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낭만이 밥 먹여주지는 않더라
대학로의 어느 소극장. 작은 무대. 텅 빈 객석.
무대는 조선 시대 배경으로 꾸며져 있다. 어쩐지 부실해 보이는 무대장치와 소품들이 열악한 극단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다.
몇 개의 조명이 무대 중앙을 비춘다. 그 조명 아래 배우들이 무대에 둘러앉아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우울하고 처지는 분위기를 숨길 수 없었다.
그리고 객석을 가로질러 오는 한 사람.
"탕수육 하나에, 짜장면 6개 맞죠? 군만두는 서비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직 분장을 다 지우지 못해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한 여자가 꼬깃꼬깃 만 원짜리 몇 장을 내민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 누구는 머슴 복장, 누구는 양반 복장. 연극의 특징일까. 복장만 봐도 대충 캐릭터가 이해된다. 배우들 모두 일사불란하게 제 그릇을 가지고 식사 준비를 했다.
계산을 끝마친 여자가 무대 뒤편에서 2리터짜리 커다란 소주와 종이컵을 들고 나왔다.
"얘들아, 그래도 마지막인데, 한잔해야지."
"어? 단장님! 그 소주, 내가 사놓은 건데? 어떻게 찾았어요? 소품용 장독대 안에 숨겨놨는데."
"그동안 공짜 술 잘 마셨다."
"아, 어쩐지. 매번 양이 좀 줄어드는 것 같더라."
단장이라 불리는 여배우가 웃으며 농담을 해보지만, 분위기는 쉬이 밝아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해달별' 극단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좋은 연극을 준비하고자 했으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관객은 점점 줄어들고, 새로운 연극을 준비해서 올릴 여력이 바닥났다. 그저 열정으로 단원들을 혹사하는 것도 한계였다.
극단 해체를 맞이해 마지막 회식이 탕수육에 짜장면이다. 그럼에도 불평 하나 없는 단원들.
그 모습을 보는 '해달별' 극단의 단장 여이수는 가슴 한곳이 찡한 것이 올라왔다.
2리터 짜리 소주가 금방 동나고, 다시 사온 소주가 몇 번 돌았을 때, 여이수 단장이 한 단원에게 물었다.
"애는 잘 커?"
"네, 잘 크죠."
"와이프는 잘 지내시고?"
"네··· 뭐 항상 미안하죠."
여이수 단장은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단원들 한 달 평균 월급 30만 원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착취냐 하겠지만, 업계 평균이다. 연극배우 평균 연봉 200 ~ 300만 원. 월급이 아니라 연봉이다. 물가는 매년 오른다고 뉴스에 나오는데 연극배우의 몸값은 20년 전 그대로다.
단장이 여이수 또한 단원과 같은 월급을 가져갔다.
아니, 오히려 단장으로서 이것저것 때고 나면 항상 마이너스 나기 일수였다.
그걸 메꾸기 위해 나레이터 모델에, 마트 기획 아르바이트까지 뛰는 여이수였다.
방금 질문한 저 단원은 애 딸린 유부남이 월급 30만원 받고 연극을 했다. 쉬는 날에는 막노동을 하고, 연극이 있는 날에는 배우를 하고.
하지만 저 단원은 이제 노가다꾼도, 배우도 아니게 되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번에 공장 들어간다 그랬나?"
"네. 와이프 고생 그만 시켜야죠. 애도 크는데. 하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소주를 비운다. 어쩐지 더 분위기가 처졌다.
여이수는 항상 툴툴대는 2년째 막내 병호에게 질문했다. 마지막 신입 단원이 2년째 안 들어와서 입단 이후 극단이 사라질 때까지 막내만 하다 가는 배우였다.
"병호! 너 영화 오디션 봤다면서?"
"헉!? 어떻게 아셨어요?"
"어휴, 새끼야. 걸리지를 말던가. 어떻게 됐나?"
"결과는 나와봐야 알죠. 아직 발표 안 났어요."
막내는 미안한 듯, 그리고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인다.
신입단원이 그동안 없었던 이유. 신입 단원 오디션을 하면, 하나같이 하는 말.
'영화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연극이 마치 영화, 드라마의 하위 장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찾아온다.
마치 연극은 배우가 되기 위한 과정쯤으로 생각하고 찾아오는 사람들.
성공하고나서 토크쇼 이야깃거리를 수집하러 오는 듯한 그들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극은 연극 그 자체로도 충분한데 말이다.
"예전에는 연극을 하는 후배들 영화 오디션 본다고 하면 존나 싫었는데. 극단이 망해서 이제는 싫어할 수도 없네···흑흑."
"왜 그래요 단장님. 무섭게. 걍 욕을 해요. 그리고 단장님 우는 연기 못 하잖아요. 티 나요."
단장인 여이수가 일부러 우는척하며 후배에게 장난을 건다. 마치 진짜 티 날 줄 몰랐다는 듯 아쉬워한다.
"쓰읍, 티 나냐? 이걸 안 속네."
웃음이 터지고, 저마다 끼가 넘치는 배우들답게 한마디씩 치고 나온다.
"단장님은요? 연극 계속하실 거예요? 아니면 다른데 재취업이라도 하세요?"
"야! 나 여이수야. 내가 연극 말고 다른 걸 할 것 같아?"
"그럼 다른 극단 가세요?”
“뭐 여기저기 서류 접수해놨어. 극단도 넣고, 뮤지컬 오디션에도 보냈고."
"뮤지컬? 단장님 뮤지컬 하시게요? 그러기에는 단장님 노래랑 춤이···"
"팍 씨. 니가 내 노래랑 춤추는 거 봤어? 디질라고 이게."
"뭐 어때요 오늘부로 극단도 해체됐는데. 이제 단장 단원이 아니라 누나 동생이지 뭐."
"어쭈? 아주 나중에는 맞먹겠다?
한명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실패가 되는 연극의 특성상, 연극판의 위계질서는 엄격하다. 하지만 오늘의 여이수는 후배의 저런 장난을 그저 웃으며 넘어갔다.
극단원 대부분이 연극이 아닌, 새로운 일을 찾을 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됐고, 자 한잔하자! 다들 그동안 고생했고, 비록 우리 극단은 이거로 끝나지만 우린 뭐다? 꿈을 나눈 형제-"
"남매겠지."
"팍 씨. 어쨌든 다들 잘되라. 꼭 무대에서 다시 만나자. 우리들의 꿈을 위하여!"
꿈을 나누는 사이.
낭만적이지만, 낭만이 밥 먹여주지는 않더라.
연극판 여장부라 소문난 여이수 단장. 그녀 또한 마지막 '위하여'를 외칠 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단원 중 아무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
전생에 나는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연극을 꽤 오래 했었다. 한 5년쯤?
그럼에도 연극무대에서 대표작 하나 없다.
연극무대에서 조연 배우에서 주연배우로 넘어 갈 때쯤. 한 사건에 의해서 도망치듯 연극판에서 떠나 영화판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폭 연기로 주목을 받아 상업영화판에 정착했다.
그렇기에 지금 시기의 영화판 보다 연극판의 배우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채 실장님. 이번 [백터맨] 기획 채 실장님이 총괄하신다는 것 맞나요?"
"네. 그런데 지우 씨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현주한테 들었어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채시원 실장. 장인호 사장과 함께 청운 엔터를 같이 세운 인물이다.
장 사장과 함께 극단을 운영하다 같이 엔터 업계에 투신했다고 했었다.
김주하 실장이 이미지메이킹과, 배우의 마케팅 전략에 능했다면, 채시원 실장은 엔터텐먼트 외부 영업에 특화된 인물이었다.
채시원 실장이 특이한 게 연극판에서 배우에서부터 연출과 무대감독을 다 해봤다고 했다. 연극판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그녀의 능력. 그런데 기획사 업무를 보며, 연극판에서 다져진 안목으로 재능있는 신인 캐스팅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김주하가 청운 엔터테인먼트에 있을 때, 나와 김범을 각각 김주하 실장과, 채시원 실장에게 선택하라 했을 때 채시원 실장은 두말없이 김범을 선택했다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채 실장은 김범의 연기를 보고 가능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연극 쪽 일을 먼저 주선했던 게 아닐까?
나는 이미지메이킹이나, 마케팅 전략이 더 중요했었기에 김주하 실장이 관리했었고.
어쨌든, 연극판에 사정을 잘 알고, 발이 넓은 채시원 실장이 이번 청원 엔터테인먼트의 아동극 프로젝트를 맡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까지 진행됐어요?"
"뭐 아직 기획단계죠. 극본 나왔으니, 캐스팅하고, 연습하고 공연장 잡아야 하고···현주 씨 극본이라 그런가 지우 씨 연극에 되게 관심 많으시네요. 호호호."
관심이 없을 수 있나. 현주의 첫 데뷔작인데.
그동안 현주가 해온 작품은 [폭력의 사슬], [민주를 기다리며], [저승 카페]. 모두 공동 각본가, 혹은 보조작가였다.
그런 그녀가 오롯이 첫 작품을 세상에 내보이는데 내가 가만있을 수 없지 않은가.
"지우 씨 출연한다고 하면 저 사장님한테 혼나요."
출연도 좋지. 좋은데.
"투자자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네? 투자자요?"
***
류창진 PD는 [저승 카페]가 종영한 직후 KBC를 퇴사했다.
힘들때 외면했던 선배 PD들과 감 CP를 계속 보고 일할 자신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저승 카페]가 흥행에 성공하자 돌변해서 숟가락 올리려는 꼴을 보고,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감정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냉정하게 따졌을 때 KBC에서 자신이 성장하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꼭, 단편독립영화 특선 때문은 아니었다. [저승 카페]를 찍으면서도 크고 작은 일에 계속 상부와 부딪쳤었다.
내용이 심심하다, 주연령층대가 너무 낮다, 비싼 이정건 데려다 놓고 이정건이 별로 안 나온다, 등등.
거기에 쫓기듯 촬영하는 빡빡한 일정까지.
좀 더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위해서 이직을 결심했고, 결국, 개국한 지 1년 좀 넘는 TNN으로 이직했다.
몇 개의 프로젝트 보조와 메인 PD를 하며 TNN 돌아가는 사정을 확인하고, 드디어 TNN에서 드라마를 제작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내년 봄에 정식으로 편성될 드라마.
류창진 PD는 처음부터 드라마 제작을 염두에 두고 영입해온 인재였고, TNN에서장편 드라마 제작 경험이 있는 유일하다시피 한 PD였다.
거기에 때마침 유수영 작가가 새로운 대본까지 들고왔다.
여기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작가님, 커피? 녹차?"
"커피 주세요."
"그런데, 유 작가님. 이 대본 주인공이요. 제가 생각하는 그 사람 맞나요?"
"맞을 걸요?"
처음봤을때의 어수룩한 신입작가의 모습이 많이 사라진, 유수영 작가.
"어··· 음··· 이지우 씨 맞죠?"
"네. [저승 카페]는 저도 신인이고, 누가 어떤 배역을 맡을지 몰라 썼는데, 이번에 이지우 씨를 주인공에 염두에 두고 썼는데 글쎄, 글이 술술 나오는 것 아니겠어요?"
"어··· 음··· 알겠습니다. 한 번 접촉해 보겠습니다. 이지우 씨 최근 영화 촬영 끝났다고 하긴 하던데.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고요."
그렇게 류창진 PD가 대본을 들고 일어서려 할 때였다.
'탁'
유수영작가가 대본을 내려치며 말했다.
"이 작품, 이지우 씨 아니면 안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