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범지구적 스케일
10년 후.
“안녕하세요. 데이비드 킴 감독님.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30대의 날카로운 모습의 조상기 기자는 없고, 어쩐지 온화해 보이는 주름이 생긴 조상기 기자, 아니 이제 조상기 편집장의 모습이다.
"네. 반갑습니다."
"이번 방문이 의미가 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시 무슨 일로 방문한 것인지 한국 팬에게 한번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악의 기록] 할리우드 리메이크판 감독을 맡은 데이비드 킴입니다. 이수한 감독과 주연이었던 배우 이지우와 한잔하러 왔습니다."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구부려 입 앞에서 꺾는다.
"아··· 교포 2세라 들었는데 한국 문화에 아주 익숙하시네요. 한국말도 잘하시고요."
"네. 10년 전에 우연히 [폭력의 사슬]을 봤습니다. 이후에 많은 한국 영화를 봤습니다. 한국문화 좋아요. 김치 좋아요. 싸이, 팍지성 알아요."
어설픈 한국어로 끝까지 농담하는 데이비드 킴.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을 말한다면 5번째 안에는 반드시 꼽힐 인물.
데이비드 킴.
그의 내방 소식에 시네르포에서는 재빨리 인터뷰 요청을 넣었고, 데이비드 킴 측에서 흔쾌히 수락하여 마련된 인터뷰.
조상기 편집장은 설렘과 기쁜 마음을 가지고 인터뷰장으로 왔다.
상대는 할리우드 거물감독. 조상기는 영화팬의 입장에서 편집장임에도 인터뷰를 자처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간 이후부터는 영어로 인터뷰가 진행됐다. 조상기는 노련함에 연륜을 더해 매끄럽게 진행되는 인터뷰.
헌데 시작과 동시에 데이비드 킴의 의외의 질문.
"우리 예전에 한번 봤던 것 기억하시나요?"
"네? 저를 아신다고요?"
"네. 제가 데뷔작으로 로카르노 갔을 때에요. 10년 조금 넘었죠? 그때 [폭력의 사슬]의 이수한 감독과 같은 '올해의 감독' 섹션에 노미네이트 됐었죠. 그래서 이수한 감독에게 말 한번 걸어보려고 기다리는데, 미스터 조가 먼저 이수한을 가로채 갔어요. 하하. 너무나 분해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죠."
"아! 저도 이제 기억나네요. 그때 로카르노에서 오셨던 게 데뷔작이셨죠?"
"하핫, 맞습니다."
그때부터 경직됐던 분위기가 풀리고 자연스럽게 영화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상기 기자는 먼저 가장 궁금했던 질문부터 시작했다.
"이번 [악의 기록] 할리우드 리메이크에 한국 팬들도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킴 감독이 갑자기 이 작품을 맡게 되어 한국에서도 화제인데요. 혹시 차기작으로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오, 미스터 조. 그건 오해입니다. 저만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에요. 판권을 가진 제작사 측에서 [악의 기록] 작품을 풀어주질 않았어요. 지난 10년간 저 말고도 5~6명의 감독이 제작 의사를 밝혔지만, 그동안 제작사 측에서 묶어두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이 작품을 선택한 게 아니라, 이 작품에 제가 선택받은 겁니다."
"네? 그것참 의외인데요. 제작사가 왜 그랬던 거죠?"
조상기 편집장은 그동안 몰랐던 사실에 놀라며 반문했다. [악의 기록] 판권이 거액에 팔렸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제작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소문이 퍼지지 않았었다.
데이비드 킴은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 작품을 성공적으로 제작하기 위해서 완벽한 배우, 스태프, 감독을 선택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작자이신 일렉 볼드만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기에 아주 까다롭게 스태프를 구성했죠."
그말을 들은 조상기 기자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말씀은 완벽한 스태프 구성이 끝났다고 해석해도 될까요?"
"네, 그럼요. 일단 감독을 제가 맡았는걸요."
"하하, 틀림없군요. 그럼 원작 [악의 기록]과, 할리우드 리메이크판 [악의 기록]의 차이점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데이비드 킴 감독은 표정이 살짝 심각해진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먼저 미국에는 재벌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좀 다른 방식으로 '최태호'를 표현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액션에 관해서 그 이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애쓸 것입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액션에 비중을 좀 더 실는다고 해석해도 될까요?"
"음··· 네. 정확하게는 [악의 기록]의 액션을 좀 더 할리우드에 맞춰서 제작한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악의 기록]이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합니다. 의외로 이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많더군요. 특히 맨손 격투에 짙은 감정을 실어 나누는 감성은 한국 영화에서 보이는 독특한 포인트입니다. 그 정점에 있는 게 [악의 기록]이구요. 무수히 많은 오마주를 만들었던 기존 [악의 기록]의 '실장'과 주인공의 액션 시퀀스를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조상기 편집장은 웃으며 데이비드 킴 감독의 말을 받았다.
"혹시 실장과의 1:1 액션장면 말하는 건가요?"
한국액션영화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센세이션했던 이지우와 최두호 무술감독의 격투 장면. [악의 기록]을 말하자면, 그 격투 장면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네 맞습니다. [악의 기록] 이후 1:1 맨손 액션 시퀀스에 [악의 기록]의 영향을 안 받은 영화가 없다시피 하죠. 그리고 그 감성을 살릴만한 배우가 없다시피 합니다. 사실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바람이 분지는 오래됐지만, 아직 큰 성과를 보인 작품은 없습니다. 하지만 [악의 기록]은 다를 겁니다."
"혹시 그러면 이번 방한도 [악의 기록] 캐스팅과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다시 쾌활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입가에 대는 데이비드 김.
"네, 맞습니다. 이번 방한의 제일 큰 목적은 배우 이지우와 한 잔 하러 온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캐스팅 해야하거든요."
"네? 이지우 씨요?"
"네! 감정을 담은 액션. 그 말고는 그 누구도 '강현수'를 연기할 수 없어요."
***
입원하고 이튿날
귀에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했었다. 고막에 큰 충격이 가긴 했으나, 입원을 계속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스트레스, 과로, 불면증, 부실한 식사로 인한 영양결핍이 더 심각했다고 했다.
의사의 말대로라면 잘 먹고 잘 쉬면 금방 괜찮아질 것이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촬영 전 북파공작원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한계까지 체중 조절했다. 거기에 하드한 코리아액션스쿨의 트레이닝을 소화했었고.
그뿐이겠는가. 마지막 17:1의 액션 시퀀스만 사흘 꼬박 촬영했다. '실장' vs '현수'의 1:1액션 장면을 이틀 촬영했고. 감정이 폭발하는 최태호와의 대면씬까지 쉬지 않고 촬영했었다.
그리고, '강현수'에 대한 지나친 몰입.
촬영하는 내내, 가족을 잃은 슬픔을 수만 번 되뇌며 연기했었다.
메소드 연기는··· 역시 맞지 않는 옷이다.
불꽃과도 같다.
자신을 연료 삼아 거세게 일어나 열기처럼 주변에 감정을 퍼트린다. 하지만 연소 후 재가 남는다. 그 검은빛 상처가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줄어든 초와 같이 한번 타오른 감정과 육체는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힘들다.
이런 감정을 가진 채 일주일간 육체를 혹사하며 촬영했으니 탈이 날 수밖에.
하지만, 만약 다시 태어난다 해도 [악의 기록]의 대본을 같은 방식으로 연기할 것이다. 아마도···
그 속에서 아버지를 만났으니까.
그리고 웃는 세화도 보았고.
오래 연기를 했지만 이런 식의 몰입은 처음이었다. 단순히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듯한 착각이 아니었다. 캐릭터의 진심과 내면이 이해됐으니까.
마지막 애드립 또한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나온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하지만 연출을 맡은 이수한 감독의 의견은 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은 다행스럽게 잘 해결 되었다.
이수한은 입원한 첫날, 마지막 내 애드립이 포함된 촬영본을 들고 찾아왔다. 현주는 그런 이수한의 머리를 델몬트 오랜지 병으로 깨버릴 뻔 했지만,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그는 재촬영 없이 애드립을 포함한 분량으로 진행하기로 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대신 결말은 어쩔 수 없이 바뀌었다. 추가촬영을 통해서 에필로그 형식의 마지막 장면을 삽입하는 방향으로 조정하기로 했다.
나는 내심 원래 시나리오 대로 촬영을 한 번 더 하고 둘 중 나은 방향으로 촬영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 델몬트 오렌지 주스 병이 내 머리를 깨버릴 것 같아 차마 말하지 못했다.
사실, 현주를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감정의 바다에 표류하던 나를 지금의 이지우로 이끌어 준 것이 그녀니까.
마지막 그 촬영. 그곳에 현주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지금의 나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텅 빈 내 화실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화실이 점점 정이 들어간다.
소파에 아무렇게나 누었다.
그림이나 그릴까?
아니면 이수한네 만화방이나 놀러 갈까.
이수한은 어차피 제작사에 붙어서 몇 주간은 꼼짝없이 편집을 확인해야 할 테니. 만화방이 비어있을 텐데.
아참. 편집감독은 누가 하기로 했었지?
경수형에게 물어볼까?
포스터 촬영 스케줄은 언제였더라.
영어 대본이나 볼까?
아니면 내 앞으로 들어온 대본 있나 알려달라 그럴까?
방금 나를 바래다주고 돌아간 로드매니저 이동수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여보세요? 네 동수 씨. 혹시 제 앞으로 들어온 대본 있나요? 그리고 [악의 기록]포스터 촬영 언제였죠?"
"지우 씨! 안됩니다. 지우 씨 쓰러지고 제가 사장님한테 얼마나 깨진 지 압니까? 제발 며칠이라도 쉬어요. 당분간 대본 넘기지 말라는 사장님 지십니다. 그리고 현주씨한테도 부탁받았고요. 앞으로 스케줄은 때 되면 알려 드릴 테니 쉬고 계세요! 제발!"
이동수에게 전화해서 물어봤지만, 지금은 그저 쉬라는 이야기만 돌아온다.
이거 너무 환자 취급인데. 찍어야 할, 그리고 가져와야 할 작품이 아직 많은데.
하릴없이 소파에 누워 멍하게 천장을 보고 있는데.
'부스럭'
누울때는 몰랐던 종이뭉치가 배긴다.
뭐지?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
현주가 쓴 아동극이었다. 그것도 초고 완성본. 아마도 작업을 하다가 놔두고 간 모양이다.
정확하게는 아동용 뮤지컬.
키득거리며 뮤지컬 대본을 읽고 있는데,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흥행과 관계없이,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면 돈을 준다고?
이게 쉬는 거지.
청운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한 배우가 생각났다. 부족한 기본기와 발성을 배우기 위해 연극판에 자리 잡은 배우.
내가 [저승카페]와 [악의 기록] 촬영하는 동안, 연극 한 편 들어가서 이제 막 전국 순회공연이 끝난 배우.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 작품 하나 끝났다고 그랬지? 나한테 기가 막히고 스팩타클하면서, 범지구적 액션 스릴러 연극 대본이 있는데 관심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