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57화 (58/121)

57. 운명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나는 아버지를 모른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미워하고자 했지만 아는 것이 없어 그러질 못했다.

실체가 없는 것은 미워하기 힘들다. 본적 없는 아버지는 상상조차 힘들었고, 미워하긴 더 힘들었다.

그렇기에 어릴 적 내가 선택한 답은 무시였다.

유년시절, 아버지는 없다 생각하고 살았다.

몇년전,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는 수 십 년 전. 현충원에 아버지의 위패를 모실 때 어머니가 서럽게 우시던 모습.

그 모습이 내게는 아버지의 전부다. 어머니를 슬프게 했던 아버지. 아마 그때부터 아버지를 미워했던 것 같다. 그 후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내 마음은 그때부터 멈춰있었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듣는 아버지란 사람의 존경과 애정은 생경하고 낯선 감각이다.

'띠리리리'

"아, 지우 씨 미안요. 잠시 전화 좀 받을게요. 어어, 글쎄 나 오늘 중요한 손님 만나서 못 간다고 전해. 당 대표님한테는 따로 전화한다고 그러고."

전화를 끊고 다시 이야기하는 지일권.

"내가 그래서 의원 되고 제일 먼저 발의한 게 '특수임무수행자 지원 및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이에요.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 제대로 보상받아야 될 것 아닙니까! 우리 상곤이 형님 같은 분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고, 혼자서 1시간이 넘게 지일권이 내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화가 울려 멈추나 싶었더니, 이내 전화를 끊고 자신의 팀장이었던 사내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지창진 작가는 옆에서 추임새를 넣으며 '운명적이다'를 연발했다.

거짓말 같았다.

운명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내가 주인공인 영화의 모티브가 내 아버지라니.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모른다.

***

크랭크인.

어느 촬영이든 첫 촬영 날은 정신이 없다.

서류만으로 존재하던 숫자들이 현실이 된다. 본격적인 상업영화. 예산의 규모가 다르고, 동원되는 인원 역시 독립영화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렇기에 서류와 현실이 맞지 않아 불협화음을 낸다.

주요 감독들은 몇 번의 미팅으로 서로의 얼굴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감독 밑의 스태프 간 얼굴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태반. 매끄러울 수 없었다.

특히 스튜디오 나우로 회사명을 바꾸면서 이수한의 후배들이 대거 입사했다. 주로 [폭력의 사슬]의 스태프들. 그때 실력이 좋았던 인원을 추려서 이번 촬영에 투입했고.

영화판에서 신인이나 다름없던 그들을 알아봐 주는 스태프는 없었다. 촬영장의 혼란은 가중됐다.

이런 상황에서는 실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과 소통이 필요했다.

"아니 광주 촬영장으로 오라니까 왜 미친놈이 전라도 광주로 가고 있어."

전화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경수형.

아무래도 제작자로는 첫 촬영이다 보니 경수형도 버거워 보이는 게 눈에 보인다. 촬영 장비를 실은 트럭 하나가 길을 잘못 들어 이상한 곳으로 빠져버렸다.

"어? 이 트럭은 뭐야? 우리 차 아닌데?"

"어어, 이쪽으로 와요. 이쪽에 주차하시면 돼요. 경수형 제가 부른 차에요."

커피트럭.

아직 촬영장에 푸드트럭, 커피트럭이 따라다니는 경우는 잘 없었다. 개인 창업자들이 하나둘씩 푸드트럭이 창업해가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렵게 섭외한 커피 전문 트럭.

하루치 매출을 지급하고, 커피 트럭 한 대를 촬영장으로 불렀다. 촬영장 스태프들 다 합쳐도 50명이 안 되니까, 이동거리를 고려해도 트럭 상인으로서는 이득이었다.

그리고, 나도 간만에 커피 좀 뽑을 생각이었다.

이전 [저승 카페]에서 커피 한잔이 주는 시너지를 느꼈기에.

"커피 한 잔씩들 하시고 합시다. 날도 더운데."

커피 트럭의 주인 옆에서 샷을 뽑고,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나눠준다.

내게는 쉬운 일이다. [저승 카페] 촬영장에서 수없이 뽑아 날랐던 커피니까.

우연한 사고로 지연된 촬영. 스태프들에게 커피 한 잔씩이 돌아가고 촬영장 인근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 커피를 뽑아들고 이수한에게 다가갔다.

"형 준비 다 되가?"

"어, 내 손에 커피 한 잔만 올려놓으면 준비 끝."

정신없이 커피를 뽑아 나르는 동안, 벌써 촬영준비가 끝나 있었다.

나는 이수한 앞에 커피를 내려놓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

슬레이트가 쳐지고, 스태프들이 숨죽인다. 촬영장에 집중도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영화 오프닝의 촬영.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액션영화는 중요한 액션을 앞에 놓는다.

관객들의 몰입을 높이고 이 영화가 어떤 영화라는 것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악의 기록]은 정반대의 흐름을 가진다.

오프닝에 액션은 전혀 없다.

이수한 감독도 그렇고, 최두호 감독도 마찬가지. 액션을 좋아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사람들.

액션은 영화를 표현하는 수단 중 하나임을 잘 아는 두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오프닝 영상에 주인공이 감정없이 휘두르는 폭력을 철저히 숨겼다.

중국, 연변을 모티브로 만든 세트장. 사방에서 중국어와 조선족의 억센 억양의 한국어가 들린다.

으슥한 골목. 대낮이지만 어쩐지 습하고 어두운 느낌의 골목이다. 쓰레기와, 그 쓰레기와 별 다름없이 널브러진 몇몇 사람들.

그런 골목과 골목을 누비며 한 남자가 전화를 받으며 걷고 있었다.

주변과 잘 어울리는 복장. 허름한 항공점퍼에 검은색 모자. 그리고 마스크.

"네 팀장님. 포인트 확인했고 수거 하겠습니다. 수거 후 확인 점 7번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배송 확인 부탁합니다."

그리고 익숙한듯, 한 창고에 들어간다.

'탁'

낡은 녹색 문이 조용히 닫히고. 멀리서 남자를 관찰하듯 찍던 카메라가 닫힌 문에 고정된다. 문을 찍던 카메라가 조여들듯 문을 클로즈업했다.

'푸슝푸슝'

'으억'

'쾅, 와장창'

문 안쪽에서 울리듯이 들리는 소음. 알 수 없는 중국어로 된 욕, 그리고 입을 틀어막고 지르는 비명. 간헐적으로 들리는 총성. 이 모든 소음은 시끄러운 배경의 소리에 묻힌다.

낡은 초록문의 모습과 소리만으로 만드는 긴장감.

액션은 전혀 보여주지 않지만, 필름의 톤과 사운드 만으로 긴장감을 만들어간다.

서서히 렌즈가 조여들어 가 어느덧 화면에는 낡은 초록 문이 꽉 차게 되고. 몇십 초가 지난 후.

'벌컥'

낡은 초록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문을 닫고 손에 든 총기를 분해해서 버린 후, 피 묻은 항공점퍼를 뒤집어 입는 남자.

"실장님. 포인트 현장정리 부탁합니다."

짤막한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의 배터리를 분리해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모자와 마스크를 벗으며 얼굴을 클로즈업.

살짝 마른, 그리고 갈색 빛이 도는 얼굴.

다시 줌아웃.

주인공만 그대로, 주변이 모두 바뀌어있다.

어둡고, 더러운 골목에서, 서울 한복판으로.

그 남자는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부르며 한 아파트로 들어간다.

'띠리리리'

그 남자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잠시 고민한다. 엄지손가락이 '통화' 버튼과 '종료' 버튼을 왔다갔다하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른다.

"네? 실장님. 저 방금 집에 왔는데, 출장 또 잡혔다고요?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전화를 받으며 아파트로 향하는 남자를 배경으로, 화면이 암전된다.

중앙에 하얀 글씨로 [악의 기록] 제목이 떠오른다.

***

한 남매가 있다.

평범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남매였다.

남매는 고아였다.

누나는 공장에서 쉼 없이 일했고, 거기서 만난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

동생은 군인이 되었고, 전역 후, 공무원이 되었다.

여기까지 오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누나의 남편은 딸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사고를 당해 죽어버렸다. 동생은 군대에서도 공무원이 되어서도 부상을 달고 살았다.

누나는 그런 동생이 걱정되고 안타까웠지만, 동생은 현장직 공무원은 다 그런 거라며 얼버무린다. 그러면서 동생은 일하는 현장이 어디인지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어리숙했던 누나는 현장직 공무원은 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영화는 이 장황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엄마와 여자아이가 찍힌 가족사진을 한번, 허름하고 좁은 아파트 내부를 한번. 집안의 소품 몇 개를 클로즈업하면서 영화적 언어로 담아낸다.

몇 주 만에 한국에 온 동생은 비행기가 내리자마자 누나를, 아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조카를 찾았다.

낡은 아파트를 들어서자마자 외치는 남자.

"미향아, 삼촌 왔다."

"와아- 삼촌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힝"

날듯이 뛰어 안기는 어린 조카.

"와, 우리 미향이 언제 이렇게 컸어? 다 컸네. 짜잔! 삼촌이 뭐 사왔게?"

남자가 무릎을 꿇어 선물을 주자 기뻐하는 조카.

"뭐야뭐야? 이거 내 선물이야?"

"어, 이게 요즘 제일 잘 팔린다던데. 연아의 햅틱이라던가?"

"우와! 진짜 좋아. 너무 고마워! 우리 삼촌 최고!"

"현수야 애 버릇 나빠져. 이제 뭐 사오지 마. 출장 갔다 올 때마다 선물을 사오냐."

현수라 불린 사내는 누나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향을 끌어안았다.

"우리 조카 선물 사주려고 삼촌이 돈 버는 건데 뭘."

"어휴, 씻고 밥 먹어."

"어어. 금방 갈게."

정신없이 선물을 뜯어보는 조카를 내려놓고 남자는 씻고 식탁에 앉는다.

"이사 준비는 잘 돼 가?"

"어, 이사 집 센터랑 입주청소 다 예약해놨어."

"이사 때 못 도와줘서 미안하네."

"요즘에는 이사 집 센터에서 다 알아서 해줘. 걱정 마. 출장이나 잘 갔다 오고."

남자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미안한 듯이 말했다.

"이번 출장이 급하게 잡혀서. 내가 갔다 와서 뒷정리할 테니까, 이삿짐센터 아저씨들한테만 큰 짐만 좀 다 배치해놓아 달라고 하고. 미향이 가구는 주문해 놨으니까 배치만 해달라 그래."

"어휴, 알았어. 잘 갔다 오기나 해. 다치지 말고."

"이번일 만 끝나면, 승진해서 한국 고정근무로 바뀌니까 몇 주씩 집 비우는 일 없을 거야."

"잘됐네. 어휴, 무슨 공무원이 허구한 날 해외로 나가냐."

웃고, 투닥이며 평범한 남매의 모습.

장면이 전환되고. 비행기, 으슥한 골목, 피 묻은 총이 빠르게 교차하며 보여진다.

그 대비를 이루는 밝은 장면.

미향이 초등학교를 갔다 오고, 미향의 엄마와 미향이 티브이를 보고, 책을 보고.

두 모녀의 평범한 일상.

이사짐을 옮기며 기분 좋게 짜장면을 먹는 누나와 미향.

새집에 이사하여 기분 좋은 모녀의 모습을 짧은 시간 동안 보여준다.

초등학교 운동장 한 쪽에 앉은 미향.

미향은 선물 받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삼촌이라 적혀 있는 단축번호를 눌러보지만. 연결되지 않는 전화. 결국, 엄마한테 전화하고.

"뭐? 새로 이사한 집을 잘 못 찾겠다고? 어휴. 잠시 운동장에서 놀고 있어. 엄마가 바로 갈게."

전화를 받는 미향의 엄마.

미향의 엄마는 미향을 데리러 가기 위해 일찍 일터에서 나섰다.

미향의 엄마는 미향과 함께 즐거운 듯이 거리를 걸어간다.

'끼이이익- 쾅!'

인도를 넘어 덮친 고급 스포츠카.

날아가는 미향의 휴대폰이 슬로우모션으로 잡히며 땅에 떨어진다.

미향이 눌렀던 것일까. 아니면 사고의 충격으로 오작동이라도 일으킨 것일까.

새빨간 피가 흘러 스민, 보도블럭. 그 옆 금이간 액정의 휴대폰은 전화가 걸려있었다.

'우리 삼촌'

'고객의 휴대폰이 꺼져있어···'

고급스포츠카에서 내린 사내는 사고의 충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비틀대며 119에 전화를 건다.

다시 부서진 휴대폰이 화면에 잡히고. 사이렌 소리와 함께 멀리 남자의 음성이 깔렸다.

"씨바- 빨리 오라고. 아파죽겠구만."

방금 큰 사고를 낸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 할 모습.

건장한 체격, 잘생긴 얼굴에 드라난 표정. 언뜻 무감각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난감함이나 당황은 전혀 없었다.

그는 귀찮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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