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61화 (62/121)

61. 그냥 연기를 잘 하는 겁니다.

"지우 씨, 괜찮은 거 맞죠?"

"네? 아, 괜찮아야죠. 들어가 볼게요. 내일 봬요."

로드매니저 이동수가 화실 앞에 차를 세우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묻는다.

괜찮냐고?

사실 별로 안 괜찮다.

수십 년을 연기했지만, 이토록 힘들게 연기한 적은 처음이었다.

특히 오늘 찍은씬.

김 비서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 '현수'가 진실이 인지하는 씬.

메소드 연기의 치명적 단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현수'의 무력감과 상실감이 마치 나의 감정인양 나를 휘두른다.

연기와 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그 위를 감정이 넘나든다.

나는 '현수'가 아니고, 저 사람은 '김 비서'가 아니라 조연 배우일 뿐이라는 사실을 끝없이 되뇌어야 했다.

치열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반복하고 돌아온 화실.

불이 켜져 있다.

내가 불을 켜고 출근했던가?.

"어? 지우 왔어? 늦었네."

현주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아직 있었어?"

"어, 그때 말했던 연극 기억나? 회사에서 이번에 각본 하나 요청했거든. 아동극."

기억난다. 청운 엔터테인먼트에서 연극 뮤지컬 제작한다고 했었고, 그 각본 작업을 현주에게 맡겼다는 것.

"어 알지. 벡터맨 이었나? 아동용 뮤지컬 맞지?"

"어 맞아. 그거 작업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어디 한번 봐도 될까?"

"에이, 인제 와서 피곤할 텐데. 다음에."

"아냐, 지금 보고 싶어."

머릿속을 꽉 채운 상념을 털어내기 위해 다른 것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게 영화든 만화든 상관없었고, 현주가 쓴 대본이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흐음··· 부끄러운데··· 일단 초고 반 정도 썼어. 자! 여기."

현주가 건네주는 대본을 받았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대본.

아동극다운 단순하고 명쾌한 플롯.

유치하고··· 즐겁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오! 웃었다. 재밌어?"

"어. 근데 유치해. 크크."

"야! 원래 아동극은 유치해야 되는 거야! 니가 아동극을 알아?"

아동극은 모르지만, 연극은 좀 알지.

"누가 뭐래? 그냥 유치하다 그랬지 재미없다고는 안 했어."

"웃으면서 잘 봐 놓고는··· 뭐 그래도 이지우 한번 웃겼으니까 만족한다. 대견해 박현주."

현주는 그렇게 말하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크하핫, 뭐야 진짜."

어쩐지 현주와 웃으며 이야기하다 보니 긴장이 탁하고 풀린다. 내내 고민하던 게 다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어, 현주야 우리 촬영장 한번 안 올래? 아니 와줘."

"나야 좋지. 간만에 수한이 오빠도 보고. 그런데 곧 마지막 촬영이라 그러지 않았나?"

"어. 마지막 촬영 때 꼭 와줘."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나를 괴롭히던 문제의 그 씬.

그녀가 필요했다.

***

씬# 215

최태호(이정건)는 사무실이 넓음에도 자신의 책상 앞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초조함이 묻어나온다.

"씨발 아닐 거야, 뭐야 진짜 씨발."

강 형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형사라는 게 워낙 위험한 직업이니까. 속으로 '그럴 거면 일찍 뒈지지' 하고 생각했다. 입금 전에 죽었으면 돈을 아낄 수 있었을 텐데. 뭐 그런 생각.

그리고 돈을 쥐여준 검사가 죽었을 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총상으로 죽었다니.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총상으로, 그것도 검사가.

갑자기 실종된 김 비서가 떠오르자 불안이 엄습한다. 김 비서가 납치될 때 조폭 6명을 한 사람이 때려눕히고 납치했다는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의 말.

실종된 김 비서도, 죽은 강 형사나, 검사도 모두 한 사람이 한 짓이 아닐까?

그렇다면 남은 건 퇴직 후 회사 법무팀 고문을 약속했던 판사뿐.

겁이 난 최태호는 마약을 공급받던 조직폭력배들에게 연락해서 판사의 집 근처를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

판사가 죽든 말든 상관없으니까 그 새끼를 꼭 잡아 오라고. 김 비서와 마약을 꼭 회수해야 한다고. 그래야 너희도 살고 나도 산다고.

그리고 오늘 자 신문 1면에 도배된 판사의 죽음.

죽은 검사와 판사. 경찰은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광역수사대에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된다고 떠들썩하다.

하지만 최태호는 경찰을 믿을 수 없었다.

판사집을 지키고 있던 십여 명의 조직폭력배들은 대부분 반신불구자가 됐다고 했다. 그 현장을 유유히 빠져나간 자를 경찰이 잡겠다고?

최태호 입장에서는 뇌물이나 받아먹는 경찰을 신뢰할 수 없었다.

그 이전에, 아무리 불안해도 최태수는 경찰에 신고할 수 없었다. 자신과 관계있는 경찰, 판사, 검사가 죽었을 뿐인데, 보호를 요청한다? 자신이 뇌물을 건넨 게 까발려질 수도 있었다.

재수사하는 과정에서 마약을 한 것이 걸릴 수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마약을 구매한 비자금의 출처까지 까발려 질 테고.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교통사고를 담당했던 자신의 변호사에게 그때의 기록을 다시 보내라 했다.

자신의 메일로 들어가 그때의 기록을 꼼꼼하게 살폈다.

'분명히 그 사고의 애 엄마한테 가족이 있었는데···'

죽은 아이와 아이의 엄마의 유일한 혈육. 연락되지 않아 무시했던 한 남자.

최태호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이렇게까지 일을 벌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초조하게 변호사가 보낸 파일을 보던 와중.

'띠링'

컴퓨터에서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람 음이 울린다.

차명계좌에서 300억이 빠져나갔다는 알림이었다. 혹시나 김 비서가 비자금을 엉뚱한데 쓸까 걸어놨던 안전장치 중 하나.

"이씨발 새끼들이!"

최태호는 재빨리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씬# 226

김 비서에게 사건의 전말을 모두 전해 들었다.

판사, 검사, 형사. 모두가 한 통속이었다.

그들의 잘 짜여진 판에는 죽은 아이와, 아이의 엄마에 대한 동정은 조금도 없었다.

신원조회가 막혀 있는 현수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사건을 마무리 지어버렸다.

힘 있는 그들에게는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겠지.

그래서 죽였다.

마약에 취한 상태로 운전한 최태호를 눈감아준 형사.

단순 교통사고로 취급해 구형을 결정한 검사.

두 사람을 죽이고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판결한 판사.

돈에 눈이 멀어 선을 져버린 인간들.

모두 죽였다.

현수에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들 손에 있는 힘을 쉽게 휘둘렀기에, 현수 또한 자신이 가진 힘을 휘둘렀다.

세번째 타겟이었던 판사.

판사를 죽이고 나왔을 때 만났던 조직 폭력배들.

아마도 위기를 느낀 최태호가 보냈겠지.

그들이 현수를 노리고 쫓아왔을 때 현수는 오히려 안심했다.

'최태호. 너도 내 존재를 알고 있구나. 다행이다.'

최태호는 곧 현수가 찾아갈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부디 두렵길 바랐다.

현수는 자신이 최태호를 죽이러 갈 그 순간까지 최태호가 공포에 떨며 참회하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 추적 위험을 무릅쓰고 최태호를 살해명단의 끝에 둔 것이니까.

현수는 창고로 돌아와 화이트 보드에 붙어있던 판사의 사진을 뜯어 버렸다.

이제 화이트 보드에 남은 사진은 두 장.

최태호의 사진과, 최태호의 비서의 사진뿐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현수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김 비서.

화이트 보드에 사진이 두 장만 남자, 헐떡거리며 겨우 말을 잇는다.

"선생님. 살려주십시오. 차··· 차명계좌를 제가 관리 하고 있습니다. 최태호 그 새끼··· 차명 계좌를 제가··· 삼백억···"

현수는 웃었다.

돈이 중요한가.

끝끝내 숨겨왔던 비밀이란 게 고작 돈이라니.

누나와 함께 열심히 돈 벌어 산 아파트.

미향이를 잘 키우기 위해 무리해서 좋은 집을 샀었다.

하지만, 그런 아파트가 수십 채 있으면 뭐하나.

들어가 살 사람이 없는데.

현수는 장비를 점검하며 마지막 작업을 준비했다.

이제 슬슬 경찰이 냄새를 맡고 수사망을 좁힐 것이다.

최태호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조폭들도 거슬리고.

무엇보다··· 움직이기 시작한 실장이 걱정됐다.

국정원 블랙, 해외 공작실 실장. 현장요원에서 올라가 실장까지 단 인물. 그만큼 오래 살았고,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았다는 것은 능력이 출중하다는 방증이다.

판사집 앞. 조폭들을 뿌리치고 마주친 요원. 그는 분명 자신과 동류의 인간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급소를 향해 칼을 휘두르던 모습.

훈련된 요원이 분명했다.

아마도 실장이 보냈을 태지.

자신을 쫓는 조폭들과, 그리고 회사(요원)의 추격. 거기에 경찰이 언제 수사망을 좁힐지 모르는 상황.

빠르게 일을 끝내야 했다.

현수와 최태호의 사이에 있던 모든 것들을 치웠다. 형사, 판사, 검사. 마침내 남은 것은 최태호와 현수 뿐이었다.

"이 계좌로 전액 이체해."

현수는 메모지에 계좌번호를 휘갈겨 써 김 비서 앞에 놓았다.

'미소 보육원, ㅇㅇ은행 110 12 XXXX XXX'

김 비서의 손을 풀어주고, 노트북을 들이밀었다.

"이···인증하려면 휴대폰이 필요합니다."

휴대폰의 위치추적을 걱정하는 듯 잠시 고민하는 현수.

이내, 이제 이곳은 필요 없음을, 곧 모든 것이 끝날 것을 떠올린다.

휴대폰을 던져주고, 송금처리가 끝나는 것까지 확인한 후 다시 김 비서를 묶었다.

그때 울리는 김 비서의 전화.

발신자 표시 서비스 : 최태호 이사

현수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김 비서? 야 씨발새끼야 너 어디야. 야 이 개새끼야 너 그 새끼랑 짜고 나 맥이는거지? 너 이거 다 자작극이지. 300억을 보육원에 태워? 씨발새끼야! 니 애미고 가족이고 다 죽여버린다.

분노로 이성을 잃어 거침없이 울분을 토해내는 최태호.

현수가 아무 말 없자, 그제야 최태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야 너 혹시? 그··· 애 엄마 오빠인가 동생인가 하는 그 새끼냐?

"신은 없다."

현수는 오랜 생각을 말했다.

-뭐?

"신이 선하다면 너를 벌 했을 테니까. 너를 벌하지 못한 신은 무능하다. 선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걸 신이라고 부를 수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신은 없다."

-씨발 뭐라는 거야.

"신이 없다면, 누군가는 너를 벌해야 하지 않을까?"

'툭'

현수는 전화기를 끄고, 창고에 남은 장비들을 마저 챙겼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계획된 촬영이 끝나고, 주연인 이지우는 급하게 촬영장을 나서 밖으로 빠져나간다.

'우, 우읍'

촬영하는 내내 묶여있었던 김 비서 역할의 조연 배우가 결박된 줄이 풀리자마자, 입을 막고 뛰쳐나가 버린다.

"어? 어! 괜찮으세요?"

그 모습을 본 이수한 감독이 놀라서 달려왔다. 촬영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고에 책임이 있는 감독. 혹시나 배우의 컨디션에 문제가 있다면 촬영순서를 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수한은 화장실까지 쫓아와 조연 배우의 등을 두드려 줬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거기에 떨림이 멈추질 않는 듯, 계속해서 떨리는 두 손까지.

이수한은 손은 배우의 등을 두드려 주며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촬영날짜를 계산했다.

"묶여 있느라 많이 힘드셨죠? 괜찮으세요?"

"헉, 하··· 좀 괜찮아졌어요. 감사합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조연 배우에게 다가가 휴지를 건넨다.

"컨디션 괜찮으세요? 여유 있으니 날짜조정할까요?"

"아뇨, 진짜 괜찮습니다. 이제 좀 진정이 되네요. 휴···"

조연 배우의 상태가 좀 괜찮아지자 밖으로 나와 커피 한 잔 뽑아 배우에게 건넸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그게···"

"음··· 말 못할 사정이 있으시면 꼭 말 안 하셔도 됩니다."

"아뇨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당황한듯 손사래 치는 조연배우.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듣지 마시고요. 사실··· 무서웠습니다. 하··· 이지우 씨가 진짜 저를 죽일까 봐요."

"네? 하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조연 배우의 얼굴은 웃음기 없이 진지했다.

"저도 말이 안 되는 거 아는데 저는 진심입니다. 중간부터는 연기가 아니었어요··· 진짜 무서워서 대사를 어떻게 쳤는지 기억도 안 나요. 감독님은 카메라로 보셔서 모르는 겁니다. 옆에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아세요?"

이수한 감독도 조연 배우의 표정을 보고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무슨 생각이 드는데요."

"볼펜을 들면, 볼펜으로 찔러 죽일 것 같고, 휴대폰을 들면 휴대폰으로 패 죽일 것 같았어요··· 이지우 씨 저한테 혹시 원한 같은 게 있는 걸까요? 제가 이지우 씨한테 뭐 실수한 거 있나요? 감독님 이지우 씨랑 친하잖아요. 혹시 뭐 들은 거 없으세요?"

이수한은 속으로 당황과 환희를 동시에 느꼈다.

상처 입고 지킬 것이 없는 남자의 처절함.

렌즈 너머에서 느껴지던 지독한 살의.

자신만이 느낀 게 아니었다.

기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스케줄을 바꿀 필요가 없음에 기뻐하며 이수한 감독은 편안한 마음으로 조연 배우를 위로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지우는 그냥 연기를 잘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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