물론 현주의 결사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나도 출연하고 싶긴 한데···
도저히 현주가 설득이 안 된다. 곧 [악의 기록]이 개봉하고 나면 각종 홍보 일정이 잡힐 것이다. 그 홍보일정과 연극연습 일정이 겹칠 것을 우려한 현주가 이번 연극에 내가 배역을 맡는 것을 결사반대했다.
한 번 무리하다가 쓰러지는 걸 현장에서 본 현주. 여러 작품을 한번에 작업하다가 또 무리할까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악의 기록]에서 쓰러진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전생의 기억 때문에 힘겨웠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기에 그저 괜찮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서병수 무대감독과 이야기를 끝낼 때 쯤, 현주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어머, 저 기다리셨던 거예요? 노크하시지."
"자 가시죠. 작가님."
웃으며 현주를 에스코트하는 채 실장. 마치 자신이 관리하는 배우를 안내하는 모습이었다.
아, 모두 현주가 준비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들이 부담스러웠는지 현주는 나를 보고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지나간다.
나는 그 모습을 그냥 기분 좋게 보고 있었고.
뭔가 뿌듯한 모습?
스태프들이 '작가님'하면서 현주를 모셔가고, 대우받는 그 모습이 대견하고, 대단하고.
그런 거 있잖은가.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올림픽에 출전만 해도 플래카드 걸고, 우리 동네 누구누구가 올림픽 출전했다고 뿌듯해하고 자랑하고, 그런 거.
그게 동네 사람 누구누구가 아니라, 내 여자친구면 말 다 했지. 어쩐지 옆에 서서 내가 저 작가분의 남자친구라고 티 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이지우의 여자친구 박현주가 아니라, 박현주 남자친구 이지우라고!
***
이것 참 할 게 없네.
막상 신사업을 주도하는 팀원들이 모두 오디션에 빠져 버리자 내가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다른 팀원들이 있을 때는, 이것저것 물어보려 많이 오다 보니, 그냥 앉아만 있어도 할 일이 생겼는데, 모두 빠지니 나도 할 일이 없다.
면접관으로 오디션장에 들어간 채 실장, 현주에게는 이미 내가 찍어 놓은 몇몇 배우를 말해놓은 상황이었다.
그중 여이수 배우를 유심히 봐달라고 했다. 본적도 없는 연극을 언급하며, 인상 깊은 연기를 한다고 칭찬을 좀 했다.
최근 연기를 안 봤을 뿐이지, 나는 여이수의 연기를 안다.
그렇기에 내가 여이수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딱 그 정도.
내가 전생에 연극판에 본격적으로 입단해서 활동한 게 지금부터 약 3년 정도 후. 그러니까 지금 연극배우 중, 좀 잘한다 싶었던 배우들은 다 머릿속에 있다.
내가 한창 연극배우로 활동할 때 같이 활동한 배우들이었으니까. 연극제든, 혹은 공부하기 위해 다른 연극을 보러 갔을 때 오가며 마주친 배우들이 많다.
그리고 이번에 들어온 프로필 중, 여이수 보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순히 내 기억에만 없었을 수도 있지만, 여이수만큼 '라일라 공주'의 외형적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내가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여이수라면 오디션에서 무난하게 합격하지 않을까 생각됐으니까.
그러다보니 내가 굳이 더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걱정되는 것은, 과거에 그녀가 아동극을 하지 않고 왜 극단 '창공'으로 갔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창공에 입단 했을 때는 이미 여이수는 극단 내 중견 배우였고, 주·조연을 다 소화하는 배우였다. 그리고 그 당시 입단 시기를 비교해 보면, 딱 지금 시기에 극단 '창공'에 입단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결국, 여이수는 아동극을 하지 않고, 극단행을 결정했다는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꼭 연기력 때문이 아니라 여이수가 아동극에 참여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연극판은 군기가 세다. 연극이 진행되면 한 명의 실수가 연극의 실패로 이어진다. 그래서 극단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군기가 센 편이다. 그중에서 '창공' 좀 유별나다. 나도 신입 시절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생활했었다.
두들겨 맞고 욕먹고. 그러다 신입이 못 버티고 나가버리면, 어차피 나갈 놈이었다고 욕하기 일쑤였고. 나 또한 그런 분위기가 당연하다 생각하고 지냈으니까.
그런 분위기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려준 게 여이수 였다.
신입들 갈굼 먹으면 커버 쳐주고, 달래주고.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 질 거라 다독여주며 극단이 다 이런 건 아니라 말해 주곤 했었다.
그러면서 항상 하는 말.
'우리는 꿈을 나눈 형제들이다'
남매 아닌가···
어쨌든. 돈도 못 벌고, 딴따라라 불리며 명예도 없는 연극이지만, 극단원 모두를 같은 꿈을 나누는 동지라고 말하던 여이수.
힘들고 빡센 극단 생활을 버티게끔 해준 누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
극단 '창공'에서 올렸던 연극이 모두 끝나고 회식이 있었다. 그 회식에서 단장이란 작자의 추태를 보았다.
단장이 은근슬쩍 여이수의 몸을 더듬는 것을 보고, 난감해하는 여이수를 보았다.
도저히 표정관리가 안 되는 얼굴로 자리를 옮기려는 여이수. 그리고 여이수를 붙잡는 단장.
그 순간.
그때는 나도 젊은 혈기를 주체못할 젊은 나이었고, 그 자리에서 단장의 턱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그날부로 내 연극인생은 끝이 났다.
극작가이자 '창공'의 단장. 이윤태.
연극계 원로이자, 대한민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몇 개 안되는 연극단 중 하나인 '창공'의 단장.
대중성이 떨어지는 연극판이기에 저 이름이 유명해지지 않았을 뿐.
폐쇄적인 연극계. 그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지 않는 연극제가 오히려 손에 꼽히는 거물이었다.
'위아래도 없는 쓰레기 같은 배우'
놀랍게도 그가 나를 지칭한 말이다.
그의 한마디에 어느 연극단에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지방에 있는 소규모 극단에서도 나를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연극을 두 번 다시 할 수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옮긴 영화판. 나는 전화위복으로 영화로 재기할 수 있었다.
이후, 여이수도 극단 '창공'에서 나와 연극쪽 인사의 입김이 덜한 뮤지컬로 옮겨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그녀가 아동극 오디션에 합격해도, 출연을 거부한다면 나로서는 어떻게 잡을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여이수가 아동극 출연을 거부한다면, 좀 뜬금없지만, 장인호 사장을 부추겨서 에이전시 입장으로 접촉할 수 밖에.
청운 엔터테인먼트에 배우로 계약한다면 어떻게든 아동극 쪽으로 끌어올 수 있을 테니까.
오후 늦게까지 이어진 오디션. 현주가 오늘은 먼저 가라고 연락이 왔다. 사실 같이 가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내가 일방적으로 기다리는 것이긴 하지만.
바쁜 현주를 신경 쓰게 하는 것도 좀 그렇고. 오래간만에 뻥 뚫린 시간을 화실에서 그림이나 그릴 요량으로 오늘은 좀 일찍 회사를 나왔다.
내가 면허가 없다보니, 로드매니저인 이동수가 나와 현주 출퇴근을 도와줬었다.
이동수한테 부탁한다면 문제없이 퇴근할 수 있겠지만, 혹시나 나를 태우고 오가는 시간 동안, 현주가 집에 갈 시간을 놓칠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냥 혼자 택시 타러 가기로 했다.
회사 건물 모퉁이를 돌아 골목을 지나가면 큰길로 이어진다. 택시를 잡기 위해 그 골목을 들어서는데, 여이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
"어?!"
처음엔 '나를 어떻게 알지?' 이런 생각에 나도 살짝 놀랐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몇 개의 작품이 올라갔으니까. [저승 카페]가 흥행하기도 했고.
나를 아는 게 이상한 게 아니구나 싶어 그녀를 바라봤다.
여이수는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외모야 내 기억보다 훨씬 젊었지만, 티가 나게 털털한 모습은 그대로였다..
여이수는 급하게 담배를 비벼끄고 다가와 먼저 인사했다.
"와? 이지우 씨 맞죠? 팬이에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이지우 씨라. 어색하다. 나이를 먹고 여이수를 만났을 때도 여이수는 나를 '야, 너, 인마, 새끼' 등등으로 불렀으니까.
그만큼 친했고 스스럼없는 사이기도 했었다.
"[폭력의 사슬] 정말 재밌게 봤어요. 아는 선배가 영화 재밌다고 해서 봤거든요. 혹시? 설마 이지우 씨도 아동극 오디션?"
역시. [저승 카페]가 아니라 [폭력의 사슬] 쪽이었나. 전반적으로 달달한 [저승 카페]가 여이수의 취향이 아니긴 하지.
그런데···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아뇨, 오디션은 아니고, 저 이 회사 다녀요. 청운 소속이거든요. 혹시 배우 여이수 씨 맞으시죠? 극단 '해달별' 단장님."
"어머? 이지우 씨가 어떻게 그걸 아세요? 저 아세요?"
"하하, 알다마다요. 저도 여이수 씨 팬입니다. 사실 여이수 씨 프로필이 사무실에 있길래 깜짝 놀랐어요.."
그제야, 청운이 극단이나 제작사가 아니라, 원래 엔터테인먼트 회사였음을 기억해 냈는지 '아' 소리를 내며 수긍한다.
그냥 이렇게 보내기가 아쉬웠다. 이대로 보내면, '창공'으로 가버릴 것만 같아서.
"오디션 잘 보셨어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내가 이성적으로 그녀에게 끌리고 말고 할 건덕지는 없다.
이전 생에도 내 옆에는 현주가 있었고, 여이수는 우리 둘을 항상 응원해 주곤 했었으니까.
그런데도 내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그 당시 힘들었던 신입 단원 시절 숨통을 틔워주었던 여이수에 대한 인간적 호감 때문이다.
그리고 '창공'에서 다시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그녀가 뮤지컬 쪽에서 빠르게 재능을 꽃피우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무엇보다 '라일라 공주'역에 여이수 만한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
"네··· 뭐 그냥이요."
"에이, 여 배우님 정도면 오디션 볼 필요도 없죠. 제가 봤을 때 '라일라 공주'에 딱 맞으신 것 같은데. "
일부러 살짝 떠봤다. 커리어를 쌓는다는 점에서는 아동극이 '창공'에 들어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디션까지 왔다면, 그녀도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온 것 아니겠나.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네요. 제가 아동극은 처음이라. 그런데 아동극에 되게 관심이 많으시네요."
"아동극도 아동극이고, 연극 자체에 관심이 많아요. 이 작품에도 한 발 걸쳐있고요. 연극은 진짜 꿈을 나누는 일이잖아요. 관객한테도 배우들한테도. 꿈이 없으면 못하는 일."
그래. 나도 안다. 뜬금없는 소리인 거.
길 가다가 만난 사람 붙잡고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것도 알고.
어쩌면 일찍 성공한 배우가 하는 자아도취에 찌든 망언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
하지만 여이수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것이다.
여이수가 내게 몇 번이나 했던 말이니까.
몇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사인해달라는 말에 사인까지 해주고 돌아서 택시를 탔다.
만약, 여이수가 오디션에 합격하고도 합류하지 않는다면, 채 실장이나 장 사장에게 부탁해 에이전시 차원에서 계약을 권유할 것이다.
내 전생의 감사함을 표현한다면 딱 그 정도가 아닐까.
그마저도 거절한다면 깨끗하게 잊을 것이다.
내 현재도 바쁜데, 타인의 미래까지 돌봐 줄 여력이 없으니까.
문득 옛날 생각이 난다.
내가 단장에게 주먹질을 했을때, 여이수는 나를 말리기는커녕 단장의 반대 턱을 돌려 버렸지.
택시 안에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