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67화 (68/121)

67. 와, 너 진짜

며칠 뒤, 청운 엔터테인먼트.

결국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 건으로 장 사장과 독대를 하게 됐다. 채 실장에게 살짝 흘린 이야기가 바로 장 사장에게 들어간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채 실장이 아동극 프로젝트를 핸들링하고 있다고는 하나, 이미 잘 굴러가고 있는 엔터 사업을 제외하고, 회사에서 추진하는 신사업이니까.

장인호 사장이 오죽 관심이 많이 갈까.

그런 상황에서 내가 투자 의향을 내비췄으니 궁금하지 않았을까?

투자 금액의 규모나, 시기보다 내 의도가 더 궁금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아동극이니까.

내 전생의 기억으로는 청운 엔터테인먼트는 아동극을 시작으로 점점 영역을 확장한다. 앞으로 연극, 자체제작 뮤지컬, 판권을 수입해서 제작하는 뮤지컬까지 다양한 연극과 뮤지컬을 제작한다.

지금이야 실장 한 명과 기존 팀에 신규직원 몇몇 뽑아 핸들링하는 프로젝트이지만 나중에는 자회사를 따로 설립해서 굴릴 정도로 커진다.

그리고 마침 나도 [악의 기록]의 개런티를 받은 상태였기에 여유자금이 좀 있었다. 손익분기점과 마케팅 비용을 제외한 관객스코어인 약 150만 명 이후에는 러닝개런티까지 계약된 상태였기에 앞으로 자금 운용에는 큰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고.

막말로 300만 관객만 들어도 150만명 규모의 러닝개런티를 받는다.

거기에 [악의 기록]에 묻어둔 투자금이 5억이다. 총 투자금액의 ⅛ 이 내 돈이고 이는 결코 지금 시기의 개인투자자가 투자하는 금액치고 적은 액수가 아니다.

돈을 떠나서 현주의 공식적인 첫 단독 작품 아닌가.

현주와 미래를 위해서 돈을 버는 건데 거기에 투자하는 것이 아까울 리 없었다.

사실 투자에 실패하기 어려운 종목이기도 하고.

내가 전생의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역사를 다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먼 미래에 코로나 19와 같은 전 세계적인 팬데믹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기존 팬덤과 인지도를 가진 [벡터맨] 시리즈가 실패할 가능성은 적었다.

장인호 사장의 사무실에 앉자,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그래도 이 사업 시작한 지 10년이 넘어서 그동안 이 소속사 오고 간 배우가 꽤 되는데, 너처럼 사무실 많이 찾아오는 배우는 처음 본다."

"그런가요."

"그래, 트레이닝 받는 배우들 빼고는 올 일이 없지. 보통은 계약 때 말고는 안 오니까. 요새는 계약도 사무실에서 안 하고 카페 같은 대에서 하거나, 따로 사인만 하고 오는 경우도 많아."

푸근한 인상으로 말하는 장인호 사장. 딱히 트집 잡는 느낌은 없었다.

하기야 나는 회사에서 해주는 트레이닝 같은 걸 할 필요가 없음에도 시청각실을 이용하기 위해서 뻔질나게 사무실에 출근했었다. 현주의 작업실이 생긴 이후로는 작품 없을때는 말그대로 출근하다시피 했었고.

그런 점을 장인호 사장이 굉장히 좋게 봤다. 마치 회사원처럼 연습한다고. 근면과 성실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계속 존중 받는 가치 아니겠나.

거기에 기자들 대상으로 고소를 진행했을 때도 회사를 내 사무실처럼 회사를 사용했으니 장인호 사장 입장에서는 뭐 이런놈이 있나 싶었을 것이다.

"하여튼, 이번에 아동극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싶다고?"

"네."

"혹시, 이번 프로젝트가 우리 회사에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니?"

"네. 알다마다요. 시장 안착을 위해서 타게팅이 확실한 아동극으로 시작하시는 것 아닌가요?"

아동극의 타겟층이 명확하기에 니즈 파악이 쉽다.

남아, 혹은 여아 어느 대상으로 할 것인가.

그리고 아동극을 애만 보나? 기본적으로 보호자 동반 시청이 매너다. 엄마나 아빠도 당연히 같이 봐야지. 그리고 애가 둘이면? 둘 다 보여줘야 하고.

특히 [벡터맨]과 같은 특촬물을 무대에 올릴 경우, 특수효과나 무대장치에 비용이 좀 더 들어가는 경향이 있지만, 반대로 그런 부분에서 확실한 투자만 된다면 흥행이 비교적 쉽다는 장점이 있다.

2000년대 초반에 우후죽순 생겨났던 소규모 아동극 전문 극단이 사라진 이유가 특수효과 부분에서 투자가 잘 안 됐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처럼 할리우드 대작과 경쟁할 일이 없다. 비슷한 시기에 전혀 다른 장르가 개봉한다고 해서 타격을 받지도 않고. 영화는 경쟁작이나, 할리우드 대작이 같은 시기에 개봉하면, 개봉관 수에서부터 경쟁이 시작된다.

연극은 그런 게 없다. 경쟁자가 별로 없다는 말이다.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 정도 규모의 아동극을 만드는 제작사 자체가 한국에 별로 없다. 오히려 소규모 아동극 입장에서는 [벡터맨]과 같은 아동극이 헐리우드 대작 포지션이다.

또한 여자아이를 겨냥하는 대형 뮤지컬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타격이 없을 것이다.

저건 원론적인 이야기고, 장 사장의 출신과, 배경을 생각하면 다른 이유가 분명히 더 있었다. 단순히 돈 때문은 뮤지컬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돈이야 차라리 방송 관련 다른 사업이 더 나을 것이다. 방송장비 대여라든지, 교육방송이나, 광고촬영 등을 하는 중소규모 콘텐츠 제작하는 방송 제작사를 차린다든지. 하다못해 부동산에 투자하는 게 더 남는 장사니까.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전망이 밝지 않은 연극과 뮤지컬. 어려운 연극이나 뮤지컬의 제작시장에 비집고 들어가는 것보다 편한 길이 분명히 있다. 그런 점은 나보다 사업가인 장인호 사장이 더 잘 알 테고.

사람 좋은 인상을 하고 내가 하는 말을 끄덕이며 듣는 장인호 사장.

그 모습을 보고 슬슬 말할 기회가 왔음을 느꼈다.

내가 연극에 무지하지 않다는 것을 어필해야 했다.

"그리고, 사장님이 잊고 지냈던 극단을, 그리고 죽어가는 연극판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지 않습니까?"

눈이 커지며 놀라는 모습의 장인호 사장.

"혹시 그만둔 김주하가 그리 말하든?"

그럴리가.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사 직전인 연극판. 대학로 소극장에서 꿈을 쥐고 스스로에 대한 희망고문을 하는 무명 배우들.

그들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곁에서 지켜봤던 장 사장. 또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시작이 그런 배우들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그러한 장 사장의 배경을 이해하면 충분히 상상이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아마 연극의 대중화, 부흥을 생각하는 거겠지.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은 그 초석일 테고.

장 사장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하게 몰라도, 누가 봐도 나는 그냥 돈 좀 있는 21살의 어린애일 뿐이다. 이제 50줄 다 돼가는 장 사장이 보기에는 진짜 애로 보일 테고.

하지만 나는 현주의 데뷔작인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을 꼭 성공하고 싶었고, 단순 투자를 넘어 가능한 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었다.

내가 손대면 이거 될 것 같거든.

미래에 어떤식으로 아동극이 성공하고 시장에서 흥행을 이끌어내는지 봤으니까.

그런데 돈 좀 투자했다고 연극에 대해서 참견한다? 안 될 말이다.

이전까지 내 행동은 나 하나 움직이는 일 이었으니 용인 가능한 수준이었다. [저승 카페]가 그랬고, [악의 기록]이 그랬다. 회사가 봤을 때 별로라 생각해 해도 일단 배우를 믿어준 것이다.

장인호 사장도 배우의 스펙트럼을 늘린다 생각해서 다른 작품을 추천하는 선에서 그쳤다. 추천하는 것 이상 강권하지 않았고.

하지만 회사 돈이 들어가는 프로젝트에 투자자로서의 권리행사? 내가 봐도 그림이 안 나온다.

내가 연극에 그만한 커리어를 쌓은 것도 아니고.

그렇기에 어떻게든 장 사장에게 내가 당신의 꿈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어필해야 했다.

그리고 나한테 그 꿈을 이룰 방법이 있음을 알려줘야 했고.

장 사장과 내가 지향하는 목표는 다르지만, 둘 다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을 꼭 성공해야 했으니까.

"연극의 부흥이 뭐 나 하나 애쓴다고 될 일이겠느냐마는. 뭐 시도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냐."

아쉬움 섞인 그의 질문. 내게 해답을 구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아쉬움에 대한 한탄, 토로.

딱 그정도의 느낌이었다.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은데요."

"뭐? 방금 뭐라고 했니?

피식 웃으며 기대없이 반문한다. 진짜 못 알아들어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식.

"그냥 제 생각이에요. 엔터테인먼트 사장님이시자, 연극을 사랑하시는 사장님만이 할 수 있는 일."

"뭐 어떤 거?"

그제야 의자에 기대고 있던 장인호 사장이 살짝 상체를 당겼다.

"스타를 만들면 되죠. 아동극의 스타 마케팅! 그리고 스타가 나올 환경을 만들어주면 되고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김이 팍 죽는 듯한 목소리. 기책을 기대했던 것에 비해 너무 일반론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쉬운게 안되서 그동안 침체되었던 것 아니겠나.

"서울 시내에 유치원만 1,500개 인 거 아시나요? 어린이집은 더 많고요. 이들 단체관람으로 돌아가는 극단도 꽤 있습니다. 수요는 꾸준히 있었어요. 아동극은 시장이 문제가 아니라 작품이 문제가 커요. 연극이나 뮤지컬 하는 사람 중에 진지하게 아동극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같은 연극인들 사이에서도 아동극 한다고 하면 삼류 취급하고 저급 연극이라 치부하는데 발전이 있을 수 없죠. 실제로 저질 작품이 무대 위로 걸리는 경우도 많고. 그런 시장에서 스타가 나올 수도 없는 건 당연하고요."

"우리도 그런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동극 시장을 공략하려는 거네. 그런데 아동극에 스타라니···"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보는 겁니다. 보통 배우들 계약할 때, 연습기간에 페이 안 주잖습니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예를 들어, 연습기간까지 4대 보험에 월급까지 준다고 해보십시오. 아동극이고 나발이고, 대학로에 있는 좀 한다는 배우들 다 몰릴걸요. 인재풀이 갖춰지면 당연히 극의 퀄리티가 올라갈 수밖에 없고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동극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중에서 스타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럼 스타마케팅은 뭘 말하는 건가?"

장인호의 반응이 의외다. 21살 먹은 애가 하는 말을 뭐 얼마나 기대하고 들을까 싶었는데, 목소리가 커지고 자세가 점점 앞으로 기운다.

"네? 어··· 그건 저보다, 사장님이 더 전문가이시지 않습니까?"

여기서 살짝 발을 뺐다. 사실 내가 매니지먼트로 성공해서 중견 회사로 성장시킨 사장한테 스타마케팅을 설명하는 게 웃기지 않겠나.

막말로 스타를 만드는 방법은 나보다 장 사장이 훨씬 더 잘 알 테니까.

나는 그저 이전 역사의 편린을 보고 그 속에서 가능성 있는 답을 찾은 것 뿐이니까.

연극에 꿈이 있는 엔터테인먼트 사장인 장인호 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동극의 스타 만드는 것이다.

내가 있던 약 20년 후에는 자신의 이름(예명)을 걸어놓고 하는 유투버의 아동극이 불티나게 팔렸다. 한 명의 스타가 주는 힘이다.

거기에 일본 애니컬(애니메이션 원작 연극)의 영향을 받은, 특수효과에 힘을 준 아동용 뮤지컬 또한 전국순회 공연은 물론이고 서울 앙코르 공연을 수차례 할 정도로 흥행하고.

오히려 아이들 대상으로 스타 만들기는 20년 후보다 더 쉽지.

유튜브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배우 하나를 키워서 스타만드는 것과, 타게팅이 명확한 아이들 대상으로 스타를 만드는 것중 어느것이 더 쉬울까?

스타를 만드는데 최적화 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일까?

"뭐, 제가 뭘 알겠습니까마는, 제작지원이나 협찬 안 붙는 교육방송에 지원 좀 해주고, 소속 배우 메인 MC 꽂아넣고 종이접기만 줄기차게 해도 애들 사이에서 금방 유명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인지도 바탕으로 아동극, 교육방송, 문구, 팬시 제작판매 무엇을 해도 될 거고요."

원 소스 멀티 유즈.

내가 생각하는 캐릭터의 방향성이다.

공연의 흥행과 관계없이 오래 갈 수있는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를 다각적으로 활용하는 방법.

꼭 연극배우일 필요도 없다. 1대 뽀미언니가 이후로 몇 대가 내려가는 것처럼 잘 만든 캐릭터 하나로 쭉 밀고 나가면 되니까.

잠시 속으로 계산하는 듯이 장 사장의 눈이 이리저리 굴러간다.

장 사장이 봐도 계산이 나오거든. 장 사장이 10여년간 만들어놓은 인맥 좀 활용해서 여러 아동용 프로그램에 배우 하나 밀어넣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다.

"와, 너 진짜."

장 사장의 감탄, 그리고 이어지는 한숨.

"후··· 지우야, 그런데 말이다. 이번엔 뭘 꾸미고 있니?"

"네?"

"너 작년에 데뷔 한 놈이 무슨 연극이고, 영화고, 엔터 사업이고, 몇십 년 구른 놈처럼 말하냐."

"뭐, 일단 현주가 쓴 각본이잖습니까. 그리고 아동극 제대로 한 번 만들어보려고요. 아이들 웃는 얼굴 좋잖아요."

미래의 지식을 마치 내 생각인 양 펼치던 구라 중에서, 이 말 만큼은 진심이었다.

내가 현주를 위해서 애쓰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힘에 겨웠던 [악의 기록] 촬영에서 내가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은 세화가 진심으로 웃었던 영화 초반부였으니까.

아이들 웃는 얼굴이 고팠다.

"예전에 지우 니가 백룡에서 현주 양에게 고백했을 때 말이다. 그날 밤에 내가 너한테 잔소리 좀 했었지? 회사 믿고, 같이 일하자고. 그때는 젊은 혈기에, 아니 어리니까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말이다. 이후에 병역비리다 뭐 다 터지면서 검찰청 간 날 기억하니?"

"네. 기억하죠. 잊을 수 없죠."

아낌없이 주는 박정태를 나락 보낸 날이니 잊을 수가 있겠나.

"니가 웃으면서 검찰청 현관을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리고 또 모두가 만류하던 [저승 카페]가 대박이 터지면서, 어쩌면 이지우란 친구 보통은 아니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냐? 어떻게 몇 년간 회사에서 준비했던 기획안보다 나은 기획이 바로 튀어나오냐?"

그러더니 장 사장은 전화기를 들었다.

"어, 채 실장 지금 아동극 기획안 들고 회의 준비해서 빨리 사장실로 오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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