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침전
고된 육체노동, 그리고 배우는 감정에, 스태프들을 예산과 시간에 치인다.
하는 일은 전혀 다르겠지만, 그 저변에 깔린 것이 육제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높다는 것은 공사판 노동과 유사하다.
그래서 그런가. 영화판에는 유독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몇몇 헤드급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여 술판이 벌어졌다.
촬영장 인근 고깃집에서 시작된 술판이 이어져 늦은 새벽 포장마차까지 왔다.
살아남은 것은 이수한, 예기성, 이정건 셋이었다.
이정건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영화판에 소문이 자자하다. 그런데 이정건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주는 술을 마다치 않고 마셨다.
취한 예기성과 이수한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시고, 이정건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따라주는 술만 홀짝인다.
"크, 좋다. 그래서 말입니다. [폭력의 사슬] 추가 촬영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그··· 인터넷 멀티숍? 그 사장한테 찾아갔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장이 지우 얼굴 딱 보자마자. 계약서 뙇! 계약금 뙇! 돈 500만 원 구해서 재촬영했는데, 재촬영 날 스태프랑 배우들이랑 패싸움이 뙇!"
"크크크, 그걸 찍은 게 [폭력의 사슬] 포스터라고? 걸작이구만."
"네··· 지우가 투자해서 겨우 찍었는데··· 하, 진짜 제가요 패싸움 난 밤에 필름 들고 편집실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완성도 조금 올리려고 그 난리를 피웠는데, 스태프들 패싸움으로 필름 다 날리고. 뭐 그 덕분에 포스터가 잘 나와서 흥행에 도움됐지만요. 진짜 지우 도움이 컸죠."
"지우 군은 그때도 대단했구만.".
그때였다. 그동안 예기성과 이수한 감독의 말을 듣기만 하던 이정건이 불쑥 말을 꺼냈다.
"지우 이야기 나와서 말인데요··· 지우 괜찮은 거 맞죠?"
"괜찮아야죠. 주연 배우인데."
무심한듯 툭 하고 내뱉는 이수한.
촬영장에 흐르는 이정건과 이지우 사이의 미묘한 기류. 이 기류는 촬영이 진행되면서 강해졌고, 촬영 최후반부인 지금에 와서는 모두가 눈치 채고 조심하고 있었다.
예를들어 이지우 앞에서는 이정건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든가, 이정건의 촬영이 끝나면 텀을 두고 이지우의 촬영을 이어간다든가.
"지우 요새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서요. 연기야 나무랄 데가 없지만."
하지만 이정건의 저 걱정스러운 말에는 가식이 없었다.
이정건이 이지우를 굉장히 신경 쓰고 있음이 보였다.
견제나 질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승부욕이나 호승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방금 저 말은 후배를 걱정하는 선배의 모습에 가까웠다.
"어··· 음··· 지우의 연기가 변했다는 것도 알고, 요새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긴 한데,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정건은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이지우와, 이수한이 막역하다는 것은 촬영장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아니··· 그래도."
"너무 연기를 잘하니까, 몰입을 덜어내서 수준을 낮춰서 연기하라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프로젝트 올 스톱시키고 쉬었다가 할까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습니까. 배우에게 필요한 케어를···"
"정건 씨가 지우 신경 써주는 거 고마워요. 사실 저도 많이 걱정되고요. 예전에 지우가 저한테 한 말이 있는데요. 저보고 우스운 사람이래요. 그런데 영화를 찍을 때는 대단한 사람이 된다더군요. 그래서 믿고 연기할 수 있다고요."
뭐라고 더 말을 하려던 이정건은 이어지는 이수한 감독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를 믿고 연기하는 지우를 저도 믿을 수밖에 없어요."
***
씬# 244
최태호의 거대한 별장.
최태호는 별장 안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비자금으로 구매한 별장. 섹스나 마약 파티를 할 때나 한 번씩 사용하는 별장이다. 용도 자체가 알려지면 안 되기에 차명으로 구매한 별장. 자신과의 연관 점은 없었다.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아 경호원을 늘리고, 조폭들도 경호랍시고 불러들였다.
미친 살인마가 운 좋게 여기를 찾아온다 해도 죽여버릴 생각으로.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여길 오겠어? 오더라도 나를 죽일 수 있겠어?'
최태호는 그렇게 되뇌어 보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애꿎은 위스키만 벌컥벌컥 마신다.
그렇게 최태호는 뉴스 채널만 돌려가며 그 빌어먹을 살인마가 잡혔다는 소식이 들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끼이이익 쾅'
난데없는 굉음에 최태호는 커튼을 뜯어내듯 걷었다.
거대한 트럭 한대가 별장의 담벼락을 부수고 곧장 돌진한다.
25톤 덤프트럭이 본관의 앞 조각상까지 부수고서야 멈췄다.
서서히 먼지가 가라앉고, 모든 경호원과 조직원들이 덤프트럭 운전석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액션.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선물이다.
가리거나 필터를 씌운 듯 단편적으로 보여줬던 액션이 나의 감정과 함께 터진다.
나는 트럭 뒤쪽 짐칸에서 뛰쳐나와, 두 명을 제압한다.
'탕탕, 탕, 탕탕, 탕'
몸통 두 발, 머리 한 발.
모잠비크 드릴과 더블탭 활용한 정확한 사격.
총소리에 주변의 이목이 쏠리고, 경호원들은 저마다 은엄폐하여 몸을 숨긴다.
'탕'
다시 울려 퍼지는 총성.
내가 쏜 총알이 아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숨긴다. 그곳에 숨어있는 칼을 든 조폭.
나를 발견하고 놀란 듯 칼을 휘두르려 하지만.
'탕탕, 탕'
몸통에 두 발. 확실하게 자세를 무너뜨리고 머리에 확인 사살 한 발.
'마약 밀수를 전문으로 하는 조직이라 그랬지.'
어쩌면 총 몇 자루가 흘러들어 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총성으로 상대방 위치를 가늠해본다.
이어지는 총격전.
내가 은엄폐한 돌벽에 총알이 꽂히고 돌가루가 튄다.
'틱, 틱, 틱틱틱틱'
이내 비어버린 약실에 공이가 치면서 쇳소리가 난다. 아무리 조직폭력배라도 총기 사용은 아마추어다. 잔탄을 계산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쏘는 총에 쉽게 맞아 주지 않는다.
바로 일어나 총성이 들렸던 위치에 대고 두 발씩.
잔탄 3발.
달려가 정문 뒤로 숨어 있는 한 녀석에게 다시 더블탭. 확인사살.
'틱'
예상대로 탄창이 비어버렸다. 탄창을 갈기 위해 텍티컬 홀스터에 손이 집어넣는 찰나.
숨어 있던 한 녀석이 달려들며 나를 막는다.
손에 있던 권총을 빙글 돌려 총신을 잡는다.
'치이이익'
뜨겁게 달구어져 있던 총신이 살을 태우며 연기가 나지만 아무렇지 않게 총의 손잡이 부분으로 달려드는 녀석의 머리를 찍는다.
동시에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사내들.
그들도 직감적으로 탄창을 가는 순간 모두 죽을 것임을 예상한 듯 몰려온다.
'샥'
예리한 회칼이 눈앞을 스치지만 피하지 않았다.
수 많은 전투로 다져진 감각이, 짧다는 것을 알려준다.
회칼을 든 상대방의 손을 잡아채고, 꺾어 나를 노린 칼날을 오히려 상대방 옆구리에 꽂았다.
비명을 지르며 칼을 놔버리는 사내.
횟칼을 잡고 비틀고 뽑고, 경동맥을 갈라 확인사살까지. 수만 번을 반복 연습한듯, 한 호흡에 이어지는 동작들. 눈에 보이질 않는다.
쇠파이프, 테이저건, 칼. 저마다 든 무기로 필사적으로 나를 막아선다.
왼 손에는 방금 줏어든 회칼. 오른손에는 빈 총.
몰려드는 상대들.
무사트와 크라브 마가가 혼합된 특이한 움직임.
회칼이 든 팔로 쇠파이프를 흘리며 바로 경동맥을 그어버린다.
칼을 든 상대의 손목을 총으로 내려치고 손잡이로 상대의 목을 걸어 자세를 무너뜨린다.
자세가 무너진 상대를 앞으로 끌어당기자.
'틱'
'끄으으윽'
테이저건을 맞아 기괴하게 몸을 비틀며 쓰러진다.
손에 든 회칼로 경련을 일으키는 남자의 경동맥을 긋고, 곧바로 회칼을 테이저건을 쏜 상대에게 던진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완벽하게 거리와 회전수를 계산해, 상대의 미간에 꽂히는 회칼.
압도.
단 몇 초 만에 3명이 추가로 쓰러지자 덤빌지 말지 고민하는 최태호의 고용인들.
돈 때문에 목숨을 거는 바보는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 주춤거리며 도망갈지 말지 고민하는 찰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총을 바로잡고, 탄창을 갈아 끼우려 했다.
'막아, 저거 막으라고!'
'으아아악!'
그제서야 남은 인원들도 덤벼든다.
탄창을 갈아 끼우게 되면 모두 죽을 것을 예감한 듯 달려드는 사내들.
'탕탕, 탕, 탕탕, 탕'
두 명이 나자빠져 쓰러졌지만, 결국 한 명이 내 총을 잡는 데 성공한다.
총구를 비틀고 꺾어 상대방 손목을 꺾어버린다. 필사적으로 총구를 붙잡아보지만. 꺾인 총구의 방향은 사내의 머리였다.
'탕'
기어코 한 명을 더 죽였다. 하지만 이어서 몰려오는 사내들에 의해 총을 놓치고 말았다.
등 뒤에 꽂히는 칼. 허리와 어깨를 강타하는 쇠파이프.
나는 고통에 익숙하다. 고문 대응훈련을 하며 단련된 정신이 있다. 정신을 잃지 않으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육체가 있고.
처절한 혈투가 이어진다.
결국 남은 모두를 제압한 나는 떨어진 총을 주어 들고 탄창을 확인했다.
눈알이 짜부라져 비명을 지르며 뒹굴고 있는 사내.
팔이 역방향으로 꺾이고 무릎이 박살 난 상태로 기어서 도망가는 사내.
겨드랑이의 대동맥을 베어 피를 흘리며 헐떡이는 사내.
'탕, 탕, 탕'
머리에 한 발씩.
원한은 없지만, 최태호를 죽이는데 방해받을 수는 없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어깨 부분의 자상. 오른팔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총을 점검하고 사격자세 한번.
방아쇠를 당기는 데 문제 없다. 그래 그거면 됐다.
나는 별장 안으로 향했다.
'끼이이익'
별장 내실 문을 여는 순간.
'철컥'
정확하게 내 머리를 겨누는 총구.
"흑제비, 총 버려."
적을 쓰러뜨리고, 가장 무방비가 되는 순간.
그 순간을 노리고 들어온, 실장이었다.
***
보통 촬영하는 순서와 영화 내의 진행의 순서는 다르다.
영화의 앞부분이라 해도 마지막에 찍을 수 있고, 영화의 종반에 해당하는 장면이라도 상황에 따라 제일 먼저 찍을 수도 있다.
[악의 기록] 종장의 액션씬. 배우들의 체력 배분과, 촬영장 협조, 그리고 여러 가지 어른들의 사정이 겹쳐 마지막 전투씬은 일정 상 마지막에 찍게 되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영화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
'이수한 감독이 이지우와 친분 때문에 시나리오를 바꿨다.'
혹은,
'신인감독이 뭘 잘 모르고 무리수를 둔다'
등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제 와 그런 소리에 신경을 쓰는 스태프나 배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촬영장에 발을 딛는 모두가 이 영화는 대작 혹은 명작으로 길이 남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을 가능케 하는 연기.
예기성, 최두호, 이정건.
존재감이 눈부시다.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다. 악과 악이 첨예하게 맞부딪히는 영화.
그 중간자적 역할을 하는 예기성. 진실에 다가갈수록 고뇌하고 고민하는 캐릭터이다. 자칫 밋밋하게 흘러갈 수 있는 캐릭터. 예기성의 연기력으로 깊이 있는 고찰을 담는다.
태생이 악으로 태어난 남자와, 악이 될 수밖에 남자를 관찰하고 조명한다.
어찌 보면 [악의 기록]이라는 타이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가 예기성이 연기한 '최 형사'였다.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지만, 영화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 두 악인의 진실을 모두 아는 캐릭터.
최두호가 연기한 '실장'이란 캐릭터도 마찬가지. 원래 이 정도로 비중이 있던 캐릭터가 아니었다. 최두호가 캐스팅되고 이수한은 시나리오를 바꿨다.
그의 육체로 표현되는 영화적 언어, 액션에 대한 열정. 모든 것이 배역과 시너지를 일으켰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연기력은 얼굴을 가리고, 대사량을 줄여서 커버한다. 그러자 오히려 미스테리한 '실장' 분위기가 살아난다.
부족한 연기도 상대하는 배우가 예기성과, 이정건이기에 도드라져 보일 뿐. 나쁘지 않은 연기였다.
'최태호'의 대칭점이 '강현수' 였다면, 최 형사의 대칭점은 '실장'이 되었다. 중간자의 입장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캐릭터. 마찬가지로 고민하지만, 최 형사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이로서 마지막 '실장'과 '현수'의 격투씬은 설득력을 갖추게 되었다. 개연성과 주제의식이 한층 살아난다.
그리고 이정건.
누가 그를 보고 바른 생활 사나이라 했던가.
타고난 악인이 있다면 바로 저 사내를 말하는 것이리라.
영화를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은 이 캐스팅을 미스 캐스팅이라 했다. 이정건이 쌓아올린 이미지가 이 영화의 독이 될 것이라고. 관객들은 이전의 이정건의 이미지와 '최태호' 사이의 괴리감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투자자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이수한 감독이 무리수를 두었다고 말을 했다.
하지만 이정건이 만들어 낸 캐릭터는 순수 악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윤리와 도덕을 상실한 재벌 3세.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가 결합한, 하지만 그런 성향을 고칠 기회가 박탈된 부유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캐릭터. 캐릭터의 배경과 환경을 분석해 연기에 녹여낸다.
이런 촬영장에서 모든 스태프의 집중력이 올라간다.
촬영장에서 단 한 번이라도 일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자부심을 품고 돌아갔다.
뭔가가 일어나고 있고, 자신이 그곳에서 무언가를 했노라고.
이 영화가 개봉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게 무슨 일인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다만 모두가 이 명작에 누를 끼치지 않게 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 애쓸 뿐이었다.
고무적이다. 인생연기를 펼치는 배우들 속, 나는 점점 침전되어 갔다.
이정건은 '최태호'로 보였고, 예기성은 '최 형사'로', 최두호는 '실장'으로 보였다.
내 삶에 전에 없던 메소드 연기.
실수를 할 것 같아, 오늘도 촬영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벗어났다.
아이들의 가구마저 모두 빼버린, 텅 빈 화실.
'똑똑똑'
"누구세요?"
"세화에요. 아주머니가 반찬 가져다 놓으라고 해서요."
문을 열어주니 세화가 보자기에 싼 음식을 내민다.
나도 모르게···
"미래야? 아니··· 미향아?"
"네?"
"아··· 세화구나."
나는 연기와 실제 그 사이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