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어쩔 수 없다
씬# 190
넓고 깔끔한 사무실. 고급스러운 크리스털 명패에는 '경영 이사 최태호'라 쓰여 있다. 대기업이라 하지만 일개 이사의 사무실치고는 유난히 넓고 가구도 고급이었다.
올백 머리에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최태호 이사(이정건). 그 앞에는 또 다른 비서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 숙이고 서 있었다.
등진 비서를 오버숄드 샷으로 최태호를 찍는다.
비서가 있건 없건 담배에 불을 붙이는 최태호.
"김 비서 아직 연락 안 돼?"
"네··· 이사님. 가족들에게도 전혀 연락이 안 되고 있다고 하네요. 실종신고까지 끝냈는데 경찰도 아직 위치를 못 찾고 있다고 합니다."
급하게 인수인계를 받아 온 새로 온 여비서는 최태호에게 적응 하지 못해 안전부절 못하고 있었다.
"하, 씨발. 내가 지금 그게 궁금해서 물어봤을 거 같아? 가서 김 비서 찾아오라고! 경찰이든 흥신소든 일단 찾아오란 소리인 거 못 알아들어? 병신이야?"
사무실의 재떨이를 던지며 새로 온 비서에게 화풀이하는 최태호 이사.
"어휴, 병신 새끼들 꺼져."
그는 뒷걸음치며 난감해하는 비서에게 나가라는 듯 손짓을 한다. 그 손짓하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끼워져 있고, 건방지고 안하무인인 그의 성격을 대변해서 보여준다.
최태호(이정건)는 휴대폰을 들어 전화하려 하다, 멈칫한다.
불법적인 일과 연관되는 것이 불안했던 것일까? 이내 서랍 안의 다른 낡은 휴대폰을 꺼내어 전화한다.
"어 양 사장. 이 씨발놈아. 우리 김 비서 어따 숨겼어?"
-아이고 최 이사님. 김 비서고 나발이고, 우리 물건 사라지고 애들 6명 병신 되게 생겼는데 지금 김 비서가 중요합니꺼? 게다가 우리 아직 물건값 못받았는데예."
최태호 이사가 윽박지름에도 지지않고 느믈거리는 전화 속 양 사장.
"말장난 하지 말고. 우리 김 비서 어디로 데려갔어?"
-진정하시고예, 아는 경찰한테 물어보니까, 어떤 십새끼가 갑자기 튀어나와가 우리 애들 조지고 물건이랑 돈 다 들고 김 비서 데리고 토끼따 하데예. 그런데··· 찾는 게 물건입니꺼, 아니면 김 비서 입니꺼?"
"둘 다."
-그라믄, 이래하입시다. 우리가 애들 풀어가꼬 김 비서 잡아간 새끼 찾아 볼테니까, 김 비서 찾으면 저번에 보낸 물건값이랑 뽀찌좀 넉넉하게 챙겨주이소. 네? 우리도 일단 우리 애들 건드린 새끼 잡아서 본보기는 보여야 안하겠는교?
"그 새끼 못 잡아 오면 너희가 먼저 죽을 줄 알아! 김 비서를 찾아야 뽀지를 주건 말건 할 거 아니야. 니들 다 잡혀가고 싶어? 김 비서가 잡혀서 불면 나도 그렇고 너도 무사하지 못해. 빨리 찾아와라. 어?!"
최태호(이정건)는 김 비서가 걱정되거나 유난히 아껴서 찾으라는 것은 아니었다. 차명계좌를 관리하는 김 비서가 경찰에 먼저 잡힌다면 곤란해질 사람이 바로 최태호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모아온 최태호의 비자금이 몽땅 날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마약 심부름을 하던 것까지 걸린다면···
최태호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최태호는 문득 무슨 생각이 난 듯, 컴퓨터를 켜서 무언가를 검색고, 전화를 건다.
"어, 김 사장. 이번에 내차 폐차했거든. 이번에는 다른 거 타보고 싶은데. 그래그래 그때 말했던 그 모델. 우리 직원이 법인 명의로 살 거야. 최대한 빨리 나오는 거로···"
최태호(이정건)는 이전의 사고도, 실종된 김 비서도 자신을 귀찮게 하는 스트레스였을 뿐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스포츠카를 주문했다.
#198
'남성 물산'
평범한 간판에 어디에나 있을법한 조그마한 무역회사.
휴대폰 케이스, 유아용 장난감 등, 주로 중국의 물건을 받아와서 한국에 유통하는 회사.
그곳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복장의 남자가 들어섰다.
잘빠진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사장인듯 직원에게 서류를 들고 지시를 하던 남자가 새로 등장한 남자를 보고 흠칫 놀라며 물었다.
"실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실까."
사장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 사무실. 직원들도 일반인은 아닌 듯 날카롭게 눈빛을 빛낸다.
사장의 말을 무시하고 말없이 사장실로 들어가는 실장이라 불린 사내.
"뭐해, 하던 일마저 해"
사장이 그렇게 말하자, 긴장을 풀고 다시 하던 업무를 마저 하는 직원들. 사장은 실장을 따라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실을 죽 한 번 둘러본 실장. 카메라는 실장이라 불린 사내의 정면을 찍지 않는다. 뒷모습과 턱 아래만을 담아 호기심을 자아낸다.
실장이라는 사람이 서류 하나를 테이블 위로 '툭' 던지며 말했다.
"우리 쪽 하나가 오작동 일으켰다."
현수의 전화기에서 들리던 예의 그 목소리.
서류를 집어 올린 사장이 빠르게 서류를 넘겼다.
"하··· 해외사업부 쪽 문제를 왜 국내사업부 쪽으로 돌리실까."
"해외 쪽 인원이 없어. 다 국외 공작 중이야. 그리고 국내에서 일이 터졌는데 따지고 보면 국내 파트 일 아닌가?"
서류를 유심히 보던 사장이 놀라며 반문했다.
"어? 이거 우리 쪽 인원이네? 혹시?"
"혹시 뭐?"
"최근 우리 쪽 은거지 두 군데 털려서 추적 중이었거든? 이 새끼가 범인인가?"
"은거지? 뭐 털렸는데?"
"하··· 골때리네. 총기, 탄약, 구급품 그리고 현금 조금. 그리고 자살용 알약. 오작동 일으킨 새끼가 누군데?"
"코드네임 흑제비. 생포할 수 있으면 좋지만 쉽지 않을 거야. 우리 쪽 에이스거든."
"그러니까, 해외 공작부 최고 에이스가 무장한 상태에서 연락 두절 된 체 국내를 활보하고 있다고?"
정체가 밝혀지면 안 되는 블랙 요원의 특성상 남성물산의 명칭은 그저 눈속임용 간판일 뿐이다. 실제 남성물산은 국내 활동하는 블랙 요원을 지휘하는 기지이다. 통칭 '사장'이라 불리는 국내 공작부 실장은 골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상대는 '실장'이라 불리우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블랙 요원을 관리하는 자. 대놓고 대립각을 세우기에는 껄끄럽다.
그때 정보수집을 위해 켜 놓은 티브이에서 뉴스가 할 시간이 아님에도 아나운서가 나왔다.
[속보입니다. 서울 서울지검 검사가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소식 전해드립니다. 강교한 검사는 2발의 총상으로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경찰은 강 검사에게 원한을 가진 자를 중심으로 수사하고 있으며···]
"하··· 씨발···"
서울 한복판에서 총격 살인사건.
남성물산 사장은 얼굴을 감싸 쥐며 나직이 욕했다.
씬# 199
최 형사(예기성)는 강 형사가 죽은 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목의 경동맥을 단번에 베어버린 흉터. 조직폭력배들의 시시한 칼질에 실수로 죽인 상처가 아니었다. 단 한 번의 칼질로 죽음을 확신하고 자리를 떠난 용의자.
그리고 며칠 안에 이어진 검사와 판사의 죽음.
경찰청은 난리가 났다. 한국에서 없다시피 한 총으로 한 범죄. 사법부를 노린 범죄가 아니냐며 떠들썩했다.
친한 국과수 감식반의 말로는, 판사와 검사의 사인은 정확하게 머리와 심장 한 발씩을 관통한 총상이라 들었다.
특수부대에서나 볼법한 정확한 사격술. 그리고 단 한 번의 칼질로 사망한 강 형사의 죽음. 어쩐지 이 모든 게 이어져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오래된 형사의 감각. 그 촉을 믿고 최 형사(예기성)는 강 형사를 조사했다. 강 형사가 담당했던 사건파일을 뒤지던 중 눈에 띄는 한 사건이 보인다.
슈퍼카 사고사건.
대낮 어린아이와 애 엄마가 차에 치여 죽은 사건. 그 사건을 접하고 심란했기에 한참 생각이 났던 사건이었다. 그 사건 유가족이 경찰서 앞에서 강 형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혹시?'
빠르게 수사기록을 뒤지고 담당판사와 검사를 확인한 순간.
"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는 최 형사(예기성).
그 사고를 담당했던 판사와 검사는 이번에 살해당한 판사와 검사였다.
경찰청 내부에는 '총격사건'이라는 것에만 집중하여 아직 강 형사와의 연관 점을 못 찾고 있는 상태였다.
'어쩌면···'
혹시나 하는 생각에 최 형사(예기성)는 자료를 들고 판검사 살해사건을 맡은 광역수사본부로 찾아갔다.
"마포서에서 온 최 형사입니다. 혹시 이번 사건 담당 팀장이나 형사분 뵐 수 있을까요?"
"네 충성! 죄송한데 지금 모두 수사랑 브리핑 때문에 빠져서요. 혹시 뭐 때문에 그러실까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최 형사(예기성)을 의식한 듯 공손히 맞이하는 젊은 형사.
"이 자료 한번 확인해주시겠어요? 혹시 도움이 될지 몰라 가지고 왔어요."
"네네 감사합니다. 담당 형사님들에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무심히 자료를 받아 책상 위 서류 더미 위에 올려두는 젊은 형사.
최 형사(예기성)는 그들이 얼마나 바쁜지 알기에 다그치지 못했다.
최 형사(예기성)가 내민 자료는 늙은 형사가 감각에 의존해 추적한 수많은 용의자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경찰이 돌아가는 시스템과 환경을 누구보다 잘 아는 최 형사는, 추가 피해라도 막아보고자 슈퍼카 사고의 유가족을 조사했다.
처연하게 경찰서 계단에 앉아 담당형사를 기다리던 유가족의 모습.
최형사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그 유가족을 찾았다.
강현수.
"어이, 이 형사. 이 사람 신원조회 가능할까?"
"네? 최 형사님. 어 무슨 사건이에요?"
"아··· 그게 일단 내가 맡은 항만창고 폭행 사고 있지? 그거로 조회해줘."
"네. 알겠습니다. 충성!"
"그래그래. 고생하고."
***
촬영을 끝내고 잠시 한숨 돌리며 대기하는 의자에 앉은 예기성.
온종일 몰아치는 촬영에 피곤할 법도 하지만, 예기성은 전에 없던 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현장에서 나오는 분위기, 혹은 에너지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정말 오래 영화를 찍었고 많은 현장을 다녀봤던 예기성 조차 이 현장은 놀라울 따름이다.
얼마나 많은 후배를 봐 왔던가.
그런 후배 중에서도, 이 현장의 후배들은 남다른 점이 있었다.
누구보다 일찍 촬영현장에 도착해 대본과 동선을 체크하는 탑스타 이정건.
두 번째 영화라 생각지 않을 연출력을 보이는 감독.
그리고···
어린 나이로 말도 안 되는 감정연기를 보이는 후배까지.
특히 최근의 연기는 그 몰입 자체가 남다른 면이 있었다.
이전 [폭력의 사슬]과 [저승 카페]에서는 정확한 감정 표현과 전달이 돋보였다면,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완벽한 메소드 연기, 그 자체였다.
촬영장에 지나치는 이지우를 보고 실수로 '현수 씨'라고 할 뻔 하지 않았던가.
예기성은 스스로 '최 형사'라는 배역에 몰입해서였는지, 혹은 이지우의 몰입이 뛰어나서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이지우의 연기법이 변했다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모인 젊은 영화인들에 의해서 이 영화가 전에 없던 방향을 일으킬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자신의 자리가 있음을 감사했다.
한편으로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이지우의 메소드 연기.
메소드 연기의 단점.
지나치게 배역에 몰입하여 정신과 치료를 받는 후배를 숱하게 봐왔기에.
예기성은 선배로서, 그리고 한 명의 영화광으로서 이지우가 걱정되었다.
***
"동수 씨, 창문 좀 닫아주세요."
"네네, 덥죠? 에어컨 틀게요. 잠시만."
늦은 밤까지 이어진 촬영. 창밖에서 부는 바람이 유난히 텁텁하다.
차 안의 모든 창문이 닫히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피곤했다. 육체보다 정신적으로.
어쩔 수 없다.
이 배역은.
시나리오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망령에 사로잡힌 듯 아버지와 죽은 딸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감정이 계속 반복해서 올라오고, 그것이 날것 그대로 튀어나와 연기가 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진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일권 의원과의 인터뷰.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타인의 입으로 듣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잊고 지내던 아버지가 어느덧 실체를 가지고 내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현수'의 모티브가 됐던 나의 아버지. 어느덧 나는 나의 아버지를 연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 '현수'의 모든 것이 나를 자극한다.
상실에 대해서 분석이 필요 없었다. '현수'가 모든 것을 상실했듯이, 나 또한 그랬으니까.
'현수'는 나이면서, 나의 아버지였다.
나는 나와 나의 아버지를 연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