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세상이 그대를 버릴지라도
최근 이정건은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있었다.
'악인이 그냥 악인이면 안 되나요?'
감독 미팅 간에 했던, 이지우의 말.
그 말을 듣고 이정건은 자존심이 상했다.
'어떤 캐릭터가 좋은 캐릭터인가?'
아마 100명 중 99명은 서사가 충실하고 입체적인 캐릭터가 좋다 할 것이다.
이정건도 그렇게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이정건은 '최태호'를 그렇게 연기하고 싶었다. 깊은 감정연기를 바탕으로 캐릭터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심.
어쩌면 이수한 감독이 '최태호'도 좀 더 멋진 악당으로 바꿔주길, 내심 바랬는지 모른다.
그래서 매니저가 이수한 감독에게 하는 요구를 재빨리 막지 않았다.
하지만 이지우의 저 말을 듣고 나서 뭔가 깨달았다.
자신이 왜 악역을 맡으려고 했는가.
바른 생활 사나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하고, 새로운 도전으로 자신의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고자 한 것 아니었나.
악인에게 이입한 관객들이 악인을 악인으로 볼까?
[저승 카페]에서의 후배의 연기. 부러웠다. 스스로 20대에 저정도 연기를 할 수 있었던가? 자문해 봤다.
결론은 지금도 저 어린 후배보다 잘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더욱 선배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숨겨지지 않는 질투심. 영화 외적인 면에서 자꾸 후배에게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도, 그런 열등감이 기저에 깔렸으리라.
그런데, 첫 미팅에서부터 이지우의 저 말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대본 분석이 전혀 안 되어 있구나.'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에 출연료를 절반만 받기로 하고 계약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배운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찍기로 마음먹었다.
[악의 기록] 출연 계약을 끝내고, 다시 [악의 기록]대본을 읽었다.
그제서야 보이는 영화의 구조.
'최태호'란 캐릭터는 서사가 깊어지면 안 되는 캐릭터다.
'최태호'의 서사가 깊어지고, 공감이나 이해가 된다면 영화 전체에 흐르는 주인공 '현수'에 대한 몰입이 통째로 날아간다.
영화 전체에 흐르는 주제의식인 '시스템', '상실', '폭력'이 흐려진다.
그 모든 것을 꿰뚫은 질문.
'악인이 그냥 악인이면 안 되나요?'
[악의 기록]에서 '최태호'는 악인으로서만 기능해야 영화가 산다.
대본을 덮고, 후배를 생각했다.
선배인 자신이 분량 욕심을 낼 때 까마득한 후배는 캐릭터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보고 있었다.
열등감, 수치심, 질투심.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정들.
이정건은 바른 생활 사나이다. 열등감, 질투심 등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조차 에너지로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본을 읽고 또 읽어 너덜 거릴 때까지 읽었다. 악인이 비중 있게 나오는 영화를 국내외 할 것 없이 보고 또 봤다.
한참 후, 이정건은 결론지었다.
'그래 그냥 '순수악'이 되어보자.'
이정건은 완벽한 악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였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스포츠카에서 내리는 이정건.
진짜 악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씨바- 빨리 오라고. 아파죽겠구만."
재벌 3세, 겁도 없고 양심도 없는 사람이라면.
타인에 슬픔이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면.
두 사람이 차에 치여 쓰러진 것보다, 앞으로 있을 복잡한 법정 싸움이 귀찮지 않을까.
이정건은 쓰러진 두 사람 옆에서 귀찮음을 연기했다.
단번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이정건은 숙제 검사받는 학생과 같은 마음으로 후배에게 달려갔다.
"내 연기 어땠냐?"
***
씬#52 세상이 그대를 버릴지라도.
봉안당에 조카와 누나를 안치시켰다.
예정보다 길어진 출장길. 끝내고 오니 누나와 조카가 죽었다.
무연고 시신으로 한참을 영안실에 누워있던 누나와 조카. 그 모습이 안타까워 빠르게 장례를 치렀다.
법원도 찾아가고, 변호사도 찾아갔다. 답답한 마음에 기자들도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한결같았다.
'어쩔 수 없다.'
모두가 이 사고를 외면했다. 이미 사고를 친 피의자는 재판까지 끝난 상황이었다.
말이 안 된다 생각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고의성이 없고 운전미숙이라는 이유로 감형. 사고발생 이후 도주하지 않고 피해자를 구명하기 위해 힘썼다는 이유로 또 감형.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피의자가 받은 형량이다.
현수는 납득 할 수 없었다. 사건의 조사부터 판결까지.
경찰서를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던 사건 담당형사.
현수는 몇 시간 동안 경찰서 앞에 앉아 그 담당형사를 기다렸다.
"이거 한잔 마셔요."
그때 현수에게 다가온 나이 많은 형사. 현수는 나이 많은 형사가 내미는 커피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쳐다봤다.
"이상한 사람 아니니까 마셔요. 나 여기 강력반 최 형사(예기성)요. 교통반 강 형사 외근 나갔다가 오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그제서야 내미는 커피를 받아 드리는 현수.
"하··· 사정이 참 딱하게 됐더라고. 나도 애들 키우는 입장에서. 뭐 해줄 말은 없고. 이거 한잔 마시고 힘내시라고."
그러더니 최 형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잠시 현수를 바라보다 다시 경찰서로 들어간다.
최 형사가 경찰서로 들어가고, 한참을 기다려 지나가는 담당형사를 붙잡을 수 있었다.
교통반 강형사.
"형사님, 제발 이것 좀 봐주십시오. 이거 한 번만 확인해주세요. 제가 확인해보니까 피의자가 우리 누나랑 미향이보다 구급차를 먼저 타고 현장을 벗어 났습니다. 이게 어딜봐서 구명 활동 입니-"
"거 참··· 말 못 알아 들으시네. 어쨌든 구급차를 부르고, 119신고 했잖아요. 그리고 저희는 그냥 증거대로 수사해서 넘겼을 뿐이에요. 저희한테 따지셔봐야 소용없다니까 그러시네."
마를대로 마른 현수의 얼굴. 눈은 퀭하고,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는 얼굴. 머리는 며칠을 감지 못했는지 엉망이었다.
초최한 몰골이 우스워 보였을까. 형사에게 항의해 보지만, 그런 현수를 밀어내는 형사. 그리고 힘없이 밀려나는 현수.
현수의 손에는 수십 장의 서류가 있지만. 아무도 읽어주지 않았다.
자신을 밀쳐내고 경찰서 안으로 유유히 들어가는 강 형사.
모두가 외면한 이 사건. 현수는 절대로 외면할 수가 없었다.
경찰서 정문 앞 계단에 힘없이 앉아 있는 현수.
'띠리리리'
그때 울리는 현수의 휴대폰. 현수는 맥없이 휴대폰을 열어 귀에 가져다 댔다.
"네, 실장님."
-이야기 들었다.
"..."
-내가 알아보니까··· 그 사고 친 사람이··· 백성 그룹 손자라고 하네.
"..."
한참을 말이 없는 현수. 수화기에서 재차 '여보세요', '듣고 있니?'와 같은 말이 연신 들리지만 현수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실장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건 진짜 아니에요."
-일단 회사로 들어와라. 니 마음 이해한다. 그러니까 회사에 와서 같이 생각하자. 엉뚱한 생각 하지 말고.
"실장님··· 법원도, 경찰도··· 기자들도. 나를 아니 우리 미향이 버렸는데··· 제가 어떻게 미향이를 버립니까."
-야, 장현수! 헛소리 하지 말고, 일단 복귀해! 인마.
'탁' 하고 휴대폰이 닫히는 소리.
현수는 휴대폰과 서류를 던지듯이 휴지통으로 집어넣었다.
직후, 줌아웃 되며 경찰서 전경을 살피는 카메라.
그때 최 형사가 다시 밖으로 나와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에는 커피 한잔이 더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현수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
[악의 기록]은 여러모로 이수한의 후속작들과 유사하다. 그 후속작이라는 게, 아직 개봉하지 않아 내 머릿속에만 들어있긴 하지만.
미래의 이수한은 [해적왕]을 대차게 말아먹고, [부패 검사]로 재기하고, [재벌이 힘을 안숨김]으로 커리어 하이를 찍는다.
먼 미래, [폭력의 사슬]과 함께 저 두 영화를 합쳐, 이수한의 '폭력 트릴로지'라 부른다. 그리고 저 3개의 영화는 그의 대표영화가 된다.
'이수한의 폭력 트릴로지'
[폭력의 사슬]은 개인의 폭력, [부패 검사]는 공권력의 폭력, [재벌이 힘을 안 숨김]은 경제권력의 폭력을 다루기에 어느 영화 평론가가 붙여준 별명이다. 모두 이수한이 쓴 각본으로 찍은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수한은 '폭력의 거장'으로 불리게 된다.
내가 아는 미래다.
하지만, [악의 기록]을 보고 난 내 감상은 이수한 감독의 역량이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만 있던 [재벌이 힘을 안 숨김]과 [부패 검사]에서 보여 줬던 폭력이 이번 [악의 기록]에 모조리 담겨있다.
기존 각본이 가지고 있는 설정과 감성은 유지 하되, 서사를 완전히 틀어버렸다.
이전 지창일 작가의 [악의 기록]이 [테이큰]의 한국판이었다면, 이수한이 각색한 [악의 기록]은 그의 특기인 '폭력'을 '상실'이란 테마에 서사와 감정을 녹여낸 영화가 된 것이다.
각본만 봤을 때, 이수한 감독의 커리어 하이 시절에 봤던 각본의 수준이었다.
고된 촬영이 종료되고, 오늘은 화실이 아닌 집으로 향했다.
촬영이 끝나고, 세화를 집에 데려다 줘야 했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세호 얼굴도 좀 보고.
좁은 투룸에 들어오니 이전에 내가 산 아이들 가구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사를 빨리하긴 해야 할 텐데.
"세화야, 오늘도 고생 많았어. 얼른 들어가서 씻고 쉬어. 내일 학교 가기 피곤하겠다."
"아저씨도 고생하셨어요."
꾸벅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세화.
피곤할테지.
촬영할때와 다른 조용한 모습이 아쉽다. 항상 촬영장에서 연기하는 '미향'의 모습이면 좋으련만.
아이들은 다시 등교하기 시작했고, 세화는 촬영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기에 꽤 힘든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아저씨, 이거 봐요!"
현관문을 닫자마자 쪼르르 달려오는 세호.
학교에서 만든 그림을 내게 들이민다.
"오! 잘 그렸는데? 근데 뭘 그린 거야?"
"벡터맨이요."
"아하? 이게 벡터맨 이글 맞지?"
"아뇨, 벡터맨 베어인데요···"
"그래 그거, 아저씨는 그게 벡터맨 베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 헛나왔네. 옆에 있는 게 벡터맨 타이거 맞지?"
"아뇨··· 그게 벡터맨 이글인데요···"
아놔, 맞추는 게 없냐.
"세호야, 아저씨가 미술학원 끊어줄까? 다닐래?"
"..."
시무룩해 하는 세호.
"어···음, 아니면 아저씨가 그림 좀 그리는데 가르쳐줄까?"
"아뇨, 사실 그림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면서 내 소매를 살짝 잡아끄는 세호.
밖으로 나가자는 이야기 같았다.
"어? 음··· 아저씨랑 아이스크림 사러 갈까?"
"네네."
"어머니, 세호 데리고 잠시 아이스크림 사러 갔다 올게요."
"그래그래, 차 조심하고."
어머니는 다 안다는 눈빛으로 우리를 배웅했다.
세호가 학교생활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하기사 몇 주 만에 다시 학교생활 하는데 불편하지 않을 리 없지. 수업 진도도 많이 밀렸을 테고. 따라 기기 힘들지 않을까?
학원을 국·영·수 위주로 보내야 하나··· 그렇게 K-학부모다운 고민을 하면서 세호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세호에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건네고, 바로 집에 가지 않고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았다.
"세호야, 이거 먹고 들어가자."
세호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세호야, 무슨 일 있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을 하는 세호.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요··· 사실 저는 뭐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잘 놀고, 잘 지내는데요. 누나가···"
"응? 누나가 왜?"
가슴이 철렁한다. 사실 세호는 별걱정이 안 됐다. 애가 성격이 활발하기도 하고 순하기도 해서, 잘 적응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늘 고민 상담하면 어느 정도 내가 해결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고.
그런데 세화는 좀··· 일단 애가 너무 성숙하다. 초등학교 6학년 주제에 뭐 그리 생각하는 게 많은지. 지나치게 어른스러웠고, 그런 세화의 문제는 심각하지 않을까 지레짐작한 것도 있다.
"누나한테 줄 게 있어서 점심시간에 누나 찾아갔는데, 누나가 혼자서 밥 먹고 있어서요. 쉬는 시간에 가봐도 항상 혼자 있고, 누나 왕따당하는 것 같아요."
아···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어··· 아저씨가 선생님이랑 이야기 해보께."
"누나한테는 말하면 안 돼요! 누나가 아저씨 걱정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근데, 나는 누나가 걱정돼서···"
"그래그래, 걱정 마. 아저씨가 알아서 할게."
그렇게 세호를 집으로 들여보내니 곧바로 어머니가 나를 붙잡고 나오셨다.
"세호가 누나 걱정 많이 하지?"
"네··· 제가 신경을 좀 썼어야 했는데···"
"어휴, 지금도 바쁜데··· 괜찮아. 내가 오늘 세호한테 이야기 듣고 선생님께 전화를 해봤거든."
이런점은 확실히 나보다 어머니가 낫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내가 직접 담임선생님한테 전화하기가 껄끄러웠기도 하고, 내가 지금 나이가 너무 어리기도 하니 담임선생이 내 말을 어떻게 들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K-학부모였던 어머니라면, 이야기가 더 잘 풀렸으리라.
"세화가 학교 다시 나오고 좀··· 적응이 안 되는 거 같다고 하시더라. 초등학교 6학년이면 알 거 다 아는 나이기도 하고. 세화 세호 부모새끼··· 부모들 이야기가 소문이 퍼졌나 봐. 그래서 괴롭히거나 때리거나 이런 거는 전혀 없는데 무리랑 잘 어울리지 못하나 보드라고."
하··· 여자아이들이 이게 참 어렵다.
치고박고 싸웠다면, 괴롭혔다면, 차라리 쉽다. 내가 잘하는 거 하면 되니까.
고소하고, 사과받고. 합의 안 해주고.
그래도 안 되면, 김범 불러서 한 일주일 같이 등교시키고···
그런데 이런 거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 같은 반 여자애들 한 명씩 찾아가 친하게 지내라고 하면 그게 먹히겠냐고···
잠시 고민하며, 해결방법을 찾았다.
내가 잘하는 것?
해결방법이 어찌 됐든 해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며칠만 애들 신경 써주시고요."
그렇게 돌아서 바로 전화기를 들어 몇 군데에 전화를 걸었다.
"어, 홍보실장님. 네네 별일 없죠? 부탁하나 드려도 될까요? 그 씨 월드 관리···"
"어··· 선배님 식사 한번 하시죠? 식당은 제가 예약 할게요. 아침 겸 점심으로. 아휴, 알죠. 선배님 식단에 딱 맞춘 식당 있습니다."
"동수 씨. 그 컴퓨터 한 대만 주문해주세요. 네네 화실 말고, 우리 집으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혹은, [미녀는 괴로워].
나는 2020년대를 살다 왔다. 그리고 앞으로 여자아이들이 환장하는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