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56화 (57/121)

56. 우리 아버지

제작발표회 다음날.

[아버지는 북파공작원. 아들은 북파공작원 배역 영화 [악의 기록] 제작발표회 현장.]

[제작발표회에서 런웨이. 이정건과 이지우]

[초호화 캐스팅 예기성, 이정건, 이지우 [악의 기록]은 어떤 영화?]

여러 기사가 올라왔다. 예기성과 이정건이라는 화제성에 기대어 올라오는 기사들. 제작발표회장 분위기가 좋지만은 않았기에 다소 우려했었지만, 생각만큼 부정적인 기사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 병역비리 사건으로 밝혀졌던 내 아버지의 과거. 내 아버지가 북파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이 딱히 비밀도 아니었고, 현충원에 위패까지 있는 마당에 숨길 생각도 없었다.

한달 쯤 남은 첫 촬영. [악의 기록] 각본가인 지창진 작가를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어떤 배우는 배역을 이해하기 위해 교도소로 찾아가 살인범을 만나는 일도 있으니까.

배역을 이해하기 위해 원작자를 찾아가는 건 내게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작업실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만났다.

강남에 있는 꽤 고급 오피스텔. 생각했던 모습과는 좀 다르다. 뭔가 나도 모르게 힘들게 각본을 써내려가는 작가의 모습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악의 기록] '현수'역을 맡게 된 이지우라고 합니다."

"아··· 전화로 받았을 때도 긴가민가했는데, 실제로 뵈니 너무 젊으시네요."

"이수한 감독님이 각색하면서 내용이 수정되어서요. 20대 중후반의 나이대로 바꼇습니다."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한동안 인터넷은 문론이고 신문 사회면과 연예면에 자주 나왔었는데.

그저 30대 초중반이라 설정한 '현수' 역을 맡은 사람이 너무 젊어 의아스럽다는 느낌만 보였다.

고급스러운 오피스텔과 다르게, 실제로 만난 지창진 작가는 전형적인 샌님 작가 스타일이었다.

역시랄까.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두꺼운 알경알이 껴있는 뿔테안경. 정리 안 된 머리. 작업실에 티브이도 없고 넓은 벽면을 빼곡히 채운 책들과 작법서들.

밥만 먹고 글만 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나쁜 의미일 리 있나.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작업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이런 작가들이 크게 한방 터트리는 일이 많다. [악의 기록]처럼 말이다.

"제작사 측에서 각색을 한다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원작자인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있을까요?"

지창진 작가는 음료수 한 캔을 건네며 말했다.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주인공을 그리셨는지, 작품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연기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아..네. 딱히 해드릴 이야기가 없는데. 그래도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영화가 잘되면 저한테도 좋은 일이니까요."

지창진 작가의 작업실에 마련된 작은 소파에서 시작된 인터뷰. 먼저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물었다.

"먼저 주인공 '현수'의 동기 부분 말입니다. 가족을 잃고 그분노가 복수로 이어지는 부분.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체념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보통이거든요.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바로 그렇게 살인 혹은 테러에 가까운 일을 저지른다는 게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 그 부분은 환경적인 측면을 생각하셔야 해요. '현수'는 북파공작원으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주 활동지역이 중국과 북한 내부입니다. 일종의 무법 지대죠. 압록강 일대에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법보다 주먹이나 칼이 더 가깝다는 것을 너무 많이 본 인물이에요. 그리고 너무나 유능하죠. 제임스 본드와 람보가 공존하는 캐릭터니까요. 그래서 '할까?, 말까?'를 고민을 하죠. 대한민국의 치안 시스템을 뚫고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할 수 있을까, 하지 못할까?'를 고민하지 않아요."

"하하, 특이하네요. 제임스 본드에 람보라니."

"뭐 람보처럼 우락부락하거나 하진 않지만요. 제가 북파공작원 부대들을 조사하면서 느낀 감상은 람보였어요. 게릴라 전에 능하고, 침투기술, 무기술, 격투술에 월등하며, 험한 북한의 산림지대를 무거운 장비를 지고도 제집 안방처럼 다니는 요원. 멋지지 않아요? 거기에 제 상상력으로 제임스 본드라는 스킨을 씌운 거에요. 북파공작원 출신 국정원 요원. 거기서 나온 캐릭터가 '현수'구요."

"아하, 그렇게 말씀하니 바로 캐릭터가 그려지네요. 무법 지대에서 활동하는 북파공작원 출신 국정원 요원."

확실히 원작 각본가와 이야기를 하니 캐릭터가 좀 더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모티브라는 건 중요하니까. 캐릭터의 모티브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캐릭터의 배경이라든지 사고방식이라든지. 그 사고방식에서 오는 행동 표정 등.

모티브라···

"혹시 그러면 이야기의 큰 줄기, 그러니까 주요 갈등에 대한 모티브도 따로 있었던 건가요?"

"네!"

"궁금하네요. 단순히 가족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 음. 몇 가지 실제 있었던 일을 섞은 거긴 한대요. 해외에 기사 중 우연히 본 내용인데, 딸을 죽인 갱단을 직접 찾아가서 복수한 남자의 이야기··· 어디 보자 스크랩해놓은 게 있을 텐데."

그러면서 지창진 작가가 커다란 파일 철 하나를 내게 건넸다. 그 파일 철에는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를 스크랩해놓은 내용이 있었다.

"그 내용에 삼촌이야기를 섞은 겁니다. 정확하게는 저희 삼촌에게 들은 이야기를 합쳐서 만든 이야기가 [악의 기록]이에요. 저희 삼촌이 북파공작원 출신이시거든요. 진짜 북한 갔다 온 북파공작원."

"네? 진짜 북파공작원이요?"

"네!"

어쩐지 각본상 북파공작원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적이더라. 바로 옆에 이렇게 고증을 바쳐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지.

"어··· 음··· 한번 만나뵐 수 있을까요?"

"네? 만날 수 있으려나? 한번 연락드려볼까요? 이 근처에서 일하시는데."

"네. 음··· 혹시 가능하다면 같이 식사하는 건 어떨까요? 제가 이 근처 식당 예약을 해놓고 왔거든요."

원래라면 지창진 작가를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었다. 간단하게 작업실에서 인터뷰 후, 식사하기로 했었으니까. 가격은 좀 비싼 곳이지만, 예약 한 사람 늘리는 게 큰 문제도 아니었고, 실제 북파공작원과 인터뷰할 기회를 잡는 거라면 더한 것도 아깝지 않았다.

"네, 문제없어요. 그럼 제가 연락 한번 드려 볼게요."

그러더니 휴대폰을 꺼내는 지창진.

"어, 삼촌. 나 창진이. 혹시 점심 드셨어요? 안 드셨으면 같이 먹으려고 전화했어요. 네네. 어디서?

-지우 씨 예약한 식당이 어디라고 하셨죠?"

휴대폰 수화기를 막고, 내게 묻는 지창진.

"중국집 '창궁'이요. 이 근처, 1시 예약."

"네 삼촌. '창궁'이라는 식당 알아요? 네네 저 말고 한 명 더 갈 거예요. 그럼 거기서 1시에 봬요."

간단하게 통화를 마친 지창진이 말했다.

"잘 됐네요. 삼촌이 오늘 별로 안 바빠서. 그럼 우리 먼저 슬 출발 할까요?"

그러면서 자신의 재킷을 챙기는 지창진.

지금이 12시니까, 일찍 도착해도 지창진과 못다 한 이야기를 계속해도 되니 '네.'라고 대답한 후 따라나섰다.

걸어서 20분 정도 걸려서 도착한 식당.

인터넷에서 보고 지창진 오피스텔 근처 룸 있는 식당 중 대충 고른 식당인데, 인테리어가 고급스럽고 생각보다 괜찮았다. 무엇보다도 직원이 내 얼굴을 분명히 알아본 것 같은데, 별다른 반응 없이 서빙에 집중하는 모습이 좋았다.

미리 예약한 룸으로 이동하고, 각본 이야기를 하며 지창진과 기다리고 있는데, 약속시각 보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지창진 삼촌이란 사람이 룸에 들어왔다.

"어? 이지우 씨 맞죠? 창진아, 같이 온다는 사람이 이지우 씨였어?"

"네, 삼촌. 일단 코스로 시켰어요. 앉으세요."

지창진 작가의 권유를 마다하고 내게 다가와 악수를 권하는 지창진 작가의 삼촌.

"지일권입니다."

악수를 권하는 모습이 뭔가 있어 보였다.

북파공작원이라길래 좀 더 우락부락하게 생긴 이미지를 상상했는데, 지창진 작가의 삼촌이란 사람은 얼굴이 조금 까만 것 외에는 고급스러운 정장에 머리를 반듯하게 정리한 깔끔한 모습이었다.

이름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이상하게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삼촌, 예전에 삼촌한테 들은 이야기 각본 써서 팔았다는 이야기 기억해요?"

"어어, 그 박정태 나온다는 그 영화?"

"네, 박정태 군대에 가고, 이번에 다시 찍는데 영화 주연으로 이지우 씨가 됐다네요. 그래서 인터뷰 겸 삼촌이야기 듣고 싶다고 해서요."

그때 종업원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식전요리를 들고 들어왔다.

"그래? 그럼 일단 먹고 나서 이야기하자. 이지우 씨도 많이 들어요."

식전 요리가 끝나고, 다음 코스 요리가 준비되길 기다리는 중. 지창진의 삼촌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뭐가 궁금한데?"

"삼촌이 예전에 해줬던 이야기 있잖아요. 그 예전 군 생활 하실 때 있었던 일들."

"아, 그거? 별거 없는데."

"삼촌이나 별거 없지, 문외한인 우리한테는 재밌으니까 해주세요.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진짜 영화에 한 장면인 줄 알았잖아요. 이래서 논픽션은 픽션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니까."

"하···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너희만 알고 있어라."

"어휴, 맨날 저 소리. 삼촌. 내가 삼촌 이야기 각본으로 팔았어도 아무 일 없었어요.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무슨."

"그럼··· 어디 보자. 한 20년 전쯤이었는데, 우리 부대는 부대가 아니라 회사라고 불렀어. 부대원들도 서로 사원, 대리, 팀장 이런 식으로 부르고···"

그렇게 한참 훈련이야기, 작전 중 일화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메인요리가 하나둘씩 나오고. 마지막 요리까지 다 먹어 갈 때 쯤이었다.

"삼촌 그 이야기 해봐요. 그 삼촌 은퇴 이야기. 내가 그 이야기 듣고 각본 썼다니까."

지창진 작가의 삼촌은 물로 입을 살짝 행구고, 잠시 생각하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는 침투경로가 몇 군데 있는데 중국 쪽에서 압록강 넘는 루트, DMZ 넘어가는 루트, 그리고 군산항이나 속초에서 배로 넘어가는 루트. DMZ 쪽 루트는 80년대 넘어가면서 다 없어졌다고 보면 되고, 내가 한창 임무수행 할 때는 주로 중국 쪽으로 갔거든."

후식으로 나온 차를 따라 한 모금 마시고 지창진의 삼촌은 말을 이었다.

"내가 3번째 작전 나갔을 땐 데. 작전 나가서 포인트 따고, 이제 복귀하는데 국경경비대에 걸린 거야. 보통 교전까지 가면 실패한 작전이거든. 우리는 교전해서 이기는 부대가 아니니까. 어쨌든 총격전이 일어나고, 압록강 앞까지 어찌어찌 오긴 했는데 보트 띄우면 총 맞아 죽겠는 거야. 그때 우리 팀장이 자신이 보트 띄워서 경비대 유인하면, 그때 수영해서 도강하라고··· 너희라도 살라고. 하면서 보트 띄워서 그냥 가버리더라고. 그 당시 우리 팀장이 살아있는 전설이었거든. 우리 회사가 보통 괴물들 모여있는 회사가 아닌데, 그 회사가 가지고 있는 체력 사격 기록을 다 갈아치운 사람이었어."

그렇게 말하는 지창진의 삼촌은 눈이 빨개지고 표정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우리 팀장이 그 작전 끝으로 퇴사하고 국정원으로 넘어간다 그랬었거든. 애 생겼다고··· 이제 안정된 생활 하고 싶다고. 우리 상곤이형이 진짜 멋진 남자였는데··· 팀원들 잘 챙기고."

"제가 아까 북파공작원 출신 국정원 요원의 모티브가 바로 저겁니다. 압도적 피지컬과 기술을 가진 국정원 스파이 -"

지창진 작가가 옆에서 뭐라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지창진 삼촌인 지일권의 입에서 나온 두 글자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상곤이요?"

"네?"

놀란듯이 반문하는 지일권.

"혹시 그분 성이 이 씨였나요? 그분 돌아가신 게 21년 전이고요."

날짜를 계산하듯 잠시 생각하던 지일권.

"어··· 그걸 어떻게···"

역시, 픽션은 논픽션을 넘을 수가 없다.

내 아버지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던 각본을 내가 다시 연기 하게 되다니.

"현충원에 계신 제 아버지 함자가 이상곤 이십니다."

"그럼 자네가 상곤이 형님···"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온 지일권.

"아이고··· 아이고··· 내가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에 돌 얹어 놓은 것처럼 무겁다. 아이고··· 내가 오늘 여기서 귀인을 다 만났다. 감사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누구에게 감사하는지 모를 인사를 한창 하던 지일권이, 내게 울 듯한 얼굴로 명함 한장을 건네면서 말했다.

"지우 씨. 지우 씨 아버지 덕에 내가 이리 잘 살아요. 고마워요. 진짜 잘 커 줘서 고마워요.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꼭 말해줘요."

'국회 의원 지일권'

명함에 쓰여 있는 직책과 이름이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이 지역 지역구 국회의원.

지일권이 왜 이 근처에 있었는지, 왜 익숙한 얼굴이었는지. 어떻게 이 지역 고급식당을 한 번에 찾아왔는지. 궁금증이 한 번에 풀렸다.

그럼에도 놀랍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의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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